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비아 지도
감비아 공화국(Republic of The Gambia)은 보통 감비아(The Gambia, Gambia)라고 부른다. 국토는 대서양에서 감비아 강을 따라 동쪽 내륙으로 320km까지 들어간 길쭉한 형태이다. 폭은 남북으로 해안쪽이 48km, 동쪽 끝이 24km다. 감비아 강 하구를 제외하고 주변이 세네갈에 둘러싸여 있어 국가 속의 국가(고립영토) 형태를 띠고 있다. 수도는 반줄(Banjul)이다. 국토 면적은 약 만7백㎢, 인구는 170만 명(2007)의 소국이다.
감비아는 국토 전역이 높이 100m 이하의 평탄한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니의 푸타잘롱(Fouta Djallon, Futa Jallon) 고원에서 발원한 감비아 강은 해발 25∼75m의 저지대를 가로질러 국토를 관통하여 서쪽의 대서양으로 흐른다. 동부의 협곡 사이에는 넓고 낮은 언덕들이 있으며, 서부에는 보다 낮고 작은 모래언덕들과 모래평원이 펼쳐져 있다. 경작지는 국토의 약 17%에 불과하다.
감비아는 사하라 사막과 해안 삼림지역 사이의 강우량이 적은 사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매우 덥고 강우량이 많은 계절(6∼10월)과 선선하고 건조한 계절(11∼5월)로 구분되는 아열대 사바나 기후다. 건기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먼지가 많은 북풍인 하마탄(Harmattan)이 불어온다. 비는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내리며, 연강우량은 760∼1400㎜다. 3~4월은 평균 강우량이 1mm 밖에 안되고, 8월은 500mm에 이른다. 연중 기온은 16∼43℃로 4∼6월의 기온은 32℃를 넘는다. 1월의 기온은 15~23℃로 비교적 서늘한 편이다. 고지대는 사바나 초원지대이고, 저지대에는 다양한 습지가 있다. 감비아 강 하류에는 맹그로브 늪지가 발달되어 있다. 사바나 삼림지나 감비아 강 일대에는 표범, 침팬지, 매너티(manatee), 일런드(eland)영양, 악어 등이 서식한다.
9~10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은 감비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10세기에 아랍 상인들과 학자들은 서아프리카의 여러 상업 중심지에 공동체들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로를 통해서 금과 상아 교역을 했다. 11~12세기경 세네갈 강 유역에 있었던 타크루르(Takrur, Tekrur) 왕국, 고대 가나(Ancient Ghana) 제국, 가오(Gao)의 지배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인 무슬림들을 신하로 등용하였다. 13세기경에는 월로프족, 말링케족, 풀라니족 등이 이 지역에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초 감비아는 말리 제국(Mali Empire)의 속국이 되었다. 1455년 포르투갈인들이 감비아 강을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은 감비아의 무역을 장악하였다.
1588년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 안토니오(Antonio, Prior of Crato, 1531~1595)는 감비아 강에 대한 무역권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여왕으로부터 전매특허를 얻은 영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1618년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는 영국 회사에 감비아와 황금해안(Gold Coast, 지금의 가나)의 무역을 허가했다. 1651년 폴란드의 봉토인 쿠를란트(Courland) 공작령을 통치했던 독일인 야코프 케틀러(Jacob Kettler, 1610~1682) 공작은 감비아의 일부를 사들여 식민지로 삼았다. 1663년 영국은 감비아 강의 섬 하나를 그곳 족장에게서 사들여 제임스 요새를 건설했다. 1681년에 프랑스도 영국 요새 맞은편 북쪽 강기슭의 알브레다(Albreda)를 점령했다. 1779년 프랑스가 영국군을 공격해 제임스 요새를 파괴시켰다. 이후 18세기 말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세네갈 강과 감비아 강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대서양 횡단무역이 성행하던 15~17세기까지 3세기 동안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약 3백만명의 노예들이 감비아를 통해서 반출되었다. 대서양 횡단무역 이전 아랍 상인이나 부족전쟁에 의해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팔려갔는지 알 길이 없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노예들 대부분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잡혀서 유럽인들의 하인으로 팔려갔다. 노예들은 주로 부족전쟁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했거나 납치된 사람들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노예들은 노동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던 서인도제도와 북미로 끌려갔다. 미국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Palmer Haley, 1921~1992)가 쓴 소설 '뿌리(Roots)'의 배경이 바로 감비아다. 그래서 이 소설을 TV 시리즈로 만들 때도 감비아에서 촬영했다.
1803년 베르사유 조약(1783)에 따라 감비아 강은 영국의 소유가 되었고, 프랑스는 알브레다 고립영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1807년 영국은 제국 내 전지역에서 노예무역을 금지시켰지만, 감비아에서의 노예무역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1816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저지하기 위해 감비아 강 어귀의 배서스트(Bathurst, 지금의 반줄) 요새를 세웠다. 반줄은 당시 시에라리온의 영국 총독이 관할지역이었다. 1857년 프랑스는 알브레다 고립영토를 영국에 할양하였다. 1888년 감비아는 시에라리온과 분리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1889년 영국과 프랑스는 감비아 국경선을 획정하였다. 1894년 영국은 마침내 감비아를 식민지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1901년 영국이 행정과 입법 기관의 설치를 허용하자 감비아는 자치권 획득을 추진했다. 1906년 감비아에서 노예의 소유를 금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감비아인으로 편성된 군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버마 전선에서 싸웠다. 반줄은 미국 공군의 기항지와 연합군 함대의 정박항으로 이용되었다.
1959년 보호령인민당(Protectorate People's Party, PPP)에 입당한 다우다 자와라(Dawda Jawara, Sir Dawda Kairaba Jawara, 1924~)는 당명을 온건 사회주의 정당인 인민진보당(People's Progressive Party, PPP)으로 바꾸고 당수가 되었다. 인민진보당(PPP)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다우다 자와라는 1960년 선거에서 감비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교육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1년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것은 영국이 선거에 대비하여 그의 정적을 임시 총리로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 총선에서 PPP가 승리하자 자와라는 총리가 되었다. 1963년 감비아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확보했다.
1965년 2월 18일 서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식민지였던 감비아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독립 직후 감비아는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Alexandra Mary, 1926~)를 대체할 국가원수를 선출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헌법의 개정에 필요한 2/3선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 비밀투표, 공정선거 등이 보장된 가운데 실시된 국민투표는 해외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1966년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PPP가 승리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1970년 4월 24일 실시된 2차 국민투표에서 감비아는 영연방(Commonwealth)에 속한 공화국이 되었으며, 자와라 수상은 국가원수로 선출되었다. PPP는 1972년과 1977년의 선거에서도 연속해서 승리하였다.
1981년 7월 자와라 대통령이 찰스(Charles Philip Arthur George Windsor, 1948~) 황태자와 다이애나(Diana Frances Spencer, 1961~1997) 황태자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쿠코이 삼바 산양(Kukoi Samba Sanyang, 1952~)은 프롤레타리아(무산자) 독재국가 건설을 목표로 좌파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혁명평의회(National Revolutionary Council, NRC)를 설치했다. 자와라는 런던에서 세네갈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세네갈 군대는 자와라 정권을 위해 반군을 진압했다. 쿠데타 진압으로 세네갈과 관계가 긴밀해진 감비아는 1981년 12월 세네-감비아(Sene-Gambia) 국가연합을 결성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국가연합의 목표는 국가와 군대, 경제와 화폐의 통합이었다.
1982년 세네-감비아(Sene-Gambia)국가연합이 출범하자 자와라는 연방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양국은 군사 및 안보의 통합, 경제 및 통화의 단일화, 외교정책과 통신의 일원화를 도모하는 한편 양국 연합단체들을 창설했다. PPP는 1982년과 1987년 선거에서도 연속 승리했다. 세네-감비아 국가연합의 결성 이후 감비아와 세네갈은 각각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다가 1989년 9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1992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자와라 대통령은 5선에 성공하였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감비아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래된 다당제 민주정치의 역사를 가진 비교적 안정된 나라였다. 자와라가 이끄는 PPP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감비아의 정치를 지배했다.
1994년 7월 야햐 자메(Yahya Jammeh, 1965~) 중위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와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사 쿠데타로 독립적인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3권의 분립을 보장했던 1970년의 헌법은 정지되었다. 야햐 자메는 임시군사통치위원회(Armed Forces Provisional Ruling Council, AFPRC) 의장에 취임한 뒤, 두 차례에 걸친 친위 쿠데타로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1995년 3월 임시군사통치위원회(AFPRC)는 민정이양의 일환으로 헌법개정위원회(Constitution Review Commission, CRC)를 설치했다.1996년 8월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었다.
9월로 예정된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 직전 자메 정권은 자와라를 비롯한 PPP 소속 정치인들과 고위 정부관료들의 정치활동을 2001년 7월까지 금지시키는 조치(decree 89)를 취하였다. 9월 자와라의 출마를 봉쇄한 상태에서 대선이 실시되어 대령으로 예편하고 출마한 자메는 5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 부정선거 시비로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자메는 이를 무시하였다. 1997년 1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쿠데타에 참여했던 군장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가재건애국동맹(Alliance for Patriotic Reorientation and Construction, APRC)이 45석 가운데 3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1998년 1월 감비아는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4월 학생 의문사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보안군이 발포하여 14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2001년 5월 국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각 주에 속한 군(District)의 장 선거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제도로 변경시켰다. 2001년 7월 자메는 군사혁명 기념일에 정치활동 금지조치(decree 89)의 시행을 중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PPP당이 10월로 예정된 대선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decree 89는 폐지되었지만 헌법에는 여전히 반정부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10월 18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햐 자메는 52.8%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하였다. 만딩고족 출신의 변호사이자 국영 텔레비젼 방송국의 언론인이었던 통일민주당(United Democratic Party, UDP)의 우사이누 다르보에(Ousainou Darboe, 1948~) 후보는 32.67%를 얻어 2위, 국민화해당(National Reconciliation Party, NRP)의 하마트 바흐(Hamat Bah) 후보는 7.8%를 얻어 3위를 차지하였다. PPP는 대선 후보를 포기하고 통일민주당(UDP)의 다르보에 후보를 지지하였다. 2002년 1월 제1 야당 통일민주당(UDP)이 선거 불참을 선언한 뒤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국가재건애국동맹(APRC)은 48석 가운데 43석을 휩쓸었다. 43석 중 33석은 무투표 당선자들이었다.
2003년 10월 자메 정권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Operation No Compromise' 정책을 출범시켜 주요 정치인과 관료 등을 구속했다. 2004년 12월 감비아의 주요한 독립신문 '더 포인트(The Point)'의 편집인으로 자메 정권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던 데이다 히다라(Deyda Hydara, 1946~2004)는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2005년 1월 UDP, PPP, 국민화해당(NRP), 민주국민운동(National Democratic Action Movement, NDAM), 사회주의인민독립민주기구(People's Democratic Organisation for Independence and Socialism, PDOIS) 등 5개 야당은 반정부 연합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민주발전국민연합(National Alliance for Democracy and Development, NADD)을 결성하였다. 대통령 선거 논의로 긴장이 높아가던 2006년 3월 의심스런 군부 쿠데타 기도가 적발되었다. 모리타니를 방문하던 중 귀국한 자메는 쿠데타 가담 혐의를 받은 다수의 장교들을 체포하였으며, 참모총장을 비롯한 중요 직책에 있던 장교들을 파면시켰다. 감비아 정부는 세네갈이 쿠데타에 개입되어 있다는 심증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쿠데타 미수사건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으로 자메 자신이 조작한 자작극이었다고 한다.
2006년 9월 실시된 대선에서 자메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 가장 강력한 야당 후보로 떠오른던 우사이누 다르보에를 자메 정권이 체포하자 민주발전국민연합(NADD)은 대선 후보를 내지도 못했다. 자메는 '나를 지지한 지역은 발전시킬 것이지만, 나를 지지하지 않은 지역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아라.'고 유권자들을 협박했다.
야햐 자메가 199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래 감비아는 인권과 언론 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왔다. 1994년 이래 수십명의 언론인과 정적들이 실종되거나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2003년 영연방 변호사협회는 감비아 정부에 법률에 의한 통치를 호소하는 등 사법부의 독립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변호사들은 보복의 공포로 인권침해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고, 희생자 가족들은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언론과 방송은 정부가 장악하고 철저하게 통제한다. 신문이나 방송국을 설립하려고 해도 허가비용이 너무 비싸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체포되거나 벌금을 물어야 하며, 협박을 당하거나 테러를 당하기 일쑤다.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나 시위도 금지되어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는 자메 정권이 언론인들에 대한 살해위협과 불법적인 체포, 방화, 살인을 자행하면서 감비아를 공포의 경찰국가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자메는 자신이 약초와 바나나로 만든 합성물질이 에이즈(AIDS)를 치료할 수 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가 하면, 동성애자들을 참수(斬首)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는 수도 반줄에 쿠데타를 찬양하는 대형 아치를 세우고 자신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도로변 도처에 자신의 미소 띤 대형 초상화들을 걸어놓게 하였다.
감비아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중심제 공화국이라는 조항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중임제한이 없어 종신 대통령의 길을 열어 놓았다. 대통령은 국가 최고원수로서 부통령과 내각의 임명권을 가진다. 또, Western, North Bank, Lower River, MacCarthy Island, Upper River 등 5개의 행정구역(Division)의 주지사(Regional Commissioner)도 임명한다. 입법권은 단원제 국민의회에 있으며, 의석 수는 53석이다. 53석 가운데 48석은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국회의장을 포함한 5명의 의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주요 정당은 집권 여당인 APRC를 비롯해서 UDP, NRP, PPP, 민주국민운동(NDAM), 사회주의인민독립민주기구(PDOIS) 등이 있다. 감비아의 주요 정당들은 한국처럼 정치적 이념보다는 정치적 보스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후진적 정치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비아 법령제도는 영국 관습법과 코란, 관습법을 기초로 한다. 최고 사법기구인 최고법원은 독립적인 사법위원회의 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지명하는 법관들로 구성된다.
감비아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주로 땅콩의 생산과 수출에 토대를 둔 개발도상국이다. 1인당 GNP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천연자원의 부족과 시장규모의 빈약, 국민경제 기반의 낙후, 안정적인 국가 수입원 부재 등의 구조적 요인이 감비아의 경제발전을 어렵게 하고 있다. 자메의 쿠데타 이후 해외원조가 중단되고 관광업마저 부진하여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다만 관세가 낮고 행정체계가 정비되지 않아 세네갈 등 인근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중개무역이 활성화되었다. 1998년 IMF는 감비아 정부와 빈곤감축 및 성장계획(Poverty Reduction and Growth Facility, PRGF)에 합의하고 283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IMF의 권고에 따라 자메 정권은 정부 지출을 축소하고 관세기반을 확대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정부 수입의 증가를 위해서도 유가를 인상하고, 관세면제를 축소했으며, 세무행정을 강화했다.
농업은 GDP의 30%를 차지하며, 노동력의 70%가 종사한다. 땅콩은 경작지의 55%에서 재배되고 있다. 땅콩의 생산량 변화와 세계시장의 시세변동에 따라 국내경제는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야자유도 주요 농산물이다. 식용작물은 쌀, 카사바, 마, 수수, 기장 등을 재배한다. 축산업은 소, 양, 염소가 주를 이룬다. 어업은 새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하자원은 빈약하여 지르콘과 고령토가 약간 매장되어 있을 뿐이다. 공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이며, 제조업은 거의 식품가공업에 국한되어 있다. 전력생산은 전적으로 수입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감비아 강은 해안으로부터 240Km까지 큰 배들이 출입할 수 있다. 관광산업은 감비아 제1의 외화 수입원이다. 관광객 중 55%는 영국인이고 스웨덴인과 독일인이 그 뒤를 잇는다. 수입 초과국인 감비아는 국제수지 적자를 메꾸기 위해 대규모의 해외원조가 필요하다. 이전에는 영국과 EU 국가들이 감비아의 주요 수출국이었으나 최근에는 세네갈과 미국, 일본 등으로 옮겨가고 있다. 기니비사우와 가나도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다. 감비아의 주요 수입국은 덴마크,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코트디브와르, 네덜란드 등이다.
감비아 국민을 구성하는 종족은 다양하다. 주요 부족은 만딩카(만딩고, 말링케)족 42%, 풀라(풀라니)족 18%, 월로프족 16%, 디올라(졸라)족 10%, 세라훌리(Serahuli, 소닌케)족 9% 등이다. 만딩카족은 주로 감비아 강 하구 지역에 거주한다. 감비아에는 유럽인과 레바논 출신 이주자들을 포함한 약 3500명의 비아프리카인이 거주한다. 농사철에는 세네갈이나 기니, 말리에서 유입되는 노동자들로 인구가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헌법에 공용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영어는 입법, 행정, 사법부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언어다. 그외 만딩고어와 월로프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이슬람 90%, 기독교 8%, 토착신앙 2% 순이다. 감비아의 남부와 서부에 거주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주로 로마 카톨릭이다. 그외 영국 국교, 감리교, 침례교, 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ts), 여호와의 증인, 복음주의 종파 등의 소수 공동체들이 있다. 남아시아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은 불교나 바하이교(Baha'i Faith)를 믿는다.
감비아에는 사회복지제도가 없으므로 국민 보건상태는 매우 열악하다. 상당수의 국민이 이질이나 말라리아, 주혈흡충병, 결핵을 앓고 있다. 주요 사망원인은 말라리아다. HIV/AIDS 감염인구는 2003년 6월까지 약 6800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서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은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가장 높다. 기대수명은 1970년대 37세에서 2002년 53세로 늘어났다. 교육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초등교육은 학령아동의 80% 정도가 수학하고 있으나, 중등교육으로 올라가면 33%로 줄어든다. 감비아 전체 인구의 약 75%가 문맹이다.
감비아는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영국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어권 국가인 세네갈과는 지리적 특성상 협력과 긴장 관계가 상존한다. 자메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서구 강대국들은 감비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였다. 특히 미국은 해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 508항을 적용하여 2002년까지 원조를 미루었다. 이에 감비아는 같은 영어권 국가로 지역강국인 나이지리아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5년부터 자메 정권은 외교를 확대하여 리비아, 대만, 쿠바 등의 국가들과도 선린관계를 확립하였다. 자메는 집권 이후 UN 제재에도 불구하고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수차례 방문하여 카다피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으며, 대만의 UN 가입 결의안을 주도적으로 제출하는 등 대만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대만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미국의 국제형사재판소(ICC) 면책 양자조약, 아프리카 성장 및 기회법(AGOA) 적용 등 미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리비아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한국은 감비아와 1965년 4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8년 7월에 의료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은 1974년 이후 주세네갈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양국은 1976년 어업협력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1985년에는 경제기술협력협정을 맺었다. 1984년 9월에는 자와라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방문하였다. 같은 해 10월 감비아는 주미 대사를 주한 겸임대사로 임명하였다. 1988년에는 다르보 부통령이 방한하였다. 감비아에 체류하는 한국 교민은 32명(2007년)이다.
조선은 감비아와 1973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75년 5월 수도 반줄에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1981년 7월 감비아에서 발생한 쿠데타 음모와 관련된 혐의로 1982년 조선대사관은 폐쇄상태가 되었다. 감비아 정부가 주세네갈 조선대사의 겸임 아그레망 신청을 거부하면서 양국관계가 동결되자 1988년 2월 조선대사관은 완전 폐쇄되었다. 이후 조선은 주기니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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