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리비아의 역사
마그레브(Maghreb)에는 고대로부터 원주민인 베르베르인(Berbers, Amazighs)들이 거주하였다. 마그레브의 옛 이름 바르바리(Barbary)는 이 종족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BC 814년 튀니지에 티레(Tyre)의 페니키아인들이 이주하여 지금의 튀니스에 도시국가 카르타고(Carthage)를 건설하고, 리비아인들을 복속시켰다.
BC 631년 경에는 에게 해(Aegean Sea)의 테라 섬(Thera island Santorini)에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리비아 동부의 키레네(Cyrene)-지금의 샤하트(Shahhat)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복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키레네를 세우고 바투스 1세(Battus I, ?~BC 600)가 되어 바티아드 왕조(Battiad dynasty, BC 632~440)를 열었다. 바티아드 왕조 시대에 키레네는 번성했고, 아폴로니아-마르사수사 항구와 바르케-알마르지, 에우헤스페리데스-벵가지 같은 도시들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들 그리스 식민지를 통틀어 키레나이카(Cyrenaica)라고 한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50~487)의 낙세 로스탐(Naqsh-e Rostam)과 크세륵세스 1세(Xerxēs I, BC 519~465)의 다이바 비문(Daiva Inscription)에 따르면 리비아는 아케메네스 왕조(Archaemenes dynasty, BC 525~404)의 태수령(속국)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리비아가 키레네를 포함해서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6지역 일부였다고 기록했다.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가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키레네 왕 아르케실라우스 3세(Arcesilaus III, ?~BC 515)는 페르시아에 가담하였다. 아르케실라우스 3세가 암살되자 여왕 페레티마(Pheretima, ?~BC 515)는 이집트 태수(satrap) 아리안데스(Aryandes)를 불러들여 키레네를 정복하게 했다. 페레티마는 아르케실라우스 3세의 어머니였다. 이후 꼭두각시왕 키레네의 바투스 4세(Battus IV, ?~BC 465)가 즉위했다. BC 404년 이집트의 반란으로 키레네는 다시 독립을 얻었다.
BC 323년부터 키레네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dynasty, BC 305∼BC 30)의 비호를 받아 고대 세계의 지적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키레네는 특히 의학이 발전했으며, 철학자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BC 435~BC 356)와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of Cyrene, BC 276~BC 194)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아리스티포스가 창시한 학파를 키레네 학파라고 하는데, 그가 키레네 태생이었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동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인 키레나이카는 키레네를 본따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의 정복으로 리비아를 포함한 아케메네스 왕조 영토의 지배권은 다시 마케도니아로 넘어갔다. 지중해의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고 600년 이상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던 카르타고는 BC 264~146년에 걸친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Punic War, Carthaginian War)으로 로마에 정복되고 말았다. BC 96년부터 키레나이카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67년에는 크레타와 통합되어 키레네를 수도로 하는 속주가 만들어졌다. 로마 지배하의 2세기 동안은 대체로 번영을 누렸으나 AD 11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 이후 키레네는 점차 쇠퇴했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의 초상
AD 42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침입한 게르만 혈통의 반달족(Vandals)이 바르바리를 약 1세기 동안 지배했다. 533년 동로마(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565)의 장군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0~565)가 반달족을 몰아내고 동부 바르바리에 제국을 재건했으나, 642년 키레네는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알제리의 우크바 이븐 나피(Uqba ibn Nafi) 동상
670년 경 우크바 이븐 나피(Uqba ibn Nafi, 622~683)가 알카이라완(al-Qayrawan), 지금의 튀니지 카이루완(Kairouan)에 이슬람국을 세운 뒤 900년까지 바르바리는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까지 베르베르 부족들은 대체로 독립을 지켜왔다.
10세기 경 리비아는 아랍족이 베르베르족보다 다수족이 되었다. 11세기 아랍계 베두인족(Bedouin)이 침입하여 농촌 경제를 파괴하자 베르베르족은 대부분 유목민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11년 트리폴리타니아에는 오스만 제국군 장교였던 아흐마드 카라만리(Ahmad Karamanli, 1686~1745)에 의해 카라만리 왕조가 세워졌다. 카라만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형태의 자치국 형태였다. 1835년 오스만 제국은 리비아 지역을 되찾았다.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 승리한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리비아를 침략하여 통치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투르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리비아인들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로돌포 그라치아니(Rodolfo Graziani, 1882~1955)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오마르 알무크타르 무함마드(Omar al-Mukhṭār Muḥammad, 1862~1931)가 이끄는 리비아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오마르 알무크타르 무함마드(Omar al-Mukhṭār Muḥammad)
잔혹한 이탈리아 제국주의자들은 무크타르의 저항군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만 5천 명의 리비아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갔으며, 이 가운데 2/3가 죽었다. 무크타르는 결국 이탈리아 점령군에 체포되어 1931년 9월 16일 추종자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오늘날 리비아의 10디나르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무크타르의 마지막 생애는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 '사막의 라이온'(Lion Of The Desert, 1981)에 잘 나타나 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리비아의 식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38년 경에는 9만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이주자들이 리비아에 들어와, 타라불루스와 벵가지 주변에서 농장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5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리비아로 건너와 정착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리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군과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연합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유명한 투브루크 공방전(Siege of Tobruk)이 키레나이카에서 벌어졌다.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자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리비아를 분할 통치했다. 영국은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프랑스는 페잔을 점령했다.
13. 독립 이후의 리비아
1951년 12월 24일 영국령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프랑스령 페잔의 3지역이 리비아 연합왕국을 구성하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리비아 연합왕국 국왕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형제단인 세누시(Senussi)의 수장 이드리스 1세(Idris I, 1889~1983)가 즉위했다.
이드리스 1세(Idris I)
1953년 리비아는 아랍 연맹에 가입했으며, 1959년에는 유전의 발견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석유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드리스 1세는 부를 독점한 채 공정하게 재분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정에 대한 지지도는 급속하게 떨어졌다.1963년 이드리스 1세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0개 주로 분할하였다.
14. 카다피 시대의 리비아
1969년 9월 1일 무아마르 알카다피(Muammar Al-Qadhafi, 1942~2011) 대위가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외유 중이던 이드리스 1세를 축출하고 나세르주의에 입각한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리비아군 총사령관에 이어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카다피는 석유 국유화를 전면적으로 단행하여 거대 석유회사와 소수 특권층이 독점했던 부를 재분배하여 리비이안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72년 카다피는 이집트,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공화국 연방을 수립했다.
무아마르 알카다피(Muammar Al-Qadhafi)
1973년 카다피는 전격적인 유가 인상을 주도하여 리비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1977년 카다피는 이집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하여 아랍공화국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그해 3월 리비아 총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 GPC)는 카다피의 제3세계 이론에 입각한 인민주권 선언을 승인하고 인민 직접민주제인 자마히리야(Jamahiriya) 체제를 수립하는 한편 국호도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으로 바꿨다. 자마히리야 체제는 명목상 국민에게 최고결정권을 부여한 것이었고,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카다피가 독점했다. 총인민회의(GPC)에서 선출된 5명이 상설기구인 총서기국을 구성하여 리비아의 대내외 정책을 결정했다. 또 GPC는 내각인 총인민위원회(General People's Committee)와 국가원수를 선출했다. 대통령이 있지만 실권자는 혁명평의회 의장이었다. 이런 복잡한 체제를 이용해서 카다피는 독재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86년 독일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국으로 지목하고 그해 4월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2년 뒤 1988년 12월 21일 런던 히드로 공항을 출발,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항공 소속 보잉 747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하여 270명이 숨진 참사가 일어났다. 사망자 259명 대부분은 미국인이었고, 11명은 로커비 마을에 떨어진 기체 잔해로 사망한 지역주민이었다.
미국과 영국 합동수사팀은 3년 간의 수사 끝에 1991년 11월 몰타에서 리비아 항공사 직원으로 활동하던 리비아 정보요원이 카세트 녹음기에 장착한 폭탄을 터뜨려 팬암기를 폭파했다고 발표했다. 영국과 미국은 용의자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카다피는 혐의사실 자체를 부인하다가 나중에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용의자의 신병인도를 거부했다. 이에 유엔은 1992년부터 민간항공기 운항 금지, 무기 및 특정 석유장비 금수, 해외자산 동결 등 리비아에 대한 제재에 들어갔다.
카다피는 사헬-사하라 지역의 국가 상호간 협력증진과 아프리카 통합의 실현을 위해 1998년 4월 사헬-사하라 국가공동체를 창설하였다. 카다피는 직접민주정치의 이념에 따라 1998년 11월 전국을 387개의 자치공동체인 콤뮨(commune, 현지 명칭 Mahallat)을 설치하고, 지방의회에 해당하는 기초인민회의(BPC)와 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두었다. 리비아는 단일정당인 아랍 사회주의자동맹(Arab Socialist Union)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카다피는 범아랍주의를 주장하면서 리비아를 엄격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카다피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녹색서(The Green Book)'에 잘 나타나 있다. 카다피는 영국, 미국과 교류를 끊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비롯한 아랍인 무장단체, 미국의 급진적 흑인결사인 블랙 팬서, 미국 이슬람교 연합, 북아일랜드 공화국군 등을 지원하였다. 그는 또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혁명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Saif al-Islam Gaddafi)
카다피는 독재정치를 통해서 반대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리비아 정부 내 개혁파와 강경보수파 간 경쟁이 있기는 했지만 가까운 장래에 리비아의 정치적 변화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카다피의 차남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Saif al-Islam Gaddafi, 1972~ )는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인지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가 개혁 지지자라는 이미지를 얻음으로써 포스트 카다피를 노린 것이었다.
리비아는 구 소련과 원활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며, 러시아와도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긴밀한 협력관계를 지속해왔다. 국제적인 위상 제고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다피의 핵무기 개발과 인권 탄압 등으로 인해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제재가 가해졌다.
알아민 칼리파 파미하(좌)와 압델바세트 알리 알메그라히(우)
1999년 4월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팬암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용의자 압델바세트 알리 알메그라히(Abdelbaset Ali Mohmed al-Megrahi, 1952~2012)와 알아민 칼리파 파미하(Al-Amin Khalifa Fhimah, 1956~ )의 신병이 네덜란드로 인도됐다. 2001년 1월 31일 스코틀랜드 재판부는 선고공판에서 리비아 정보요원 출신 메그라히에게 종신형, 몰타항공 대표 파미하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02년 5월 리비아는 책임을 시인하고 경제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희생자 270명의 유족에게 1인당 1000만 달러(약 125억 원)씩 총 27억 달러(약 3조 3,7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UN이 리비아에 대한 제재 중단을 신호탄으로 유럽 각국은 석유 분야 등 경제 진출을 염두에 두고 리비아와 관계를 개선했다.
2003년 12월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의 포기를 선언했다. 2004년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1986년 취해진 리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 및 무기금수 조치를 해제하였다. 2004년 2월 미국은 자국민의 리비아 여행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4월에는 대부분의 경제 제재를 해제하였다. 그해 6월에는 주리비아 연락사무소를 개설하여 24년만에 양국 간 공식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9월에는 리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카다피의 주도로 아프리카 연합(AU)이 창설된 후, 2005년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AU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리비아의 대외관계 정책 기조는 아프리카 연합 창설, 아랍 통합 및 아랍-마그레브 연합 활성화, 사헬-사하라 국가 간 협력 강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카다피는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대응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을 탈피하고 대외적으로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2009년 8월 스코틀랜드 교도소에서 8년 동안 복역한 팬암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의 범인 메그라히는 전립선암 3기 진단을 받고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돼 리비아로 귀국했다. 영웅 대접을 받으며 귀국한 메그라히는 3개월 시한부 진단과 달리 3년을 더 살았다. 메그라히는 생존 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메그라히 기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증언도 거짓으로 밝혀졌다. 미국과 영국 수사팀이 3년 동안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은 점도 의혹을 샀다. 영국이 리비아 석유개발권을 대가로 메그라히를 석방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010년 7월 리비아에서 한국인 선교사 구금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리비아의 한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하던 유학생 신분의 한국인 선교사가 갑자기 불법 선교와 간첩활동 혐의로 구금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사건은 한국 정보기관의 정보활동에 따른 외교 갈등 문제에서 선교사가 희생양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정보요원이 선교사에게 접근해 통역과 번역 등을 부탁한 것이 리비아 당국으로부터 간첩 혐의를 받았다.
15. 카다피 축출 이후의 리비아 - 1차 내전
2011년 2월 17일 리비아 혁명기념일을 전후하여 동북부의 주요 도시인 벵가지에서 아랍의 봄을 타고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민주화 시위는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친 카다피 세력과 반 카다피 세력 사이의 제1차 내전으로 발전했다. 리비아 시민혁명군은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of Lybya, NTC)를 출범시켰다. 시민혁명군은 카디피의 쿠데타로 전복된 리비아 왕국의 국기를 다시 내걸었다. 이는 왕정복고가 아니라 카다피가 통치한 42년을 부정하는 의미였다.
2011년 3월 17일 UN에서 안보리 결의안 1973호가 채택된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카다피 정권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였다. 8월 초순까지는 수도 트리폴리가 있는 서부를 거점으로 한 카다피 정권과 동부의 벵가지를 거점으로 하는 시민혁명군의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가 대립 할거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시민혁명군은 8월 21일 수도 트리폴리에 성공적으로 입성하였고, 22일에는 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투브루크도 시민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카다피의 차남이자 정권의 2인자였던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는 시민혁명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다. 이에 카다피 정권은 시르테, 사브하, 바니 왈리드로 퇴각했다. 8월 24일 한국 정부는 NTC를 리비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최종 은신처인 시르테에서 시민혁명군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은 이렇게 끝장났다. 카다피의 체포작전에는 미국 시고넬라 해군항공기지에서 이륙한 MQ-1 프레데터 무인기도 투입되었다.
무스타파 압둘 잘릴(Mustafa Abdul Jalil)
2011년 10월 23일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 무스타파 압둘 잘릴(Mustafa Abdul Jalil, 1952~ ) 위원장은 리비아의 해방을 공식 선포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법무장관을 지낸 무스타파 압둘 잘릴은 2011년 리비아 봉기에 대한 카다피 정권의 무자비한 대응에 항의하면서 사임한 뒤 반 카다피 세력의 거점 도시인 벵가지에서 리비아 NTC 의장을 맡았다.
압두라힘 엘케이브(Abdurrahim el-Keib)
2011년 10월 31일 NATO의 군사작전이 종료되면서 리비아 제1차 내전은 막을 내렸다. NTC는 압두라힘 엘케이브(Abdurrahim el-Keib, 1950~2020)를 임시 총리로 선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
2011년 11월 19일 리비아 국가과도위 관계자는 카다피 정권 2인자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남부 오바리에서 니제르로 빠져나가려다 측근 2명과 함께 체포돼 진탄으로 이송됐다고 발표했다. 세이프 알이슬람 카디피는 리비아 민주화 촉구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는 등 반인륜죄 혐의로 압둘라 알 세누시 정보부장과 함께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아왔다. 그는 서방의 리비아 경제제재를 푸는 데 핵심 역할을 하며 개혁가를 자처했지만, 시민혁명군에 대한 강경 진압을 고수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의 수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11월 22일 NTC는 제1차 과도내각을 선임했다.
2012년 7월 7일 리비아는 총국민회의(General National Congress, GNC) 선거를 실시해서 200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120명은 선출, 80명은 비례대표였다. 카다피 축출 이후 리비아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인권변호사 출신 알리 제이단(Ali Zeidan, 1950~ )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부패와 무능으로 자유주의 세력은 리비아인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2012년 8월 8일 리비아의 권력은 과도국가위원회(NTC)에서 총국민회의(GNC)로 공식 이양되었다. 8월 9일에는 모함메드 알메가리프(Mohammed al-Magarief, 1940~ ) 전 리비아 구국민족전선(LNSF) 대표가 GNC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GNC 의장은 곧 리비아 국가원수였다. 이로써 43년만에 리비아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모함메드 알메가리프(Mohammed al-Magarief)
다른 중동 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리비아에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때 리비아는 다른 중동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제작된 반 이슬람 영화로 인해 반미 시위가 확산되었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에서 미국 영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영사관을 공격한 범인 1명은 체포되었다. 리비아의 엘케이브 임시 총리도 영사관 공격은 비겁한 범죄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2012년 11월 14일 GNC는 엘케이브 임시 총리를 해임하고, 알리 제이단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알리 제이단(Ali Zeidan)
2012년부터 리비아 동부와 서부에서는 분리독립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부인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인 키레나이카는 서로 다른 나라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이질감이 심했다. 실제로 이 두 지역은 8세기에 잠시 통합된 후 두 번째로 통일된 것은 18세기 초였다. 시민혁명 당시에도 서부 반군과 동부 반군은 반목을 계속했다.
16. 리비아 2차 내전
2014년 1월 세속주의를 표방한 리비아 동부 지역이 독립을 선언했다. 1월 19일 리비아 주재 한석우 코트라 트리폴리 무역관장이 무장괴한에게 납치되었다. 1월 20일 한국 외교부는 리비아 전역에 특별여행경보 2단계를 발령하고 현지에 체류 중인 한국민 551명에 대해 철수 권고를 하였다. 1월 22일 리비아 정부는 군병력을 동원해 납치범의 거처를 습격하여 한석우 관장을 구출했다.
압둘라 알타니(Abdullah al-Thinni)
2014년 3월 11일 GNC는 치안 부재와 동부 무장세력의 석유 시설 장기 점거 및 중앙정부의 허가 없이 불법적인 원유 거래 등을 이유로 제1야당 이슬람 세력은 알리 제이단 총리 불신임안을 의결하고, 압둘라 알타니(Abdullah al-Thinni, 1954~ ) 국방장관을 임시 총리로 지명했다. 5월 5일 GNC는 아흐메드 마에티그(Ahmed Maetig, 1972~ )를 신임 총리로 선출하였다. 5월 이슬람 민병대가 의회의 요청을 받고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하면서 세속주의를 표방한 다른 무장정파들과 정면 충돌할 위험이 고조되었다. 6월 9일 리비아 최고법원은 마에티그의 총리 임명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아흐메드 마에티그(Ahmed Maetig)
리비아 군 장성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1943~ )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주의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도리어 반격을 받고 실패했다. 리비아 국민군(Libyan National Army, LNA) 정부를 이끄는 하프타르는 카다피의 전우였다. 그러나, 차드 전쟁의 실패로 숙청된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랍의 봄으로 리비아에서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에서 귀국한 하프타르는 시민혁명군 사령관을 맡아 카다피 정권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은퇴했던 하프타르는 리비아 신생 정부가 이슬람주의로의 회귀를 내세우자 이에 반대하며 일선에 복귀했다. 하프타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리비아 국민군(LNA)을 이끌고,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북동부로 근거지를 옮겼다.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2014년 6월 25일 제2차 총선이 실시된 결과 200석 중 이슬람 세력은 30석도 못 얻는 참패를 기록했다. 제헌의회는 새 의회에 입법권을 넘겨주고 해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은 총선 투표율이 지나치게 저조하고 무장세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명분으로 제헌의회 해산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새 의회 정부는 투브루크로 피난을 떠났다. 이슬람주의 민병대는 새 의회에 불참한 기존 GNC 의원들을 중심으로 의회를 구성했다. 이후 리비아는 서로 합법 정부를 자처하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7월 13일 트리폴리 공항을 두고 이슬람주의 미스라타 민병대(Misratah militia)와 세속주의 진탄 민병대(Zintan militia) 간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이 악화되면서 7월 25일 전후 대부분의 외국 공관들은 리비아에서 철수했다. 유엔은 트리폴리 주재 직원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2014년 7월 30일 한국 외교부는 치안 악화 등을 이유로 리비아를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였다. 7월 31일 이슬람주의 세력은 동북부의 벵가지를 장악했다. 8월 4일 새 의회가 출범했음에도 이슬람주의 세력-세속주의 세력이 별도의 정부와 의회를 세우면서 정치적 불안은 가속화되었다. 8월 23일 이슬람주의 세력은 트리폴리까지 장악했다.
8월 7일 한국 정부는 문무대왕함을 파견해 현지 체류 중인 한국인의 철수를 지원했다. 8월 17일에는 3단계에 걸친 리비아 철수 작업이 완료되었다. 철수를 거부한 한국인은 총 62명이었다.
이슬람주의 세력이 벵가지에 이어 트리폴리까지 장악하자 세속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국회-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 CoD)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리비아 정부로서 투브루크 항구에 정박한 그리스의 카페리로 옮겨 갔다. 투브루크는 하프타르의 LNA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리비아에는 두 개의 의회와 두 명의 총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투브루크로 피난 간 새 정부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트리폴리 소재 리비아 대법원은 2014년 11월 6일 지난 6월 총선이 무효이며, 세속주의 세력의 대표자회의(CoD)도 불법이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세속주의 세력은 대법원이 이슬람주의 세력의 무력 앞에서 내린 판결은 무효라고 반발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집단 다에시(IS)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엄격한 샤리아법 시행을 옹호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살라피스트(Salafist) 세력은 제3의 세력을 결성하여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알카에다나 다에시(IS)의 하부조직을 자처하며 활동했다. 혼란을 틈타 남부 사막지대의 투아레그족 등 기타 부족들도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리비아는 수십 개의 독립 무장조직이 활동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2015년 4월 12일 트리폴리에 있는 주리비아 한국대사관이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아 현지인 경호원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7월 리비아의 각 정파는 유엔의 중재 하에 새 평화안을 수용하였다. 12월 1일 다에시(IS)가 근거지를 이라크, 시리아에서 리비아로 옮길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12월 6일 다에시(IS)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세속주의 투브루크 정부와 이슬람주의 트리폴리 정부는 단일정부 구성을 위한 새 평화안에 합의하였다. 새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도 2년 이내에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
트리폴리 정부와 부브루크 정부의 통합정부가 출범한다고 해도 리비아는 다에시(IS)라는 최대의 적을 척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12월 8일 다에시(IS)가 트리폴리 시내에서 마술사들을 참수,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무렵 다에시(IS)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 1971~2019)가 리비아로 도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12월 17일 유엔의 중재로 양측은 통합정부 구성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 합의안에 서명했다. 이후 단일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2016년 들어서 다에시(IS)는 석유를 얻기 위해 시드라 만(Gulf of Sidra)의 원유 시설을 공격했다. 1월 8일에는 리비아 경찰학교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6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1월 19일 양측 정부는 통합정부 구성안을 발표했다. 2월에는 통합정부 내각 구성안에 대한 의회 승인에 들어갔다.
통합정부 수립을 발표한 직후 리비아군은 살라피스트 이슬람 민병대 안사르 알샤리아 (Ansar al-Sharia) 등 이슬람 급진 무장단체가 장악한 벵가지를 공격하였다. 2월 23일 리비아군은 다에시(IS), 안사르 알샤리아와 격렬한 전투 끝에 벵가지를 탈환했다. 하지만 다에시(IS)는 리비아 서부 도시 사브라타를 점령했다. 2월 26일 리비아 내무부는 사브라타 지역에서 작전을 벌여 다에시(IS) 리비아 지부장과 측근 2명을 체포했다.
2016년 3월에는 통합정부의 국가최고위원회가 트리폴리에 입성했다. 4월 5일 통합정부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겸 총리에 파예즈 알사라지(Fayez al-Sarraj, 1960~ )가 취임했다. 4월 12일 트리폴리 정부가 해산하고 새 정부에 권력을 인계함으로서 트리폴리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트리폴리 정부가 해산한 것과 달리 동부의 투브루크 정부는 해산하지 않았다. 10월 리비아 통합정부 내각 구성안에 대한 의회 승인이 지연되었다.
파예즈 알사라지(Fayez al-Sarraj)
2016년 12월 18일 알사라지 총리는 다에시(IS)로부터 시르테 해방을 공식 선언했다. 리비아 통합정부(Government of National Accord, GNA)는 시르테에서 다에시(IS)의 탈출을 차단하는 봉쇄작전을 펼쳐 도주 중이던 리비아 다에시(IS) 사령관을 체포했다. 시르테 함락을 기점으로 리비아 내 다에시(IS)는 몰락했다. 하지만 알카에다 연계 단체인 안사르 알샤리아 등 여러 무장단체들이 전국 각지를 할거하고 있어 언제든지 내전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투브루크와 벵가지 등 리비아 북동부와 리비아 서부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투브루크 정부는 여전히 트리폴리를 지배하고 있는 리비아 통합정부(GNA)로의 합류와 권력 인계를 거부했다. 여기에 과거 트리폴리 정부 세력도 GNA에 반발하면서 내분을 겪었다. 리비아 GNA 출범은 이처럼 산 넘어 산이었다.
2017년 1월 이탈리아, 터키 대사관이 트리폴리로 복귀했다. 7월에는 파리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중재로 이슬람주의 GNA의 알사라지 총리와 세속주의 동부 군벌 하프타르는 휴전 및 2018년도 선거 실시 등에 합의했다.
2017년 9월 제72차 유엔 총회를 계기로 개최된 리비아 문제 고위급 회의에서 가산 살라메(Ghassan Salame) 유엔 리비아지원임무(United Nations Support Mission in Libya, UNSMIL) 특별대표는 단계별 행동계획(Libya Action Plan)을 발표했다. 10월 유엔 안보리는 가산 살라메 대표의 리비아 단계별 행동계획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8년 5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주최로 파리에서 개최된 리비아 국제회의에서 알사라지와 하프타르가 만나 12월 10일에 대선 및 총선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정국 혼란으로 대선 및 총선은 연기되었다.
2018년 7월 6일 리비아 서부 자발 하사우나(Jabal Hassawna) 지역에서 무장 민병대가 수로관리회사 알 나르 회사(Al Nahr Company, ANC)의 캠프에 침입해 물품을 약탈하고 한국인 1명과 필리핀인 3명을 납치한 사건이 일어났다. ANC는 리비아 대수로관리청이 지분 75%를 소유하고 CJ대한통운이 25%를 보유한 합작회사였다. 이 사건은 한동안 한국 정부의 엠바고로 납치 사실이 숨겨졌으나, 페이스북에 피랍된 사람들의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리비아 당국은 타리크 후네이쉬가 이끄는 무장세력이 후네이쉬의 형제이자 조직의 리더인 알무바락 후네이쉬의 석방을 목적으로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2018년 11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리비아 제 정파 회의가 열렸으나 별 성과도 없이 끝났다. 2019년 2월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은 리비아 남부 지역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LNA는 리비아 인민해방군(jaysh al-taḥrīr al-waṭanī al-lībī)이 리비아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바꾼 이름이다. 같은 달 하프타르 LNA 최고사령관과 알사라지 GNA 총리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만나 리비아 선거를 준비하는 데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2019년 4월 하프타르의 LNA는 트리폴리 서부로 진격하면서 미티가 공항을 공습했다. 알사라지 GNA 총리는 하프타르 LNA 최고사령관이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GNA를 공격한 투브루크 정부의 하프타르 LNA 최고사령관을 규탄하며 무력 공격을 멈추고 평화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프타르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무시한 채 우세한 군사력으로 트리폴리 GNA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전개했다. LNA 병력은 트리폴리 외곽 40㎞까지 접근해 가르얀, 수르만, 아지지야 등 3개 지역을 장악했다. GNA군도 LNA에게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수도 트리폴리를 방어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Manuel de Oliveira Guterres, 1949~ ) 유엔 사무총장은 트리폴리 GNA와 LNA를 긴급 중재하기 위해 리비아를 방문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을 만난 하프타르 LNA 최고사령관은 테러리즘을 물리칠 때까지 트리폴리 진격이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LNA를 저지하기 위해 GNA군의 공습 등 무력 사용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LNA는 트리폴리 국제공항을 완전히 장악하고, 트리폴리 남부 와디 엘-라베이아 지역도 차지했다. LNA는 수도 트리폴리를 점령하기 위해 GNA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투아레그족이 장악했던 알제리 국경지대도 LNA 수중에 넘어갔다. GNA가 통치했던 서부의 가리안, 주아라, 날루트 등의 지역은 LNA의 포위망에 갇혀 육지 속의 섬 신세가 되었다. 유전지대 대부분도 LNA가 장악했다.
2019년 4월 12일 리비아 내전이 격화되자 한국 정부는 주리비아 대사를 포함한 공관원 전원을 튀니지로 철수시켰다. 5월 16일 납치됐던 ANC 한국인 직원이 315일만에 석방되었다. 함께 납치된 필리핀인들도 풀려났다. 한국인 직원은 UAE 아부다비로 이동해 한국 공관에 인도되었다. 인질 석방에는 리비아 동부와 남부를 장악한 LNA와 UAE의 특수관계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트리폴리 진격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한 LNA가 납치범들에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인질 석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카다피가 축출된 이후 리비아는 현재 GNA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알사라지 총리가 국가원수이다. 그러나, 알사라지 총리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슬림 형제단과 손을 잡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싫어하는 미국과 러시아는 하프타르의 LNA가 정권을 장악하기를 바라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남아프리카 공화국, 적도기니, 코트디부아르도 하프타르를 지지하고 있다. 최근 5년 동안의 전투로 LNA는 동부 유전지대는 물론 서부의 상당한 지역도 손아귀에 넣어 국토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했다.
그동안 모호한 태도를 취해온 미국이 하프타르의 LNA 지지로 돌아서면서 리비아 내전의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 발언으로 하프타르의 대내외적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다. 미국의 지지를 얻은 LNA는 4월 20일부터 수도 트리폴리를 공습하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
2019년 6월 16일 GNA의 알사라지 총리가 연말까지 리비아 대통령 선거를 치르자고 하프타르의 LNA에 제안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양측의 합의가 이뤄졌음에도 내전으로 인해 리비아에서는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알사라지 총리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LNA는 GNA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내전이 격화되면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다에시(IS)의 테러도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9월 19일 미군 아프리카사령부는 다에시(IS)를 공습해서 무장반군 8명을 사살했다. 이어 9월 24일에도 미군은 리비아 남서부 도시 무르주크 근처 다에시(IS) 근거지를 폭격해서 11명을 사살했다.
모스크바 휴전 협상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LNA의 하프타르와 GNA의 알사라지
2020년 1월 2일 알사라지 총리의 GNA를 지지하는 터키 의회가 리비아 파병안을 승인하면서 리비아 내전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터키는 시리아 지하드 반군 2,400명을 리비아에 파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1월 13일 터키와 러시아의 중재로 모스크바에서 GNA와 LNA가 휴전을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협정 조인에는 실패했다. LNA는 GNA가 휴전조건으로 내건 수도 트리폴리에서의 철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월 22일 GNA와 LNA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비드-19(COVID-19,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와 싸우기 위해 전투를 중지해달라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라 잠시 휴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트리폴리 남부에서 전투가 재개됨에 따라 다시 임시 휴전은 깨지고 말았다.
리비아의 정정 불안에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깊게 내재되어 있는 부족주의, 동부와 서부의 지역대립, 경제 불황, 빈부 격차 등 다양한 원인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세속주의 세력이나 이슬람주의 세력 중 어느 한쪽이 승리해도 다른 요인으로 인해 야기되는 갈등을 단기간에 봉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리비아는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가능성도 있다.
내전으로 인해 리비아를 떠나 유럽으로 피난하는 리비아인들의 행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작은 배에 수백 명이 올라타 지중해를 건너다가 배가 침몰해 전원 익사하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배 안에서 난민들 간의 종교, 지역 갈등으로 살해와 폭행, 감금 사건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2020. 5. 2.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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