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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North Africa) - 이집트(Egypt) 5

林 山 2020. 4. 5. 20:39

8-10. 말기왕조 시대


아슈르바니팔이 BC 665년 사이스에 리비아인 제24왕조의 후예 네코 1세(Necho I)를 파라오로 세우면서 이집트 제26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제26왕조부터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에게 점령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이집트 말기왕조 시대(末期王朝時代, Late Period of ancient Egypt)라고 한다. 

네코 2세(Necho II)


26왕조는 25왕조의 영토였던 상이집트 지역까지 다스리며 100년 이상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2대 파라오 프삼티크 1세(Psamtik I)는 이집트 지방 총독 출신으로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다시 통합해 제26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3대 파라오 네코 2세(Necho II)는 수에즈 운하를 비롯한 수많은 건설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강성한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캄비세스 2세(Cambyses II)의 공격을 받고 BC 525년 멸망했다. 이후 이집트는 100여 년 넘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집트 제27왕조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1차 점령기이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BC 525년~BC 404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는 페르시아에서 등장한 제국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최대 판도였을 당시 영토가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 이란, 이라크, 흑해 연안, 소아시아 전체를 지배했다.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일반적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을 의미한다.


프삼티크 3세(Psamtik III)


BC 525년 이집트를 점령한 캄비세스 2세의 전설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전한다. 캄비세스가 프삼티크 3세(Psamtik III)에게 공주 한 명을 요청했다. 프삼티크는 캄비세스를 속이고 공주 대신 신분이 낮은 여자를 보냈다. 캄비세스의 어머니는 와히브레(Wahibre)의 딸이었다. 캄비세스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이집트 정복을 맹세한 일이 있었다. 이후 프삼티크 3세는 캄비세스의 부하가 되어 캄비세스의 원정에 참여했지만, 그의 자손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지속하였다. 아르타크세륵세스 1세(Artaxerxes I) 시절 반란은 극에 달했고, 다리우스 2세 오쿠스(Darius II Ochus) 때부터는 페르시아 내부의 혼란 때문에 이집트는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는 다리우스 2세에 대한 끈질긴 저항으로 BC 404년 마침내 페르시아의 1차 점령기를 끝장내고 독립 이집트 제28왕조를 세웠다. 제28왕조는 아미르타이오스 단 한 명의 파라오만 존재한다. 동명의 할아버지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후예로, 프삼티크 3세의 아들인 이나로스(Inaros)와 함께 아르타크세륵세스 1세에 대항한 반란 지도자였다. 이집트인 독립에 성공한 파라오 아미르타이오스는 내전 끝에 살해당해 왕좌를 찬탈당했다. 아미르타이오스의 재위 기간은 BC 404년~BC 399년까지 단 5년에 불과했다. 그는 어떤 기념물이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BC 399년 네페리테스 1세(Neferithes I)가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 제29왕조를 수립했다. 이렇게 성립한 제29왕조는 4명의 파라오가 존재했다. 이 시기에 수도는 사이스에서 멘데스(Mendes)로 옮겨졌다. 제29왕조는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BC380년 네페리테스 2세(Neferithes II)를 마지막으로 멸망했다.

넥타네보 1세(Nectanebo I)  


BC 380년 넥타네보 1세(Nectanebo I)가 세운 이집트 제30왕조는 3명의 파라오가 40년 가까이 통치하였다. 제30왕조의 3대 파라오 넥타네보 2세(Nectanebo II)는 이집트인으로서는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Agesilaos II)의 도움을 받아 2대 파라오 타코스(Tachos)의 왕위를 빼앗았다. 넥타네보 1세의 아들 타코스는 원래 이름이 제드호르(Djedhor)인데, 타코스나 테오스(Teos)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타코스도 경쟁자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했으나, 아게실라오스가 그것을 물리침으로써 넥타네보 2세는 왕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넥타네보 2세(Nectanebo II)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륵세스 3세 오쿠스(Artaxerxes Ⅲ Okhos)는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뒤 나일 강 어귀 세 곳을 동시에 공격하여 이집트를 정복했다. BC 343년 페르시아군에 패한 넥타네보 2세는 처음에는 멤피스, 그 다음에는 상이집트로 도망쳤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집트 제31왕조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이집트 2차 점령기이다. 1차 점령기와는 달리 통치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1차 점령기의 관용과 포용 정책이 아닌 종교와 문화를 잔학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이집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르타크세륵세스 3세 오쿠스가 이집트를 점령한 지 5년만에 독살당했고,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륵세스 4세 아르세스((Artaxerxes IV Arses)도 2년 만에 살해당했다. 제국을 안정시킨 다리우스 3세(Darius III)는 BC 332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ros III)의 군대에 쫓기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아케메네스 제국은 멸망했다. 


8-11. 헬레니즘 제국의 점령기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5년~BC 30년까지 통치했다. 이 왕조의 왕들은 파라오를 칭했고, 기존 이집트의 역사 전통과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 제32왕조라고도 불린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aeos I Soter)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된 장군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05년에 스스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칭하고 이집트 제32왕조의 1대 파라오가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독립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하였다. 


이집트 제32왕조의 남자 통치자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로 칭했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Cleopatra)나 아르시노에(Arsinoe), 베레니체(Berenice)로 불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조 중 유일하게 토착 이집트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고대 이집트 종교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이들은 오직 그리스 신화를 숭배하였다. 유일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Cleopatra VII Philopator)만이 토착 이집트어를 구사할수 있었으며, 자신을 그리스인의 후손이 아닌 토착 이집트인의 후손을 자처하며 고대 이집트 종교를 숭배하였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Cleopatra VII Philopator)


BC 6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Ptolemaeos XII Auletes)의 셋째딸로 태어난 제3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BC 51년 18살의 클레오파트라는 15세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Ptolemaeos XIII Theos Philopator)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또 다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테오스 필로파토르 2세(Ptolemaeos XIV Theos Philopator II)와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파라오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던 클레오파트라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와 협상을 통해서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와서 클레오파트라와 2주일 동안 함께 보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Ptolemaeos XV Caesar, Ptolemaeos Philopator Philometor Caesar)는 카이사르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별칭은 카이사리온(Caesarion)이다. 


카이사리온(Caesarion)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5년 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3두 중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로마 3두 중 한 사람이자 카이사르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의 여동생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유일한 적자이자 상속자로 선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BC 31년 9월 2일 이집트에 선전포고했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했다. BC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 상륙하자 절망한 클레오파트라는 39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의 지배층은 헬레니즘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의 학문 중심지였으며, 나아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꽃을 피웠다. 이집트 문명이 지중해의 페니키아, 그리스-로마 문명, 홍해의 아랍 문명, 유대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융합 문명은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8-12. 로마와 아랍의 점령기

 

BC 30∼AD 395년 로마에 정복당한 이집트는 이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642년 아라비아의 군대는 마침내 이집트에서 비잔틴 제국을 몰아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이슬람 문화권에 편입되어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아랍어를 사용하였다. 이집트는 칼리프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와 아바스 왕조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국의 중심이 되어 상당한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는 1171년에 멸망하고 다시 아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250년 이슬람교로 개종한 아랍의 노예군단인 맘루크 장군들이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국을 무너뜨리고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를 세웠다. 1517년까지 지속된 맘루크 왕조 시대에 이집트는 거의 완전히 이슬람화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되면서 문명도 쇠퇴했다. 


8-13. 제국주의 영국 점령기


1798년에 이집트는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았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이집트에 제국을 세운 무함마드 알리 왕조(Muhammad Ali dynasty)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영국에 막대한 부채를 졌다. 1882년 영국은 내란을 틈타 이집트를 점령하고, 1914년부터 식민지로 만들었다. 


8-14. 이집트 현대사


이집트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 7월 23일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89명의 자유장교단원들과 함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전복시켰다. 이후 7월 23일은 이집트 공화국 선포일이자 혁명기념일이 되었다. 1953년 나세르는 이집트 전체에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으로 1인당 40만㎡ 이상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다. 또, 부패척결운동이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며, 여성들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리가 부여되었다.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54년 나세르는 자신을 암살하려 한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탄압하고, 당시 대통령 무함마드 나기브(Mohammed Naguib, 1901~1984)를 가택연금시켰다. 국제 외교에서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와 함께 비동맹노선을 주창했다.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의 반둥 회의에서 그는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1956년 1월 나세르는 일당 독재정치 체제에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사회주의 아랍 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했다. 1956년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두고 이집트 주도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하자 나세르는 사회개혁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군비에 쏟아부었다. 


1956년 3월 총선 이후 나세르는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수에즈 위기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면서 이집트와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따올랐다. 그의 범아랍주의 실현 의지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시리아와 아랍연합공화국 창립으로 나타났다.


나세르가 유엔 평화유지군의 가자 지구와 샤름앗샤이흐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고, 이스라엘의 해상 운송을 막기 위해 아카바 만을 봉쇄하자 1967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시 제2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이집트 공군기가 비행장에서 파괴되고, 이집트군이 수에즈를 넘어 퇴각하자 나세르는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나고 국회에서 재신임을 얻어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소련은 파괴된 이집트의 모든 전쟁 장비를 즉각 교체하기 시작했고, 이집트군의 포대를 엄호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했다.


나세르는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안을 잠정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아랍연맹회담 직후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나세르는 이집트를 경찰국가로 변모시켜 우편물과 통신매체를 엄격히 검열했고, 주요 신문은 국유화했다. 또, 전화를 도청하고 이집트를 방문한 사람들의 방을 수색했다. 나세르 치하에서 이집트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일정당의 공직 후보자들은 나세르와 그 측근들이 뽑았고, 정적들은 사막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대다수 농민들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사망하자 부통령 모함메드 안와르 알-사다트(Mohammed Anwar al-Sadat, 1918~1981)가 임시대통령이 되었다. 10월 15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사다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다트는 탈중앙집중화와 족벌경제의 완화, 독재정치의 완화를 내걸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73년 사다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제4차 중동전쟁 일명 욤키푸르 전쟁을 이끌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 일부를 수복했다. 


1976년 사다트는 대통령에 재선되고, 1977년 이집트의 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조인하여 이스라엘로부터 시나이 반도 일부를 돌려받고, 1979년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랍 세계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을 실현한 사다트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모함메드 안와르 알-사다트(Mohammed Anwar al-Sadat)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서방세계에서 사다트의 인기는 올라갔다. 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에 대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묵인하고 넘어갔다는 이유로 사다트를 아랍 세계의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를 따돌리기 시작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반대여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사다트의 인기는 추락했다. 


국제통화기금이 외국인 투자유치를 원하는 사다트에게 빵 보조금을 없앨 것을 요구하자 그는 이집트 국민을 대상으로 보조금 폐지를 발표했다. 그러자, 빵값이 폭등하면서 빵폭동이 일어났다.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는 카이로 근교인 나스루에서 수에즈 운하 도하 기념 군사 퍼레이드 중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자 칼리드 이스람불리(Khalid Islambouli)와 다른 공범 2명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서방 국가들의 정상들은 참석하였으나, 아랍 국가들과 동구권 국가 정상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사다트가 죽자 부통령 무암마드 호스니 무바락(Muammad Hosn Said Mubrak, 1928~2011)이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무바락은 사다트의 평화정책을 계승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되찾았다. 그는 1981년부터 비상계엄을 선포한 채 이집트를 장기 통치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집트의 세속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이 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 17일 관광지로 유명한 룩소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조직원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65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관광객은 58명이나 되었다. 룩소르 테러 이후 이집트 관광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무암마드 호스니 무바락(Muammad Hosn Said Mubrak)


2003년 2월 무바락은 1981년 이래 지속되어 온 비상계엄을 3년 더 연장하였다. 군부의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 무바락 통치 하의 이집트 민주화는 요원했다. 비상계엄 하의 이집트에서 대중집회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라크 사태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 민감한 문제들에 대하여 시위를 금지할 경우 국민들의 분노가 반정부 시위로 확산될 위험성을 고려하여 무바락 정권은 경찰의 철저한 감시 하에 군중시위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군중시위는 무바락 정권을 위협하지는 못했지만 향후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표출이 반정부 시위로 발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2000년 9월 시작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의 영향으로 이집트 청년층의 정치적 각성과 의식화가 진행되면서 무바락 독재정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이집트 국민들은 미국 주도의 대이라크 전쟁을 원유 확보 및 이스라엘 보호를 위한 침략전쟁으로 간주했다. 미국이 이라크 파병을 요청하자 이집트 정부는 같은 회교도인 이라크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파병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라크 경찰병력 훈련을 위한 교관 파견 및 병원 복구 등 인도적 지원에는 적극 참여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무바락 독재정권은 민주화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2003년 9월 집권 국민민주당(NDP) 전당대회에서 야당 세력과의 대화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무바락이 진실로 야당들이 요구해 온 헌법개정과 비상계엄 해제, 대통령 권한 제한 등의 민주적 정치개혁을 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는 없었다. 


2004년 10월 7일 시나이 반도의 휴양지 타바 지역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이스라엘인 등 34명이 사망했다. 1997년 11월룩소르 테러로 독일, 일본인 관광객 등 62명이 사망한 사건 이후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소강상태에 있던 이집트 내 테러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무바락은 2005년 2월 국내외의 민주화 요구가 빗발치자 복수후보 출마와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2005년 의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종전에는 의회 재적 의원의 2/3 이상 지지를 얻는 지명후보 1인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했었다. 개헌안은 의회와 슈라위원회(Shura Council), 주의회 의원 250명의 추천을 받거나 또는 의회와 슈라위원회 의석의 5% 이상을 점유하는 정당 후보만이 출마 자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경과 조치로서 2005년 대선에서는 개헌안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5년 4월 7일 카이로 시내 칸칼릴리 재래시장 인근에서 자폭  테러로 외국인 관광객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30일에는 카이로 시내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광장에서 자폭 테러가 발생해 테러범 1명이 사망하고 외국인 3명이 부상했다. 같은 시간대에 알리 모스크 인근 도로에서 관광버스 총격 사건이 일어나 여성 총격범 2명이 사망했다. 7월 23일에는 시나이 반도 휴양지 샴엘셰이크 연쇄 폭탄 테러로 64명이 사망하고, 124명이 부상했다. 이들 테러 중 조직적인 테러는 무바락 독재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부정부패, 경제불황, 고실업률 등 이집트 국내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좌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상황에 분노한 젊은층의 자생적 테러도 종종 일어났다.


2005년 9월 실시된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무바락은 유효투표의 88.57%를 득표하여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또다시 당선되었다. 알가드당(Al-Ghad Party)의 아이만 누르(Ayman Nour, 1964~) 후보는 7.3%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아이만 누르는 알가드당 창당 당시 추천인 서류를 위조한 혐의로 이집트 법원에 의해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누르는 구속된 이후 정치적 탄압 중단을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4개 이집트 인권단체와 미국, 유럽 연합(EU)은 즉각 그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2005년 11~12월 실시된 총선에서 국민민주당(NDP)은 311석, 무소속으로 출마한 무슬림 형제단이 88석, 기타 정당은 11석, 무소속은 24석, 기타 10석을 얻었다총선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운동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 후보들이 선전한 반면 제도권 정당의 고위인사들은 줄줄이 낙선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종전의 17석에서 88석을 얻음으로써 의회 정원의 20%를 차지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약진은 NDP의 장기집권과 부패에 대한 부정적 여론, 경제 악화, 고실업률, 집권 대안세력으로서 야당의 역할 미흡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혔다.


2006년 12월 30일 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집트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 후세인 사형이 사면하고 용서하는 알-아드하(희생제)가 시작되는 날 집행되었다는 점에서 무슬림의 정서를 감안하지 않았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집트 언론들은 대체적으로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처형에 대해 동정적인 논조의 기사를 게재했다. 알아람 지(Al-Ahram)는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한 처형이 정당한 판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암살이며, 이는 이라크가 현재 외국 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알메사 지(Al-Messa)는 후세인이 처형 당시 보여준 의연한 모습으로 인해 영웅화되고 있으며, 희생제 시작일에 이루어진 처형으로 인해 향후 희생제가 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후세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알곰후리아 지(Al-Gomhuria)는 후세인의 처형 이후 외국 군대에 대한 저항이 가열화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후세인은 미국의 오만함에 저항하였던 순교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0년 3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Mohamed Elbaradei, 1942~ ) IAEA 전 사무총장이 영구 귀국했다. 이집트 재야세력은 엘바라데이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엘바라데이는 귀국 직후 34개 야당 대표들이 참여하는 ‘변화를 위한 국민연합(National Coalition for Change)'을 결성하고, 헌법 개정과 비상계엄법 철폐 등 민주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엘바라데이는 정부 여당이 공정선거를 보장하지 않은 점을 들어 2010년 11월로 예정된 총선과 2011년 9월로 예정된 대선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호스니 무바락이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대선에 나오지 못할 경우 그의 아들 가말 무바락Gamal Al Din Mohammed Hosni Sayed Mubarak, 1963~ )과 우마르 술라이만(Omar Suleiman, 1936~2012) 국가안전부장이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가말 무바락은 집권 국민민주당의 고위 간부였다.        

 

이집트 야당과 재야세력은 무바락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과 경제상황 악화에 따른 불만이 고조되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 반정부 세력은 야권과 재야 시민 세력의 연합체인 키파야 운동연합(Kifaya는 Enough와 같은 말, 무바락의 집권은 이제 충분하다는 뜻)과 무슬림 형제단이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2011년 2월 11일 30년 동안 집권했던 독재자 무바락은 민주 시민혁명에 의해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부통령 오마르 술레이만은 이집트군 최고위원회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날 무바락과 그의 가족들은 대통령궁을 떠나 휴양 도시 샤름엘셰이크로 이동하였다. 무바락의 퇴진 이후 권력은 군부에게 넘어갔다.


2011년 4월 13일 호스니 무바락과 그의 아들 가말 무바락은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심문을 받기 위해 구금되었다. 무바락의 일당독재의 기반이 되었던 국민민주당(NDP)은 4월 16일 강제 해산되었다. 12월 28일 무바락과 두 아들 알라, 가말 및 6명의 측근들에 대한 공판이 카이로 외곽에 소재한 경찰학교(Police Academy)에서 재개되었다. 무바락은 85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집트 시민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 등 강경진압의 책임과 부정축재 혐의로 기소되었다.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최고 사형 선고를 받을 수도 있었다. 


2012년 1월 23일 선거를 통해 새로 구성된 이집트 하원(People's Assembly)이 의원 전원(508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하였다. 정당별 의석은 무슬림 형제단의 자유정의당이 235석, 살라피스트 정당인 누르당(Nour) 123석, 자유주의 전통 야당인 와츠드당(Wafd) 38석, 세속주의 정당 연합인 이집트 블록(Egyptian Bloc) 34석, 중도 이슬람 정당인 와사트당(Wasat) 11석, 구 여권 NDP의 개혁개발당 9석, 무소속 31석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원내 제1당을 차지함으로써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상황을 맞이했다. 


2012년 4월로 예정된 대선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i, 1951~2019)를 비롯해서 전 아럽연맹 사무총장 아므르 무사(Amr Moussa, 1936~ ),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압델 포투(Abul Fotouh, 1951~ ), 무바락 정권의 전 총리 아흐메드 샤피크(Ahmed Shafiq, 1941~ ), 함딘 사바히(Hamdeen Sabahi, 1954~ ) 등 5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모하메드 무르시는 권리 회복을 위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합법적인 투쟁과 독립국가 건설 노력 지원, 걸프 협력기구(GCC) 회원국들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 강화, 아랍 지역 내 무역 자유화와 아랍 공동시장 설립 등을 통한 아랍국가 간 협력 강화 및 경제 통합, 나일 강 수자원 확보 및 수자원 권리 강화를 위해 이집트 외교정책에서 나일 강 유역국가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의 중요성 제고, 치안 및 군사협력, 무역관계 발전 등을 통한 이집트-터키 관계 강화, 단기적으로는 상호이익에 기초한 이집트-미국 관계 재구축, 장기적으로는 모든 정치, 경제, 군사 분야 등에서 예속관계 종식,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관계 강화 및 유럽 국가들의 대 이집트 투자 유치 활성화, 경제협력 수준 격상, 투자 증대, 무역교류 활성화, 아시아 국가들의 개발 경험 전수 등 아시아 대륙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 신흥 경제강국(BRICS)들과의 관계 및 파트너십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2012년 5월 23~5월 24일 실시된 이집트 대선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후보가 25.3%, 전 총리 샤피크가 23.7%, 나세르주의자 사바히가 21.6%, 무슬림 형제단 간부 출신 포투가 17.9%, 전 아랍연맹 사무총장 무사가 11%를 얻었다. 결국 무르시와 샤피크 후보가 6월 16일~17일 실시되는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2012년 5월 31일 비상조치법이 공식 폐지되었다. 비상조치법은 1981년 독재자 사다트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비상계엄법이었다. 비상조치법은 법원의 영장 청구 없이 경찰에게 체포 및 구금에 관한 광범위한 권한이 부여되고,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회부하는 등 무바락 장기 독재정권을 뒷받침해 온 것으로 비난받아 왔으며, 시민혁명 세력들의 주요 개혁 요구사항 중의 하나였다.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i)


이집트 대선 결선투표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모하메드 무르시가 샤피크를 물리치고 이집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르시는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무르시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이집트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해산된 의회 재소집을 결정하면서 군부와 충돌하였다. 이집트 헌재는 의회 해산을 따라야 한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집트 헌법재판소가 무르시의 의회 재소집은 무효라고 밝혔고, 무르시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7월 15일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이집트를 방문했다. 클린턴은 이집트인들로부터 토마토와 신발 세례를 받았다. 7월 24일 무르시는 헤샴 칸딜을 새 총리로 지명했고, 칸딜 총리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8월 12일 무르시는 군사정보부장 압델 파타 알시시(Abdel Fattah Al Sisi, 1954~ )를 대장으로 승진시켜 국방부 장관 및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무르시는 시나이 반도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국가안전부을 교체했다. 시나이 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무슬림 형제단과 세속주의 세력 간 정치적 충돌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무르시는 국방장관을 해임하면서 군부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무르시는 국방장관을 해임하는 대신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했다.


2012년 8월 24일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져 무르시 지지자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르시는 8월 28일 기독교인과 여성을 정부 관리로 임명했다. 이집트는 무슬림 형제단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일부 세력이 반 무슬림 형제단 세력과의 연대 조짐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이집트 법원은 이슬람 무장단체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12년 10월 12일 무르시 대통령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이 충돌해서 1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집트 헌법재판소는 10월 17일 무르시가 추진하는 새 헌법 초안의 일부가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11월 13일 방송국의 여성 뉴스 앵커가 히잡을 쓴 것을 계기로 이집트 항공도 여자 승무원이 히잡을 쓰는 것을 허용하면서 이슬람화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11월 22일 무르시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헌법 초안을 발표하고, 12월 15일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이집트에서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 과정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가 충돌했다. 이집트 사법부도 93년만에 시위에 동참했다. 12월 5일에는 대통령궁 부근에서 무르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이 충돌했다. 12월 8일 무르시는 헌법 초안을 폐기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한다고 밝혀 반대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1차 투표에 이어 2차 투표 결과 64%의 찬성으로 신헌법은 통과되었지만, 야권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2월 26일 무르시는 새 헌법에 서명한 뒤 방송을 통해서 야권을 회유하는 연설을 했다.


2013년 1월 25일 이집트는 혁명이 일어난 지 2주년이 되었지만, 반정부 시위가 계속 일어나면서 무르시는 1월 27일 3곳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월 1일에는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집트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충돌했다. 


2013년 7월 2일 알시시는 알 아흐람 지의 1면에 '축출이냐 사임이냐'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내도록 명령하였다. 무르시가 자진 사퇴하지 않으면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어엎겠다는 협박이었다. 7월 3일 알시시 국방장관은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무르시 정권을 축출했다. 쿠데타 이후 알시시는 7월 3일~4일간 이집트의 국가원수로 존재하였고, 7월 4일에는 헌법재판소장 아들리 만수르를 대통령 대행에 임명하여 권력을 이양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알시시의 임시 군사정권이 쥐고 있었다. 7월 16일 알시시는 부총리에 임명되어 국방장관 및 군 총사령관을 겸직했다. 


2013년 8월 무바락은 법원의 시위 유혈 진압 책임에 대한 무죄 선고로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무바락은 임시 군사정부의 직권 명령으로 군 병원에 다시 연금되었다. 


알시시는 언론을 철저하게 장악해서 군부 쿠데타 이후 이집트의 신문들은 친 군부 세력 성향의 기사만 내보낼 수 있었다. 8월 14일 이집트 신문들은 군부의 반정부 시위 유혈 진압 과정을 담은 사진을 대부분 싣지 않았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일당에 저항하여 일어난 한국의 광주민중항쟁 당시 민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처럼 이집트 언론도 군부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  


8월 16일 알시시는 '분노의 금요일'을 맞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무차별 유혈진압했다. 군사정부는 최소 638명이 사망하고, 4,2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 주도 세력 무슬림 형제단은 2,6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카이로 시민은 군대의 저격수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었으며, 광장뿐 아니라 건물에 있는 사람도 총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이집트에는 알시시를 중심으로 한 과도 군사정부에 의해 공안정국이 형성되었다. 이집트 과도 군사정부는 무르시를 축출한 뒤 감옥에 수감했다. 이후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한 무르시는 3건의 재판을 통해 징역 4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인 무슬림 형제단은 2013년 10월 9일 과도 군사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당했다. 


임시 군사정부는 또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에 우호적이었던 알자지라(Al-Jazeera) 방송을 탄압했다. 알자지라는 2001년 9.11 테러 당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 인터뷰,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대량학살 보도로 유명해졌으며, 이후 중동의 CNN으로 불렸다.  


압델 파타 알시시(Abdel Fattah Al Sisi)


2014년 1월 이집트 신헌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으며, 1월 27일 알시시는 원수로 진급하였다. 신헌법에 따라 3~4월 의회선거에서 18세 이상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는 540명(정당명부제 120명, 개인후보제 420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27명을 합한 총 567명의 의원이 2012년 위헌 결정으로 해산된 하원과 2013년 무르시 대통령 축출시 함께 해산된 상원을 대체할 단원제 의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헌법에는 또 전체 의석 중 여성 56석, 청년 16석, 장애인 8석, 콥트교도 24석을 배정하도록 규정했다. 


2014년 2월 17일 이스라엘-이집트 국경지역인 타바(Taba)에서 버스 폭탄 테러가 일어나 진천 중앙장로교회 성지순례단 3명과 이집트인 운전기사 1명이 사망하고, 한국인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집트 반정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Ansar Bayt al-Maqdis)는 이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버스 폭탄 테러가 임시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하면서 앞으로도 이집트 경제와 관광산업, 그리고 군사령관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모함마드 이브라힘 내무장관을 대상으로 한 차량 폭탄 테러와 파이프라인 폭파 사건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 테러로 인해 이집트는 여행 제한 지역이 되었다. 


2014년 3월 26일 알시시는 이집트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대선에 출마하려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선거법에 따라 국방장관 및 군 총사령관, 부총리직을 사임하였다. 5월에 실시된 대선에서 쿠데타를 주도한 시시가 이집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6월 8일 알시시는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집트 정부는 엘시시, 알시시 등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공식 이름이 압델 파타 알시시(Abdel Fattah Al Sisi)라고 한국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에 통보했다. 


2015년 1월 9일 카이로 형사법원은 대통령궁을 보수한다며 공금을 횡령한 뒤, 가족 소유의 건물을 개선하는 데 사용한 혐의로 무바락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5월 4일 무바락은 자신의 생일날 교도소 창문을 통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2015년 6월 12일 룩소르에서 반정부 테러 시도로 경찰 2명과 상인 2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테러범 3명 중 1명은 자폭, 1명은 사살, 1명은 체포됐다. 8월 20일 기자의 이집트 국가보안부를 목표로 한 차량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 테러로 경찰 6명을 포함해 29명이 부상을 당했다. 다에시(IS) 이집트 지부를 자처하는 '시나이 지방'이 벌인 테러였다. 8월 24일에는 수도 카이로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현지 경찰 통근 버스가 폭발하여 2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6년 1월 이집트 신의회가 출범했다. 3월 9일 이집트 기자에서 경찰 호송 차량을 공격한 폭탄 테러가 발생해 3명이 부상당했다. 10월 14일에는 시나이 반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습격으로 이집트군 1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다쳤다. 이집트군의 반격으로 이슬람 무장단체원 15명은 전원 사살되었다.


2017년 3월 2일 이집트 최고항소법원은 무바락의 민주화 요구 시위대 유혈진압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무바락은 민주화 시위 직후인 2011년 4월 구속돼 이듬해 1심 재판에서 시위대 진압에 차량과 무기를 제공하고 시위참가자 239명의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집트 항소법원이 동 사건을 파기 환송하였고, 카이로 형사법원은 2014년 11월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판결한 바 있다. 3월 25일 무바락은 무죄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 로마 카톨릭 교황(좌)과 타와드로스 2세 콥틱 교황(우)


2017년 4월 28일~29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집트를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집트 대통령 알시시를 비롯해서 무슬림 수니파 최고종교기관인 알아자르의 아흐메드 알타옙 그랜드 이맘, 콥틱교회의 타와드로스 2세(Tawadros II) 교황 등 주재국 내 주요 인사들과 만났다. 4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집트 군사 운동장에서 약 2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콥틱교회의 단결을 포함한 평화와 관용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2017년 5월 26일 알시시 정권은 21개의 언론 홈페이지 접속을 차단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 허밍턴 포스트 아랍어판 등 21개의 언론사가 테러리즘과 극단주의를 지원하며 거짓 뉴스를 유포한다는 명목으로 온라인 홈페이지 접속을 차단한 것이다. 


5월 29일 알시시 정권은 새 NGO 관련 법안을 승인했다. 4만 7천여 개에 달하는 시민단체는 이 법안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법원의 재판을 거쳐 강제 해산될 수 있는 악법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 법안 도입으로 이집트 정부는 시민단체에 유입되는 외국자금에 대한 감독, 설립자의 범죄기록 제출 및 재산공개 의무 부과 등을 통해 시민단체 활동을 감독 및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안은 시민단체의 활동영역을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7년 9월 16일 이집트 대법원 항소파기법원은 카타르에 국가기밀 문건을 유출해 국가안보를 위해했다는 혐의에 대한 무르시 전 대통령 재판에서 종신형을 최종 선고했다. 무르시는 카타르 반역 혐의에 대해 2016년 6월 카이로 형사법원으로부터 40년형을 선고 받은 후 항소했다.  


2017년 11월 6일 인권변호사 칼레드 알리(Khaled Ali 1972~ )는 2018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알리는 알시시 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이집트 경제, 안보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이집트를 구하고 희망을 회복하기 위하여 단합할 것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11월 24일 알시시 정권에 저항하는 이슬람 과격단체의 총격 폭탄 테러가 일어나 30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했다. 


2018년 1월 13일 알시시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3개월 추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테러 발생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테러리즘에 대한 재정지원 차단 등을 위해서라는 명목이었다. 국가비상사태 발령시 대통령은 영장 없이 수색 체포 및 행정구금의 권한을 내무부 장관에게 위임할 수 있고, 집회 및 거주이전의 자유에 대한 제한, 1심법원과 항소법원, 군사법원에 대한 특별조치 및 일반인의 국가비상법원 재판, 모든 통신과 서신에 대한 감독과 차단, 출판물에 대한 검열 및 압수, 통행금지, 사유재산 통제, 군대 배치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3월 7일 이집트 정부는 폭발물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고, 테러에 연루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2018년 3월 29일 실시된 이집트 대선에서 알시시는 9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42%에 불과했다. 엘시시의 유일한 경쟁 후보였던 무명의 정치인 무사 모스타파 무사는 3%를 얻는데 그쳤다. 12월 28일 기자 피라미드 인근에서 반정부 폭탄 테러가 발생해 베트남 관광객 등 4명이 사망했다. 2019년 6월 5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시나이 반도 북부 검문소를 공격해서 최소 10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2019년 6월 17일 전 대통령 모하메드 무르시는 카이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후 이집트 검찰은 무르시의 시신에서 부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며, 이집트 국영 TV는 그의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전했다. 그러나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무르시의 자연사에 대해 살해 의혹을 제기했다. 또, 무슬림 형제단은 무르시의 죽음에 대해 살인이라고 비난하며, 지지자들에게 항의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또 국제 앰네스티도 무르시의 친지 접견이 단 3차례만 허용됐다며, 사인에 대한 독립적 조사를 촉구했다.  


2019년 9월 7일 이집트 카이로 형사재판소는 2011년 혁명 당시 하마스 등의 도움으로 탈옥한 혐의, 헤즈볼라 등과 공조하여 국익을 저해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모하메드 모하메드 바디(Mohamed Badie) 등 무슬림 형제단 소속 고위 지도자 11명에 대해 25년형을 최종 선고했다. 알시시 정권은 무르시 축출 이후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다. 


2019년 10월 3일 이집트 국가인권위는 국내 시위 관련 성명을 내고 일부 시민들에 대해 자의적인 보안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명서는 일부 시민들이 도로나 주요 광장에서 정당한 법적 근거나 혐의에 대한 고지 없이 체포되고 친척이나 지인들과의 연락도 차단되었으며, 임의로 개인 휴대폰 등도 검색당했다면서 사생활 보호에 관련된 법 등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이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도 10월 25일 이집트 정부가 반정부 시위자들을 계속해서 체포하는 등의 인권 상황을 규탄하고, 이에 따라 EU 회원국들이 이집트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2020년 1월 14일 이집트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를 1월 27일부터 3개월 재연장한다는 대통령령 제2020-20호에 대해 동의했다. 이집트 내각은 성명을 통해 이집트가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정부의 테러 척결 노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동 국가비상사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통령령은 이집트군과 경찰이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가 전체의 안보를 유지하며, 공공재산 및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있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집트의 비상계엄령은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반정부 인사나 단체를 탄압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 2월 25일 건강악화로 카이로 소재 군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오던 이집트 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락이 91세로 사망했다. 1928년 5월 4일 모노피아 주에서 출생한 무바락은 이집트 제4대 대통령으로 30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었으며 2011년 2월 11일 시민혁명으로 축출되었다. 알시시는 2월 26일 뉴카이로에서 거행된 무바락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집트 대통령실은 2월 26일부터 3일 간 국가 애도기간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알시시 정권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20. 4. 3.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