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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North Africa) - 알제리(Algeria) 2

林 山 2020. 7. 11. 18:21

19. 알제리의 역사

 

19-1. 아랍 정복 이전의 역사

 

고고학적 발굴작업의 결과 BC 50∼70만 년 무렵 알제리(Algeria) 북부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直立猿人)가 살았던 것이 밝혀졌다. 알제리 영토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카(North Africa) 지역에는 유사 이래 베르베르인(Berber)으로 통칭되던 원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누미디아인(Numidian), 가에툴리아인(Gaetulian), 가라만테스인(Garamantes) 등 다양한 분파의 형태로 이집트(Egypt)나 그리스(Greece)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BC 1250년~1000년경 소아시아(Asia Minor)의 페니키아(Phoenicia) 상인들이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정착했고, 지금의 튀니지(Tunisia)에 있던 카르타고(Carthago, Carthage)는 페니키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후에 카르타고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알제리의 대도시 대부분의 기원은 이 시기로부터 비롯되었다.

 

마시니사(Massinissa)

BC 510년경에는 로마(Roma)인이 들어왔다. BC 3~2세기에는 베르베르인 토착왕국이 존재했다. 누미디아 왕국(Nomedia kingdom)은 베르베르인 토착왕국이었다. 마시니사(Massinissa), 유구르타(Jugurtha) 등은 누미디아의 왕들이다. BC 146년 카르타고는 로마에 넘어갔다. BC 46년경 누미디아 왕국은 로마의 지방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AD 40년에 로마는 해안지방을 확고히 지배하게 되었고, 알제리는 로마 제국의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Mauretania Caesariensis) 지방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안 배후 지역은 로마의 통치권 밖에 있었다. 5세기에 로마가 멸망하자 게르만족(Germanic peoples)의 일족인 반달족(Vandals)이 침입했다. 429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왕국을 세우면서 알제리도 그 지배를 받았다. 534년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Byzantine Empire, 동로마 제국)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알제리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기독교 세력이 커졌고, 라틴어가 북아프리카 전역에 널리 퍼졌다. 로마-반달-비잔틴 등 외부 세력에게 차례로 정복되면서 알제리인들은 이들과 혼혈, 동화되었고, 일부 세력만 내륙에서 민족적 독자성을 유지했다.

 

19-2. 이슬람 정복기 및 오스만 제국 지배기

 

7세기에 이슬람(Islam, al-Islām) 세력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647년 이슬람 세력은 이집트를 비롯해 북아프리카를 침략해서 비잔티움 제국과 베르베르족 세력과 충돌했다. 711년 무렵 이슬람 최초의 통일 세습왕조인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 마그레브(Maghreb, Maghrib) 지역의 토착 베르베르족 사이에 이슬람교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7세기 말에는 이미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740년 경 이슬람의 한 분파인 카와리지파(Khawarij)의 영향으로 북아프리카인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면서 마그레브 지역에 많은 이슬람화된 베르베르족 제국들이 명멸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왕조는 스페인까지 영역을 확대한 알무라비툰 왕조(al-Murābiṭūn dynasty, 알모라비드 왕조, 무라비트 술탄국, 1056∼1147)와 알모아데 왕조(Almohad Chaliphate, 1121∼1269)였다. 이 시기가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였다. 알모아데 왕국의 쇠퇴와 함께 베두인족(Bedouin)이 이동해왔는데, 이들이 들어오자 토착민들은 유목민화되었다. 

 

아루즈 (Arūj)

14세기 경부터 오스만 제국(Osman Empire, Ottoman Empire)은 이슬람 세계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6세기 초 스페인(Spain)이 북아프리카에 침입하자 아프리카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투르크족의 해적 아루즈(Arūj)는 1514년 알제리의 지젤리(Djidjelli)에 근거지를 세우고, 1515년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 셀림(Selim) 1세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아 약 70년 간 알제리를 섭정했다. 그후 알제리는 튀니지의 섭정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모로코-알제리 국경선까지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알제리는 3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튀니지, 모로코와는 별도의 지역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19-3. 프랑스 정복기 및 식민지 지배기

 

나폴레옹 전쟁 후 복권된 부르봉 왕가(Maison de Bourbon)의 샤를 10세(Charles X, 1757~1836)는 매우 보수반동적인 인물로 입헌군주제도 거부하고 전제 정치를 자행했다. 1820년대 말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샤를 10세는 1830년 왕조의 위신을 세우고 국내 정정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알제리 침공을 기도했다. 프랑스군은 바르바리 제국의 해적 행위가 수세기 동안 지중해 무역을 위협했다는 것을 구실삼아 알제리를 침략했다. 샤를 10세는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국내의 여론을 해외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압델카데르  알자자이리

1848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공식적으로 병합하고 알제와 오랑(Oran), 콩스탕(Constantine) 등 3개 주를 설치해 프랑스 본토의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프랑스군에 패한 터키군은 알제리를 떠났으나, 알제리인들은 동부 산악지역 카빌리 봉기(Grand Kabyla rebellion)를 일으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저항했다. 알제리 무슬림의 구심점 압델카데르 알자자이리(Abdelkader al-Jazairi, 1808~1883)는 오랑을 근거지로 삼고 프랑스 침략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압델카데르 저항군의 투쟁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7년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카빌리 독립군은 1852년이 되어서야 진압되었다. 프랑스군이 카빌리를 정복한 이후에도 독립을 위한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은 1884년까지 지속되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이를 계기로 알제리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에게 진압당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전으로 영토를 상실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식민사업을 통해서 영토 확장을 모색했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알제리인들의 봉기를 구실로 몰수한 토지를 알자스(Alsace), 로렌(Lorraine) 난민을 비롯한 유럽계 이민자들에게 불하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토지 약탈을 자행했듯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도 알제리에서 토지를 약탈해서 본토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토지 불하 정책으로 유럽계 이민자가 폭증하면서 1872년에만 24만5천 명의 프랑스인이 알제리로 건너왔다. 1914년에는 본토에서 건너온 이민자가 75만 명을 웃돌았다.  

 

프랑스는 다방면에 걸쳐 알제리인의 프랑스화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인들의 민족혼을 말살하고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강행한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과도 같은 교활한 정책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알제리 출신 병사들은 프랑스군으로 복무하였지만 각종 권리에서 본토인들과 다른 차별 대우를 받았다. 참전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정부에 명예회복 및 참전수당 지급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를 놓고 알제리-프랑스 간 불협화음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9-4. 알제리 독립전쟁

 

1954년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압제자들로부터 알제리 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아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 1916~2012) 등 6인의 알제리 지도자들은 1954년 11월 1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FLN)을 결성하고 대 프랑스 항쟁을 전개했다.

 

아흐메드 벤 벨라

프랑스는 50만 명 이상의 육군과 해군, 공군을 파견하여 알제리 민족인민군(Armée nationale populaire, ANP)을 토벌함으로써 해방투쟁을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하루 평균 20억 프랑의 전비를 쓰면서도 프랑스는 알제리 해방투쟁 진압에 실패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본토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내각이 무너지고, 1958년 10월 4일에는 샤를 드 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1970)의 프랑스 제4공화국도 붕괴되었다. 제4공화국을 타도한 드골이 1958년 9월 28일 재집권하면서 프랑스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1958년 민족해방전선(FLN)은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 이주민인 콜롱(colon)에 대한 저항운동을 강화하였다. 친프랑스 반민족 알제리인 경찰 하르키(Harki)들은 알제리 민족인민군에게 교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알제리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주둔했던 프랑스 외인부대(Legion Etrangere)는 온갖 잔악한 만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알제리 독립전쟁 과정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희생된 알제리인은 약 1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직도 영화를 통해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제리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프랑스 대통령 드 골은 알제리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고 평화협상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19-5, 알제리 근현대사

 

1961년 알제리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했다. 1962년 알제리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FLN은 1962년 7월 3일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알제리의 독립을 쟁취했다. 7월 5일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알제리는 독립을 선포하고, 9월에는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으며 국제연합에도 가입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 거주자들은 알제리를 떠났다. 1962년 9월 FLN을 이끌었던 아메드 벤 벨라가 초대 총리로 선출되어 집권했다. 1963년 9월 아메드 벤 벨라는 FLN 일당제 하에서 대통령제 도입 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독재정치를 펼쳤다.  

 

1965년 6월 국방장관이자 독립전쟁 당시 군 총사령관이던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 본명 Mohammed Ben Brahim Boukharouba, 1927~1978)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메드 벤 벨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알제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부메디엔은 1974년 국민투표로 국민헌장과 새 헌법을 채택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독립 이래 알제리는 유일 합법정당인 FLN이 통치했다. FLN은 대통령,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 국가인민회의를 통해서 알제리를 지배했다. 

 

후아리 부메디엔

1976년 부메디엔은 FLN 일당 주도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 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8년 12월 부메디엔이 병으로 사망하자 이듬해 2월 샤들리 벤제디드(Chadli Bendjedid, 1929~2012) 대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벤제디드 집권 하에 알제리는 계획경제 체제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해 모로코는 알제리가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The Polisario, Polisario Front)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단교를 선언했다. 1979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화해하자 알제리는 이집트와 단교했다. 10여년 뒤 알제리는 모로코, 이집트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그 이듬해에는 아랍 마그레브 연합을 결성하였다.

 

 

샤들리 벤제디드

1962년부터 지속된 FLN 중심의 유일 정당 체제의 장기집권은 독재정치와 부정부패, 국가 운영 부실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1986년 유가가 폭락하면서 알제리는 극심한 인플레와 실업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맞았다. 경제불황에다가 FLN의 장기집권과 부정부패로 불만이 커질 대로 커진 알제리 국민들은 1988년 10월 대규모 반독재 민주화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1989년 민중항쟁이 격화되자 국민적 저항에 맞서오던 벤제디드는 어쩔 수 없이 다당제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자본주의를 주내용으로 한 새 헌법을 제정했다. 

 

절대적 권한를 행사하던 FLN은 다른 정당의 출현으로 위협을 받았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정당이었다. 1990년 지방선거에서 이슬람구국전선(The Islamic Salvation Front, FIS)은 도시 빈민과 청년층의 몰표를 받아 55%의 지지율로 집권 FLN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1991년 12월 최초의 자유총선 1차 선거에서도 이슬람구국전선(FIS)은 압승을 거뒀다. 

 

모하메드 부디아프

총선 2차 선거에서도 FIS의 압승이 예상되자 1992년 네자르(Nezzar) 장군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벤제디드 정권이 축출되고, 알제리 독립전쟁을 이끈 FLN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모하메드 부디아프(Mohamed Boudiaf, 1919~1882)가 집권했다. 군부가 FIS를 불법화시키고, 1만여 명의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자 이슬람 세력의 저항으로 내전이 발생했다. 1992년 6월 29일 부디아프는 내전 중 암살되었다. 부디아프가 암살됨으로써 알제리에 헌법적 유고상태가 초래되었다. 

 

알리 카피

군부는 알리 카피(Ali Kafi, 1928~2013)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다가 1994년 1월 리아민 제루알(Liamine Zeroual, 1941~) 장군을 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1995년 8월 리아민 제루알은 독립 후 최초의 다당제 대선에서 61%를 득표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리아민  제루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반정부 무장투쟁으로 군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1995년부터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성전을 선포하고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폭력과 학살은 점차 알제리인들로부터 지지를 잃게 되었지만, 알제리 정부군도 민간인들을 상대로 극단적인 폭력과 잔혹한 행위를 저질러 많은 비판을 받았다. 10년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10만 명 이상의 알제리인이 사망하였다.

 

1996년 11월 헌법 개정으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와 복수정당제에 의한 상하 양원제 의회 구성, 사법권의 독립 등 3권분립 체제를 채택하였다. 제루알 대통령은 군부와의 갈등으로 1998년 9월 사임하고, 1999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군부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의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aziz Bouteflika, 1937~)가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해 6월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산된 바 있는 복수정당제 하의 첫 총선을 실시하여 하원인 국가인민회의(APN) 의원을 선출하고, 10월 23일에는 면의원(APC)과 도의원(APW) 등 지방의원을 선출했다. 10월 25일에는 상원인 국가평의회(Conseil De La Nations) 의원을 선출했다. 이에 비로소 알제리는 중앙 및 지방 입법기관을 구성하였다. 부테플리카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대한 사면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국민화합(Concorde Civile) 법안을 채택하는 등 내전 수습을 위한 국민화합 정책을 실시했다.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2001년 4월에는 베르베르 언어권인 카빌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고등학생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8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테플리카는 강력한 대테러 정책과 화해 정책으로 인근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2002년 제2차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의한 하원 선거가 실시되어 5년 임기의 하원의원 389명을 선출했다. FLN은 재적 과반수 이상인 199석을 획득하여 연립정당 내 제1여당으로 떠올랐다. 2004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부테플리카는 83.49%의 압도적인 지지로 알리 벤플리스(Ali Benflis, 1944~)를 물리치고 임기 5년의 제8대 대통령에 또다시 당선되었다. 알리 벤플리스는 알제리 인권연맹을 설립한 변호사로 FLN 당수이자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부테플리카는 2004년까지 내전으로 매년 100~200명이 사망하였음에도 2005년 1월 테러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다. 2005년 9월 알제리는 국민투표로 국민 화합, 평화 정착, 국가 안정, 안보 확립을 주내용으로 한 '평화와 국민화합 헌장'을 채택했다. 알제리 정부가 반군에 대한 대사면을 통한 포용과 토벌작전을 통한 진압이라는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한 결과 정국은 점차 안정을 회복했다. 이후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반군은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의 무장공격은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계 회사 BRC를 상대로 한 무장공격에서 보듯이 테러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알제리의 과거사 청산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 당시 알제리인에 대한 대량 학살, 투옥, 고문 등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배에 공헌한 프랑스 국민과 현지 부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북아프리카 지역의 발전에 대한 프랑스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는 등 오히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미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지배, 레지스탕스와 프랑스인 탄압에 대하여 프랑스는 전후 독일로부터 철저한 사과를 받았으며, 또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을 처벌하는 등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을 한 것과 비교할 때 프랑스의 태도는 매우 이율배반적이었다. 2005년 2월 프랑스 하원에서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내용의 법률이 제정되자 알제리에서는 반프랑스 정서가 확산되었다. 

 

2008년 11월 12일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등을 골자로 한 부테플리카 정권의 헌법 개정안이 알제리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부테플리카의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한 반민주적인 헌법 개정이었다. 2009년 4월 주요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대선에서 부테플리카는 90.24%의 지지로 3선에 성공했다. 부테플리카 정권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연이은 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외국인 투자시 현지인 지분 51% 의무화, 수입규제 강화 등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무크타르 벨무크타르

2013년 1월 16일 전설적인 '애꾸눈' 무크타르 벨무크타르(Mokhtar Belmokhtar, 1972~2015)의 지휘를 받는 알카에다계 무장 집단이 인아메나스(In Aménas)의 석유시설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알제리군은 현장을 급습해서 685명의 알제리인 노동자, 107명의 외국인을 구출했다. 하지만 인질 구출 작전 과정에서 적어도 23명(일설에는 35명)의 인질과 32명의 무장 세력이 사망했다. 무크타르 벨무크타르는 2015년 6월 14일 미군의 리비아 공습으로 사망했다. 

 

2014냔 4월 실시된 알제리 대선에서 부테플리카는 중풍(中風, palsy) 발병에 따른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81.53%의 압도적 지지로 4선에 성공했다. 부테플리카는 알제리 독립유공자인 전통 군부 세력의 정권 장악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정보 조직의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 정치 구도를 재정비했다. 2015년 9월 부테플리카는 25년 이상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온 모하메드 메디네(Mohamed Mediène, 1939~ ) 정보안전부장을 전격 해임했다. 2016년 1월에는 정보 관련 조직을 감시안보부(Département de Surveillance et de Sécurité, DSS)로 개편하여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2016년 2월 부테플리카는 집중적으로 추진해 온 정치개혁 공약인 헌법 개정에 성공했다. 2월 7일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위 1회 연임으로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이 상하원 합동특별회의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최종 통과되었다. 

 

 19-6. 부테플리카 이후의 알제리 

 

2019년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5선 출마를 선언한 부테플리카에 대한 반대 시위가 약 2달 간 지속되었다. 이에 장기집권자 부테플리카는 4월 2일 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 4월 9일 압델카데르 벤살라(Abdelkader Bensalah, 1941~) 상원의장이 임시대통령에 지명되었다. 벤살라는 향후 최대 90일 간 국가수반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여 차기 대선을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부테플리카가 퇴진하자 그의 배후에 있던 군부, 특히 사실상의 실세인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Ahmed Gaid Salah)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규탄 시위로 이어졌다. 살라는 그동안 알제리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

2019년 12월 12일 영국 총선과 같은 날 알제리 대선이 실시됐지만 대규모 반대 시위와 일부 투표소를 겨냥한 공격 등으로 혼란을 빚었다. 대선에는 허가를 받은 압델마드지드 테분(Abdelmadjid Tebboune, 1945~) 전 총리, 알리 벤플리스( 전 총리, 아제딘 미후비(Azzedine Mihoubi, 1959~) 민주국가연합(RND) 대표, 압델아지즈 벨라이드(Abdelaziz Belaid, 1963~) 등이 후보로 출마했다. 이들은 부테플리카 독재정권에서 총리, 장관 등을 지낸 구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알제리 국민은 민주화를 열망하며 부테플리카를 쫓아냈지만 12.12 대선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날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는 수천 명이 모여 대선 반대를 주장하며 행진했다. 북부 도시 티지우주 주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최루가스를 발사했다. 또 알제리 북부 카빌리 등 일부 지역 투표소들이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투표율은 39.83%로 저조했다. 

 

대선 반대 시위대는 대선 후보들이 모두 과거 부테플리카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라며 투표 거부를 촉구해 왔다. 알제리에서는 새 대통령이 뽑혀도 군부가 정치에 계속 관여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개표 결과 압델마드지드 테분 후보가 58.15%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압델카데르 벤그리나 후보는 17.38%, 알리 벤플리스 후보는 10.55%, 아제딘 미후비 후보는 7.26%, 압델아지즈 벨라이드 후보는 6.66%를 각각 얻었다. 

 

압델마드지드 테분

2019년 12월 19일 압델마드지드 테분 신임 대통령이 취임했다. 알제 고등법원은 12월 22일 카림 타부(Karim Tabbou, 1973~ ) 민주사회연합(Social Democratic Union, UDS) 대표의 석방 요청을 기각했다. 카림 타부 UDS 대표는 '군 사기 저하'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후 바로 ‘국가 결속 저해’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재구속되었다. 테분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정치범 석방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다.

 

 

카림 타부(가운데)

12월 23일 베르베르 상징기(Berber flag) 소지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시위자 13명이 만기 출소했다. 이들의 출소를 환영하는 구금자 가족과 시민단체 등 다수의 인파가 교도소 앞에 결집하여 정권의 자의적 구금, 권력 남용을 비판하며 나머지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테분의 대통령 취임식 4일 뒤인 12월 23일 가이드 살라 합참의장이 심장마비로 알제의 아인 나자(Ain Naadja) 군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테분 당선자가 살라 합참의장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에 알제리에서는 대선 결과에 반발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사이드  셴그리하

테분 대통령은 살라의 후임에 군의 정치 개입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온 사이드 셴그리하(Said Chengriha, 1945~ ) 육군 참모총장을 임시 합참의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군의 탈정치 노선 채택 가능성을 시사하는 인사였다. 테분은 살라를 위해 3일 간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라 크다르 부레가

12월 24일 알제 고등법원은 1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구금자 9명의 재심에서, 6개월로 감형했다. 그러나 알제 고등법원은 12월 25일로 예정되었던 민주화 운동가 사미르 벤라비(Samir Benlarbi)의 가석방 심사를 연기하였으며, 87세 고령의 독립운동가 라크다르 부레가(Lakhdar Bouregaa)의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석방을 허가하지 않았다. 카치 탄사우트(Kaci Tansaout) 정치적구금자석방위원회(CNLD) 대표는 테분 정권의 화해 분위기 조성 의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주장했다.

 

12월 25일 살라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장에서 테분은 코란 제1장 알파티하(Al Fatiha)를 암송하고 묵념했다. 알제리 국영 언론들은 찬양 일색으로 살라의 죽음을 애도했다. 살라의 유해는 알제 근교 엘 하라쉬(El Harrach)에 있는 엘 알리아(El Alia) 국립묘지 내 충혼묘에 묻혔다. 일개 군인이 국가원수와 동일한 장례 예우를 받은 것은 알제리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주요 외신들은 살라의 죽음에 대해 1962년 알제리 독립 이후 권력을 독점한 최고 실권자이자 평화시민운동(Hirak)과 대립각을 세우던 권력자가 타계하였다고 보도했다. 

 

모하메드 샤르피

한편, 모하메드 샤르피(Mohamed Charfi, 1946~ ) 독립선거기구(ANIE) 대표는 장례식 하루 전 국영방송을 통해 살라의 중재로 ANIE 대표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발언함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샤르피의 발언으로 대선을 관장한 ANIE의 중립성 여부와 군의 불법적 정치 개입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었다. 

 

  알제리 독립영웅  람단 아반

2019년 마지막 금요 시위가 12월 27일 알제, 티지우주(Tizi Ouzou), 콩스탕틴(Constantine), 지젤(Jijel) 등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알제리 시민들은 정통성이 결여된 테분 신임 대통령을 비판하는 한편 '군정 반대', '언론 자유', '구속자 석방', '테분 퇴진', '민정 이양' 등의 슬로건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은 마침 FLN이 암살한 알제리 독립영웅 람단 아반(Ramdane Abane, 1920~1957) 사망 62주기여서 그를 기리는 슬로건도 다수 등장했다. 가이드 살라 합참의장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군의 정치 불개입을 믿는 알제리인은 없었다. 

 

압델아지즈 제라드

테분 대통령은 12월 28일 국제관계학 교수 출신 압델아지즈 제라드(Abdelaziz Djerad, 1954~ )를 신임 총리에 임명했다. 의회 다수당 FLN 출신의 제라드 총리는 부테플리카의 5선 출마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은 인물이었다.

 

12월 28일 사이드 살히(Said Salhi) 알제리인권총연맹(LADDH) 대표, 사회학자 나세르 자비(Nacer Djabi), 정치학자 루이사-드리스 하마두쉬(Louisa-Dris Hamadouche), 사회학자 주비르 아루스(Zoubir Arous), 모한드-아레즈키 페라드(Mohand-Arezki Ferrad) 교수 등 알제리 인권운동가, 교수, 학자, 학생활동가 등 50명은 히라크(Hirak)의 요구 사항을 효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합의된 로드맵 도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를 위한 총회 소집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하루 전 평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합 테분 정권을 규탄하고, 구금자 무조건 석방, 언론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했다. 

 

2020년 1월 2일 테분 정권은 양심수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인 독립운동가 라크다르 부레가를 비롯한 정치범 76명을 가석방했다. 장기 구속자 석방을 요구해온 구금자석방위원회(LADDH) 사이드 살히(Said Salhi) 부대표는 민중저항운동(Hirak)과 시민의 승리라면서 실질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을 이어나갈 것을 촉구했다. 살히 부대표는 그러나 감옥에 아직도  51명의 정치적 구금자가 수감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제라드 총리가 구성한 내각에 전 독재정권의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1월 3일 2020년 첫 금요시위가 알제리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시민들은 테분 정권을 향해 조속한 민정 이양과 사법부 독립, 테분 퇴진, 제라드 내각 퇴진을 요구했다. 제46차 금요시위에는 시위 방해꾼들이 등장하여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에게 물건을 던지거나 슬로건을 빼앗는 등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금요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평화시위 무력화 시도를 규탄했다. 오랑에서는 진압대가 시위 방해꾼들을 막아 시민들이 평화행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베르베르 신년을 이틀 앞둔 1월 10일에도 알제리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제47차 금요시위가 열렸다. 시민들은 베르베르 상징기를 들고 ‘개헌 반대’, ‘민주화’, ‘정치적 구금자 석방’ 등을 외치며 행진했다. 시민들은 테분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거쳐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정통성을 회복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민중저항운동(Hirak)은 당면 목표가 테분 정권의 퇴진임을 명확히 했다. 히라크(Hirak) 내부에서는 지도부 구성 문제가 대두되었다. 찬성론자들은 의회 등을 상대로 요구사항을 효율적으로 관철하기 위해서는 지도부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반대론자들은 잠정적 지도자로 거론되던 주요 인물들이 테분 정권에 의해 모두 투옥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지도부가 구성되면 테분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더욱 취약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이자 하눈

1월 6일 문화민주주의연대(Rally for Culture and DemocracyRCD), 사회주의세력전선(Socialist Forces Front, FFS), 진보변혁연합(Union for Change and Progress, UCP), 민주사회주의운동(The Democratic and Social Movement, MDS), 노동자당(Parti des Travailleurs, PT, The Workers' Party) 등 야권과 사회학자 나세르 자비, 인권변호사 무스타파 부샤쉬(Mustapha Bouchachi), 변호사 나빌라 스마일(Nabila Smail), 인권운동가 아이트 라비(Mokrane Ait Larbi), 알제리인권보호연맹(LADDH) 누레딘 베니사드(Noureddine Benissad) 대표 등 사회운동가, 지식인, 학자, 기자 등 다수는 카림 타부 USD 대표, 루이자 하눈(Louisa Hanoune, 1964~ ) 노동자당(PT) 대표, 압델와합 페르사위(Abdelwahab Fersaoui) 청년행동연합(Rassemblement Action Jeunesse, RAJ) 대표 등 100여 명의 양심수, 정치적 구금자를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월 17일 수도 알제에서 열린 제48차 금요시위에서 시민들은 '정치범 석방', '군부독재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최근 시위 경계 조치를 강화한 경찰을 규탄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는 '2020 세계인권보고서'에서 2019년 알제리에서 독립 이래 가장 활발한 반정부시위가 개최되었으나, 다수의 정치인 및 인권운동가가 체포되는 등 표현의 자유가 크게 억압받았다고 발표했다. 

 

1월 31일 알제리 전역에서 열린 제50차 금요시위에서 시민들은 ‘소피안 메라크시(Sofiane Merrakchi) 석방’, ‘셰일가스 반대’, ‘진정한 변화’ 등의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2019년 9월 방송장비 반입 관련법 위반으로 알제 엘-하라크(El-Harrach) 구치소에 임시구금된 레바논 출신의 소피안 메라크시 기자는 언론자유 보장과 무죄석방을 요구하며 1월 29일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테분 정권은 정치적 구금자를 여전히 석방하지 않은 채 민중저항운동 히라크(Hirak)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으로 일관했다.  

 

2월 3일 비르 무라드 라이스(Bir Mourad Rais) 지방법원은 2019년 9월 국가결속 저해 혐의로 임시구금된 사미르 벤라비(Samir Benlarbi) 히라크(Hirak) 운동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블리다 군사법원은 2월 10일 항소심에서 국가내란음모죄, 군권저해죄 등으로 하눈 노동당 대표에게 징역 9개월, 집행유예 2년 3개월을 선고했다. 군사법원 검사는 하눈 대표에게 20년 형을 구형한 바 있다. 하눈 대표는 2019년 5월 9일 이래 임시구금 상태였기 떼문에 복역 기간 만료로 재판 종료 직후 석방되었다. 하눈 대표는 부테플리카의 대통령 5선 출마에 반대하였으며, 부테플리카의 사임 이후에도 군의 정치 개입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다. 

 

2월 10일 블리다 군사법원은 권력 남용과 부패 혐의로 부테플리카 전 대통령의 동생 사이드 부테플리카(Said Bouteflika)부테플리카 정권에서 감시안보부장을 지낸 바치르 타르타그(Bachir Tartag)정보국장을 지낸 모하메드 메디엔(Mohamed Mediene)에게 각각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칼레드 네자르(Khaled Nezzar) 전 국방부 장관, 네자르의 아들인 로트피 네자르(Lotfi Nezzar), 파리드 벨함딘(Farid Benhamdine) 제약회사 사장은 해외로 도주했다.   

 

민중저항운동 Hirak 1주년인 2월 21일 제53차 금요시위는 알제리 전역에서 대규모로 개최되었다. 알제에서만 수십만 명의 시민이 ‘구정권 반대’, ‘정치적 구금자 석방’, ‘정치적 자유와 권리 보장’ 등의 슬로건을 들고 행진에 참여함으로써 구정권 축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2월 25일 하눈 노동당(PT) 대표는 석방 후 처음으로 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고, 테분 정권이 취임 후에도 변화를 위한 단계를 시작하지 않았다며, 여전히 구정권의 관행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2월 26일 시디 음하메드(Sidi M’hamed) 지방법원은 테분 대통령의 아들 칼레드 테분(Khaled Tebboune)의 금품수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사업가 겸 부동산업자인 카멜 쉬키(Kamel Chikhi)는 알제 벤 아크눈(Ben Aknoun) 건물 설립 허가를 위해 당시 주택부 장관이었던 테분 대통령의 아들 칼레드 테분에게 청탁을 위한 금품을 증여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검사는 칼레드 테분에 대해 징역 2년을 구형했지만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압데레자크 마크리

2월 27일 압데레자크 마크리(Abderezak Makri, 1960~ ) 평화사회운동(Movement of Society for Peace, MSP) 대표는 극단적 세속주의(laic extremiste) 세력이 Hirak에 침투했다고 비판하고, Hirak은 정당과 협력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시위자들은 마크리 대표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Hirak 운동이 정치적,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는 시민운동임을 강조했다.

 

2월 28일 알제리 전역에서 제54차 금요시위가 열렸다. 코비드-19 확산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테분 대통령 퇴진’, ‘민정 이양, 군정 반대’, ‘진정한 변화’ 등의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알제리 경찰은 2월 29일 알제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시민 50여 명을 체포했다.   

 

3월 6일 제55차 금요시위는 토요일에도 이어졌다. 알제리 전역에서 히라크에 참여한 시민들은 ‘구정권 반대’, ‘정치적 구금자 석방’, ‘부테플리카 재판 회부’, ‘군정 반대, 민정 이양’ 등의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3월 13일 제56차까지 이어지던 금요시위는 코비드-19 확산 방지를 위해 3월 20일 제57차 금요시위를 일시 중단했다. 2019년 2월 22일 금요시위 개최 이래 최초로 행진이 중단되었다.  

 

3월 24일 알제 고등법원은 타부 UDS 대표 항소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 이는 시디 음하메드 지방법원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6개월, 5만 디나르의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보다 무거운 형량이었다. 타부 UDS 대표는 야권 및 민중저항동의 대표적 인물로, 군 사기 저하 혐의로 2019냔 9월 11일 임시구금 후 재판 없이 장기간 구금상태가 연장되었다. 알제리 야권 및 시민사회단체는 타부 대표가 테분 정권의 정치적 탄압 희생자라며 석방을 요구했다. 

 

마리 아레나(Maria Arena) 유럽의회 인권분과위원회장 등 유럽의회 의원들은 타부 대표의 항소심이 변호인단에게 사전 고지 없이 개최되었다며, 공정한 재판에 대한 권리 침해일 뿐 아니라 국제인권협약에도 어긋난다고 비판했다.국제 인권보호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은 테분 정권이 야권 지도자의 정치적 표현을 이유로 불공정한 판결을 내렸다며 이를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변호인단은 재판을 사전 고지하지 않은 재판부를 상대로 변호권 침해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타부 대표가 재판 당일 실신하여 의무실로 이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강행한 재판부의 비인간적 행태를 비판했다. .

 

문화민주당(RCD)과 알제리인권연맹(LADDH), 무스타파 부샤쉬 인권변호사 등은 알제 고등법원의 결정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알제 변호사협회는 테분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에게 부당한 판결을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4월 1일 시드 음하메드 지방법원은 부정축재, 자금세탁, 자금 불법반출 등 부정부패 혐의로 압델가니 하멜(Abdelghani Hamel) 전 경찰청장에게 징역 15년형과 800만 디나르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부인과 자녀 4인에게는 최소 3년에서 최대 10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부테플리카 정권 시절 실권자 중 한 명인 하멜 전 경찰청장은 지난 2019년 7월 자녀들 소유 기업 10여 개를 이용한 부정축재 등 부패 혐의로 예비구금된 바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RSF) 4월 21일 발간한 2020년도 '세계 언론자유 보장 보고서'에서 코비드-19로 인한 보건위기가 심화되고 Hirak 운동이 일시 중단된 상황을 틈타 테분 정권이 독립 언론사들을 탄압하고 구금된 기자들의 석방을 미루는 등 알제리 내 언론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알제리는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 보장 순위에서 세계 180국 가운데 146위를 기록했다. 

 

4월 15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암마르 벨히메르(Ammar Belhimer) 공보부 장관이 '마그레브 이머전트(Maghreb Emergent)'와 '라디오 앰(Radio M)' 등 온라인 민영 언론사 두 곳을 대통령 명예훼손 및 모욕죄로 사이트 접속을 차단하였다며 언론검열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그레브 이머전트와 라디오 엠은 테분 정권에 대해 비판적 성향의 독립 언론으로 Hirak 민중저항운동을 지지해왔다. Radio M 논설위원 겸 국경 없는 기자회 해외통신원인 칼레드 드라레니(Khaled Drareni) 기자는 지난 3월 금요시위 현장 취재 중 연행되어 현재까지 구금 상태에 있다. 

 

5월 1일 테분 대통령은 국영언론 간담회에서 알제리 내 언론의 자유 보장에는 동의하나 명예훼손 및 모욕적 언사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5월 8일 테분은 5.8 참사 75주년 기념 대국민 담화에서 프랑스 정부에게 식민지배 기간 알제리를 대상으로 자행한 범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5월 8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프랑스는 세티프(Setif), 겔마(Guelma) 주 등에서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알제리 민중에게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타이옙 지투니

5월 28일 과거 여당이었던 민주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 démocratique, Democratic National Rally, RND)은 제6차 전당대회에서 타이옙 지투니(Tayeb Zitouni) 전 알제리국제박람회장(SAFEX) 대표를 신임 당대표로 선출했다. RND는 아메드 우야히아(Ahmed Ouyahia, 1952~ ) 전 대표가 총리 시절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2019년 6월 구속되자 아제딘 미후비(Azzedine Mihoubi), 1959~ ) 전 문화부 장관을 임시 대표로 선출하였다. 지투니 신임 대표는 2016년 우야히아 대표와의 불화로 당에서 제명당한 바 있다. 

 

아부 엘 파들 바지

5월 30일 FLN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변호사 출신의 아부 엘 파들 바지(Abou El Fadl Baadji) 신임 대표를 선출했다. FLN은 모하메드 제마이(Mohamed Djemai) 전 대표가 2019년 9월 부패 및 증거문서 인멸 혐의로 구속된 이후 알리 세디키(Ali Seddiki)가 임시 대표를 맡았다. 

 

압델말렉 드루크델

2020년 6월 4일 플로랑스 파를리(Florence Parly) 프랑스 국방장관은 프랑스군이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 알카에다 북아프리카 지부)의 수장 알제리인 압델말렉 드루크델(Abdelmalek Droukdel, 1970~2020)을 말리 북부 지역에서 제거하였다고 발표했다. 

 

2020. 7. 11.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