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집트 역사
8-1. 선왕조 시대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는 이집트 문명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서 시작된다. 이집트는 BC 5000년경 나일 강 유역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선왕조 시대(先王朝時代, Predynastic Period)는 신석기 시대인 BC 6000년~BC 3150년 무렵 고대 이집트에 왕정이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선왕조 시대에는 상하 이집트를 막론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집트 지도
8-2. 원왕조 시대
BC 31~BC 30세기경 이집트 원왕조 시대(原王朝時代, Protodynastic Period)가 시작되었으며, 이 무렵 상형문자가 출현했다. 원왕조 최초의 파라오로서 전갈왕(Scorpion King)이라는 이름이 제시되기도 한다. 고대 상이집트 왕국의 수도였던 히에라콘 폴리스(Hierakon polis, 독수리 마을) 신전에서 전갈왕의 투구가 발견되었다. 히에라콘 폴리스는 고대의 네켄(Nekhen), 지금의 콤 엘 아마르(Kôm el-Ahmar)다. 네켄은 룩소르의 남쪽 약 80km 지점의 나일 강 서안에 있었다.
원왕조 시대는 왕권이 형성되어가던 시기였으며, 고고학적으로는 나카다(Naqadah) 3기에 해당된다. 이집트인들은 이 무렵 상업 등의 목적을 가지고 팔레스타인 남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나일 강변에 형성된 소규모 왕국들은 몇 개의 핵심적인 세력으로 통합되었다. 이들 중 상이집트(Upper Egypt)의나카다, 네켄, 티니스(Thinis) 등 세 도시가 중요하게 등장하였다.
티니스와 네켄은 호루스, 나카다와 하이집트(Lower Egypt) 지역은 세트(Seth)를 섬겼다. 호루스 숭배 지역이 우세해지면서 티니스는 나카다와 네켄을 흡수한 뒤 정치적 발달이 늦은 하이집트를 점령했다. 티니스 출신 왕들은 기자 남쪽으로 480km, 룩소르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고대 도시 아비도스(Abydos)에 묻혀 있다. BC 3100년경 유명한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를 남긴 나르메르(Narmer)는 이 시기의 마지막 왕, 혹은 이집트 초기 왕조를 연 왕으로 알려져 있다.
8-3. 초기왕조 시대
전설적인 파라오 나르메르(Narmer)
BC 3100년경 이집트 초기왕조 시대 전설적인 파라오 나르메르(Narmer)는 이집트 제1왕조를 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때 활동했던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는 나르메르와 메네스(Menes)와 같은 인물로 추정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나르메르가 상하 이집트의 통일자이자, 호르-아하(Hor-Aha)의 전대 파라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르메르 또는 나르메르의 아들은 카이로 남쪽 25km 지점에 수도 멤피스를 건설했다. 멤피스는 '두 땅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이집트(Egypt)는 '후트 카 프타(Hut-ka-Ptah)-프타 신의 카 영자'에서 유래했다. 이는 멤피스의 가장 큰 사원의 이름이며, 그리스어로는 아이깁투스(Aigyptos)이다. 애급(埃及)은 Aigyptos의 한자 음차 표기이다. 나르메르 또는 메네스의 아들이 멤피스에 궁전을 세워 그것을 '페르-아(p r â, perâa)'라고 불렀다. Pharaoh는 바로 '위대한 거처'를 뜻하는 'p r â, perâa 에서 파생되었다.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
나르메르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은 바로 나르메르 팔레트이다. 이 팔레트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기록이 담긴 최초의 기념물이다. 맨 위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 하토르(Hathor)를 상징하는 송아지 머리가 있다. 네르메르의 이름은 송아지 머리 사이의 네모 속에 쓰여 있다. 하토르는 매를 상징하는 호루스의 부인이다. 하토르는 '호루스의 거처'라는 뜻이다. 호루스는 사자(死者)와 부활의 신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이다. 오시리스가 남동생 세트에게 살해되자 이시스는 남편의 시신을 모아 자신의 권능으로 소생시켰다. 부활한 오시리스는 저승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 호루스는 여신 네이트(Neith, Neit)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 세트의 한쪽 다리와 성기를 잘라 죽여서 복수한다.
팔레트 앞면은 상이집트의 상징인 백관(헤제트)을 쓴 나르메르가 적의 머리를 잡고 몽둥이로 내려치는 장면이다. 머리를 잡힌 상대방은 하이집트 도시국가인 나카다의 추장으로 추정된다. 뒷면은 하이집트의 상징인 적관(데슈레트)을 쓴 나르메르가 군대를 인솔하고 전쟁터로 향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상하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한다. qor관과 적관을 쓴 모습은 나르메르가 상하 이집트의 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다른 유적인 나르메르의 지팡이 머리(Narmer Macehead)에는 파라오의 왕위 갱신제인 헤브-세드(Heb-Sed)를 기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헤브-세드는 왕이 된 지 3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이것으로 보아 나르메르는 30년 이상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나르메르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이집트는 절정기에 들어섰다. 이집트는 이후 약 3000년 동안 문명을 구가하였다.
나르메르 이후 호르-아하, 제르(Djer), 제트(Djet), 덴(Den), 안지브(Anjib), 세메르케트(Semerkhet), 카아(Kaa), 네페르카(Neferka) 등 그의 후손들이 다스린 왕조를 이집트 최초의 왕조인 제1왕조라 부른다. 제1왕조의 파라오들은 순장의 풍습이 있었고, 확실한 왕권을 구축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네페르카를 마지막으로 이집트 제1왕조는 막을 내렸다.
카세켐위(Khasekhemwy)
이집트 제2왕조는 BC 2890년~BC 2686년까지 존속했다. 제2왕조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고고학적 흔적도 적다. 제2왕조 1대 파라오 헤텝세켐위(Hotepsekhemwy)는 순장 풍습을 폐지했으며, 4대 파라오 세트-페리브센(Seth-Peribsen)은 호루스 이름을 버리고 세트 이름을 사용하였다. 다음 파라오인 카세켐위(Khasekhemwy)는 하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이름도 호루스와 세트 모두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바꿨다.
8-4. 고왕국 시대
조세르(Djoser)
BC 2686년~BC 2613년까지 존속한 제3왕조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古王國時代, Old Kingdom Period)를 열었다. 제3왕조의 첫 파라오인 사나크테(Sanakht)는 제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세켐위의 사위였으며, 시나이 반도의 광산을 개척하였다.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거대한 조세르(Djoser)의 석상은 이집트 파라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파라오가 쓰는 무거운 가발을 쓰고, 턱에도 파라오 특유의 턱 장식이 붙어 있다. 제3왕조는 조세르 대에 종교, 예술, 사회가 크게 진보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레판틴 섬(Elephantine Island)의 크눔 신전(The Temple of Khnum) 유적지
사나크테가 18년을 통치한 후 동생인 조세르가 2대 파라오에 올랐다. 조세르는 '권위 있는, 찬탄스러운, 신성한' 등의 뜻이다. 당시 나일 강의 범람은 역대 파라오들에게 큰 골치거리였다. 조세르는 나일 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크눔 신전(Temple of Khnum)이 있는 상이집트의 엘레판틴 섬(Elephantine Island)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나일 강 한가운데 있는 도시 엘레판틴은 창세신화의 태양신 라(Ra)가 생명을 주려 할 때 쉬는 거처였다. 엘레판틴은 아스완의 나일 강 한가운데 길이 2km, 폭 500m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이다.
임호텝(Imhotep)
조세르는 임호텝(Imhotep)에게 명하여 세계 최초로 완전한 형태의 계단형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했다. 임호텝은 최초의 의사이자 천재 건축가였으며, 연금술과 철학에도 뛰어났다.
사카라(Saqqara)의 조세르 피라미드(Pyramid of Djoser)
사카라 고대 무덤 지역의 남쪽에는 조세르 피라미드(Pyramid of Djoser)가 있다. 조세르 피라미드는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사카라는 카이로 남서쪽으로 24㎞ 지점에 있다. 조세르의 건축가 임호텝은 조세르를 위해 6개의 계단으로 된 피라미드 모양의 새로운 무덤을 고안했다. 세계 최초의 석조건물인 거대한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묘의 외벽을 매끄럽게 다듬어 처리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건축공법을 보여주고 있다.
제3왕조 마지막 파라오 후니(Huni)의 피라미드는 최초의 전형적인 제4왕조식의 정방형 피라미드이다. 후니가 24년을 다스린 후, 파라오의 지위는 사위이자 서자인 스네프루(Sneferu)에게 돌아갔다. 후니의 피라미드도 스네프루 대에 완성된 것이다.
스네프루(Sneferu)
BC 2613년 스네프루는 제3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후니의 딸 헤테페레스와 결혼하여 제4왕조를 개창했다. 스네프루는 나라 전체에 복을 주는 파라오라고 불렸다. 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였으며, 이때 많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마이둠)에 있는 스네프루(Sneferu)의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
스네프루는 조세르와 임호텝의 업적을 이어받아 종전의 형태와는 다른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를 건설했다. 굴절 피라미드는 멤피스 근처 마이둠(Medum, Mydoom)에 있다. 굴절 피라미드는 엄격한 4각뿔 무덤으로 발전하는 중간 단계를 나타낸다. 경사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가파르다. 스네프루의 사후 그의 피라미드 도시들은 영원성을 위해 모든 세금과 부담금이 면제되었다.
쿠푸(Khufu)
제4왕조의 파라오들은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다. 2대 파라오는 쿠푸(Khufu)다. Khufu는 '신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이라는 뜻이다. 쿠푸는 BC 2560년경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쿠푸의 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 Pyramid of Khufu)를 건설했다. 가장 북쪽에 있는 대피라미드는 기자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들 중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피라미드는 서기 1300년까지 3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쿠푸의 피라미드는 지저부의 한 변이 230m, 창건 때의 높이는 146.7m였다. 지금은 꼭대기 부분이 무너져서 137.2m이다.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석재의 평균 무게는 1개당 2.5톤으로 추정되고, 사용된 석재 숫자는 230만~268만 개라고 한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단인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03단이다. 피라미드 건축 당시에는 화장석으로 겉을 마무리해서 매끄럽게 되어 있었다. 내부 관람을 하려면, 9세기 알마문(Al-Ma'mun)이 뚫은 북쪽 도굴 구멍으로 들어간다. 입구를 지나면 큰 회랑을 거쳐 왕의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 Pyramid of Khufu)
가운데 피라미드는 4대 파라오 카프레(Khafre)가 세웠다.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는 3대 피라미드 중 한가운데에 있다. 쿠푸의 피라미드 보다 좀 작은 듯하지만, 지금은 높이가 143m로 가장 높다. 또 쿠푸의 피라미드보다 좀 높은 곳에 세워져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더 크게 보인다. 피라미드 가운데 비교적 잘 보존되고, 표면의 화장석도 일부 남아 있어 외관이 가장 아름답다. 이 피라미드의 동쪽에 신전이 축조되어, 스핑크스 남동쪽에 세워진 하안 신전과 참배용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카프레(Khafre)
카프레 피라미드에 부설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높이 20m, 길이 80m인 이 스핑크스는 신왕국(新王國) 시대에 하르마키스 신(Harmachis)-지평선상의 호루스로서 숭배되었다.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레의 얼굴이라고 추정된다.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
남쪽 끝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5대 파라오 멘카우레(Menkaure)의 피라미드이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Menkaure)는 기저부의 한 변이 105m, 높이 65m이다. 3대 피라미드 중에서는 가장 작다. 하안 신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이 피라미드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오는 관광객이 적다. 멘카우레 피라미드에서는 그의 점판암 상(像), 그의 누이이자 부인인 카메레르네브티 2세(Khamerernebty II)의 상, 하토르 여신, 여러 신을 묘사한 점판암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들은 피라미드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멘카우레(Menkaure)와 왕비
기자의 3대 피라미드 각 건축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고,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의 석재는 대부분 석회암이다. 이 석회암들은 기자 남동쪽 약 15km 지점 투라(Tura)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듯하며, 화장석으로 쓰인 횐석회암은 남쪽으로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 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Menkaure)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생명이 있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피라미드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에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파라오의 정신적 힘의 응집소라고 믿었다.
우세르카프(Userkaf)
BC 2498년 멘카우레의 사위인 우세르카프(Userkaf)는 제4왕조 마지막 파라오 솁세스카프(Shepseskaf)의 사후 파라오를 계승하여 이집트 제5왕조를 개창했다. 솁세스카프가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누이 켄트카웨스와 결혼한 우세르카프가 제4왕조 3대 파라오 제데프레(Djedefre)의 손자 자격으로 파라오를 이어받은 것이다.
제5왕조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Unas)는 자신의 피라미드 안에 '피라미드 텍스트'로 알려진 종교적, 마술적 내용의 구절을 새겨놓은 최초의 이집트 파라오였다. 우나스의 피라미드는 멤피스의 고분지역인 사카라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피라미드 북쪽에는 조세르의 피라미드가 있다. 우나스는 약 30년 통치하고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파라오는 우나스의 사위 테티(Teti)가 물려받았다.
테티(Teti)
BC 2345년 테티는 고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제6왕조를 열었다. 하지만 1대 파라오 테티부터 경호원에게 살해당하는 등 제6왕조는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테티-우세르카레(Userkare)-페피 1세(Pepi I)-메렌레(Merenre)에 이어 페피 2세(Pepi II Neferkare)가 제6왕조 5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페피 2세의 즉위명은 네페르카레 (Neferkare)로 '레의 영혼은 아름답다'는 뜻이다. 페피 2세는 이집트를 94년 동안 통치했다. 종교적인 건축물에 몰두한 페피 2세는 관련자들 모두에게 세금을 면제했다. 이런 조치는 곧 왕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페피 2세(Pepi II Neferkare)
페피 2세는 페피 1세의 아들이며, 메렌레와 형제다. 메렌레가 일찍 사망하고, 페피 2세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미국 브루클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페피 2세의 설화석고 상에는 어려서 파라오가 된 그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안케센메리레 2세와 그녀의 아들 페피2세
페피 2세 사후 파라오는 허수아비가 되고 귀족과 사제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페피 2세 이후의 파라오들은 문헌에만 등장하며, 역사가 마네토의 기록에는 아예 수록되지도 않았고, 고고학적인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페피 2세 사후 제6왕조가 종말을 고하면서 고왕국 시대도 끝이 난다. 이후 혼란스러운 시대가 이어진다.
8-5. 제1중간기
마네토의 기록에는 이집트 제1중간기(第一中間期, First Intermediate Period)를 연 제7왕조에는 70일 간 재위한 70명의 파라오가 있었다고 한다. 제8왕조는 20년 동안 17명에 달하는 파라오가 통치했다. 파라오들의 지배권은 멤피스 일대로 한정되었다. 제8왕조에 이어 카이로 남쪽 25㎞ 떨어진 멤피스보다 약간 남쪽의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에는 제9왕조가 들어섰으며, 이어 제10왕조가 이를 계승했다. 한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675㎞ 떨어진 상이집트의 테베에는 제11왕조가 등장하여 두 개의 왕조가 공존하였다.
멘투호텝 2세(Mentuhotep II)
8-6. 중왕국 시대
BC 2040년 제11왕조의 멘투호텝 2세(Mentuhotep II)가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중왕국 시대(中王國時代, Middle Kingdom Period)가 시작되었다. 왕조의 개창자 멘투호텝 1세(Mentuhotep I)는 테베의 총독이었으나, 멤피스의 통일왕국이 무너진 이후 독립하여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제9, 10왕조와 대립하였다. 인테프 1세(Intef I)부터 파라오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3대에 걸쳐 헤라클레오폴리스로 진격했다. 4대 파라오 멘투호텝 2세 대에 이르러 제11왕조는 제10왕조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했다. 멘투호텝 2세 사후 그의 손자 멘투호텝 4세(Mentuhotep IV)가 재상 아메넴헤트 1세(Amenemhat I)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제11왕조는 막을 내렸다. 멘투호텝 4세의 무덤과 석관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아메넴헤트 1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메넴헤트 1세(Amenemhat I)
BC 1991년 아메넴헤트 1세는 이집트 제12왕조를 열었다. 2대 파라오 세누스레트 1세(Senusret I) 때부터는 공동 통치제가 도입되었다. 공동 통치제는 파라오의 치세 말기에 왕세자와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공동 통치기간에 왕세자로 하여금 정치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누스레트 1세(Senusret I)
아메넴헤트 1세는 재위 20년이 되던 해 아들 세누스레트를 왕위에 올렸으며, 그에게 국방을 맡겼다. 재위 24년에는 북동 국경에 나타난 아시아인을 공격했다. 재위 30년 아메넴헤트 1세는 세누스레트가 리비아인과 전쟁을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그의 피라미드는 리쉬트(Lisht)에 있다.
헬리오폴리스 소재 세누스레트 1세(Senusret I)의 오벨리스크
아메넴헤트 1세가 암살당하자 세누스레트 1세는 수도로 돌아가 쿠데타를 진압하고 파라오가 되었다. 세누스레트 1세는 수많은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파라오다. 그의 행정개혁으로 제12왕조는 부유하고 강성해졌다. 그는 헬리오폴리스에 2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아메넴헤트 1세에 이어 세누스레트 1세의 치세는 이집트 문학과 건축 문화가 최절정에 달한 시기이다.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5대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는 중왕국의 핵심을 이룬 아비도스-지금의 알아라바트 알마트푸나 건설에 몰두했다. 그의 치세에 오시리스 숭배가 본격화되었다. 이시스 숭배와 결합한 오시리스 숭배는 유럽으로 건너가 세계 최대의 박애주의 비밀결사단체인 프리메이슨(Freemason)에 의해 계승되었다.
소벡네페루(Sobekneferu)
6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와 7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4세(Amenemhat IV)에 이어 소벡네페루(Sobekneferu)가 8대 파라오에 올랐다. 마네토의 기록에는 소벡네페루가 아메넴헤트 4세와 공동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소벡네페루는 아메넴헤트 3세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BC 1782년 제12왕조는 소벡네페루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제12왕조의 멸망과 함께 이집트 중왕국 시대도 끝났다.
8-7. 제2중간기
이집트는 제12왕조를 끝으로 제2중간기(第二中間期, Second Intermediate Period)로 들어가게 된다. BC 1782년경 웨가프(Wegaf)는 이집트 제13왕조를 열었다. 제13왕조는 132년 동안 무려 29명의 파라오가 있었으며, 평균 재위 기간이 4.5년에 불과했다. 그만큼 제13왕조가 혼란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제14왕조는 제13왕조 말기의 혼란기에 나일 강 삼각주의 동부에 자리잡았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의하면 BC 1705년경~BC 1690년경까지 15년 동안 존속한 제14왕조 때에는 무려 30명에 가까운 파라오가 난립했다고 한다. 평균 재위 6개월은 정국이 지극히 혼란했기 때문이다. 문헌에 등장하는 파라오도 네헤시(Nehesi)와 메르제파레(MerjepaRe) 두 명뿐이다.
BC 1663년 팔레스타인 힉소스인 출신 살리티스(Salitis)는 이집트 북동쪽으로부터 나일 강 삼각주의 동부를 침략해서 제15왕조를 세웠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말을 타고 싸우는 그들이 처음이었기에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에 전차를 비롯해 조립식 활, 개량된 전투용 도끼, 발달된 요새 축조술을 들여왔다. 살리티스는 나일 삼각주의 북동부에 있는 아바리스(Avaris)에 요새를 건설하고, 이집트에 거주하는 힉소스인들의 수비기지로 삼았다. 힉소스인 왕조는 하이집트와 중이집트를 108년 간 통치했다. 이집트 제15왕조의 멸망애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대 이집트 역사서에서는 제15왕조를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인과 바이블의 '창세기', '출애굽기'가 바로 이 시절과 연관이 깊다는 설이 있다.
이집트 제16왕조는 제15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나 BC 1650년~BC 1580년까지 70년만 존속했기 때문에 남은 기록도 적다. 힉소스인과 대립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마네토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30명이 넘는 파라오가 난립하는 매우 심각한 혼란기였다고 한다. 이집트학 연구가인 킴 리홀트는 제16왕조가 테베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리홀트가 제시한 아나트-헤르(Anat-her)와 야코바암(Yakobaam) 등 16왕조 파라오의 존재는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라호텝(Rahotep) 왕자와 노프렛(Nofret) 왕자비
라호텝(Rahotep)은 이집트 제17왕조를 열고 힉소스인이 세운 제15왕조와 경쟁하였다. 타오 2세(Tao II)가 8대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힉소스와 전쟁을 시작했다. 타오 2세가 전사하자 BC 1573년 카모세(Kamose)는 9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카모세(Kamose)
이집트 제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는 타오 2세와 아호텝(Ahotep)의 아들이었다. 카모세도 힉소스인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BC 1570년 카모세가 전사하자 그의 어머니 아호텝도 힉소스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카모세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 제2중간기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