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바로 알기

북아프리카(North Africa) - 남수단(South Sudan)

林 山 2020. 4. 15. 19:39

1. 남수단 개관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은 아프리카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으로는 수단, 동쪽으로는 에티오피아, 남쪽으로는 케냐, 우간다, 콩고 민주공화국, 서쪽으로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 접한다. 2011년 이전까지 남수단은 수단의 일부였다. 


남수단 지도


남수단의 인구는 2020년 기준 약 1,100만 명이다. 국토 면적은 644,329㎢이다. 한반도의 3배쯤 되는 면적이다. 수도는 주바(Juba)이다. 19세기 주바 근처에 곤도코로(Gondokoro)라는 무역기지가 있었다. 이곳은 오스만 투르크의 가장 남쪽 군사기지였다. 1922년 그리스 무역상들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백나일 강 반대편에 주바를 건설했다.


남수단 수도 주바


2. 남수 단 국기


남수단의 국기는 제2차 수단 내전이 종식된 2005년에 제정되었으며 수단 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의 기를 바탕으로 제정되었다. 디자인은 케냐의 국기와 유사하다. 검정색과 빨강색, 초록색은 범아프리카색이다. 검정색은 흑인, 빨강색은 자유를 위해 흘린 피, 초록색은 국토, 두 개의 하얀색 선은 평화를 상징한다. 왼쪽의 파란색 삼각형은 나일 강, 노란색 별은 베들레헴의 별로 남수단의 단결을 상징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기에 이어 국장이나 문양 없이 6가지 색 이상이 사용된 두 번째 국기이다.


남수단 국기


3. 남수단의 자연 환경


남수단의 식생은 다양한 야생동물의 서식지인 무성한 대초원, 늪, 열대우림을 포함한다. 기후는 사막성 기후이다. 남쪽 우간다 국경지대는 남수단의 최고봉인 키니에티 산(Mount Kinyet, 3,220m) 등 고산들이 즐비한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키니에티 산은 온갖 야생동물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키니에티 산에 이르는 교통편은 상당히 불편하다. 수도 주바(Juba)에서 비포장도로로 토리트(Torit)를 거쳐 카티레(Katire)까지 간 다음 키니에티 산에 올라야 한다.   


키니에티 산(Mount Kinyet)


백나일 강(White Nile River) 인근에는 농업이 발달하였다. 남수단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금, 은, 망간, 아연, 철, 납, 우라늄, 청동, 코발트, 니켈 등 천연 자원이 아주 풍부하다. 백나일 강 유역에는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광대한 수드 늪지(Sudd marsh)와 열대 우림이 있다. 수드 늪지는 2006년 6월 5일 람사르 협약에 따라 지정된 습지로 등록되었다. 수드(Sudd)라는 늪 이름은 아랍어로 '장벽' 또는 '장애물'을 뜻하는 '사드'(아랍어 سد, Sadd)에서 유래되었다.


4. 남수단의 민족 구성과 언어, 종교


수드 늪지(Sudd marsh)


남수단의 민족 구성은 딩카족(Dinka, 35.8%), 누에르족(Nuer, 15.6%), 실루크족(Shilluk), 아잔데족(Azande), 바리족(Bari), 카크와족(Kakwa), 쿠쿠족(Kuku)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딩카족은 나일 강 유역의 중앙습지 주변 사바나 지대에 사는 종족이다. 나일사하라어족의 샤리나일어군에 속하는 동수단어를 쓰며, 누에르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유명한 집단으로는 아가르족, 알리아브족, 보르족, 레크족, 말루알족 등이 있다.


남수단의 공용어는 대부분의 주민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이다. 하지만, 여러 민족어들이 존재하며 수단과 접경하고 있는 북부 지역에서는 아랍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2012년 조사에 따르면 남수단 인구의 60.5%가 기독교도였다. 상당수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에 속한다. 또한 32.9%는 아프리카 토착신앙을 믿는다. 이슬람교는 6.2%, 기타 종교는 0.4% 수준이다.


5.남수단의 정치 제도


2019년 현재 남수단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이고, 대통령 임기는 4년이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 이원제다. 상원(Council of States)의 정원 50명이다. 50명 가운데 전직의원 20명, 대통령 지명 의원 30명이다. 하원(National Legislative Assembly)의 정원은 332명이다. 332명 가운데 선출의원 170명, 전직의원 96명, 대통령 지명 의원 66명이다. 대통령이 의회 의원을 지명하는 것은 정치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제도이다.


6. 남수단의 경제 상황 


남수단의 GDP는 2018년 기준 39억 달러, 1인당 GDP는 303달러이다. 석유수입은 정부 총예산의 98%(원조금액 제외)이며, 연 GDP의 71%를 차지한다. 2013년 12월 내전 발발 후 원유생산이 급감하고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국가 재정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경제성장률(GDP)은 2016년 기준 ​-11.2%를 기록했다. 교역 규모는 2018년 기준 23.9억 달러이다. 수출은 16.2억 달러, 수입은 7.7억 달러이다. 화폐단위는 남수단 파운드(South Sudanese Pound)이다. 


7. 남수단과 한국


한국과 남수단은 2011년 7월 수교했다. 주우간다 대사가 남수단 대사를 겸임한다. 남수단은 한국 주재 대사관이 아직 없다. 한국과 남수단의 수출입 현황은 2018년 기준 39.5만 달러 수준이다. 수출은 34.5만 달러, 수입은 5만 달러이다. 


남수단 정부는 와랍(Warrap) 주 톤즈(Tonj)에서 청소년 교육과 의료 봉사활동을 펼치다가 암으로 선종한 이태석 신부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남수단 정부는 2019년부터 남수단의 모든 학교에서 이태석 신부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교과서가 배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태석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학교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남수단에서 장학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남수단 유학생을 선발해 교육시키고 있다. 


남수단에는 현재 국제연합 평화유지군(PKO)의 일원으로 한국군 대민지원단 한빛부대가 파병돼 있다. 한빛부대는 2013년 4월 최초로 파병됐으며, 병력 규모는 약 300명이다. 


8. 남수단의 관광 명소


8-1. 백나일 강(White Nile River)


백나일 강(White Nile River, 아랍어 النيل الأبيض)은 청나일 강(Blue Nile River)와 함께 나일 강(Nile River)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이다. 빅토리아 호(Lake Victoria, Victoria Nyanza), 앨버트 호(Lake Albert, Albert Nyanza), 에드워드 호(Lake Edward, Edward Nyanza)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우간다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남수단을 관통하여 수단의 하르툼(Khartoum)에서 청나일 강과 합류하여 나일 강의 본류를 이룬다. 백나일 강으로 들어가는 호수들의 지류들이 빅토리아 나일(Victoria Nile), 앨버트 나일(Albert Nile)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백나일 강(White Nile River)


백나일 강 유역에 광활한 늪지 수드(Sudd)가 있다. 서쪽으로는 바르 가잘 강(Bahr al-Ghazal), 중앙으로는 자발 강(Baḥr al-Jabal)-마운틴 나일 강(Mountain Nile River)이 흐른다. 두 강은 모두 백나일 강의 주요 지류들이다. 이곳에는 키가 큰 파피루스와 수초, 수생 히아신스가 무성해 강물의 흐름을 막기 때문에, 자발 강은 수드를 거치면서 전체 유출량의 절반이 증발되거나 유실된다. 수드에는 전원생활을 하는 나일 강변의 누에르족이 살고 있다. 1980년대 초 백나일 강을 통해 준칼리(Junkali)와 말라칼(Malakal)을 연결하고, 늪지대의 물을 빼내 농사를 짓기 위한 수드를 우회하는 운하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운하공사는 1984년 발발한 제2차 수단 내전으로 중단되었다.


8-2. 올 세인츠 대성당(All Saints Cathedral)


올 세인츠 대성당(All Saints Cathedral)


올 세인츠 대성당(All Saints Cathedral)은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있다. 주바의 랜드 마크라고 하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남수단의 관광 명소가 별로 없는 듯하다.


8-3. 성 요셉 캐돌릭 교회(St. Joseph's Catholic Church)


성 요셉 캐돌릭 교회(St. Joseph's Catholic Church)


성 요셉 캐돌릭 교회(St. Joseph's Catholic Church)는 남수단 수도 주바에 있다. 1974년 12월 12일 주바 대교구로 승격했다고 한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데,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8-4. 성 터리서 대성당(St.Theresa Cathedral)


성 터리서 대성당(St.Theresa Cathedral)


성 터리서 대성당(St.Theresa Cathedral)은 주바의 코토르(Kotor)에 있는 대주교좌 성당이다. 성당의 건립 공사는 1952년에 시작되었다. 수단-남수단 내전 당시 5천여명이 성 터리서 대성당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8-5. 메인 모스크(Main Mosque)


메인 모스크(Main Mosque)


이슬람 사원인 메인 모스크(Main Mosque)는 수도 주바에 있다. 청록색 테라코타 벽과 첨탑을 가진 메인 모스크에서는 한때 아름다웠던 이슬람 종교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가시가 많기 때문에 신발을 신어야 한다.  


8-6. 주바 스테이디엄(Juba Stadium)


살바 키르 국립경기장(Salva Kiir National Stadium) 조감도


주바 스테이디엄(Juba Stadium)은 남수단 축구 대표팀의 본거지이다. 주바 스테이디엄에서는 2009 CECAFA U-17 챔피언십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1962년 7,000명 수용 규모로 건설된 이 경기장은 보수 공사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주바 경기장은 35,000 명 수용의 대규모 경기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경기장 이름은 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살바 키르 국립경기장(Salva Kiir National Stadium)으로 정해졌다. 


9. 근대 이전


근대 이전의 남수단 역사는 크게 현 수단 공화국의 역사와 동일하다. 하지만 현 수단 공화국은 이집트가 북쪽으로 물러난 이후 이슬람화되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고,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 민족들이 대거 유입된 반면, 남수단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남수단에 거주하는 다수의 종족은 15~19세기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10. 근대 이후


1820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는 북수단을 정복한 뒤 딩카족의 영역이던 남수단까지 점령했다. 남수단은 다른 지역에 노예를 공급하기 위한 약탈 지역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상아 공급지였다.  


남수단의 행정구역


북수단 출신 아랍인 알 주바이르 라마 만수르(Al-Zubair Lahma Mansur, 1830~1913)는 남수단에서 노예무역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다르푸르(Darfur) 술탄국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집트는 만수르를 제압하고 남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영국인 탐험가 사무엘 베이커(Samuel White Baker, 1821~1899)를 고용했다. 이집트는 남수단 지역을 에콰토리아(Equatoria)로 명명하고 베이커에게 통치를 위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알 주바이르 라마 만수르(Al-Zubair Lahma Mansur)

 

19세기 말까지 수단은 영국-이집트의 공동통치를 받았다. 1882년 영국은 내란을 틈타 이집트를 강제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1884년 영국은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을 수단 총독에 임명하여 무함마드 아마드 이븐 앗사이드 압달라(Muammad Ahmad ibn as-Sayyid Abd Allah, 1844~1885) 반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하르툼(Khartoum)에서 이집트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무함마드 아마드 반군은 1885년 하르툼을 점령하고, 수단에 이슬람 마흐디 신국(Mahdist State)을 세웠다. 영국은 고든 총독이 살해당하고 효수되는 굴욕까지 겪으며 하르툼을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허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1850~1916)가 이끄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에서 무함마드 아마드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단을 정복하였다. 


허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1898년 선진 자본주의 유럽 열강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절정을 이루었던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Crise de Fachoda)이 일어났다. 유럽 열강들은 원료와 시장 확보, 잉여 자본의 투자를 위해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에 사활을 걸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과 이집트의 카이로(Cairo)를 잇는 종단정책(縱斷政策)을 펼쳤고, 이에 맞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연결하는 횡단정책(橫斷政策)을 추진했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은 1894년 프랑스령 수단과 지부티를 연결하기 위해 시작됐다. 


장밥티스트 마르샹(Jean-Baptiste Marchand)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의 일환으로 허버트 키치너 장군은 섹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는 한편 철도를 부설하면서 1898년 9월 하르툼에 도달했다. 장밥티스트 마르샹(Jean-Baptiste Marchand, 1863~1934) 대위가 1898년 7월 지금의 남수단 코도크(Kodok)인 파쇼다(Fashoda)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키치너는 급히 파쇼다로 달려와서 마르샹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마르샹 대위가 이를 거절하자 한동안 긴장 상태가 야기됐다. 결국 이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의 본국 정부로 넘어갔다. 1899년 프랑스의 양보로 양국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1904년에는 영불 화친 협정을 맺게 되었다. 말이 좋아 양보지 해군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손을 뗀 것이었다. 이후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중간 지점이 영-불 양국의 경계가 되었다. 


북수단 지역은 영국의 통치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받아들였지만, 남쪽에서는 훨씬 큰 저항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북수단에서 영국의 식민지 통치는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반면 남수단에서는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북부와 남부 사이의 개발 격차의 원인이 되었다.


사막지대인 북부 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계가 많이 거주하였고, 초원과 밀림지대인 남수단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기독교와 토속신앙을 믿는 아프리카 본토 흑인이 많이 거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단을 식민지화한 영국은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채 두 지역을 하나로 묶어 통치하였고, 1956년에는 두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독립을 인정하였다. 오늘날 수단과 남수단의 갈등과 분쟁의 원인은 바로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56년 영국-이집트 공동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이래 수년 동안 수단에는 숱한 정권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자국 내의 다양한 정치 유권자들로부터 전국적인 지지를 얻어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어려움은 특히 남수단에서 심했다. 


이슬람계가 지배하는 수단 중앙정부는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 주민을 차별하고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시켰다. 수단 정치인들은 나라 전반에 이슬람의 법과 문화를 강제적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심지어 남수단 주민에 대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슬람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등 극단적인 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남수단 주민은 격렬히 대항하면서 1955~1972년의 제1차 수단 내전(Sudanese Civil War)으로 이어졌다. 


1972년 수단-남수단 간 체결된 아디스아바바 평화협정은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했을 뿐이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발생한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갈등은 1983~2005년의 제2차 수단 내전으로 이어졌다. 사실상 제2차 수단 내전은 남수단에서 발견된 대규모 석유와 광물자원을 둘러싼 이전투구(泥田鬪狗, 泥田斗狗)였다. 1989년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 1944~ )가 군사반란(coup d'Etat)으로 집권하면서 내전은 더욱 악화되었다. 두 차례의 내전으로 남수단에서만 2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수단과 남수단 간 수많은 회담과 휴전협정들이 체결됐지만 2005년까지는 그 성과가 극히 미미했다. 


케빈 카터(Kevin Carter)가 수단 내전 당시 찍은 사진


케빈 카터(Kevin Carter)


수단 내전 당시 참상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93년 2월 남수단 아요드(Ayod)에서 남아공 출신의 사진기자 케빈 카터(Kevin Carter, 1960~1994)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는 어린이를 바로 옆에서 노리고 있는 독수리를 찍은 사진이다.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 보도사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는 내전 당시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포착했다는 찬사와 함께 사진기자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이 사진이 나간 후 카터는 매일 분노에 찬 편지와 전화에 시달렸다. 카터는 결국 얼마 후 유서를 쓰고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은 'I'm really, really sorry(정말 진실로 미안해)'였다. 하지만 카터의 사진만큼 수단 내전의 충격적인 참상을 전 세계에 웅변적으로 알린 것은 없었다. 


2001년 1월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한국인 가톨릭 사제 이태석(1962~2010) 신부는 와랍 주 톤즈에서 의료와 교육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현지인들로부터 수단의 돈 보스코(Don Giovanni Bosco, John Bosco), 수단의 슈바이처로 칭송을 받았다. 톤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세례명 요한에 성을 더해 발음하기 쉬운 존 리(John Lee) 신부로 불렀다.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하고 평생을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1907년 교황 비오 10세(Saint Pius X)에 의해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로 선언되었다. 


2003년 수단 서부, 남수단 북서부에 위치한 다르푸르에서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Janjaweed, Janjawid)가 반군인 수단해방운동군(Sudan Liberation Movement-Army), 정의와평등운동(Justice and Equality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 세력을 무차별 학살하고,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30만 명의 희생자와 27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는 대참극이 발생했다. 'Janjaweed(잔자위드)'는 아랍어로 '말등에 탄 악마'라는 뜻이다.


2차 수단 내전으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수단은 결국 공격을 일시 중지했다.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PKO) 주둔 이후 국제형사법원(ICC)은 다르푸르 학살 당시의 인종청소 등 전쟁범죄 혐의로 수단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존 가랑 데 마비오르(John Garang de Mabior)


2005년 수단의 제1부통령이자 남수단 초대 대통령 존 가랑 데 마비오르(John Garang de Mabior,, 1945~ 2005)는 수단과 포괄적 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 CPA)을 체결하고 마침내 스단-남수단 내전을 종식시켰다. 존 가랑은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1951~ ), 리에크 마차르(Riek Machar, 1953~ ) 등과 함께 1983년 남수단 반군인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을 창설한 인물이었다.


포괄적 평화협정(CPA)을 통해 수단으로부터 권력과 부를 나누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CPA는 남수단에 반자치권을 보장했고, 2011년 남수단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조항을 명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마비오르는 2005년 7월 우간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국경 상공에서 의문의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2009년 톤즈(Tonj)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던 이태석 신부가 대장암 투병 끝에 선종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거룩한 봉사정신으로 교육과 의료 활동을 펼친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영화 '울지마 톤즈(Don't cry for me sudan, 2010)', '울지마 톤즈 2 : 슈크란 바바(2019)'로 제작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바 있다.


영화 '울지마 톤즈' 포스터 


11. 독립 이후


험난하고 기나긴 여정 끝에 2011년 1월 9~15일까지 1주일에 걸쳐 남수단의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 결과 분리 독립에 98.83%의 주민이 찬성하는 압도적 지지로 나타났다. 마침내 2011년 7월 9일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은 전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포했다. 남수단은 아프리카의 54번째 주권 국가이자 193번째 유엔 가입국이 되었다. 남수단의 독립 선포식에는 수단 독재자 알바시르가 참석하여 축하 연설을 하기도 했다.


남수단 독립과 함께 2대 대통령에는 존 가랑에 이어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의 2인자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부통령에는 마야르디트와 SPLM의 2인자 자리를 다투던 리에크 마차르가 취임했다. 마야르디트는 남수단 최대 종족인 딩카족, 마차르는 제2위 종족 누에르족 출신이었다. 마야르디트는 취임 후 2년 간 과도정부의 대통령을 맡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선거를 통해서 새 대통령을 뽑도록 되어 있었다. 마야르디트는 미국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선물로 주었다는 카우보이 모자를 늘 쓰고 다녔다. 그래서 카우보이 모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독립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수단-남수단 분쟁은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분쟁은 더욱 악화되어 2012년 4월 수단이 전투기를 동원하여 남수단에 폭격을 하는 등 전면전 직전까지 치달았으나, 비밀 협상을 통해 남수단이 수단에 위치한 송유관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뒤이어, 아프리카 연합의 중재로 평화협정을 맺어 비무장지대 설치와 석유 수출 재개에 합의했으나 또다시 결렬되었다.


리에크 마차르(Riek Machar)


2013년 3월 한국의 한빛부대는 UN 남수단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outh Sudan, UNMISS)의 일원으로 남수단 재건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병되어 종글레이(Jonglei) 주 보르(Bor) 시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대한민국 남수단 재건지원단 한빛부대는 공병과 의료부대원 210명, 이들을 보호하는 경비병력 70여명으로 구성됐다. 1진 때는 경비병력으로 특공여단 대원들을 보냈으나, 2진부터는 특수전사령부 부대원들을 파견했다.


2013년 7월 마야르디트는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면서 독재를 시작했다. 이에 리에크 마차르가 불만을 제기하자 마야르디트는 그를 부통령에서 해임하고 내각을 해산시켰다. 이에 12월 제2차 수단 내전 당시 무장투쟁에 참여했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군들은 마차르를 중심으로 모여 마야르디트 지지세력과 치열한 내전에 돌입했다. 이것이 이른바 악명높은 남수단 내전이다. 


내전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2013년 12월 14일 수도 주바에서 개최된 SPLM 민족해방위원회(National Liberation Council) 회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 경호원들 중 마야르디트와 마차르 추종세력 간 충돌이 벌어져 수십 명이 사망하고, 이튿날에도 대통령궁 인근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마야르디트는 마차르 추종세력의 쿠데타를 정부군이 성공적으로 진압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태는 마야르디트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지도부의 권력 투쟁은 딩카족 대 누에르족 간의 내전 양상을 띠고 남수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내전이 인종대학살 사태로 전개되자 마야르디트는 결국 아프리카 정부간개발기구(Intergovernment Authority on Development, IGAD)의 중재로 2014년 1월 23일 아디스아바바에서 마차르 반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양측의 산발적인 교전은 계속 이어졌다. 남수단 내전으로 2개월 동안 사망자 1만여 명, 피난민 80만 명이 발생했다. 


남수단에서 대민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한빛부대


2013년 12월 한빛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보르 시의 북쪽 수십km까지 반군이 접근하면서 충돌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한빛부대는 유엔 남수단임무단(UNMISS) 본부에 탄약지원을 요청했다. 미 아프리카사령부는 5.56㎜ 소총 실탄 3천400발과 7.62㎜ 탄약 1천600발, 일본 육상자위대는 5.56㎜ 소총 실탄 1만 발을 한빛부대에 지원했다. 한국군이 일본 자위대로부터 탄약을 지원받은 것은 창군 이래 처음이었다. 반군이 물러가자 한빛부대는 일본 자위대에 탄약을 모두 반환했지만, 이 일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하고 방어무기 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한국군 지휘관들의 무능함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남수단 정부는 2015년 7월로 예정되었던 대선 및 총선을 2017년 7월까지 2년 간 연장한다고 발표하였다. 추후 정부-반군 간 평화협정 체결이 성공하면 3년 임기의 과도정부로 대체될 계획이었다. 2015년 8월 아프리카 연합, 미국, 중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과 중재로 분쟁 당사자인 마야르디트와 마차르 간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평화협정을 통해서 즉각적인 교전 중지, 주바 비무장화, 과도정부 구성, 개헌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양측은 내전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면서 평화 정착은 지지부진했다. 


마차르의 남수단 부통령 취임식, 카우보이 모자를 쓴 사람이 대통령 마야르디트


2016년 4월 반군 지도자 마차르가 부통령을 맡는 연립정부가 구성되면서 정국이 안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7월 7일 수도 주바에서 마야르디트와 마차르 지지세력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 최소 270명이 사망하면서 내전 발발 가능성이 야기되었다. 위기를 느낀 마차르는 남수단을 탈출해 수단 수도 하르툼에 머물렀다. 7월 23일 타반 덩 가이(Taban Deng Gai, 1950~ )가 마차르의 탈출로 공석이 된 부통령에 취임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평화유지군의 추가 배치를 결의했고, 에티오피아와 르완다 등의 아프리카 연합 국가들은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자국 병력의 남수단 파병을 추진했다.


조지 클루니(George Timothy Clooney)와 인권운동가 존 프렌더개스트(John Prendergast)가 공동으로 설립한 비영리 국제감시기구 센트리(Sentry)는 2016년 9월 13일 남수단 내전 중에도 마야르디트부터 군부, 정치 권력자들이 재산을 오히려 더 축적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남수단 내전으로 국민의 생활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으나 정치 권력자, 군 장성, 대통령 측근은 국고와 공금 유용, 해외 자산 보유, 전리품 획득 등으로 더 부자가 됐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조지 클루니와 부인 아말 클루니


센트리 보고서에는 남수단 엘리트 특권층이 공금을 유용해 자신들의 군사조직에 제공하고, 내전 기간 고급 저택과 호화 외제차를 소유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마야르디트의 부인과 최소 7명의 자녀가 석유, 광산, 금융 분야 등 남수단 사업 전반에 관여했으며, 12살 된 마야르디트의 아들이 한 지주회사의 지분 25%를 소유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또 마야르디트 일가는 외국 부동산과 다국적회사 지분도 보유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남수단 지도부 가족 구성원들이 5성급 호텔에서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 찍힌 사진도 첨부됐다. 조지 클루니는 또 국제 변호사와 은행, 부동산 사업가들이 남수단의 군사조직과 연계된 범죄 행위에 연루돼 있으며, 무고한 국민이 비참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700백만 명의 국민들이 굶주림으로 아사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부패한 남수단의 권력자와 그 측근들은 내전을 이용해서 뒷주머니를 채웠던 것이다. 남수단은 4년 동안 계속된 내전으로 어린이 난민이 200만 명을 넘어섰다.


2017년 12월 21일 남수단 과도정부 대표단과 마차르 반군 간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2018년 6월 27일에는 항구적 정전을 주 내용으로 하는 카르툼 선언이 채택되었다. 9월 12일 마야르디트와 마차르 양측은 권력의 공유를 약속한 평화협정에 최종 서명했다. 평화협정 서명 후 정세는 점차 안정되었으나 남수단의 권력 구조는 오히려 더욱 중앙입권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우간다와 국경을 접한 중부 에콰토리아(Central Equatoria) 지역에서는 2018년 9월 이래 7개월 간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등 수단인민해방운동군(SPLM-Army)과 반군 간 무력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민족해방전선(National Salvation Front, NAS) 지도자인 토마스 키릴로(Thomas Cirillo)는 우간다의 테러조직인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LRA) 지도자 조셉 코니(Joseph Kony)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4월까지도 앙숙인 마야르디트와 마차르는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2019년 5월 12일로 예정된 과도정부 수립 일정은 정부와 반군 측의 합의에 따라 6개월 연기되었다. 남수단 주요 야당 및 반군세력인 남수단반군단체(SPLM-IO)는 양측의 상호 정치적 의지 결여, 정부의 평화협정 이행을 위한 자금 제공 불이행 등을 과도정부 구성 연장의 이유로 들며, 정부가 평화협정의 전반적인 조약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협정 체결 이후 8개월 이내에 추진하기로 약속한 무장해제와 동원해제, 통합(DDR), 과도정부 군대 구성 등 안보분야 개혁도 지연되었다. 


한편 마야르디트 정권은 기존의 수단인민해방운동군(SPLM-Army)을 남수단인민방위군(South Sudan People's Defense Forces)으로 격상하였다. 마야르디트는 또 자신이 의장을 지낸 SPLM-A의 장교들을 대거 진급시켜 남수단 32개 주지사로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 기반을 대폭 강화했다. 마야르디트의 불공정한 정실 인사는 평화협정의 순조로운 이행은 물론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주축 반군조직인 민족해방전선(NAS) 등 6개 반군들을 포용할 여지마저 없애버렸다.


정부군과 반군 간 무력분쟁보다 더 심각한 남수단의 문제는 주로 친정부 세력인 정부군, 주지사, 시의장 등에 의한 민간인 폭력과 인권유린이다. 이들은 딩카족과 누에르족 간 인종 갈등을 이용해서 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 이들은 주민들의 공포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강간, 살인, 폭행, 약탈 등을 자행하고 있지만, 사법체제가 확립되지 않아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남수단 주요 야당 및 반군세력인 남수단반군단체(SPLM-IO)가 평화협정 준수를 위한 선결조건으로 정부-아프리카연합(AU) 혼성법정(hybrid court) 설립을 내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19년 11월 7일 남수단 과도정부 수립 기한이 다시 100일 연장되었다. 한국 정부는 12월 3일 남수단 전 지역에 대해 특별여행경보를 해제하고 여행경보 3단계를 발령했다. 여행경보 3단계는 적색경보로 철수 권고 단계이다. 남수단은 평화정착 노력에도 정부군-반군 간 갈등이 계속되어 돌발적 무력 충돌 가능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불안한 치안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2020년 2월 22일 드디어 남수단 정부와 반정부 세력이 참여하는 과도 통일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실상 내전이 종식되었다. 마차르는 제1부통령으로 복귀했고, 제2부통령에는 제임스 와니 이가(James Wani Igga, 1949~ )가 취임했다. 


제임스 와니 이가(James Wani Igga)


남수단의 정세는 다소 안정되었지만 국민들은 전쟁과 학살의 공포, 빈곤과 기아 등으로 인한 인도적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남수단은 인구의 60%가 넘는 약 7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부족 위기에 처했으며, 접경국인 DR콩고로부터의 에볼라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두려움도 높아지고 있다.


남수단은 국경지대의 유전지대를 둘러싸고 수단과 영유권 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남북 수단 간 석유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남수단 내 부족 간 갈등도 큰 문제로 남아 있다. 딩카족과 누에르족을 비롯한 남수단 내 부족 갈등 문제는 독립 이전부터 심각한 수준이었다. 


남수단 내 종교 간 갈등도 골치 아픈 문제다. 남수단인의 60%가 기독교도(일설에는 80%)이지만 성공회와 개신교, 가톨릭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종파가 다르면 같은 기독교도라 하더라도 유혈 충돌로 발전하기 일쑤다. 남수단 내 군벌들 간의 갈등도 언제든지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남수단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아직 멀고도 험한 여정이다.


코비드-19(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남수단 파병 한빛부대원 교대 근무에 문제가 발생했다. 남수단 정부가 코비드-19로 인해 한국 군인의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는 현지에서 발이 묶인 한빛부대원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전세기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2020. 4. 15.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