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튀니지의 역사
10-1. 튀니지 고대사
튀니지의 역사는 BC 10세기 경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와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를 오가는 무역선이 기항할 중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연안, 메제르다 강-고대의 바그라다스 강(Bagradas River) 어귀에 우티카(Utica) 같은 항구 도시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이 교역 거점으로 삼기 위해 튀니지로 이주하여 BC 814년 경 건국한 카르타고(Carthago)-튀니지인들은 대부분 까르따쥐(Carthage)라고 함-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했다. BC 5세기에는 카르타고가 튀니지를 포함해 지중해의 드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카르타고(Carthago, Carthage)
카르타고는 서쪽으로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모로코 북부와 알제리 중서부-에서 동쪽으로 리비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이베리아 남부, 발레아레스 제도(Islas Baleares)-지중해 서부에 있는 스페인령 제도, 시칠리아, 사르디냐(Sardinia)까지 지배했다. 해상무역은 지중해뿐만 아니라 대서양의 브리튼 및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까지 이르렀다.
튀니지 내륙에는 오늘날 베르베르인(Berbers)의 선조인 누미디아인(Numidian), 가에툴리아인(Gaetulian)이 거주했다. 정착민인 누미디아인은 중북부 아틀라스 산맥, 유목민인 가이툴리아인은 남부 사하라 지역에 거주했다. 카르타고 등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가 강성해짐에 따라 누미디아인들은 이들의 용병이나 소작농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인 도시국가들은 지중해의 무역 주도권을 놓고 그리스인들과 경쟁하였다. BC 480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와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과 세 차례의 전쟁(Sicilian Wars)에 이어 에페이로스 왕국(Kingdom of Epeiros)과도 전쟁을 벌였다. 이는 이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된다.
BC 510년 이탈리아 반도에 생긴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264년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과 제1차 포에니 전쟁(Punic War, Carthaginian War)을 벌였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그리스와 오랫동안 다퉈왔던 시칠리아를 중간에 개입한 로마에게 넘겨주었으며, 이후 사르디냐도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는 되는 등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반면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카르타고의 영역을 상당히 확장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BC 184) 장군의 활약으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다. 한니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6~BC 183)가 아프리카 본토를 기습하는 한편 로마와 동맹을 맺은 누미디아 왕국의 공격을 받고 카르타고는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카르타고의 영토는 카르타고 시 주변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제1, 2차 포에니 전쟁 과정에서 카르타고와 라이벌 관계였던 우티카나 하드루메툼(Hadrumetum) 같은 페니키아인 도시들은 중립을 지키거나 로마 편을 들기도 했다. 쇠퇴 일로에 있던 카르타고와는 달리 이런 도시들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벗어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번영했다. 원래 동부와 서부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누미디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에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10-2. 로마 시대의 튀니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완패함으로써 카르타고는 BC 146년에 멸망했다. 같은 해 로마는 그리스마저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올랐다. 이 전쟁 후 로마는 오늘날 안나바(Annaba)-튀니지 국경에서 가까운 알제리 북동부의 항구도시-에서 수스(Sousse)에 이르는 튀니지의 북부 및 동부, 리비아의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지금의 리비아 북서부 지역-해안 지방을 아프리카 속주로 삼았다. 카르타고의 나머지 영토는 로마의 동맹국 누미디아에 넘어갔다. 누미디아 왕국은 튀니지 내륙 지역은 물론 동쪽으로 트리폴리타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로마는 누미디아를 동맹국으로 삼아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가에툴리아(Gaetulia)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의 내전에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BC 48)와 동맹을 맺었다가 탑수스 전투(Battle of Thapsus, BC 49~BC 46)에서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에게 패배하여 멸망했다.
아프리카 속주의 첫 수도는 우티카였으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Gaius Julius Caesar Augustus, BC 63~AD 14) 시대에는 카르타고가 수도가 되었다. 아프리카 속주의 수도 카르타고는 수백 년간 로마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로마식 도시로 재건된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과 함께 로마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는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 공업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 제국 여러 지역에서 퇴역 군인을 포함한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로마의 속주 튀니지는 급속히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2~3세기에는 아프리카 속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카르타고는 초기 로마 제국의 기독교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55~220),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AD 354~430)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도 배출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프리카 속주는 특이하게도 기독교 중에서도 도나투스주의(Donatism)가 널리 전파되었다. 3세기 말 마지막 기독교 탄압에서 발생한 배교자를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다시 받아들일지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일부 기독교도가 이를 반대하면서 도나투스파(Donatist)로 갈라져 나왔다. 특히 내륙의 덜 로마화되고 가난한 베르베르인 중에서 도나투스파가 많았다.
4세기 말에는 피르무스(Firmus)가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형제인 길도(Gildo)에 의해 진압당했다. 395년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다. 피르무스에 이어 길도도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또 다른 형제인 마스케젤(Mascezel)과 서로마 군대에게 패배했다. 베르베르인 유력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 도나투스파 기독교도들은 중요한 세력 기반이 되었다. 이후 튀니지는 서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은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무렵, 게르만계 반달족(Vandal)은 라인 강과 프랑스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남하했다. 429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Gaiseric, 389~477)는 반달족과 알란족(Alani)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를 침공했다. 439년 가이세리크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전역을 손에 넣고 튀니지에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때 도나투스파도 반달족을 도와 로마군과 싸웠다. 반달족에 패한 로마군과 로마 시민, 카톨릭 사제들은 지중해를 건너 피난을 가야 했다.
반달 왕국은 해상 무역으로 번영했다. 말이 좋아 해상무역이지 사실은 해적질을 통한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반달족의 해적이 로마까지 위협하자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재위 527~565)는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0~565) 장군을 파견해 반달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534년 반달 왕국은 결국 비잔티움 제국에 정복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반달 왕국령에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총독령(Exarchate)을 세웠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해안 지방 외에는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내륙의 베르베르인들은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610년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우스(Flavius Heraclius, 575~641)가 폭군 포카스(Flavius Phocas Augustus, 547~610)를 죽이고 동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Sasanian dynasty)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동로마 제국을 구했다. 이어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을 공격하여 사산조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가 약화되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여 시리아,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670년 경 이슬람 아랍 세력은 아프리카 총독령을 비롯해 북아프리카에 대규모 침공을 하여 동로마 제국과 베르베르인 왕국을 정복하였다. 698년 토착 베르베르인 가히나 여왕(Queen Kahina)과 동로마 제국 연합군이 동방에서 침입한 아랍 세력에 패배하면서 카르타고는 이슬람국이 되었다. 아랍인들은 카르타고를 함락하고 북아프리카 정복을 마무리지었다.
10-3. 튀니지 중세 시대
아랍인에게 정복된 후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이프리키야('ifrīqīyah)로 불리게 된다. 이프리키야는 지금의 튀니지에서 알제리 동부에 이르는 북아프리카의 중서부를 가리키는 역사적 지명이다. 이프리키야는 이후 모로코 등 리비아보다 서쪽에 있는 지역 등과 함께 마그레브라고 불리게 된다.
이프리키야의 중심 도시는 이슬람 군대가 침공할 때 군사적 거점을 만들기 위해 세운 카이르완(Kairouan)이었다. 'Kairouan'은 아랍어로 '요새' 라는 뜻이다. 이후 카이르완은 이슬람 제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튀니스에는 군항이 건설되었다. 반면 카르타고, 우티카 등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카이르완(Kairouan)
튀니지에는 750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를 무너뜨린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1258)의 지배를 받는 카이르완의 아글라브 왕조(Aghlabid dynasty, 800~909)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아바스 왕조는 형식적으로만 지배했며, 아글라브 왕조는 사실상의 독립 왕조였다. 아글라브 왕조의 함대는 당시 지중해 중부에서 최강이었다. 아글라브 왕조는 한때 이탈리아 일대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칼라브리아(Calabria) 주를 잃으면서 쇠퇴했다.
909년 이슬람 시아파 중 두 번째로 큰 분파인 이스마일파(Ismailis)의 파티마 왕조(Fatimid dynasty, 909~1171)가 일어나 아글라브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왕조의 칼리프들은 이슬람의 시조인 무함마드(Muhammad, AD 571. 4. 22~AD 632. 6. 8)의 딸 파티마 빈트 무함마드(Fatimah bint Muhammad)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의 이름도 파티마라고 정했다. 파티마 왕조는 마그레브 전역을 정복한 뒤 969년 이집트를 침공하여 카이로를 수도로 삼았다. 파티마 왕조의 중심이 이집트로 옮겨가자 파티마 왕조의 섭정인 지리드 왕조(Zirid dynasty, 972~1148)가 카이르완을 수도로 삼고 튀니지를 통치했다. 지리드 왕조는 마그레브 지역에서 사상 최초로 성립된 베르베르인 왕조였다.
1048년 수니파로 전향한 지리드 왕조가 파티마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파티마 왕조는 1058년 바누 힐랄(Banu Hilal) 등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베두인족을 보내 지리드 왕조의 영토를 이프리키야 해안가 일부로 대폭 축소시켰다. 1121년 모로코 방면에서 베르베르인 무슬림 무와히드 왕조(al-Muwahhidun, 1121~1130, 1266~1269)가 일어나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지리드 왕조는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148년 지리드 왕조는 결국 시칠리아 노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지리드 왕조의 멸망 이후 약 100여년 간 이프리키야는 베두인족과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혼란 상태가 지속되었다. 1150년대 무와히드 왕조는 이프리키야를 정복하고,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1170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젊은 나이임에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티마 왕조는 친척을 통해서 명맥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실권자인 살라딘(Saladin)이 칼리프를 옹립하지 않음으로써 왕조가 단절되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븐 할둔(Ibn Khaldun) 동상
무와히드 왕조는 무함마드 나시르(Muhammad al-Nāsir, 1182~1213)가 1212년 카스티야(Castilla), 아라곤(Aragón), 나바라(Navarra), 포르투갈(Portugal) 등 기독교 4왕국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아프리카 일대로 지배권이 축소된 무와히드 왕조는 마린 왕조(Banū Marīn, Marinid dynasty, 1244~1472)를 세운 세력이 1215년 여러 부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더욱 약화됐다.
무와히드 왕조가 쇠퇴하자 1229년 튀니지에는 베르베르족의 하프스 왕조(Hafsid dynasty, 1229~1574)가 성립되었다. 하프스 왕조는 서쪽으로 알제리에서 동쪽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했다. 무와히드 왕조는 1269년 마지막 왕이 노예에게 살해되면서 멸망했다.
하프스 왕조 때 이프리키야는 다시 이슬람 세계의 중심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 세비야(Sevilla)에서 튀니스로 망명한 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도 하프스 왕조를 섬겼다. '역사서설'을 저술한 이븐 할둔은 최초로 비종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킨 아라비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였다. 로마 캐돌릭 왕국들에 의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718~1492) 운동을 피해 이베리아에서 건너온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프리키야 문화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프스 왕조 통치하에서 베르베르인의 아랍화가 진행되어 아랍어가 널리 퍼졌다. 하프스 왕조는 15세기 중후반 우스만 칼리프(Uthman, 1435~1488) 때 전성기를 맞았다.
10-4. 오스만 제국 시대의 튀니지
1516년 지중해를 휩쓸고 다니던 바르바로사(Barbarossa)-붉은 수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 하이르 앗딘(Khair ad-din, ?~1546)과 바바 우르지(Baba Oruç, 1474~1518) 형제가 알제(Alger)를 정복했다. 1518년 이들 형제는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 베일레르베이(Beylerbeyi)-대지사, 최고사령관-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오스만 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프스 왕국은 전성기를 맞은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의 세력 대결장으로 전락했다. 오스만 제국은 하프스 왕조에게 스페인보다도 더 큰 위협이었다. 1534년 오스만 제국이 튀니스를 1년 동안 점령하자 하프스 왕조는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
1574년 울루지 알리(Uluj Ali, 1500~1587)-본명 지오반니 디오니지 갈레니(Giovanni Dionigi Galeni)-가 튀니스를 알제의 베일레르베이령에 포함시킴으로서 하프스 왕조는 멸망하고, 이프리키야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587년 울루지 알리가 사망한 후 베일레르베이는 폐지되었고,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임명된 파샤(pasa, pasha)-주지사, 군사령관-가 튀니지와 알제리, 리비아를 각각 통치했다.
1591년 예니체리(Yeniçeri)-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보병군단-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지휘관 중 한 명을 데이(Dey)로 선출하였다. 데이는 해적선장들에게 내려지던 명예 칭호였지만, 오스만 투르크 근위기병의 하급장교들의 칭호이기도 했다. 16세기 말 유럽 열강들의 침략으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튀니지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데이는 마침내 단독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다. 데이의 통치기에 튀니지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회복되었다. 특히 튀니지는 우스만 데이(Usman Dey, 1598~1610)와 유수프 데이(Yusuf Dey, 1610~1637) 통치하에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1640년 데이가 사망하자 무라디드 왕조(Muradid dynasty)의 두 번째 베이(Bey)-총독-인 하무다 파샤 베이(Hammuda Pasha Bey)는 데이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베이가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하무다의 아들 무라드 2세(Murad II)는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디완(diwan)-지방 최고행정기관-을 복원했다. 그러나 1675년 무라드 2세 사후 무라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인접한 알제리에서 군사 개입을 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야기되었다. 1702년 무라드 가문의 마지막 베이가 암살됨으로써 무라디드 왕조는 멸망했다.
무라디드 왕조의 혼란을 틈타 1705년 튀니지에는 후사인 왕조(Husainid dynasty, 1705~1957)가 성립되었다. 1715년 오스만 제국은 후사인을 대신할 파샤를 내려보냈으나, 후사인 베이를 지지하는 현지 유력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어쩔 수 없이 후사인 베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튀니지는 후사인 왕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독립성을 확보하였다. 후사인 왕조는 오스만의 간섭을 우려해 제국과의 관계는 형식적으로만 유지했으며, 예니체리에 대한 의존도 줄였다. 또, 오스만 제국이 인정한 하나피(Hanafi) 학파보다 튀니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말리키(Maliki) 학파의 이슬람 학자들을 관료로 임명하고, 튀니지-튀르크 혼혈 및 튀니지인의 관직 진출을 확대하였다.
튀니지 정부의 주요 수입원은 지중해의 독점 무역으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1820년대 이후 크게 악화된 무역수지는 튀니지 정부가 큰 부채를 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산업화에서 뒤쳐진 튀니지는 값싼 수입 상품의 유통으로 전통적인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경제적 위기 상황에 처했다.
10-5. 튀니지 근대사
1837년에 즉위한 아흐메드 베이(Ahmed Bey, 1786~1851)는 부국강병을 위해 서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고,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Murat II, 1404~1451)와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를 본받아 근대적인 통신, 교통, 군대, 교육기관을 도입하는 등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1863년 사독 베이(Sadok Bey, 1813~1882)는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물론 아프리카 최초의 입헌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으로 1864년 헌법은 정지되고 근대화 정책은 좌절되었다. 1867년에는 서구화 정책의 재정 부담과 부진한 세금 징수, 무역 적자, 가뭄과 전염병 등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난과 재정 적자에다가 중앙은행장이 자본금을 통째로 들고 프랑스로 도주하면서 튀니지 정부는 결국 파산을 선언하고 말았다.
당시 시칠리아에서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건너와 인구 100만 명에 불과하던 튀니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이탈리아는 튀니지를 두고 프랑스와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1878년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베를린 회의에서 튀니지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이탈리아는 튀니지를 양보하는 대신 트리폴리타니아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1881년 튀니지 변경의 한 부족이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제국주의 프랑스는 외무장관 쥘 페리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3만 6,000명의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바르도 조약으로 튀니지의 군사권과 외교권에 이어 재정권마저 탈취했다. 1883년에는 마르사 협정으로 튀니지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후 후사인 왕조는 이름만 존재할 뿐이었고, 프랑스 총독이 튀니지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요직도 프랑스인이 거의 독점했다.
프랑스 정부가 본토인에 대한 우대 정책을 펴자 많은 프랑스인들이 튀니지로 몰려왔다. 반면에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의 탄압을 못 이겨 본토로 귀국했다. 프랑스의 근대화 정책은 튀니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튀니지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가 식민지 튀니지에서의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880년대부터 이슬람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자말 앗딘 알아프가니(Jamal ad-Din al-Afghani, 1838~1897)는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슬람 공동체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그는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아랍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슬람이 하나가 되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자고 역설했다. 아프가니의 영향으로 이집트의 이슬람 법학자 무하마드 압두(Muhammad Abduh, 1849~1905)는 이슬람 근대화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사드 자글룰 파샤(Sa⁽d Zaghlūl Pasha, 1857~1927)는 이집트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드당(Wafd Party)을 창설했다.
알리 바크 함바(Ali Bach Hamba)
1907년 튀니지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청년 튀니지당(Jeunes Tunisiens)이 등장하였다. 청년 튀니지당은 튀니지인의 시민권 보장, 헌법 제정, 튀니지인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알리 바크 함바(Ali Bach Hamba, 1876~1918)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청년 튀니지당은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부터 청년 튀니지당의 후신인 데스투르당(Al-Ḥizḅ al-Ḥurr Addustūrī At-Tūnusī. Tunisian Liberal Constitutional Party, Destour)은 튀니지인의 동등한 참정권을 프랑스에 요구했다. 1930년대에는 하비브 부르기바(Habib ibn Ali Bourguiba, 1903~2000)를 지도자로 하는 신 데스투르당(Neo Destour)이 등장하여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레옹 블룸(Lé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人民戰線, Popular Front) 정부는 신 데스투르당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튀니지는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1940~1944)에 귀속되었다. 이후 북아프리카는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독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추축군의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1942년 11월 튀니지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s of el-Alamein)의 패배로 독일군이 후퇴하고, 서쪽의 모로코와 알제리 등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는 영미 연합군이 횃불작전으로 비시 프랑스군을 제압했다. 또,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추축군은 결국 1943년 5월 13일 항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튀니지는 다시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무하마드 8세 알 아민
2차대전 후 하비브 부르기바(Ḥabīb Būrqība, 1903~2000)가 이끄는 신 데스투르 당은 튀니지 노동자총연맹(UGTT)과 연대하여 범아랍주의 세력의 도전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하고 알제리 독립을 저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프랑스 정부는 결국 베이 무하마드 8세 알 아민(Muhammad VIII al-Amin, 1881~1962)을 국왕으로 세우는 조건으로 1955년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했다.
10-6. 튀니지 현대사
1956년 3월 20일 무하마드 8세 알 아민을 국왕으로 한 튀니지 왕국이 독립했다. 독립한 이후에도 튀니지는 프랑스 문화를 보유하는 데 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독립 튀니지 왕국의 초대 총리에는 하비브 부르기바가 선출되었다. 1957년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튀니지 공화국이 출범했다.
하비브 부르기바(Ḥabīb Būrqība)
총리에서 대통령이 된 부르기바는 1958년 아랍연맹에 가입했다. 온건파 사회주의자였던 부르기바는 국내적으로는 급진 아랍주의자들을 견제하고, 대외적으로는 급진 아랍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는 등 친서방 비동맹 중립노선을 걸었다. 또, 유엔 외교와 걸프 만 지역의 친서방 아랍국가들과의 경제협력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1959년 부르기바는 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으며, 1970년대에는 자유주의 노선으로 변경했다. 부르기바는 이슬람법-샤리아-을 폐지하고, 아랍 국가 중 유일하게 중혼(重婚) 금지를 법률에 명시함으로써 여권 신장을 추진하였다. 일부다처제를 폐지한 결과 튀니지는 이슬람교가 국교임에도 여성들의 활동이 중동이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크게 앞서게 되었다.
부르기바의 신 데스투르당은 데스투르 사회당(Parti Socialists Destourien, PSD)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1980년대 초까지 데스투르 사회당(PSD)은 다수당이자 유일 합법정당의 위치를 고수해왔다. 부르기바 정권은 지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노동조합 활동으로 구속된 노동조합원들을 특별사면하였으며, 튀니지 노동자 공산당( Parti Communiste Ouvrier Tunisien, PCOT)도 합법화하였다. 1981년 최초의 다당제 국회의원 선거에서 PSD와 튀니지 노동총동맹(UGTT)의 연합전선인 국민전선(國民戰線, Front National)이 사회주의 연합 좌파 야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다. 198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본부가 튀니지로 옮겨왔으나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일부 기구를 이전했다.
부르기바는 세속주의 정책과 여권신장 정책을 꾸준히 시행하고,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을 후원함으로써 독재자 치고는 튀니지인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부르기바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30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사회주의 정책 실패로 인한 총파업, 식량 위기 등은 튀니지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켰다. 민주화 운동이 유혈폭동으로 전개되면서 튀니지의 사회적 혼란은 점차 심화되었다.
1987년 11월 총리에 임명된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 1936~2019)는 빵값의 급격한 인상으로 인해 격분한 민중들이 일으킨 봉기를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한 뒤,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 주치의의 서명을 받아 부르기바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헌법 규정에 따라 벤 알리는 11월 7일 튀니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사실상의 무혈 쿠데타였다. 그러나 벤 알리는 '대통령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총리가 대신한다'는 헌법에 근거한 합법적 권력 이양이라고 주장했다.
자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
벤 알리는 1989년 4월 대선을 통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1991년 걸프전 당시 벤 알리 정권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면서 아랍인의 연대를 주창했다. 같은 해 이웃 나라인 알제리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선거 승리를 부정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정부에 이슬람주의 무장단체가 저항하면서 알제리 내전이 발발했다. 알제리 내전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튀니지 정부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벤 알리는 건국 이래 계속 집권해온 데스투르 사회당(PSD)을 민주헌정연합(Rassemblement Constitutionnel Démocratique, Democratic Constitutional Rally, RCD)으로 바꾸고 장기간 집권했다. 하지만 민주헌정연합(RCD)은 한국의 모 보수정당처럼 이름만 바꾸고 본질은 그대로인 정당이었다. RCD도 PSD처럼 집권당의 위치를 한번도 내준 적이 없었다. 야당들은 선거에 아예 참여하지도 못하거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94년과 1999년 대선에서도 벤 알리는 각각 99.5%와 99.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9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벤 알리는 새 헌법을 제정해 2002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새로 개정된 선거법은 75살까지 누구나 재당선될 경우 대통령직에 머무를 수 있다는 일종의 대통령 종신제를 채택했다. 이는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일본군 초급장교 출신 박정희의 종신 대통령을 보장한 한국의 유신헌법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2004년 10월 24일 튀니지의 대선 1차전에서 대통령 벤 알리는 다시 94.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다.
2008년 튀니지는 EU와 자유무역지대(FTA) 협정을 체결하였다. 또, 서구 일변도의 통상관계를 탈피하고 외교 다변화를 위하여 한국과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과도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도모했다.
한편, 벤 알리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정치로 인해 튀니지는 외견상 안정을 이루었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염증에다가 15%에 이르는 실업률, 특히 30% 이상의 청년실업 문제는 점차 정권과 사회불안의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를 휩쓴 재스민 혁명의 일환으로 튀니지에서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면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튀니지인들의 광범위하고 치열한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벤 알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그의 23년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몬세프 마르주키(Moncef Marzouki)
벤 알리가 축출되자 독재정권에 맞서온 인권운동가 몬세프 마르주키(Moncef Marzouki, 1945~ )가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살라피즘(Salafism)을 신봉하는 무슬림에 의한 폭동은 6월 12일까지 지속되었다. 살라피즘 또는 살라프파는 샤리아가 지배하던 7세기 이전 초기 이슬람 시대로 회귀해야 한다는 수니파의 사상이다. 살라피즘은 이슬람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8월 14일 튀니지는 새 헌법에 삽입될 '여성은 남성에 대한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헌법 문구에 반발해서 6,000여명의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결국 튀니지 정부는 헌법 개정 투표를 2013년 4월 말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9월 3일에는 살라피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호텔에서 술을 판다는 이유로 호텔 바를 공격했다. 튀니지는 몇 주 동안 살라피즘을 신봉하는 세력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비상사태를 3개월 더 연장했다. 비상사태는 2014년 1월에 해제되었다.
2014년 1월 신헌법 채택 및 선거정국을 주도할 메흐디 조마(Mehdi Jomaa, 1962~ )가 총리로 취임했다. 1월 26일 튀니지 신헌법이 통과되었다. 튀니지 신헌법은 광신적인 아랍 국가들 사이에선 이례적으로 샤리아-이슬람 율법을 근거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을 보장한 진보적인 조항을 담고 있었다.
10월 총선에서는 튀니지의 소리(Nidaa Tounes)가 승리하고, 11월과 12월 양차 대선에서는 튀니지의 소리 베지 카이드 에셉시(Beji Caid Essebsi, 1926~2019)가 제4대 대통령이자 제2공화국 첫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튀니지의 민주화를 주도해 온 시민단체 연합체인 국민4자대화기구(Tunisian National Dialogue Quartet, TNDQ)는 다원적 민주주의 실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5년 2월 에셉시 대통령은 하빕 에시드(Habib Essid, 1949~ )를 총리로 지명했다. 3월 튀니스의 바르도 국립박물관(Bardo National Museum)에서 괴한들의 총격 테러로 관광객 21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주요 관광지에서 대규모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튀니지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베지 카이드 에셉시(Beji Caid Essebsi)
에시드 정부는 민주화에 대한 높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참여 주요 정당들의 대립으로 효율적 국정 운영에 실패했다. 에시드 정부는 출범 후 1년 6개월만인 2016년 8월 퇴진했다. 에셉시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제 정파 및 사회단체들은 통합내각 구성에 합의했다. 2016년 8월 튀니지의 소리 유세프 샤헤드(Youssef Chahed, 1975~ ) 총리의 통합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통합정부의 출범에도 튀니지는 높은 실업률로 인해 분신자살이 잇따르는 등 사회 불안이 지속되었다. 2017년 1월 14일에는 튀니지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한국 정부는 여행경보 단계상 수도 포함 해안가 주요 도시 등 튀니지 전역을 여행 자제 지역, 알제리 및 리비아 접경지역은 철수 권고 지역으로 지정했다.
2017년 7월 27일 튀니지는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9월 15일 튀니지는 44년만에 무슬림 여성이 비무슬림 남성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초 튀니지 정부는 여성 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받아온 결혼지참금 풍습을 금지하고, 아랍 세계 최초로 딸과 아들이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18년 1월 내륙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튀니지 정부의 긴축정책 및 경제난에 항의하는 폭력 시위가 일어나 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1월 9일에는 반정부 시위로 200명이 체포되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정부의 조기 강력 대응으로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2018년 7월 3일 튀니지 역사상 최초로 수도 튀니스 시장에 여성인 수나드 압데라힘(Souad Abderrahim, 1964~ )이 당선되었다. 10월 수도 튀니스에서 여성 자살 폭탄 테러로 20여명이 다쳤으며, 당시 부상자는 대부분 경찰이었다. 11월 샤헤드 총리는 자신의 입지 강화 포석으로 연정 파트너인 온건 이슬람 정당 엔나흐다 운동(Ennahdha Movement)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관급 13명을 교체하는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유세프 샤헤드(Youssef Chahed)
2019년 1월 샤헤드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중도파 통합운동 타흐야 투니스(Tahya Tounes)-튀니지여 영원하라-가 출범했다. 6월 튀니스 도심에서 경찰 순찰차를 겨냥한 두 건의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1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 다에시(IS)는 튀니스 도심 연쇄 폭탄 테러를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카이스 사이에드(Kais Saied)
7월 25일 에셉시 대통령이 92세로 사망하자 모하메드 엔나세우르(Mohamed Ennaceur, 1934~ )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튀니지 대통령의 유고로 11월로 예정됐던 대선을 9월로 당겨서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9월 15일 대선 1차 투표에서 법학교수 출신 무소속의 정치 신인 카이스 사이에드(Kais Saied, 1958~ ) 후보와 세속주의 중도좌파 신생정당 칼브 투네스(Qalb Tounes)-튀니지의 심장-총재 나빌 카루이(Nabil Karoui, 1963~ ) 후보가 집권당과 제1야당 후보 등 기성 정치권 인사들을 물리치고 각각 1, 2위를 기록하면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9월 18일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 민중봉기로 축출된 튀니지 전 독재자 벤 알리가 망명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죽었다. 10월 6일 튀니지 총선에서는 온건 이슬람 성향 엔나흐다당(Ennahda Party)이 52석, 튀니지의 심장(Qalb tunes, Heart of Tunisia)이 38석을 확보했다. 10월 13일 실시된 튀니지 대선 결선 투표에서는 무소속의 사이에드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특히 사이에드 후보는 튀니지 청장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일라이스 파흐파흐(Elyes Fakhfakh)
2020년 2월 일라이스 파흐파흐(Elyes Fakhfakh, 1972~ ) 총리의 신정부가 출범했다. 파흐파흐는 하마디 제발리(Hamadi Jebali, 1949~ ) 총리 정부에서 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했으며, 2012년 12월 19일부터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3월 6일 수도 튀니스 신시가지 락두(Lac II) 소재 미국 대사관 인근에서 스쿠터에 탑승한 2명의 테러범이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테러범 포함 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4월 21일 2002~2005년 주한 튀니지 대사를 역임한 오스만 제란디(Othman Jerandi) 전 외교장관이 신임 사이에드 대통령의 외교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제란디 외교보좌관은 주 유엔 대사, 주 요르단 대사, 주 나이지리아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4월 30일 사이에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30일 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튀니지 국가비상사태는 2015년 테러사태 후 처음 발동된 이래 수차례 연장되어 왔다. 비상사태 하에서는 내무장관이 집회금지, 야간통행금지 조치, 상점 단속, 언론 및 출판을 사전 허가없이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2020. 5. 26.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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