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북아프리카(North Africa) - 이집트(Egypt) 4

林 山 2020. 4. 5. 20:25

8-8. 신왕국 시대


BC 1570년 카모세의 동생 아흐모세 1세(Ahmose I)는 힉소스를 물리치고 이집트 제18왕조를 세웠다. 이집트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를 신왕국 시대(新王國時代, New Kingdom of Egypt)라고 한다. 제18왕조는 테베를 수도로 삼았다.


이집트 지도


아흐모세 1세(Ahmose I)


신왕국 시대에 들어와 고대 이집트 문명은 고왕국 시대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신왕국은 수단을 점령할 정도로 이집트의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이집트의 팽창 정책은 아흐모세 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멘호텝 1세(Amenhotep I)


2대 파라오 아멘호텝 1세(Amenhotep I)는 누비아-지금의 수단까지 이집트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시나이의 광산을 다시 열고 중왕국 시대의 요새를 다시 점령했다. 시리아에도 영토가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아멘호텝 1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이집트의 장군 투트모세 1세(Thutmose I)가 그 뒤를 이었다. 투트모세 1세는 투트모세 2세(Thutmose II)와 하트솁수트의 아버지이다. 투트모세 1세는 이집트의 세력을 크게 떨쳤으며, 역대 파라오의 보물을 훔치던 도굴꾼을 엄벌에 처했다고 한다. BC 1492년 투트모세 1세는 아들 투트모세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병사하였다. 

카르낙 신전의 투트모세 1세(Thutmose I) 오벨리스크(Obelisk)


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는 테베의 카르낙 신전에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방첨탑(方尖塔)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방첨탑은 하나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라 혹은 호루스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하트셉수트(Hatshepsut)


5대 파라오 하트셉수트는 BC 1490~BC 1468년까지 약 20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와 정비(正妃) 사이에서 출생한 유일한 딸 하트셉수트는 이복동생이자 4대 파라오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자 어린 의붓아들이며 동시에 배다른 조카인 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의 섭정이자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하트셉수트의 치세는 역대 파라오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카르낙의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


하트셰수트는 이집트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었다. 그 이전까지 이집트 역사상 여자가 파라오가 된 예가 없었으므로 하트솁수트의 모든 조각상이나 부조상에는 남장(男裝)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트셉수트는 카르낙 신전에 네 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높이 30m에 이르는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는 현존하는 최대의 오벨리스크다. 

데이르 엘-바흐리의 하트솁수트 장제전


테베 왕들의 계곡 근처 데이르 엘-바흐리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에는 하트솁수트 장제전이 세워져 있다. 이 장제전은 하트솁수트의 영혼을 기리는 제전인 동시에 태양신 아몬 신을 모시는 신전이기도 했다. 하트솁수트는 자신의 장제전을 제세르-제세루(Djeser-Djeseru, 장엄 중의 장엄)라고 불렀다.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6대 파라오 투르모세 3세는 시리아, 누비아 등 대규모의 군사 정복을 통하여 이집트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17회의 원정을 통해서 미타니, 히타이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우가리트, 비블로스, 야흐베, 누비아 등을 지배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투르모세 3세는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는 또 카르낙에 아몬 대신전을 세웠다. 카르낙에는 투트모세 3세의 신전(Temple of Thutmose III)이 있다. 투르모세 3세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중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여겨진다. 

카르낙에 있는 투트모세 3세의 신전(Temple of Thutmose III)


파라오(Pharaoh)가 왕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된 것은 투트모세 3세부터이다. 이후 모든 이집트 군주들은 파라오라고 불렸다. 'Pharaoh'는 원래 이집트 왕의 궁정, 왕궁을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 최고통치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파라오가 '성스러운 권좌'를 뜻하는 '페르-오'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공문서에 적힌 이집트 왕의 정식 칭호는 모두 5개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이름 앞에는 '호루스', '두 귀부인', '황금 호루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이며 두 땅의 주인', '태양신 라의 아들이며 왕관의 주인'이라는 칭호 가운데 하나를 덧붙였다. 마지막 칭호는 태어날 때 받는 이름이고, 나머지 칭호들은 대관식을 거행할 때 받았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호루스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진다. 호루스는 하이집트의 다산의 신이자 죽은 왕들의 신인 오시리스와 보호의 여신인 이시스의 아들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과 동격이었다. 따라서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파라오가 죽으면 육체를 모두 소진하고 영혼으로서 다스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궁궐의 의미로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있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의 무덤


7대 파라오 아멘호텝 2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부왕 투트모세 3세의 정복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시리아 북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아시아의 여러 왕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호수 원정 이후에는 군사력의 균형이 이루어져 북부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테베 왕들의 계곡에 있는아멘호텝 2세의 무덤은 훌륭하고 보존상태도 좋다.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8대 파라오 투트모세 4세(Thutmose IV)는 아멘호텝 2세의 이복동생이다. 미남에다가 기개가 넘쳤던 투트모세 4세는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으며, 암살 음모까지 있었다. 파라오를 비롯한 왕실 가족이 모두 멤피스에 머물 때, 투트모세 4세는 마차를 몰아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인 쿠푸와 아들 카프레, 손자 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의 언덕에 이르렀다. 그는 오랜 세월 모래더미에 파묻혀 머리만 나와 있는 스핑크스 앞에 무릎을 꿇고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 중에 깜빡 잠이 든 투트모세 4세의 꿈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파라오가 되게 해줄 테니 자신을 답답하게 뒤덮고 있는 모래를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스핑크스의 예언대로 투트모세 4세는 파라오에 올랐다. 투트모세 4세는 약속대로 스핑크스를 덮었던 모래를 걷어내고 그 앞에 붉은 화강암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투트모세 4세가 스핑크스와 한 약속, 왕위에 오른 경위 등이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투트모세 4세는 높이 45m에 이르는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는 이집트가 가장 번성했던 시대의 파라오다. 그는 15세에 평민 유야와 투야의 딸인 티예와 결혼했다. 평민 출신과 파라오의 결혼은 이집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아멘호텝 3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지배하였다. 당시 히타이트, 바빌로니아의 산물이 수도 테베로 흘러들어 왔다. 아멘호텝 3세와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제18왕조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뛰어난 아마르나 시대(Amarna Period)를 맞이했다.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데벤(Deben)이라는 동전이 발견되었다.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고대 이집트 최고의 걸작품 룩소르 신전은 바로 아멘호텝 3세가 지은 것이다. 나일강 동쪽 둑에 자리잡고 있는 룩소르 신전은 아멘호텝 3세가 건립하고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중축하였다. 꽃이 피어 있는 파피루스와 피지 않은 파피루스 기둥이 특이하다. 높이 16m의 원주열은 주랑 측벽에 투탕카멘이 오페드 축제(Opet-Festival) 내용을 새긴 얕은 부조와 함께 신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대탑문, 람세스 2세의 뜰, 제2탑문, 열주실 등으로 이어져 있다.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룩소르 신전은 이집트에서 신들의 왕으로 숭배된 아몬을 위해 지은 남쪽 신전이다. 아몬은 하늘의 여신이자 대모신인 무트(Mut)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기념하는 행사는 카르낙 신전에서 해마다 열리다가 룩소르 신전으로 옮겨왔다. 이후 매년 룩소르 신전에서 개최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이곳은 이펫 레세옛(Ipet reseyet, 남쪽의 하렘)이었다.


룩소르 아멘호텝 3세 장제전의 멤논의 거상


테베의 룩소르에 있는 멤논의 거상은 아멘호텝 3세가 건설한 장제전에 있던 그의 상이다. 장제전은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왕들을 예배하고, 그 왕들에게 바칠 물건과 음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아멘호텝 3세의 장제전은 후세의 파라오들이 완전히 파괴하여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토대와 높이 10m의 거대한 돌기둥, 그리고 멤논의 거상이라고 부르는 2개의 석상뿐이다. 이 조상들은 아멘호텝 3세를 나타내고 있다. 머리에 쓴 관을 합하면 높이가 거의 22m나 된다.

말카타(Malkata) 유적지  


북쪽에 있는 조상은 기묘하게 높은 소리를 냈기 때문에 고대에는 '노래하는 멤논'으로 유명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와 황후 사비나(Sabina)를 비롯하여 많은 로마인들이 이 놀라운 소리를 듣기 위해 테베를 찾았다. 그러나 이 조상을 수리한 후 멤논은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솔렙 신전(Soleb Temple)


아멘호텝 3세는 또, 테베의 메디넷트 하부 남쪽에 유명한 왕궁 말카타(Malkata)를 지었다. 티예 왕비를 위해서 나일 강 제3폭포 근처 누비아 사막 한가운데 솔렙 신전(Soleb Temple)을 지었다. 

티예(Tiye)


아멘호텝 3세는 만년에 쾌락에 빠져 정치는 왕비인 티예가 맡게 되었다. 아멘호텝 3세는 단 것을 너무 좋아하여 치아에서 고름이 나오고, 잇몸이 쑤씨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멘호텝 3세가 병사한 후에는 티예가 이집트를 통치했다. 투트모세 왕세자(Crown Prince Thutmose)가 아멘호텝 3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티예는 위대한 이집트 여왕으로 불리고 있다. 둘째 왕자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자 티예는 물러났다. 

10대 파라오 아크나톤(Akhnaton)을 멘호텝 4세라고도 한다. Amenhotep은 '아멘이 기뻐한다', Akhnaton은 '아톤(Aton, Aten)의 종'이라는 뜻이다. 아멘호텝 4세는 출생명이다. 그는 아멘 신앙에서 아톤 신앙으로 종교를 바꾸고 이름도 아크나톤으로 개명했다. 아톤은 아크나톤이 만든 유일신 종교의 태양신이다. 아멘은 아몬과 같은 말이다. 

아크나톤(Akhnaton)


아크나톤은 테베의 수호신 아몬의 신관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커지자 이를 제어하기 위해 종교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다신교인 종래의 이집트의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도입했다. 아몬 신앙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아크나톤은 수도를 왕조의 발상지 테베에서 지금의 엘-아마르나(El-‘Amarna)로 옮기고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타텐(Akhetaten)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수용한 것은 상류층뿐이었고, 아크나톤이 죽은 뒤 아몬 신앙이 부활하였으며 수도도 다시 테베로 돌아갔다. 제19왕조에 들어서면서 종교혁명은 부정되었으며, 파라오 아크나톤의 존재 자체도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종교사적으로 보자면 아크나톤은 세계 최초로 아톤 유일신교를 창도했다지만, 사실은 이신교였다. 아톤 신은 아크나톤을 위한 신이었고, 이집트 백성들에게는 아크나톤 자신을 숭배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미녀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


아크나톤의 왕비는 전설적인 미녀 파라오 네페르티티(Nefertiti)이다. Nefertiti는 '미녀가 왔다'는 뜻이다. 1914년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석회석 채색 흉상(베를린 알테스 박물관 소장)은 사실적인 화려함을 잘 나타낸 당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네페르티티는 투탕카멘의 이모였다. BC 1334년에 아크나톤이 사망하고, 투탕카멘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대신하여 약 2년 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녀의 딸 중 메리타텐(Merytaten)은 파라오 스멘크카레(Smenkhkare)의 정비였고, 안케세나멘(Ankhesenamen)은 아버지인 아크나톤과 결혼했다가 다시 이복동생인 투탕카멘의 왕비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크나톤이 죽은 후 다시 세력을 잡은 아몬 신의 사제들은 나이 어린 투탕카톤(Tutankhaton)을 12대 파라오로 세운 뒤 새로운 수도인 아케타톤을 버리고 테베로 환도하였다. 파라오의 이름도 '살아 있는 아몬 신의 상'이라는 뜻인 투탕카멘(Tutankhamen, Tutankhamun)으로 고치게 했다.

투탕카멘(Tutankhamen)


왕들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무덤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무덤


투탕카멘(Tutankhamen)의 순금제 가면 


B.C. 1352년에 세워진 투탕카멘의 무덤(왕가의 계곡 KV 62호)은 1922년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투탕카멘의 순금제 황금관의 무게는 1375kg에 이른다. 신상을 배치하는 내실에는 투탕카멘 부부의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솔렙 사원의 비문에는 투탕카멘의 아버지가 아멘호텝 3세로 되어 있다. 하지만 투탕카멘이 태어났을 때 아멘호텝 3세는 이미 죽고, 아크나톤의 시기였다. 고고학자들은 kv55호의 미라가 아크나톤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투탕카멘의 아버지로 확인하였다. 2010년 고고학자들은 아멘호텝 2세 무덤에서 발견된 네페르티티로 추정되는 미라가 투탕카멘의 어머니의 미라라는 것을 밝혀냈다. 

파라오 아이(Ay)는 다소 특이하다. 그는 여성 파라오 네페르티티와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헵(Horemheb)의 왕비 무트네드즈메트(Mutnedjmet)의 친정 아버지였다. 아이는 또한 아멘호텝 3세의 처남이기도 했다. 아크나톤은 그의 외삼촌이자 장인이었다. 투탕카멘의 왕비이자 이복 여동생인 안케세나멘은 그의 외손녀였다. 

아이(Ay)


아이는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의 시대에 고위 관리이자 자문관이었다. 투탕카멘이 후사 없이 죽자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의 왕에게 청혼하여 왕자 한 명을 이집트로 보내 자신과 결혼시킨 뒤 파라오에 앉힐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자가 오기 전에 아이는 이집트의 권력을 잡고 파라오가 되어 4년 동안 통치했다. 

호렘헵은 아크나톤의 아톤 신 숭배를 폐지하고 아몬 신 숭배를 되살렸다. 이집트 북부에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있던 호렘헵은 파라오에 오른 뒤 군인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멤피스를 수도로 삼았다. 또 아톤 신의 상징물을 모두 파괴하고 아몬 신을 모시는 건물들을 새로 짓거나 복구했다. 그는 아몬 신을 숭배하지 않은 파라오들의 이름을 역대 파라오 명부에서 지웠다. 호렘헵은 후사가 없었다. 호렘헵이 자신의 총리였던 람세스 1세(Ramses I)에게 파라오를 물려줌으로써 이집트 제18왕조는 막을 내렸다. 

호렘헵(Horemheb)


호렘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어놓은 거대한 무덤이 1975년 멤피스 근처 사카라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호렘헵은 '왕들의 계곡'에 있는 왕실 무덤에 묻혔으므로 이 무덤은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룩소르의 아몬 대신전(Great Temple of Amon)


룩소르의 아몬 대신전(Great Temple of Amon)


투탕카멘에 이어 호렘헵은 아멘호텝 3세를 위해 테베 남부 룩소르에 아몬 대신전 완성했다. 아몬 대신전은 열주식 기둥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기둥 위를 커다란 긴 돌로 서로 연결하여 수평 구조를 이루게 했다. 절벽으로 된 계곡 밑의 거대한 신전에는 이와 같은 수백 개의 기둥이 계곡의 절벽처럼 웅장하고 장엄하게 세워져 있다. 아몬 대신전은 람세스 2세가 증축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다시 좀더 증축했다. 


BC 1293년 이집트 제18왕조가 멸망하고, BC 1292년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세웠다. 제19왕조는 고대 이집트 시대의 최전성기이자 신왕국 시대의 황금기였다. 람세스 1세는 델타의 한 요새 군사령관으로 있다가 호렘헵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세티 1세가 뒤를 이었다.


세티 1세(Seti I)의 미라


2대 파라오 세티 1세는 아버지 람세스 1세를 이어 위대한 제19왕조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세트 신에게 경배드린다'는 뜻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북부와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적어도 1번 이상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스(Muwatallis)와 싸웠다. 그뒤 레바논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를 흐르는 오론테스 강(Orontes River, Nahr al-⁽Āsī) 근처의 카데시(Kadesh)를 국경으로 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강화조약으로 이집트에는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비도스의 세티 1세 신전(The Temple of Seti I)


세티1세는 광산과 채석장을 개발하고, 우물을 팠으며, 무너진 신전과 제단을 다시 세웠다. 또 람세스 1세가 시작한 카르낙의 거대한 열주전(列柱殿)을 세웠다. 이 열주전은 이집트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장엄한 기념물 중 하나다. 세티 1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물은 자신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지은 신전이다. 세티 1세의 신전(Temple of Seti I)은 아비도스 있다. 그는 이 신전을 오시리스 신을 비롯해 6명의 신들에게 바쳤으며 섬세한 부조물로 치장했다. 당시 칠했던 색 중 일부는 아직도 선명하다. 신전 뒤에는 그의 기념비로 보이는 건축물이 하나 서 있다.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있는 세티 1세(Seti I)의 무덤


세티 1세의 무덤은 테베 서쪽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 중 가장 훌륭하다. 역사학자들은 세티 1세를 제19왕조의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여기고 있다.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79년 람세스 2세가 제19왕조 3대 파라오로 등극했다. 람세스는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뜻이다. 람세스 2세 때 이집트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호전적인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람세스 2세는 사자왕, 정복왕으로 불렸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였지만 실리도 추구할 줄 알았다. 그는 히타이트와 휴전을 맺어 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리며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그는 수도를 페르라메수(Per Ramessu, Pi Ramesse)로 천도했다. 페르라메수는 지금의 콴티르(Qantír, Khatána, Tall ad-Daba⁾a)이다. 콴티르는 나일 강 지류의 전략적 요충지로 이집트와 아시아의 두 세계가 만나는 접합점이었다. 람세스 2세는 세트 신을 숭배하고 아시아 신들을 섬겼다. 그의 치세에 아부 심벨 신전, 카르낙 신전, 라메세움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세우기도 했다.  

아부 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


아부 심벨 신전은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에 있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280km 지점이다. 나일 강 서안의 사암 절벽을 깎아 만든 이 신전은 1813년에 재발견되었다. 이부 심벨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위해 지은 신전으로 정면 높이 32m, 너비 38m이며 입구에 22m의 람세스 2세 조각상이 4개 있다. 이 신전은 암벽을 60m 깊이로 파서 만든 암굴신전이다. 특이한 것은 2년에 한번씩 햇살이 이 신전 깊숙한 곳까지 비치도록 설계한 것이다.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2세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람세스 2세의 좌상은 움푹 들어간 절벽을 등지고 있으며, 2개는 주신전 입구 양쪽에 각각 놓여 있다. 이 좌상의 발 둘레에는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와 자식들을 상징하는 작은 상이 조각되어 있다.

아부 심벨 신전은 태양신 아몬 레(Amon Re)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신전 내부는 왕의 조상과 함께 왕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채색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주신전의 북쪽에 있는 작은 신전은 여신 하토르를 경배하기 위해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진 것이며, 10.5m 크기의 왕과 왕비의 조상이 장식되어 있다. 아부 심벨에 있는 두 신전은 세계에서 그 규모가 가장 웅대하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 당시 나세르 호의 범람으로 아부 심벨 신전이 수몰 위기에 처했다. 이집트 정부는 유네스코와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두 신전은 해체되어 3000년 동안 자리하고 있던 사암 절벽보다 60m나 더 높은 곳으로 이건되었다. 두 신전은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조립되었다.

아부 심벨 신전의 디자인은 독특하다. 바위를 파서 만든 암자식 신전은 이집트 내에서도 흔치 않지만 누비아 지역에서는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두 신전이 똑같은 모습을 한 신전은 이 곳 말고는 없다. 아부 심벨 신전의 람세스 2세와 그의 부인 네페르타리 동상은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누비아의 다른 신전과 달리 아부 심벨은 신전이 교회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겨져 1817년 모래 속에서 발견될 때까지 다른 종교가 손을 대지 않았다.

네 개의 거상과 원숭이 형상이 있는 신전 본관은 그 거대한 규모와 위엄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남성의 용감성과 군인의 힘을 상징하는 이 신전에서 파라오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또, 그의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작은 신전의 꽃과 여성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벽에는 카데시 전투 장면이 상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람세스 2세와 부인 네페르타리가 신과 교분을 나누며 종교의식을 행하는 그림도 있다.

네페르타리(Nefertari)의 무덤


람세스 2세는 매우 총애한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아부 심벨에 따로 신전을 만들었다. 근처에 있는 네페르타리의 무덤인 QV66은 왕비의 계곡에 있는 무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네페르타리는 람세스 2세의 부인 중 한 명이다. 네페르타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네페르타리가 13살 때, 15살의 람세스 2세와 혼인을 하였다. 람세스 2세가 파라오에 오르자 이세트노프렛(Isetnofret)과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네페르타리는 람세스 2세가 파라오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왕세자 아문헤르케페셰프(Amunherkhepeshef)와 딸 메리타멘(Meritamen)을 두었다. 네페르타리가 죽자 메리타멘은 아버지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Temple of Karnak)


카르낙 신전은 룩소르 신전 북쪽 3km 지점에 있으며,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BC 200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지만, 역대왕에 의해 증개축이 되풀이되어, 초기의 유구로는 제12왕조 세누세르트 1세의 성당만이 남아 있다. 

카르낙 신전의 대열주실(大列柱室, Great Hypostyle Hall)


현재의 신전은 신왕국 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제19왕조 1대파라오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大列柱室, Great Hypostyle Hall), 제18왕조 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 5대 파라오 하트솁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 신전, 제20왕조 2대 파라오 람세스 3세 신전(Medinat Habu, Funerary Temple of Ramses Ⅲ)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서 안쪽의 하트솁수트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테베 나일 강 서안의 라메세움(Ramesseum)


라메세움은 상이집트 테베의 나일 강 서안에 세워졌다. 암몬 신과 죽은 람세스 2세에게 바쳐진 장제전이다. 높이 17m나 되는 람세스 2세의 좌상이 유명했으나 지금은 부서진 조각만 남아 있다.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 부조


절반 정도 남아 있는 라메세움의 벽에는 BC 1299년 시리아 힘스(Hims)의 남서쪽 오론테스 강 지역에서 람세스 2세 치하의 이집트인들과 무와탈리스 치하의 히타이트인들 간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경에 코엘레 시리아(Coele-Syria)를 둘러싸고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Seleucos dynasty)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에 6번 벌어진 시리아 전쟁(Syrian Wars), 민 제전(Min Festival) 광경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성우(聖牛) 아피스가 매장된 사라페움(Sarapeum)


람세스 2세는 또 사카라 근처 나일 강 서쪽 둑 위에 있는 사라페움의 주회랑과 부속방을 설계하였다. 이 신전은 프타 신(Ptah)의 성스러운 동물인 죽은 아피스 황소의 기념비에서 유래했다. 사라페움은 죽은 아피스 황소들의 지하묘지와 죽은 뒤에 오시리스 아피스로서 오시리스 신과 결합된 아피스의 지상묘로 사용되었다. 성우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의 석관에 넣어 동굴 같이 생긴 지하에 안치하였다. 사카라에 사는 그리스인들은 이 신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사라피스(Sarapis)가 된 오소라피스로 숭배했고, 그뒤부터 이 신전을 사라페움이라 불렀다.

BC 12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이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인 모세(Moses)는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반도로 탈출했다. 이 사건은 바이블의 '출애굽기(出埃及記, Exodus)'에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 파라오를 람세스 2세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출애굽 시기는 BC 1202년~BC1199년까지 아멘메세스(Amenmesses)가 파라오로 재위하고 있던 시기다. 

아멘메세스(Amenmesses)


'출애굽기'는 J, E, P 문서로 지칭되는 3가지 문학전승이 있다. 이 전승들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자기 아들이 죽자 파라오가 충격을 받아 히브리인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는 전승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전승에는 모세가 맏아들을 위한 애도 기간을 이용해 이집트로부터 몰래 도망쳤다고 전한다. '갈대 바다'는 후대의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홍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파피루스는 깨끗한 물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갈대 바다'는 이집트 북동쪽 끝의 얕은 호수였을 가능성이 많다. 

시나이 산(Mount Sinai)


히브리인들의 제벨 무사(Jebel Musa)를 향한 이동 경로는 황량한 광야지대를 가로지르는 남부 여행로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야발 무사는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 화강암 산맥 가운데 있는 시나이 산(Mount Sinai) 또는 호렙 산(Mount Horeb)으로 추정된다.  

세트나크테(Setnakhte)


BC 1185년 이집트 제19왕조는 투스레트(Tausret) 여왕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세트나크테(Setnakhte)가 제20왕조를 세웠다. 이후 제20왕조는 람세스 3세에서 람세스 11세까지 115년 동안 존속했다. 

람세스 3세(Ramesses III)의 미이라


2대 파라오 람세스 3세는 3차례의 큰 전쟁에서 해상민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리비아인들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의 재위 동안에는 대체로 국가의 평온을 유지했으나 재위 말년에는 내부 혼란과 쿠데타를 겪었다. 람세스 3세는 메디넷 하부 신전을 완공했으며, 카르낙 신전을 재건축했다. 테베의 카르낙에는 람세스 3세 신전이 있다. 


카르낙의 람세스 3세 신전(Medinat Habu, Funerary Temple of Ramses Ⅲ)


파피루스 기록에는 람세스 3세의 아내 티(Tiy)와 아들 펜타웨어 왕자(Prince Pentawere)가 파라오를 암살할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암살 음모에는 티와 펜타웨어 외에 람세스의 왕실 담당자 페베카멘, 7명의 왕실 하인, 2명의 국고 담당자, 병사 2명, 왕가의 친척 2명, 전령관 1명도 가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람세스 4세(Ramses IV) 이후 람세스 11세(Ramses XI)까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이는 기록도 남기지 못할 만큼 왕조가 혼란스러웠음을 의미한다. 람세스 3세 이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왕들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 6세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원래 람세스 5세(Ramses V)의 무덤이었는데 람세스 6세가 가로챈 것으로 판명되었다. 람세스 5세는 람세스 6세에게 왕위뿐만 아니라 무덤까지도 빼앗겼다.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있는 람세스 6세(Ramses VI)의 무덤


이집트 제20왕조의 람세스 11세는 27년 간의 이집트 통치를 혼란으로 끝맺었다. 테베에 만들어지던 그의 무덤은 끝내 완성되지 못해 빈 무덤으로 남았고 이집트에서는 2개의 새 왕조가 시작되었다. 제20왕조를 끝으로 이집트 신왕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신왕국 시대가 끝나는 BC 1070년부터 이집트는 정복자가 아니라 피정복자 처지가 되었다.

8-9. 제3중간기

이집트 제3중간기(第三中間期, Third Intermediate Period)는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침입에 시달렸던 시기다. 테베의 아몬 대사제단(Theban High Priests of Amon)은 상이집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하이집트에서는 리비아인들이 세력을 구축하였다. 리비아인들의 통치 이후에는 누비아인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엘레판틴 섬 남부에 쿠시 왕국(Kingdom of Kush)을 건설한 누비아인들은 북부로 진출하여 80년 넘게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누비아인들의 통치 시대가 끝나고 제26왕조가 등장하였지만, 독자적인 힘으로 성립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제20왕조가 몰락하자 이집트의 권력은 테베의 아문 대사제단이 장악했다. 아문 대사제단의 집권은 BC 1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BC 1069년 스멘데스 1세(Smendes I)가 이집트 제21왕조를 세웠다. 제21왕조는 아문 대사제단과 같은 시기에 타니스(Tanis)를 중심으로 하이집트 지방을 통치하였다. 그래서 제21왕조를 타니스 왕조(Tanite dynasty)라고도 한다. 스멘데스 1세를 비롯 7명의 타니스 왕들은 대체로 상이집트 테베에 있는 강력한 사제에게 통치권을 행사했으나, 쿠시 지역만은 독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파라오 시아멘(Siamen)의 딸은 솔로몬 왕(King Solomon)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프수센네스 2세(Psusennes II)의 딸로 추정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타니스 왕조의 지배력이 약화된 결과 이들 지역에는 소왕국들이 번성했다. 

셰숑크 1세(Shoshenq I)


BC 945년 셰숑크 1세(Shoshenq I)가 세운 이집트 제22왕조는 BC 715년까지 타니스 근방을 다스렸다. 제22왕조의 통치자들은 나일 강 삼각주 동부의 부바스티스(Bubastis) 출신으로, 이들은 리비아인이기 때문에 리비아 왕조(Libya dynasty)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100년 이상 이집트의 북부를 통치했으나, BC 9세기 말에 이르면, 이집트 제23왕조가 분리되어 이집트 제25왕조에 통합될 때까지 분열을 겪었다. 

셰숑크 1세는 바이블 '열왕기상' 11:40, 14:25 및 '역대하' 12:2~9 에 시삭(Shishak)이라고 되어 있고, 업적은 카르낙의 부바스티스 입구에 새겨져 있다. 이 기록에는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Rehoboam) 5년, 시삭이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와,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약탈해갔다고 한다. 이 사건은 메지도에서 발굴된 비석에 묘사되어 있다.

하르시에세 A(Harsiese A)가 세운 이집트 제23왕조는 제22왕조와 마찬가지로 리비아 출신의 파라오들이 다스렸다. 이들은 기원전 9세기 초부터 하이집트의 22왕조로부터 사실상 독립되어,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를 비롯한 나일 강 하류 삼각지의 중부에서 테베를 비롯한 상이집트 지역을 100년 가량 다스렸다.

테프나크트(Tefnakht)


이집트 제24왕조는 테프나크트(Tefnakht)가 BC 727년에 세웠다. 제24왕조는 알가르비야 주 나일 강 삼각주 서쪽의 고도 사이스(Sais)에 있었던 단명한 왕조이다. 파라오도 단 두 명만 존재했다. 사이스는 누비아계 왕조에 맞선 이집트 제24왕조, 제26왕조의 수도였다.

피안키(Piankhi)


이집트 제25왕조는 BC 751년 무렵 피안키(Piankhi)가 열었다. 제25왕조는 제3중간기의 마지막 왕조이다. 이 왕조는 쿠시 왕국에서 유래한 누비아인들이었다. 4대 파라오 타하르카(Taharqa)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았다.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은 타하르카를 공격하여 테베까지 점령한 후, 누비아 인들을 쿠시 왕국으로 쫓아냈다. 이집트 제25왕조는 5대 파라오 타누타멘(Tantamani)을 마지막으로 몰락했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