아프리카 바로 알기

서아프리카(West Africa)-기니(Guinea)

林 山 2010. 2. 1. 11:40

 

 기니 지도

 

기니 공화국(Republic of Guinea)은 서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다. 북쪽으로 기니비사우와 세네갈, 동쪽으로 말리, 남쪽으로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와 라이베리아, 서쪽으로 시에라리온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24만5856㎢, 인구는 약 천만명(2005년)이다. 수도는 대서양 연안의 톰보 섬(Tombo Island)에 있는 기니 최대의 도시이자 주요 항구인 코나크리(Conakry)이다. 옛 이름(1979∼1984)은 기니인민혁명공화국(People's Revolutionary Republic of Guinea)이었다. 이웃 나라인 기니비사우와 구별하기 위해 때로 기니코나크리(Guinea-Conakry)라고도 부른다.

 

기니는 지리적으로 크게 상기니(Upper Guinea), 하기니(Lower Guinea), 푸타잘롱(Futa Jallon) 산악지방, 삼림지대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상기니는 사하라 사막을 향해 북동쪽으로 경사진 나이저(Niger)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기니는 석호(潟湖)와 맹그로브 습지가 산재한 사구해안과 해안평야로 되어 있다. 동부의 푸타잘롱 산악지방은 해안평야에서 우뚝 솟아오른 해발 900m 이상의 광대한 고원지대이다. 이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은 북쪽의 말리와 인접한 곳에 솟아 있는 루라 산(1515m)이다. 남동부 고원에는 고립된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기니 최고봉 님바 산(Mont Nimba, 1752m)이 솟아 있다. 기니와 코트디부아르에 걸쳐 있는 님바 대산괴(Nimba Massif)는 유네스코가 정한 자연보호지역이다. 일명 기니의 등뼈(Guinean Backbone)로 불리는 님바 대산괴는 라이베리아로 이어진다. 서아프리카의 3대 강인 나이저 강, 세네갈 강, 감비아 강은 모두 푸타잘롱 산악지방에서 발원하여 기니 영토의 절반 이상을 흐른 다음 기니를 빠져나가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기니는 대부분의 지역이 습한 열대성 기후로 우기가 6개월이나 된다. 수도인 코나크리의 연강우량은 4300㎜이며, 연평균기온은 약 27℃이다. 가장 더운 달은 4월, 가장 습한 달은 7~8월이다. 산악지방의 강우량은 1600∼2300㎜, 연평균기온은 약 25℃이다. 국토의 40%에 이르는 열대우림에는 티크, 마호가니, 흑단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며, 해안지대에는 맹그로브 숲이 울창하다. 상기니 사바나에는 여러 종의 키가 큰 풀들이 자라고 있다. 기니에는 원숭이, 하이에나, 하마, 뱀, 코끼리, 멧돼지, 영양, 침팬지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오늘날 기니 지역은 가나 제국(Ghana Empire, Wagadou Empire) 영토의 일부였다. 900년경 말링케족(Mailinke, Maninka, Mandingo, Manding)의 일족인 수수족(Soussou, Susu)이 북쪽과 동쪽의 사막지대로부터 대거 남하하여 원주민인 바가족(Baga)을 대서양 해안으로 내몰았다. 12세기부터 수수족은 기니 지역을 중심으로 소왕국들을 세우면서 세력을 키워 해안지대까지 지배권을 확대하였다. 소쏘 왕국(Sosso kingdom)으로 알려진 타크루르 왕국Takrur, Tekrur, Tekrour kingdom)은 대표적인 수수족의 왕국으로 12~13세기 동안 번영했다. 가나 제국이 멸망한 뒤 소쏘 왕국은 가나 제국의 수도였던 쿰비살레(Koumbi Saleh)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1235년 키리나(Kirina, Krina) 전투에서 수수족의 수만구루 칸트(Sumanguru Kant, Soumaoro Kanté) 왕이 만딩카족(Mandinka)의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에 패한 뒤 소쏘 왕국은 멸망하였다. 키리나 전투 이후 이 지역은 사헬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말리 제국(Mali Empire)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5세기부터 풀라니족 유목민들이 푸타잘롱 고원지대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인들은 기니 해안까지 진출하여 노예 무역을 시작했다. 기니 해안에서 매매된 노예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다른 대륙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기니 해안에서 수출된 노예의 수는 아프리카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는 주장도 있다.  

 

말리 제국이 쇠퇴하자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이 흥성했다. 팀북투(Timbuktu, 통북투)는 인구가 8만명에 이르렀고, 200여개의 학교가 있었다. 손니 알리(Sonni Ali, Sonni Ali Ber, 재위 1464~1492) 왕은 투아레그족(Tuareg)과 모시족(Mossi)을 추방하고 니제르강 중상류 지역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1493년 무하마드 1세 아스키아(Askia Mohammad I, Muhammad Toure, 1442~1538)는 손니 알리의 아들 손니 바루(Sonni Baru, 재위 1493)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 16세기초 무하마드 왕은 남쪽으로 카치나(Katsina), 자리아(Zaria), 카노(Kano) 등 하우사족의 왕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대서양 연안까지 점령했다. 북쪽으로는 투아레그족의 근거지 아이르(Aïr)와 아가데즈(Agadez)를 점령했다.

 

1528년 부왕인 무하마드 왕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아스키아 무사(Askia Musa, 재위 1528~1531) 때부터 왕위쟁탈전이 벌어진 송가이 제국은 모로코 사디 왕조(Saadi dynasty)의 술탄 아마드 알 만수르(Ahmad al-Mansur, 재위 1578~1603) 군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591년 톤디비(Tondibi) 전투에서 아스키아 이시하크 2세(Askia Ishaq II, 재위 1588~1591)의 군대가 주다르 파샤(Judar Pasha) 장군이 이끄는 사디 왕국의 군대에 패한 뒤 송가이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16세기부터 기니의 푸타잘롱 고원지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풀라니족(Fulani, 페울족)은 풀라니 제국(Fulani Empire, Sokoto Caliphate)을 건설했다. 1725년 풀라니족의 신비주의자이자 철학자인 우스만 단 포비오(Usman dan Fodio, 1754~1817)는 이 지역 주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지하드(성전)를 전개했다. 풀라니 제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다. 18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은 이 지역의 해안지대에서 노예와 상아 무역을 주도했다. 19세기초 프랑스인들은 누네즈 강 연안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1849년에는 해안지대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리비에르뒤쉬드(Rivires du Sud, 남부하천지대)로 명명했다. 프랑스는 이 보호령을 세네갈과 함께 통치했다. 1878년 만딩카족(Mandinka)의 일족인 디울라족(Dyula, Diula, Dioula, Jula)의 통치자 사모리 투레(Samori Ture, 1830~1900)는 나이저 강 상류에 이슬람 와술루 제국(Wassoulou Empire, Mandinka Empire)을 창건했다. 1880년부터 사모리 투레는 만딩카족 전사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저항했다. 

 

1890년 프랑스는 리비에르뒤쉬드를 세네갈과 분리하여 프랑스령 기니(French Guinea)로 개명하고 코나크리를 수도로 정했다. 1895년 기니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French West Africa) 연방에 편입되었다. 이 무렵 풀라니 제국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1898년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가봉으로 추방됨으로써 와술루 제국도 멸망하고 말았다. 나이저 강 우안에서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를 합병한 프랑스는 1904년 영국으로부터 로스 제도까지 양도받았다. 프랑스는 푸타잘롱과 남부 기니도 점령하는 등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1946년 기니는 프랑스의 해외영토가 되었다. 같은 해 사모리 투레의 손자로 사회주의자인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 1922~1984)는 아프리카민주연합(African Democratic Rally, RDA)에 가입하고, 1948년에는 기니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맡았다. 1952년 기니민주당(Guinean Democratic Party, PDG)에 참여한 세쿠 투레는 1956년 아프리카인들의 독자적 연맹인 아프리카노동총동맹을 결성하는 등 노동운동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8월 기니는 프랑스 공동체를 탈퇴하였다. 9월 28일 프랑스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의 지도하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프랑스 신헌법은 식민지 국가들에게 즉각적인 독립과 식민지 잔류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기니를 제외한 식민지 국가들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10월 2일 기니는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로서는 최초로 독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초대 대통령에는 아프리카민주연합-기니민주당(PDG-RDA)의 지도자 세쿠 투레가 취임하였다. 투레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공화국을 선포하고 '족쇄로부터의 자유와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슬로건으로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하였다. 또, 그는 주요 강대국 블록에 공식적으로 속하지 않거나 이에 대항하려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조직인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에 참여하는 한편,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를 멀리 했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가 설치한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모든 공문서와 군사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심지어 전화선까지 끊었다. 프랑스 자본의 유출로 기니의 경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투레는 프랑스 대신 소비에트 연방(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행정과 정책을 소련식으로 바꾸는 등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프랑스의 지원은 다시 재개되었지만 소련과의 우호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투레 정권은 내정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소련 대사를 추방하였다. 소련식 사회주의에서 벗어나 모택동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로 전환한 투레 정권은 국영농장을 집단화했다. 농장의 집단화로 100만명 이상의 기니인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자 경작지의 25%만이 경작되었다. 그 결과 기근이 닥쳐 미국의 식량원조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65년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모택동과 그 추종세력 홍위병의 친위 쿠데타인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1967년 투레 정권도 중국을 모방하여 작은 문화혁명을 일으키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였다. 투레 정권은 또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1968년 1월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세쿠 투레는 기니민주당(PDG)의 일당독재를 강화하였다.   

 

1970년 기니의 망명인사들과 포르투갈군이 기니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1974년 실시된 대선에서 세쿠 투레는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11월 기니는 국명을 기니 인민혁명공화국으로 변경했다. 1980년 기니와 기니비사우는 석유 매장지로 추정되는 대서양 해상지역에 대한 소유권 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2년 경쟁후보가 없이 형식적으로 치뤄진 대선에서 세쿠 투레는 또 다시 당선되어 장기집권 독재자의 반열에 올았다. 그는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출신 부족인 만딩카족 인사들만을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 대부분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속한 풀라니족은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다. 탄압을 피해 인구의 25%에 이르는 기니인들이 망명을 위해 기니를 탈출했다. 국제사면위원회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기니를 인권탄압국가 리스트에 올렸다. 세쿠 투레의 독재정치로 기니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세쿠 투레는 반체제 인사들을 일명 '검은 다이어트(black diet)'라는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했다. 그는 수도 코나크리 근처의 정치범 수용소인 보이로 캠프(Camp Boiro National Guard Barracks, Camp Boiro, Camp Mamadou Boiro)에 창문조차 없는 콘크리트 감옥을 세우고 정치적 반대자로 지목된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투옥했다. 이들은 세쿠 투레가 자신의 반대 세력을 위협하기 위해 아무 죄도 없이 투옥한 사람들이었다. 세쿠 투레의 추종자들은 양심수들에게 음식은 물론 마실 물도 주지 않고 폐쇄된 감방에서 굶어죽게 했다. 투레 정권 당시 보이로 캠프에서 약 5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디알로 텔리(Diallo Telli, Boubacar Telli Diallo, 1925~1977) 아프리카단결기구(Organisation of African Unity) 초대 사무총장도 이때 보이로 캠프에서 아사했다. 같은 해 투레의 강력한 지지세력이던 시장 상인들이 모든 농산물은 정부가 운영하는 협동단체로 운송되어야 한다는 조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킨디아(Kindia)와 파라나(Faranah), 보케(Boké) 시장이 살해당했다. 프랑스의 중재로 협동단체와 시장 상인들 모두에게 무역을 허용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1984년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1926~)은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기니를 공식 방문하여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그해 3월 투레가 미국에서 병사하자 루이스 란사나 비보기(Louis Lansana Beavogui, 1923~1984) 총리가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4월 3일 란사나 콩테(Lansana Conté, 1934~)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비보기 정부를 무너뜨렸다. 정권을 잡은 란사나 콩테는 국명을 기니 공화국으로 다시 변경했다. 콩테는 PDG와 의회를 해산한 뒤 25명으로 구성된 국가재건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for National Recovery, CMRN)를 설치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콩테는 투레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던 25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외로 추방되었던 20만명에 이르는 기니인들의 귀환을 장려했다. 또,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하고 경제 회생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단지 민심을 얻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기니의 빈곤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민주주의로의 이행도 진전되지 않았다. 콩테 정권도 역시 독재정권이었다. 

 

1990년 12월 콩테 정권은 5년 안에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1992년 4월 기니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93년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콩테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투표매수에 의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콩테는 경제파탄과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1995년 6월에는 총선이 실시되어 형식상 민정이양이 완료되었다. 1996년 군부가 대통령궁을 폭격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98년 6월 기니비사우에서 일어난 내전에서 프랑스가 전 대통령 비에이라를 지원하자 콩테 정권도 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콩테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1년부터 주변국인 라이베리아와 코트디브와르, 시에라리온 국경지대에서의 무력충돌이 계속되면서 난민이 대량 유입되어 국내불안이 초래되었다. 시에라리온과는 1998년 이래 기니가 점령하고 있는 옝가(Yenga) 지역에 대한 분쟁으로 양국간 긴장관계가 지속되어 왔었다. 

 

2001년 11월 야당이 투표 보이코트를 선언한 가운데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3선제한 폐지,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연장, 대통령 입후보 나이 제한의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야당의 불참으로 실제 투표율은 저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정국의 긴장상태가 야기되었다. 2002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통일진보당(Party of Unity and Progress, PUP)은 114석 중 8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진보개혁연합(Union for Progress and Renewal, UPR)은 20석, 아프리카민주연합-기니민주당(Democratic Party of Guinea-African Democratic Rally, PDG-RDA)과 기니진보동맹(Union for the Progress of Guinea, UPG)은 각각 3석, 진보국민연합(National Alliance for Progress, ANP)은 2석, 발전연합당(Union for Development Party, PUD)은 1석을 얻었다. 기니인민연합(Rally of the Guinean People, RPG)는 총선을 보이코트했다. 

 

2003년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연임 기능성을 열어둔 콩테는 95.25%의 지지로 3선에 성공하였다. 대선을 보이코트한 야당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여야간의 부정선거 시비로 정국불안이 지속되었다. 2004년 12월 콩테는 개혁파인 셀루 디알로(Cellou Dalein Diallo, 1952~)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디알로는 총리로 임명된 이후 기니의 개혁을 주도하여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원조기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6년 4월 5일 콩테는 경제, 재무, 국제협력 등의 분야에서 디알로 총리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의 측근 7명을 장관에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4월 6일 콩테는 보수파인 포데 방구라(Fodé Bangoura) 대통령 업무장관(비서실장)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서명한 대통령령을 하루만에 번복하고 디알로 총리를 해임하였다. 

 

디알로 총리가 방구라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개혁파가 몰락하고 보수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 사건은 고령에다가 오랫동안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아온 콩테의 통치능력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디알로가 해임된 후 후임자를 임명하지 못해 총리직은 공석이 되었다. 5월부터 방구라 대통령 업무장관의 권한이 확대되어 그는 실질적 총리대행이나 다름없었다. 디알로 총리의 해임은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2006년 공무원들은 두 번이나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났으며, 항의시위를 벌이던 학생 10명이 진압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파업은 콩테가 공무원의 임금인상, 생필품과 쌀 그리고 석유가의 인하를 약속함으로써 가라앉았다. 2007년 1월 양대 전국노조가 생필품 가격의 인상과 정부의 부정부패, 경제의 실패에 항의하면서 2주일 이상 총파업을 일으켰다. 노조는 또 디알로의 후임 총리를 임명할 것, 고령과 중병에 시달리는 콩테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노조의 총파업은 콩테의 재임기간 중 최대규모의 유혈저항으로 확산되었다. 콩테 정권이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가담자 60명이 사망했다. 콩테가 마지못해 노조와 재야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총리의 임명, 석유와 쌀값의 인하를 약속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진정되었다. 

 

2월 13일 콩테의 입맛에 맞는 유진 카마라(Eugène Camara, 1942~)가 총리로 임명되자 다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1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끝에 콩테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계엄령 기간에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약탈과 강간 행위가 보고되었다. 이에 성난 군중들은 전국의 정부 청사와 시설물들을 공격하고 파괴하였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ECOWAS)와 이웃 나라 정상들의 외교적 중재로 콩테는 노조와 재야 지도자들이 추천한 5명의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총리에 임명하기로 약속하였다. 2월 26일 콩테는 방구라 대통령 업무장관을 해임하고, 란사나 쿠야테(Lansana Kouyaté, 1950~)를 총리로 임명했다. 쿠야테 총리는 노조, 야당, 재야세력의 의견을 수렴하여 기존의 각료 전원을 교체하고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5월 쿠야테의 총리 취임 이후 군인들이 지난 1996년부터 일부 미지급된 급료의 완전 정산과 부패한 군 간부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콩테가 부패한 장교를 해임하고 급료의 지급을 약속함으로써 소요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급료 미지급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기니는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으로 대통령과 관료, 공무원들이 국가를 주도한다.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고 2회 연임할 수 있다. 그러나 란사나 콩테는 1984년부터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와 정부수반, 참모총장을 겸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기니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기니에서 태어나 기니 국적을 가지고 최소한 35세 이상이어야 하며, 프랑스어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입법권은 114명 정원의 단원제 국회에 있다. 114석 가운데 지역구에서 38명, 비례대표로 76명을 선출한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지역구 주요 정당은 집권 통일진보당(PUP)을 비롯해서 진보개혁당(UPR), 아프리카민주연합-기니민주당(PDG-RDA), 기니인민연합(RPG), 기니진보동맹(UPG), 전국진보연합(ANP), 개발동맹당(PUD) 등이다. 그러나 기니는 PUP 일당 독재국가나 다름없다. PUP 외에 다른 야당들은 집권할 기회가 거의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니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상존하고 있다. 콩테는 고령에다가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인 당뇨병과 고혈압이 악화되어 혼수를 거듭하고 있어 2010년까지의 대통령 임기도 채우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유고시 헌법상 국회의장이 승계하도록 되어 있으나 기니의 정치풍토로 볼 때 이러한 적법한 권력이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부가 질서유지와 안정확보라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또, 개혁파와 보수파의 권력투쟁도 정국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니는 농업과 광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이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하며, 1인당 GNP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기니 정부는 국가예산을 건강이나 교육보다 국방비 지출에 치중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평균적 삶은 처참한 수준이다. UN이 발표한 삶의 질 지수에 의하면 1990년 이래 기니는 세계 최하위 국가로 선정되고 있다. 1985년 이후 기니는 IMF의 지원하에 경제금융개혁(PREF)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수차에 걸친 구조조정계획(ESAF)을 실시했다. 그러나 IMF는 기니의 만성적인 적자예산과 국고수입의 불안정, 민영화의 지연, 공공부문의 개혁 부진, 고용축소 실패 등으로 ESAF 지원을 중단했다가 1997년 1월부터 재개하였다. 

 

농업은 주민의 80%가 종사하지만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 정도다. 경작지는 전국토의 6%에 불과하며, 주로 기니 남동부 지역에 몰려 있다. 여름철 우기에는 고원 목초지에서 가축을 방목한다. 주요 농산물은 커피, 바나나, 파인애플, 기름야자, 땅콩, 감귤 등이다. 커피는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인접 국가들로 대량 밀수출되고 있다. 내수작물로는 카사바, 쌀, 옥수수 등이 재배된다. 식량 부족분은 소 등 가축으로 보충하고 있다. 어업은 아직 발달되지 못했다. 목재는 주로 연료로 이용되고 있다.

 

GN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5%에 불과하지만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 이상에 달한다. 기니는 보크사이트, 다이아몬드, 금, 철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알루미늄 원광석인 보크사이트는 전세계 매장량의 50%에 달하는 250억톤이 매장되어 있다. 생산량은 세계 제2위다. 러시아 회사인 루스알(RUSAL)은 보크사이트 광산과 제련소를 운영하며 연간 75만톤의 알루미늄을 생산하고 있다. 철광석 매장량은 약 40억톤으로 추정된다. 다이아몬드와 금, 우라늄도 상당량 매장되어 있다. 다이아몬드는 정부가 50%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2개의 민간기업에 의해 생산된다. 연해에서는 석유탐사가 행해지고 있다. 1980년대 광산물 수출증가에 힘입어 기니는 무역수지 흑자국으로 돌아섰다. 

제조업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그것도 수입대체 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에너지 생산은 광업부문의 수요로 인해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원조를 받아 바핑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건설했다. 무역과 금융은 GNP의 25%를 차지하지만 종사자는 노동인구의 2%에도 못미친다. 도로시설은 전반적으로 빈약하다. 다만 광산개발에 필요한 교통시설은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수도 코나크리와 캉칸(Kankan)을 연결하는 철도가 놓여 있다. 

기니의 국가예산은 상당부분 외국차관으로 충당된다. 주요 수출국은 미국, 러시아, 스페인, 벨기에, 우크라이나, 아일랜드 등이다. 이들 나라로 보크사이트, 알루미나, 커피, 다이아몬드를 수출한다. 주요 수입국은 프랑스, 벨기에, 중국, 미국, 코트디부아르 등으로 이들 나라에서 주로 원자재, 식료품, 소비재, 석유제품을 수입한다.

 

기니 국민은 약 24개의 부족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3대 종족은 풀라족(Fula)으로 알려진 풀라니족(40%), 만딩고족(Mandingo)으로 알려진 마닌카족(Maninka, 30%), 수수족(20%)이다. 소수부족은 모두 합해 10% 정도다. 풀라니족은 주로 푸타잘롱 산악지방 일대에 거주하고 말링케족은 캉칸(Kankan)과 키시두구(Kissidougou)를 중심으로 한 상기니와 북부 삼림지대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수수족은 주로 수도 코나크리와 포레카리아(Forécariah), 킨디아(Kindia)를 중심으로 한 하기니에 거주한다. 삼림지대에서는 키시족(Kissi), 로마족(Loma), 크펠레족(Kpelle, Guerze)이 고유의 역사와 문화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외국인도 약간 거주하고 있다. 기니의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외에 풀라니족의 풀풀데어(Fulfulde) 방언인 풀라르어(Pulaar, Pular), 마닝카어(말링케어), 수수어, 키시어, 크펠레어, 로마어, 바사리어(Basari), 코니아기어(Koniagi) 등 8개 언어를 가르치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이 85%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니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행사는 신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재물로 바치라는 권고를 대신해 양을 죽인 날을 기념하는 타바스키(Tabaski, Eid al-Adha)다. 라마단이 끝나는 날인 에이드-알-피트르(Eid-al-Fitr)도 중요한 이슬람 휴일이다. 타바스키에서 3개월 후인 모하메드의 생일은 성탄절로 축복된다. 기독교는 10%, 토착신앙은 5%에 불과하다. 이슬람은 대부분이 수니파(Sunni)이고 시아파(Shi'a)는 소수다.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성공회, 침례교, 여호와의 증인, 제7일안식일교회, 복음교회 등이 있다. 거의 모든 기니인은 토착신앙의 환생과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있다. 그외 소규모 바하이 공동체, 힌두교, 불교, 중국전통신앙도 있다.

 

기니의 보건환경 수준은 매우 열악하다. 공중위생은 천연두와 황열에 대한 예방접종만 실시되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은 말라리아와 주혈흡충병, 결핵, 나병, 딸기종, 성병, 기생충 등의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다. 유아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고, 평균수명은 약 40세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기니 인구의 40% 이상이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 2004년말 통계에 의하면 에이즈(HIV/AIDS) 감염자가 17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은 7∼13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실제로 취학하는 아동은 2/3 이하다. 따라서 문맹률도 72%로 매우 높은 편이다. 1984년에 설립된 코나크리대학교는 비정규과정으로 운영된다. 코나크리에는 과학기술전문학교가 있으며, 파라나(Faranah)에는 농업학교가 있다. 1977년부터 시작된 TV 방송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코나크리와 키시두구(Kissidougou), 베일라(Beyla)에는 기니의 선사시대와 민족지(民族誌) 및 예술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토속 수공예품으로는 가죽제품, 끈을 엮거나 감아서 만든 바구니, 홀치기염색 직물, 나무로 만든 작은 조각과 악기 등이 있다. 기니의 대표적인 작가에는 '검은 아이(L'Enfant noir)'과 '왕의 시선(Le Regard du roi), '아프리카의 꿈(Dramouss)을 쓴 카마라 라예(Camara Laye, 1928~1980), '늙은 고아(The oldest Orphan)의 저자 티에르노 모네넴보(Tierno Monénembo, 1947~), 윌리엄스 새신(Williams Sassine, 1944~1997), 부바카르 디알로(Boubacar Diallo) 등이 있다. 기니는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국립 켈레티귀 에 세스 탐보리니(Keletigui et ses Tambourinis)는 댄스음악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다. 벰베야 재즈(Bembeya Jazz)는 1960년대 중독성이 강한 아프로팝 리듬으로 유명한 재즈 그룹이고, 카마엔 소파(Camayenne Sofa)는 1970년대 인기 팝 그룹이다. 

 

기니는 독립이후 친공산주의, 비동맹 중립노선을 걸었다. 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지양하고 온건 비동맹 외교정책을 기조로 한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조선은 1958년 10월 기니의 독립과 동시에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다. 1960년 7월 양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1년 7월 14일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이후 기니 공관은 조선의 서아프리카지역 외교거점이 되었다. 기니는 친조선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고수해 왔다. 세쿠 투레 대통령은 조선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고, 1992년 4월에는 란사나 콩테 대통령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1999년에는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기니를 방문 한 바 있다. 조선은 건설지원 등 기니에 상당한 경제협력을 제공하는 등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기니는 주중국 대사가 겸임한다.

 

한국은 1976년부터 기니와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기니와 한국은 1978년 1월 6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지만 2년 후인 1980년 단교하였다. 1984년 4월 군부 쿠데타 이후 기니는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선경제협력 후수교 원칙을 고수하였다. 2006년 8월 29일 한국은 마침내 기니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상주공관은 세네갈에 있다. 2006년 8월 경제과학기술문화협력에 관한 기본협정에 가서명했다. 한국교민은 2007년 현재 불법 체류자를 포함해서 약 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