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열반종 총본산 은이산(隱里山) 와우정사(臥牛精舍)를 찾아서

林 山 2013. 7. 26. 10:27

곱등고개에서 바라본 은이산과 형제봉


어느 날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을 지나가다가 무엇인가 내 발길을 잡아끄는 듯하여 와우정사(臥牛精舍)에 들렀다. 와우정사를 품고 있는 산은 은이산(隱里山, 366m)이다. 은이(隱里)는 '숨은 마을’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은리'였을 것이나 후에 '은이'로 변했을 것이다. 은이산 북쪽 계곡인 양지면 남곡리 은이골은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던 곳이다. 1822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김대건과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1827년 은이골로 들어와 숨어 살았다. 1836년 김대건은 은이골에서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았다. 


은이골은 김대건이 사제가 되어 돌아와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본당이 있던 곳이다. 김대건은 은이골을 중심으로 경기도 이천, 용인, 안성 등지로 다니면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은이라는 이름은 한국의 천주교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불교 열반종 연화산 와우정사(大韓佛敎涅槃宗蓮花山臥牛精舍) 표지석


넓은 마당 한켠에는 전서체(體)의 하나인 소전체(小體)로 새긴 '대한불교 열반종 연화산 와우정사(大韓佛敎涅槃宗蓮花山臥牛精舍)'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에는 은이산을 불교식 이름을 붙여서 연화산(蓮花山)이라고 했다. 은이산이라는 산명을 버리고 연화산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화(蓮花)는 세속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 곧 부처를 상징한다. 따라서 와우정사를 품은 산을 연화산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산이 불교의 영역, 부처의 세계임을 선언한 것이다. 


와우정사(臥牛精舍)는 1970년 실향민인 해암해곡(海巖海谷) 삼장법사(三藏法師, 속명 김해근)가 삼국시대의 호국불교를 재현하고 한반도 평화통일과 세계평화의 염원을 담아서 창건한 호국사찰로 대한불교 열반종(大韓佛敎涅槃宗)의 총본산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절이 자리잡고 있는 터가 암소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명당이라서 와우정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삼장법사는 1960년대부터 TBC 동양방송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방송 통폐합 이후에는 KBS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KBS 사우회 회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반종(涅槃宗)은 중국 13종의 하나로 대승불교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열반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한다. 열반경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열반을 종교적,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편찬한 경전이다. 열반종은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에 따라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정진하여 열반적정(涅槃寂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증득하고, 나아가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한다.


열반경의 한역본(漢譯本)은 세 가지가 있다. 416년에서 423년 사이에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이 40권으로 번역한 것이 북본열반경(北本涅槃經)이다. 북본(北本)은 석가모니가 80세 되던 해 왕사성을 출발하여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사라쌍수(娑羅雙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곳에서의 마지막 설법, 열반 후의 화장, 유골의 분배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핵심 내용은 열반의 특성과 법신(法身)의 상주(常住),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천제(一闡提, 절대 성불할 수 없다는 대죄인) 성불설 등에 대해 설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된 것은 북본이다.


420년에서 479년 사이에 남조 유송(宋)의 혜엄(慧嚴)과 도량사(道寺)의 혜관(慧觀) 등이 36권으로 번역한 것이 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이다.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참조하여 북본의 번역에서 모호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재편집한 것이다. 내용은 북본과 같다.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3권으로 번역한 것이 법현본열반경(法顯本涅槃經)이다. 


남조에서는 유송(劉宋)의 혜정(慧靜)과 정림(靜林), 남제(南齊)의 승종(僧宗), 양(梁)의 보량(寶亮)과 법운(法雲), 진(陳)의 경소(警韶) 등이 열반경을 주석하고 강경(講經)하였다. 북조에서도 북위(北魏)의 담회(曇淮)와 혜광(慧光), 북제(北齊)의 법상(法上), 후주(後周)의 도안(道安) 등이 열반경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다. 


육조를 통일한 수(隋)나라에 들어와서도 혜긍, 지취(智聚)에 의한 열반경의 연구와 강경, 주석은 계속되었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523~592) 문하의 선주(善胄)와 동진(童眞), 법청(法聽)은 수대의 열반종주가 되었다. 이처럼 열반경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육조)와 수대의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태산(天台山)의 지의(智顗)선사가 '법화경(法華經)'을 토대로 열반의 교지(敎旨) 흡수해서 새로이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고, 당(唐)대의 법상종(法相宗)과 화엄종(華嚴宗) 등 여러 종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열반종은 점차 소멸의 길을 걸었다.

 

우리나라의 열반종은 고구려 영류왕 6년(623년) 고구려의 고승 보덕(普德)이 개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보덕은 고구려 용강현(龍崗縣) 사람으로 고구려의 반룡사(盤龍寺)에서 주석하였다. 보장왕(寶藏王)이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불교를 탄압하자 650년 비래방장(飛來方丈)으로 백제의 완산주 고달산(孤達山)으로 이주하여 경복사(景福寺)를 창건하였다.


보덕의 상수제자 11인은 8대 가람을 창건하였다. 금취(金趣)는 금동사(金銅寺),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진구사(珍丘寺),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 일승(一乘)과 그의 제자 심정(心正)은 대원사(大原寺),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 사대(四大)와 계육(契育)은 중대사(中臺寺), 개원(開原)은 개원사(開原寺),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지었다. 


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은 보덕의 강하에서 열반경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웠고, 경흥(景興)과 대현(大賢)도 열반종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13종인 성실종(成實宗), 삼론종(三論宗), 구사종(俱舍宗),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염불종(念佛宗), 밀종(密宗), 선종(禪宗),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이 도입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열반종은 율종, 법성종(法性宗), 화엄종, 법상종 등과 함께 교종(敎宗)의 5대 종단을 이루었다.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교종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던 선종(禪宗)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선종은 9세기 초 도의(道義)가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하면서 널리 퍼졌다. 이어 홍척(洪陟)의 남원 실상사 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哲)의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桐裏山門), 현욱(玄昱)의 창원 봉림사 봉림산문(鳳林山門), 도윤(道允)의 영월 흥녕사(법흥사) 사자산문(獅子山門), 범일(梵日)의 강릉 굴산사 사굴산문(闍崛山門), 낭혜(郎慧, 無染)의 보령 성주사 성주산문(聖住山門), 도헌(道憲)의 문경 봉암사 희양산문(曦陽山門), 이엄(利嚴)의 해주 광조사 수미산문(須彌山門) 등 이른바 9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했다. 교종의 5대 종단과 구산선문을 일컬어 5교9산(五敎九山)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조계종(曹溪宗),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화엄종, 총남종(摠南宗), 자은종(慈恩宗), 신인종(神印宗), 남산종(南山宗), 도문종(道門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 등 11개의 종단으로 분화되었다. 이 중 화엄과 자은, 총남, 중신, 시흥을 5교(五敎), 조계와 천태를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양종(五敎兩宗)의 종파를 이루었다.  


이상한 점은 고려시대에 성립된 종파에서 열반종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개성 흥왕사(興王寺)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묘지(墓誌)에 열반종은 계율종(戒律宗), 법상종, 법성종,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과 함께 육학종(六學宗)의 하나로 나온다. 당시 육학종은 불교의 전공분야였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도 열반종은 학종(學宗)이었을 뿐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지는 못했으며, 열반경이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은 맞지만  종파로까지 발전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열반종은 종파가 아니라 당시 승려들의 전공분야인 학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종은 통일신라시대 교종의 5대 종단 가운데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반면에 열반종은 종파 또는 종단이 아니라 학종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설이 맞을까? 통일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열반종은 하나의 종파를 이루고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학종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한 시기였다. 태종은 고려시대의 11개 종단을 7개 종단으로 통폐합하여 242개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은 모두 폐사시켰다.  세종은 1424년 7종 가운데 조계종과 천태종, 총남종의 3종을 합하여 선종, 화엄종과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의 4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통폐합시켰다. 그 결과 각 종파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되어 종단과 종명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불교에 대한 탄압이 이어져 종단의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1960년대까지 열반종은 전국에 20개의 사찰과 70여 개의 폐사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이 창종한 이후 1970년 삼장법사는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에 열반종 포교당을 설립하고 대한불교 열반종을 중흥시켰다. 삼장법사는 통일신라시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열반종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는 조계종과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법화종을 비롯해서 관음종, 총화종, 보문종, 원융종, 총지종, 조동종, 염불종, 법상종, 진언종, 법륜종, 본원종, 일붕선교종, 대승종, 삼론종, 열반종, 미타종, 여래종, 대각종, 미륵종, 일승종. 승가종, 연화종, 법사회, 약사여래종, 정토종, 천지종, 해인종, 화엄종, 임제종, 원효종 등 35개 종단이 있다.   


대한불교 열반종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열반불이다. 소의경전은 열반경 외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과 '목련경(目蓮經)' 등을 부경(附經)으로 한다.  


대한불교 열반종은 1978년 와우정사를 총본산으로 정하고, 1986년에는 '한국불교 와우정사' 재단법인으로 문공부에 정식 등록했다. 1991년에는 대한불교 열반종이라는 종단 이름도 등록했으며, 1992년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가입했다. 대한불교 열반종은 세계불교도총연맹, 세계불교문화 교류협회, 세계불교도 우의회, 세계불교 승가회 등을 통하여 140여 국가와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불두(佛頭)


와우정사는 일주문도 없고 어딘지 모르게 조계종 사찰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에는 커다란 비단잉어들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연못 위에 조성한 거대한 불두(佛頭)가 시선을 압도했다. 선정에 든 듯 지긋이 감은 눈과 도톰한 입술, 어깨까지 닿을 듯한 귀가 인상적이었다. 세속적이고 정형화된 불상들과는 달리 다소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두의 높이는 11m로 돌로 쌓은 상반신이 8m, 금동을 입힌 철제 불두가 3m였다. 언젠가 불신(佛身)이 만들어지면 올려놓을 불두라고 했다. 불상이 완성되면 얼마나 클까 상상을 해보았다. 대단한 규모의 불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거대한 규모의 불상이 과연 깨달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소박하고 검박한 불상이 오히려 더 부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궁전 같은 교회에는 여호와가 없고 대궐 같은 사찰에는 부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와우정사 국제불교회관


넓은 마당 정면에 있는 2층 건물은 국제불교회관이었다. 국제불교회관에는 대한불교 열반종 총무원과 함께 세계불교문화교류협회 본부와 세계불교도총연맹본부, 한국-스리랑카 불교문화 교류협회, 한국-미얀마 불교문화 교류협회도 있어 세계 각국의 승려들이 자주 오가고 있다. 한국불교 삼장대학도 이곳에 설립되어 있어 열반종 승려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를 연구하러 온 남방 불교 승려들이 상주하고 있다. 


세계만불전(와우정사 홈페이지 제공)


또, 국제불교회관의 세계만불전(世界萬佛殿)에는 한국 불상을 비롯하여 중국,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 아시아 각지에서 수집한 3천여 불상이 있다. 앞으로 만 개의 불상이 모이면 만불전을 새로 지어 봉안할 예정이다. 불상 중에는 쌀로 된 불상, 금불상, 오곡으로 된 불상, 은불상, 크리스탈 불상, 동불상, 나무불상, 철불상, 흙으로 된 불상도 있다. 그리고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서 입수한 석가모니의 전신사리와 불교의 초기 경전인 팔리어 경전, 산스크리트어 경전도 봉안되어 있다. 


금동53존불(와우정사 홈페이지 제공)


국제불교회관에는 또 금동5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와우정사는 금동53존불에 대해 '금과 동으로 조성된 53존의 불상으로서 문화재급의 성보임.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조성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와우정사에 따르면 스리랑카 프리미다사 대통령이 기증한 석가모니 진신사리, 스리랑카 아씨 끼리야종에서 기증한 팔리어 패엽경전(貝葉經典), 인도 고승이 가져온 싼스크리트어 경전, 티벳 고승이 가져온 티벳어 경전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종무소를 찾아 세계만불전과 금동53존불을 보고 싶다고 하자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언제부터 관람이 가능한가요?' 하고 물으니 모르겠다는 대답 뿐이었다.  


수월관음보살도 벽화

 

국제불교회관 건물 옆  벽면에는 수월관음보살도(水月觀音菩薩圖)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남인도의 바닷가에 면한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보타락산)을 상징하는 기암절벽 위에 반가좌(半跏坐)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앞에서 연잎을 타고 방문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설법을 청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보살의 두상 뒤에는 물방울 모양의 둥근 연청색 광배가 있고, 보관을 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흰색 천의(天衣)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보관과 팔찌, 가슴의 수려한 장식은 보살의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주변에는 절벽 위의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염주를 물고 있는 파랑새(극락조)와 버드나무가지를 꽂은 정병, 연잎을 탄 노인 등이 있었다.   

 

수월관음은 관세음보살의 33응신(應身)의 하나로 바다에 뜬 연꽃 위에 서서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고 있는 관음이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수월(水月)'은 '물속에 비친 달'이라는 뜻이다. 곧 '세상을 비추는 달'이다. 수월관음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환상에서 비롯된 고통이 물에 비친 달처럼 덧없음을 깨닫게 하여 이를 초월하게 하는 보살이다. 


수월관음이 들고 있는 버들가지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림과 같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수월관음을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도 한다. 또, 백의를 입은 수월관음을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발생한 백의관음은 본래 중국의 수월관음보다 오래 전에 성립된 신앙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부터 수월관음상에 흰옷을 입힘에 따라 두 신앙이 융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수월관음과 백의관음, 양류관음을 유형적으로 뚜렷하게 구분짓기가 어려워졌다. 이 세 관음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응신이니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불화(佛畵)에서 수월관음은 주로 수목(樹木) 또는 죽림(竹林)을 배경으로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거나 연잎 위에 서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보살의 주변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연꽃, 산호초 등이 있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보타락산(補陀落山)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중국에서는 8세기 후반 당(唐)의 주방(周昉)에 의해 수월관음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여 송원대(宋元代)에 널리 유행하였다. 돈황에서는 '수월관음보살'이라는 명문이 있는 943년경의 채색 수월관음도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수월관음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12세기 중기에는 수묵(水墨) 수월관음도도 그려졌다.


한국에서는 관음신앙이 발달한 고려시대에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중국과는 달리 관세음보살의 발 아래쪽에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1323년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수월관음도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보물 제926호 수월관음보살도, 1991년 뉴욕 소더비즈 경매에서 176만 달러에 외국인에게 낙찰된 수월관음도가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수월관음은 바다에 뜬 연꽃 대좌 위에 큰 원형 광배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 작품으로는 1476년에 그려진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벽화가 유명하다.



통일의 탑


국제불교회관에서 위로 오르는 길가에는 '통일의 탑'으로 명명된 여러 기의 탑(佛塔)이 세워져 있었다. 통일의 탑은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고승과 불교 신자, 외교관, 언론인들이 아시아 각국의 불교 성지와 백두산, 히말라야 산맥, 북극, 독일 베를린 장벽 등지에서 가져온 돌로 한층 한층 쌓아 올려 만들었다고 한다. 버려진 돌도 깨끗하게 씻어서 정성을 다하여 탑을 쌓으면 공덕이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일까? 


남북통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력남용과 정경유착, 부정부패, 언론과 사상의 통제, 빈부격차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은 정말 심각하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북통일이 된다고 한들 그게 바람직한 통일일까?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한다. 


통일의 탑을 쌓은 방식이 좀 특이했다. 먼저 시멘트 콘크리트로 골조를 세운 다음 돌을 붙이는 방식으로 탑을 만들었다. 시멘트콘크리트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석탑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런 탑은 문화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찰을 건립하는 목적은 불상(佛像)을 봉안하고 불탑을 세워 여기에 예배하기 위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에서 유래한 불탑은 불자들이 직접 예배를 올리는 대상인 불상과 더불어 사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불탑은 대개 불상을 모신 대웅전의 앞 중정에 세운다.   


대웅보전 전경


대웅보전


대웅보전의 무궁화 무늬 꽃창살


대웅보전 현판


단아한 익공식 겹처마 맞배지붕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다. 대웅보전의 문과 기둥, 처마는 물론 법당 내부에도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양쪽으로 여닫는 문은 무궁화 무늬 꽃창살이었다. 해서체(楷書體)로 단정하게 쓴 현판의 '大雄寶殿' 글씨는 해암해곡 삼장법사의 작품이다. 대웅보전은 불교의 선종 계통의 사찰에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시는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협시불(脇侍佛)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육상 5존불


장육상 3존불


와우정사 대웅보전에는 장육상(丈六像) 5존불(五尊佛)을 봉안했다. 오존불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8만5천근의 황동으로 10년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의 규모가 대단하고 엄청난 것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하지만 대단하고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깨닫고 해탈에 이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법당의 불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와우정사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의 수행을 통한 법력이 아닌가 한다.


장육상은 8척의 배수인 1장 6척의 크기로 조성한 불상을 말한다. 신라 3보의 하나였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아미타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5존불은 각각 서로 다른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었다. 수인이란 부처나 보살이 스스로 깨달아 증득한 진리나 서원(誓願)을 표시하기 위해 두 손과 열 손가락으로 짓는 손 모양을 말한다. 따라서 수인은 불상의 이름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손에 아무것도 없이 손가락만으로 특정한 동작을 취하는 것을 수인,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 것을 계인(契印), 수인과 계인을 합쳐 인계(印契)라고 한다. 부처나 보살의 진리와 서원의 덕은 무한하고,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수인의 종류도 무한하다. 


수인에는 모든 불상이 취할 수 있는 통인(通印)과 오직 한 불상만 취할 수 있는 별인(別印)이 있다. 모든 불상이 취할 수 있는 통인에는 선정인(禪定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이 있다. 반면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은 석가모니불, 구품정인(九品定印)은 아미타불, 지권인(智拳印)은 비로자나불만이 취할 수 있다. 이처럼 수인은 매우 중요한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불상 조성시에 그 형태를 바꾸거나 특정 부처의 수인을 다른 부처에 표현해서는 안된다. 


가운데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불상은 비로자나불이다. 지권인은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쥔다. 오른손은 불계,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며 부처와 중생,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임을 상징한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만 취할 수 있는 수인이다.


비로자나불의 오른쪽에서 구품정인 중 오른손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 왼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하고 있는 불상은 아미타불이다. 두 손을 가슴 앞까지 들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는 중품중생인의 변형으로 보인다아미타불의 수인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무리를 상중하 3품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3생으로 나누어 중생의 각 성품에 맞게 설법을 해야 모두 구제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서 오른손은 구품정인 중 중품중생인, 왼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모니불이다.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석존5인(釋尊五印) 중 하나인 항마촉지인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한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이라고도 한다. 이 수인은 결가부좌한 채 선정인에서 오른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은 채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댄 것이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은 선정인 그대로다.

 

석가모니불 왼쪽의 보살은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다. 머리에 쓴 보관의 정면 한가운데에 있는 화불(化佛)로 보아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화불은 아미타불이다.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본사(本師)로 삼고 항상 섬기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 남쪽에 있는 보타락산(補陀落山)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의 고통과 괴로움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구제하고 제도하여 극락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또,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푸는 것이 이 보살의 특징이다. 관세음보살은 단독 불상으로 조성되기도 하지만 보통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봉안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대세지보살과 함께 봉안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다른 손에는 목이 긴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다양한 변화 관세음보살도 그에 걸맞는 지물을 들고 있다.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은 견삭,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은 여의주와 법륜을 들고 있다.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과 마두관음(馬頭觀音)은 얼굴에 각각 11가지의 얼굴과 말머리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은 대세지보살이다. 보관의 정면 한가운데에 있는 보병(寶甁)으로 보아 대세지보살임을 알 수 있다. 대세지보살의 형상은 보병 외에 관세음보살과 동일하다. 이 보살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의 보처보살(補處菩薩)로서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불로 봉안된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봉안되는데 이를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이라고 한다. 


자비문(慈悲門)을 관장하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지혜문(智慧門)을 상징한다. 대세지보살은 지혜광(智慧光)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을 비추어 보고 삼도팔난(三途八難)에 떨어져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해 준다. 시방세계를 태양처럼 비추고 있는 시방무량제불정사광명(十方無量諸佛淨紗光明)은 이 보살의 땀구멍을 통해 광채를 발한다. 그래서 이 보살을 무변광(無邊光)이라고도 한다.  


대세지보살이 쓰고 있는 천관(天冠)에는 오백 보화가 있고, 각각의 보화에는 오백 보대(五百寶臺)가 갖추어져 있으며, 각각의 보대에서는 무변광을 발한다. 머리의 육발은 붉은 연꽃인 발두마화(伐摩華)와 같으며, 육발 위에는 보병을 얹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보병 속에 담겨 있는 온갖 종류의 광명으로 보현불사(普現佛事)를 행한다. 대세지보살은 발을 한번 구르면 삼천대천세계뿐만 아니라 마귀의 궁전까지 뒤흔들어 항복시킬 정도의 힘을 지녔다고 한다.


장육존상 5존불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리면서 세계의 평화와 중생의 행복을 빌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불보살님들에게 빌 것도 없다. 


  대웅보전 처마의 풍경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자 문득 두둥실 떠가는 뭉게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대웅보전 처마 끝에는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가 바람에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풍경소리에 내 마음도 맑아지는 듯했다.    



수월관음보살상

 

대웅보전의 왼쪽 마당 한가운데에는 석부조(石浮彫)의 아름다운 수월관음보살상(水月觀音菩薩像)이 세워져 있었다. 국제불교회관 건물 옆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보살도에서 관세음보살만을 그대로 재현한 석부조였다. 보살상 자체만 본다면 백의관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높이 2m의 이 불상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바위에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범종각 통일의 종


범종각(梵鐘閣)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였다. 범종각의 단청에 무궁화꽃을 그려 넣은 것이 다소 특이했다. 처마에는 '통일의 종' 현판을 걸어 놓았다. 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범종(梵鐘)의 이름을 통일의 종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통일의 종


와우정사는 통일의 종을 세계 최대의 범종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통일의 종 무게가 12톤인 반면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 국보 제29호)의 무게는 19톤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범종의 무게는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범종소리보다 고승대덕의 사자후(獅子吼)가 필요한 시대다.  


통일의 종


제24회 88 서울 하계 올림픽경기대회 때 통일의 종을 타종한 이후 1997년 10월 23일에는 아시아태평양방송인총회(ABU)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이 세계평화를 위한 타종식을 거행했다. 또, 1999년 5월 8일에도 세계평화를 위한 타종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용뉴와 음통


통일의 종은 일반적인 범종 양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용뉴부(龍紐部)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의 용뉴(龍鈕)와 대나무 마디 모양의 소리 대롱인 음통(音筒)이 있었다. 


견대와 상대, 유곽, 유두


종신(鍾身)의 상부는 용뉴와 음통을 받치는 천판(天板)의 아래로 천판의 테두리를 띠처럼 두른 견대(肩帶)와 종의 어깨 부분을 빙 두른 당초문(唐草紋) 상대(上帶)가 부조되어 있었다. 또, 상대 밑에는 범종의 앞뒤에 세로로 새긴 '와우정사'와 '통일의 종'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2개 도합 4개의 당초문 유곽(乳廓), 유곽 안에는 각각 9개의 연화문(蓮華紋) 유두(乳頭)가 있었다. 


비천상


당좌와 하대


종신부 중앙인 종복(鍾腹)까지 내려온 '와우정사'와 '통일의 종' 명문의 좌우에는 천인(天人)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飛天像)이 2개 도합 4개, 종을 치는 당목이 닿는 자리인 당좌(撞座)에는 8엽(葉)의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이 부조되어 있었다. 종신부 하단에는 당초문과 연화문이 혼합되어 부조된 하대(下帶)가 종구(鍾口)를 빙 둘렀다.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 치는 범종의 소리는 모든 중생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제도할 뿐만 아니라 지옥에 빠진 중생까지도 구제한다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 범종소리는 부처나 고승대덕의 설법을 상징한다. 


통일의 종소리가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통일의 종도 열심히 쳐야 되겠지만 중생의 끊임없는 자기혁명 과정인 해탈도 중요하다. 중생의 해탈, 즉 욕망과 욕심을 여의는 자기혁명 없이는 남북통일도 세계평화도 난망이다. 큰 도둑, 작은 도둑의 무리들이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군수가 되어 중생의 피땀을 도적질하는 아수라같은 사바세계를 일거에 박살낼 법력의 종소리를 울려줄 고승대덕의 출현을 기대한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대웅보전의 오른쪽에는 청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있었다. 보관을 쓰고 얼굴을 약간 숙인 미륵보살이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는 결가부좌한 자세로 오른손은 뺨에 살짝 대고 왼손을 왼쪽 무릎에 올려놓은 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가사유상의 발치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동자승상이 다소 이색적이었다. 


높이 6m인 이 반가사유상은 자세와 표정, 보관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매우 흡사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제작된 것으로 보였다. 모조 작품은 예술적 가치나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12지상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반가부좌의 준말인 '반가(半跏)'와 생각하는 불상이라는 뜻의 '사유상(思惟像)'을 합친 말이다. 이 보살상은 높이 6m로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고 했다. 미륵보살상 앞마당에는 석조 12지상(十二支像)이 죽 늘어서 있었다.  


미륵보살상 앞에서 '어서 빨리 미륵보살님이 강림하시어 자본과 권력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낡은 세상을 타파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소서', 또, '남북통일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강대국과 남한, 북한의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소서' 하고 기도를 올렸다. 


과연 중생이 바라는 대로 낡은 세상을 타파할 미륵보살이 강림하는 그날이 올까? 또, 그런 메시아가 있을까? 그런 미륵보살, 메시아는 없다. 왜냐하면 미륵보살, 메시아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미륵보살, 메시아를 일깨워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 일어날 때 비로소 용화세상이 실현되는 것이요,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용화세상, 후천개벽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듯이 용화세상, 후천개벽도 마찬가지다.

 

미륵(彌勒)은 벗을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한 마이트리야(Maitreya)의 음역이다. '자씨(慈氏)'라고 의역되며, '매황려야(梅喤麗耶)' 또는 '자씨보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래불(未來佛)이 강림하여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에 따라 등장한 보살이 미륵보살이다. 미륵보살은 유가유식학(瑜伽唯識學)을 체계화한 역사적 실존인물인 인도의 학승 미륵이 법상종의 교조로 신비화되면서 보살로 변화된 것이다.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과 '석가보(釋迦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석가모니불로부터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 미륵은 아직 부처가 되기 전단계라서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보살은 석가모니불을 대신한다고 해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 천불 가운데 제5불에 해당한다.


도솔천은 욕심이나 번뇌망상, 방탕함이 없는 세계로 지족천(知足天)이라고도 한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등장하면서 도솔천은 윤회를 벗어난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極樂)과 대등한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었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7천만년이 되고,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될 때 인간계로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며, 성불한 미륵불(彌勒佛)은 3회의 설법으로 272억 명의 중생을 교화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고 한다. 56억7천만년이면 지구가 없어지고, 태양계도 사라질지 모르는데 그 때 오셔서 뭘 어쩌시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는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염원하는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과 미륵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 염원하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信仰)이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신앙은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미륵상생경)'과 '불설관미륵보살하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下生兜率天經, 미륵하생경)',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 미륵성불경)' 등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이 중심이 된다. 미륵삼부경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불국토의 풍요롭고 안락한 용화세상에 대해 설법함으로써 미륵신앙은 민중들에게 희망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미륵하생경은 미래불이자 당래불(當來佛)인 미륵불이 인간계에 하생하여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원하고 낡은 세상을 혁파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미륵신앙의 혁명적인 사상은 당시 전제왕조정권의 가혹한 통치 아래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중국과 한국의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특히 미륵신앙이 왕성하여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미륵불이 강림한다는 사상에 따라 민중들은 사회 변혁과 체제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전국 어느 마을을 가든지 미륵불로 불리는 돌부처들이 쉽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미륵신앙이 민중들 속에 얼마나 깊숙히 파고든 신앙인지 알 수 있다. 


6세기경 삼국에 들어온 미륵신앙은 여러 가지 설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미륵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백제 무왕(武王)이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용화산(龍華山) 밑 큰 연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 3존을 알현한 뒤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와 신라 진지왕(眞智王) 때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불상 앞에서 화랑(花郞)으로 화현(化現)하기를 빌자 미륵이 미시(未尸)라는 작은 낭자로 나타나 세상을 7년 동안 비췄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또, 선덕여왕 때 승려 생의(生義)가 도중사(道中寺)에서 꿈을 꾸고 깨어나 돌미륵을 찾아냈다는 설화도 있다. 


미륵신앙은 신라의 화랑도(花郞徒)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화랑도의 정신은 미륵 하생에 의한 용화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에 유교적 덕목에 의한 수양을 결합한 것이었다. 화랑은 용화세상을 실현할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또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화랑도를 미륵선화(彌勒仙花)라 칭하기도 했으며, 김유신의 무리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부르기도 했다. 용화는 곧 미륵보살을 비유하는 말이다.     


미륵신앙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더욱 성행하여 신라 말기에는 자칭 미륵불까지 나오는 상황에 이르렀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였고, 후백제의 견훤도 금산사의 미륵불로 자처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이금(伊金)은 미륵불을 자칭하고 혹세무민하였으며, 조선 숙종 때 경기도 양주의 승려 여환(呂還)은 불교탄압정책에 반발하여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왕조 전복을 기도하였다. 일제강점기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스스로 절대적 권능을 가진 옥황상제, 미륵불이라고 자처하며 증산도를 창시하였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련교(白蓮敎)의 두령 한산동(韓山童)은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원나라에 대항하는 홍건군(紅巾軍) 봉기의 지도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미륵불이나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가짜였고 사기꾼들이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내가 미륵불이요, 메시아니 돈 바쳐라, 몸 바쳐라' 하는 자들은 100%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이다.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겁박해서 돈 바치고, 몸 바치라고 을러대는 자들도 100%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이다. 그래도 이런 사기꾼들한테 속아서 돈 바치고, 몸 바치는 중생이 많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신라의 원효(元曉)는 도솔천에 왕생하는 길은 관행인과(觀行因果)에 있다고 했다. 관행(觀行)의 관(觀)은 도솔천의 장엄하고 화려함과 미륵보살이 누리는 과보의 뛰어남을 관하는 것이다. 관에 이은 행(行)은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죄업를 참회하면서 미륵보살의 덕을 받들어 찬양하고, 탑을 닦고 마당을 쓸며, 향과 꽃을 공양하는 일 등을 행하는 것이다.


미륵보살은 다음 대의 부처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의 형태 뿐만 아니라 부처의 형태로도 조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보살을 염원하는 신앙이 성행했던 삼국시대에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가 곧 미륵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라는 독특한 자세는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만들어질 때 싯다르타 태자의 생노병사에 대한 고뇌에 찬 사유를 표현한 것에서 기원한다. 


반가사유상은 7세기부터 신라에서 발전했다. 현재 38구의 반가사유상이 보존되어 왔는데, 이 중 금동반가사유상은 24구가 있다. 그 중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평양 천리에서 출토된 국보 제118호 금동반가사유상, 보물 제331호 백제 방형 대좌 금동반가사유상 등이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83.2cm의 크기로 보관의 조각이 화려하고 장식띠를 늘어뜨린 모습이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93.5㎝로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보다 좀더 단조로운 모습이지만 조각이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京都)의 광륭사(廣隆寺)에 소장된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반가사유상(木造半跏思惟像)과 매우 흡사해서 한국에서 제작되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와우정사는 화랑도의 호국불교 정신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이 반가사유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호국불교는 맹목적인 국가주의 내지 국수주의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과거 보수 기독교 교단이나 불교 종단들이 조찬기도회니 호국법회니 하는 따위를 열어 독재정권을 옹호하면서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반민주 수구적 행태를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종교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중생 누구나 메시아가 되고 미륵불이 되어 낡은 세상을 뒤집어 엎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용화세상, 후천개벽의 시대는 과연 도래할까?   


금강역사


열반전(涅槃殿)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끝 양쪽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두 눈을 치켜뜨고 열반전의 석가모니 열반상(涅槃像)인 와불(臥佛)을 지키고 있었다. 금강역사는 일주문(一柱門) 다음에 있는 금강문(金剛門)에 봉안하여 불법을 수호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천왕문(天王門)의 양쪽에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이듯이 금강역사도 오백 야차신(夜叉神)을 시켜 현겁 천불의 법을 수호하는 두 신이다. 금강역사는 보통 상의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어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등의 모습을 취한다.    


나라연금강


밀적금강


금강역사를 바라볼 때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역사(那羅延金剛力士), 왼쪽은 밀적금강역사(密跡金剛力士)이다. 나라연금강역사는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라고 한다. 밀적금강역사는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부처를 보호하는 야차신이다. 항상 부처 곁에서 그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들으려고 하므로 밀적(密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라연금강역사는 '아' 하고 입을 벌린 모습이어서 아금강역사, 밀적금강역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 어떤 경전은 반대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는 범어의 첫 글자, '훔'은 범어의 끝 글자이다. 따라서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하나로 잇는 통일성과 또 그 영원성을 상징한다.


5층와탑


5층와탑 감실에 봉안된 불상


나라연금강역사 옆에는 탑을 세우기 위해 시멘트 콘크리트 골조가 올라가 있었고, 밀적금강역사 옆에는 이제 막 공사를 끝낸 5층와탑이 세워져 있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든 지대(址臺) 위에 역시 시멘트 콘크리트로 세운 뼈대에 기와를 붙이고 쌓아서 만든 탑이었다. 지대 외에는 기단부(基壇部)도 없이 곧바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상륜부(相輪部)는 6층의 탑신에 수연(水烟)만 덩그렇게 올려놓은 형식이었다.  


탑신의 옥신(屋身)은 시멘트 콘크리트 골조 외측에 기와를 쌓았고,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에는 기와를 붙였다. 옥개석의 귀마루인 우동(隅棟)에는 숫기와를 얹고, 그 끝은 암기와로 막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3층에는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감실(龕室)을 만들었고, 옥개받침에는 단청을 칠한 것이 특이했다. 감실에는 작은 불상을 봉안했다. 


통일의 탑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만든 탑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문화재로 인정받기 어렵다. 차라리 실상사(實相寺) 옛터에서 출토된 1200년 전의 기와를 모아서 쌓은 3층 옛기와탑(古瓦塔)이 훨씬 더 정감이 가지 않을까?


        열반전의 석가모니 와불


토굴을 파서 만든 열반전에는 석가모니 열반상인 와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석가모니 와불 앞에서 합장삼배로 예를 올렸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성인(聖人)에 대한 예를 갖춤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토막을 깎아서 만든 저 와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불상이 부처의 존상(尊像)이기 때문이다. 


열반전의 와불은 인도의 스님이 인도네시아에서 보내준 향나무로 만든 세계 최대의 목불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한다. 와우정사는 이 와불이 영험한 기도처임을 강조하고 있다. 권세와 재물, 명예, 득남, 무병장수, 진학 등 현세의 복을 비는 구복신앙(求福信仰) 또는 기복신앙(祈福信仰)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 본연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종교가 기복신앙에 치우친다면 무속(巫俗)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고려 말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선시(禪詩) '청산혜(靑山兮)'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면 될 것을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속 헤매는가!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내게 말 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내게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내려놓고 증오도 내려놓고

如水如風以終我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내게 말 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내게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怨而無惜兮         원망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以終我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좀조팝나무꽃


열반전 앞 돌담에는 좀조팝나무꽃이 무리지어 활짝 피어 있었다. 1주일 전 예빈산을 오를 때도 팔당마을에서 좀조팝나무꽃을 보았었는데.....


바위취꽃


그늘진 바위틈에서 요정으로 피어났네

누구를 향한 절실한 사랑인가 바위취꽃


돌담에는 바위치꽃도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바위취는 일본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습한 곳에서 자라는 상록 다년생 초본이다. 범의귀, 호이초(虎耳草), 왜호이초, 불이초(佛耳草), 천하엽(天荷葉), 홍전초(紅錢草), 등이초(橙耳草), 석하엽(石荷葉)이라고도 부른다.


바위취는 초여름에 잎사이에서 긴 꽃자루가 자라나 많은 꽃이 원뿔꼴로 모여 피어난다. 꽃잎은 5장인데, 위 3장은 짧고 흰색 바탕에 분홍색 점이 있다. 아래 2장의 꽃잎은 길고 희며 나란히 아래를 향한다. 언뜻 보면 大자와 비슷한 모양이다. 꽃말은 절실한 사랑이다.


바위취는 꽃이 아름다워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잎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참취처럼 특이한 향은 없지만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그런대로 괜찮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쌈을 싸 먹어도 좋고, 갖은 양념을 해서 무쳐 먹어도 괜찮다. 마늘과 통깨를 넣고 된장 무침을 해도 좋다. 


바위취의 전초는 한약재로 쓴다. 바위취는 해열, 해독, 소종 등의 효능이 있어 민간에서 감기, 백일해, 고열, 습진, 종기, 중이염, 화상 동상, 충독(蟲毒)을 치료하는 데 쓴다. 어린이의 이질이나 경련, 간질에도 응용할 수 있다. 이보다 효능이 좋은 한약재가 많은데 굳이 바위취를 쓰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한의사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돌탑


열반전에서 대각전(大覺殿)으로 오르는 산기슭에는 돌로 쌓은 탑이 여러 기 있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골조를 세워서 만든 통일의 탑이나 5층와탑보다도 이 돌탑들이 훨씬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왜일까? 한 사람이 쌓은 듯 돌탑의 크기와 형태가 비슷비슷하고 고만고만했다.  



금동석가모니불상


금동석가모니불상이 봉안된 전각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렸다. 대좌도 없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금동불상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보던 석가모니 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얼굴이 상하로 길고, 팔과 손가락도 가늘고 길어서 갸름하고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법의(法衣)는 불상에 직접 표현하지 않고  토황색(土黃色) 가사(袈裟)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혔다. 이마의 양미간(兩眉間)에는 부처 32상 중 하나인 백호(白毫), 머리는 오른쪽으로 머리카락이 꼬불꼬불하게 나선형으로 말린 나발(螺髮),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었다. 육계 위에 얹혀 있는 불꽃 형상, 귀가 어깨와 다소 떨어져 있는 점, 달팽이처럼 오톨도톨한 나발과 육계로 볼 때 전형적인 태국식 불상이었다.     


금동석가모니불상을 모신 전각은 석판(石板)을 깔아서 만든 기단(基壇)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돔을 얹은 구조의 건물이었다. 돔 위에는 앙련(仰蓮)을 올리고, 연꽃에서 솟아난 기둥 끝에는 법륜(法輪)을 올려놓았다. 법륜은 석가모니불이 지금도 여전히 설법을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0톤의 금과 동으로 태국의 인간문화재가 조성한 이 금동불상은 태국 국왕이 취임 80주년을 맞아 기증한 것이다. 와우정사는 '1950년 6.25 전쟁에 북괴(北傀)의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위급할 당시 유엔군으로서 북괴를 물리치기 위하여 태국 군인들이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29분이 전사하셨습니다. 고귀하신 그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깊은 뜻도 함께 합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남북평화통일을 지향하려면 '북괴' 같은 상대방을 멸시하고 비하하는 표현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남괴(南傀)'라고 표현하면 좋아하겠는가? 남한은 주권국가를 자처하면서도 전시작전권을 미국이 쥐고 있지 않은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고 왈가왈부하면 웃음거리 밖에는 안된다. 평화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신 없이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팔상도


대각전은 석가모니 금동불상 바로 뒤에 산비탈을 파서 만든 토굴이었다. 대각전 입구 양쪽 벽에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물감으로 그린 팔상도(八相道)가 걸려 있었다.


팔상(八相)은 석가모니의 생애 중 중요한 하천(下天),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항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 등 8가지를 말한다.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인간계로 내려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출가를 하고, 마귀에게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뒤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 것을 간략하게 그림으로표현한 것이 팔상도(八相圖)다.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지 백여 년 뒤부터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네 장면이었으나 후에 대승불교에서 여덟 장면으로 세분화하였다. 우리나라의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묘사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을 토대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팔상도는 사찰의 팔상전(八相殿)이나 영산전(靈山殿)에 봉안된다. 팔상탱(八相幀),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도 한다.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兜率來儀相),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毘藍降生相), 4대문을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四門遊觀相), 궁성을 나가서 출가하는 상(踰城出家相),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雪山修道相),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樹下降魔相),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상(鹿苑轉法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솔래의상은 전생의 싯다르타가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중인도의 가비라국(迦毗羅國)으로 내려오는 장면이다. 마야(摩耶) 왕비가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 입태전(入胎殿)에서 입태되는 장면, 소구담(小瞿曇)이 도둑으로 몰려 죽는 장면, 정반왕궁(淨飯王宮)에서 왕과 왕비가 꿈에 대해 바라문(婆羅門)에게 묻는 장면 등 네 장면으로 그려진다.


비람강생상은 싯다르타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마야 부인이 궁전을 떠나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출산하는 장면, 갓 태어난 싯다르타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 하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장면, 제천(諸天)들이 기뻐서 보물을 바치는 장면, 9마리의 용이 싯다르타를 씻기는 장면, 왕궁으로 돌아가는 장면, 아시타선인(阿私陀仙人)이 예언하는 장면 등 여섯 가지로 묘사된다.


사문유관상은 싯다르타가 사대문을 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본 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이다. 동문 밖에서 노인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남문 밖에서 병자를 보고 노고(老苦)를 느끼는 장면, 서문 밖에서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 북문 밖에서 수도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등 네 장면으로 표현된다.


유성출가상은 29세의 싯다르타가 사랑하는 처자와 왕위를 계승할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는 장면이다. 부왕의 만류와 아내의 간청을 뿌리친 태자가 마부 찬다카와 함께 백마 칸타카를 타고 몰래 궁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이다. 태자궁에서 태자를 유혹하는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장면,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뛰어넘는 장면, 찬다카가 돌아와 태자의 출가 소식을 알리자 왕비와 태자비가 행방을 묻는 장면 등 세 장면으로 그려진다.


설산수도상은 싯다르타가 고행을 하면서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스승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닫고 설산에서 6년 동안 선정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태자가 삭발하고 사문의 옷을 입는 장면, 찬다카가 돌아가는 장면, 정반왕이 교진여(憍陳如) 등을 보내 태자에게 환궁하기를 권하는 장면, 환궁을 거절하자 양식을 실어보내는 장면, 목녀(牧女)가 태자에게 우유죽을 바치는 장면,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는 장면 등 여섯 장면으로 되어 있다.


수하항마상은 수행이 자신과의 싸움임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장면이다. 마왕파순(魔王波旬)이 마녀를 시켜 태자를 유혹하는 장면, 마왕의 무리가 코끼리를 타고 태자를 위협하는 장면, 마왕이 80억의 무리를 모아 태자를 몰아내려 하는 장면, 마침내 마왕의 항복을 받아 성도하는 장면 등 네 장면으로 묘사된다. 


녹야전법상은 부처가 된 석가모니가 500리 떨어진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比丘)에게 설법하는 장면이다. 상단에는 석가모니가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는 장면, 하단에는 5비구가 설법을 듣는 장면,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舍衛城, 슈라바스티)에 기수급고독원정사(祇樹給孤獨園精舍, 기원정사)를 건립하는 장면,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고 석가모니에게 공양하자 탑으로 바뀌는 장면 등 네 장면으로 그려진다. 


쌍림열반상은 80세의 석가모니불이 쿠시나가라성 근교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한 뒤에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용맹정진을 당부하고 열반에 드는 장면이다. 석가모니가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장면, 금관에 입관된 석가모니불이 제자 가섭(迦葉)의 문안을 받고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는 장면, 다비(茶毘)하여 사리(舍利)가 나오자 8나라의 왕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장면 등 세 장면으로 묘사된다. 


팔상도를 바라보면서 정강 스님이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태자 싯다르타의 출가'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이 노래는 팔상도를 노래로 부른 것이다.  


동쪽 문 나갔을 적에 늙은 자 모습 보았네

세월이 흘러간 뒤에 그의 환영 보는 것 같아

 

남쪽 문 나갔을 적에 병든 자 모습 보았네

괴로움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모습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속에 번민하셨네

 

서쪽 문 나갔을 적에 죽은 자 모습 보았네

육체에 영혼이 떠난 제일 슬픈 이별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속에 번민하셨네

 

북쪽문 나갔을 적에 구도자 모습 보았네

남루한 옷차림 속에 눈빛만은 총명하였네

반가운 마음 깨달은 마음 출가의 길 결심하셨네

 

왕궁의 부귀영화도 한순간 던져 버리고

외로운 구도의 길을 구름따라 헤메이셨네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명상속에 깨달으셨네

우주의 진리 생명의 실상 명상속에 깨달으셨네


석가모니고행상

 

대각전 유리벽 안에는 석조석가모니고행상(石彫釋迦牟尼苦行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뼈만 남은 얼굴,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등에 거의 붙은 배 등 피골이 상접했음에도 표정만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석가모니고행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불상이다. 와우정사 이전에는 여주에 있는 목아박물관의 목조석가모니고행상(木彫釋迦牟尼苦行像)이 유일한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출가한 이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고행을 결심하고 6년간 브라만 수행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마하시하다나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알몸인 채로 식사 초대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루 한 끼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한 달에 한 끼 먹는 것으로 견뎠다. 물고기와 고기, 술도 일체 먹지 않았다.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뽑는 고행, 똑바로 서는 고행, 앉지 않는 고행, 웅크린 자세로 있는 고행, 가시에 드러눕는 고행도 했다. 


고행으로 석가모니가 생사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브라만이 나타났다. 브라만은 줄이 3개 달린 비파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는 비파의 줄이 느슨하거나 팽팽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암시였다. 마찬가지로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석가모니는 비로소 6년간의 고행이 헛수고였음을 알게 되었고,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7일간의 명상 끝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


와우정사는 이 고행상을 백옥(白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옥돌로 보이지 않았다. 조명탓일까? 이 고행상은 캄보디아의 텝봉 승왕(僧王), 태국 부승왕(副僧王), 우리나라의 고승대덕 등 수많은 고승이 증명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텝봉 승왕은 캄보디아 불교 지도자이다. 태국 부승왕은 혹시 우리나라에 다녀간 프라 폼와치라야 부승왕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승대덕은 누구를 말함일까? 


승왕은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말이다. 캄보디아에는 10명의 불교 수장이 있다. 20대 전후의 승려 가운데 장차 큰스님 재목으로 지정이 되면 꾸준한 교육을 통해 마침내 섬다엑 칭호를 받는 자리에 오른다. 섬다엑은 왕자나 나라에 아주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칭호다. 현 정부에서는 2004년 훈센 총리와 치아심 상원의장, 행삼린 CPP 당의장이 섬다엑 칭호를 받았을 뿐이다.섬다엑 칭호를 받는 10명의 스님 중 열반으로 결원이 생기면 20대 때부터 큰스님 재목으로 교육받은 스님을 선정하여 충원한다. 10명의 섬다엑은 순위가 엄격하다. 바로 1순위의 섬다엑이 승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승왕이 입적하면 2순위의 섬다엑이 다음 승왕을 계승한다. 


태국에서는 국왕이 승왕을 지명한다. 태국의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승왕을 선출할 때는 테라사마콤이라는 고승회의에서 후보를 선정해 원로회의에 보내면 원로회의에서 승왕을 결정하게 된다. 국왕은 이를 승인한다. 태국의 승왕은 종신제다.


팔상도 벽화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벽에는 채색 팔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대각전에서 보았던 흑백 팔상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것이 눈에 띄었다. 비를 맞거나 습기 때문이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석가모니금동불상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호박돌을 쌓아 올린 돌탑 위에 얹혀 있는 불상이 금방이라도 넘겨박힐 것처럼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불상을 이런 식으로 봉안한 것은 처음 보았다. 머리에 올려져 있는 갓 모양의 원형 판석은 대구 팔공산의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을 연상케 했다. 이 불상은 서해덕 주지가 화강암으로 조성하여 1998년 4월 8일 봉안했다고 한다.


약사여래좌상의 나발 위에는 비교적 큰 육계가 있었다. 풍만한 볼살과 어깨까지 내려온 귀, 부드러운 콧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주었다. 미간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두 눈은 선정에 든 듯 지긋이 감은 모습이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었다. 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의 주름을 삼도라 하는데 혹도(惑道, 번뇌도), 업도(業道), 고도(苦道) 등 생사 윤회의 인과(因果)를 나타낸다. 

 

가사는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통양견법(通兩肩法, 통견)으로 두 팔을 거쳐 무릎을 덮은 다음 대좌로 흘러내렸다. 무릎 아래로 내려온 옷자락이 대좌를 덮는 형태를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옷주름의 선각(線刻)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되어 매우 유려(流麗)했다. 가슴 아래에는 허리에서 무릎 아래를 덮는 긴 치마인 군의(裙衣, 승가리)의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었다.   


결가부좌한 다리에 올려놓은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이 분명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여 수명을 연장해주고, 재앙을 없애 현세의 복락을 이루게 하는 부처로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과거 약왕(藥王)이자 의왕(醫王)이었던 약사여래는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에 머물면서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키겠다는 12대원을 서원하였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에 의하면 동방 정유리세계는 아미타정토와 같고,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으며, 12신장(十二神將)을 거느린다고 하였다. 약사여래의 특징은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지만 원래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은 당나라 때 약사경변상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약사여래도는 8세기에 틀이 잡혔다.


한국에서는 7세기 중엽부터 약사여래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는 크게 유행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는 약사경(藥師經) 독경으로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약사도량(藥師道場)을 자주 열었다. 불상으로는 경주 백율사(栢栗寺)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과 굴불사지사면석불(掘佛寺址四面石佛) 동면(東面)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이 유명하다. 또 약사여래도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한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12신장을 거느린 약사신중도(藥師神衆圖), 동방 정유리세계를 그린 약사정토변상도(藥師淨土變相圖) 등이 있다.

 

약사여래는 오늘날 의자(醫者)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약사여래와 같은 의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사여래좌상 앞에서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서원과 함께 합장삼배를 올렸다. 

 



오백나한상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은 약사여래좌상 바로 위에 있었다. 바위의 속을 파낸 감실에 부조상으로 새긴 나한상이 반원 형태의 계단에 봉안되어 있었다. 아라한마다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달랐다. 기계로 나한상을 새긴 한 듯 마감질이 매끈했다. 아라한상 하단에는 사람의 이름이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시주자 이름인 듯했다. 정면의 상부 한가운데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괸 채 비스듬히 누워있는 석가모니 열반상인 와불이 모셔져 있었다. 이 불상들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바위로 조성했다고 한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과는 소승불교에서 아라한이 이른 최고의 경지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나중에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바뀌었다. 아라한은 윤회에서 벗어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성자로 추앙받는다. 오백나한을 오백비구(五百比丘) 또는 오백상수(五百上首)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십송률(十誦律)'에는 석가모니가 중인도 교살라국의 사위성에서 500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한다. '흥기행경(興起行經)'에는 매월 15일 500나한을 위한 계(戒)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는 은 석가모니가 500나한을 위하여 수기를 베푸는 모습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오분율(五分律)'에는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나한이 결집하여 불전을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제1결집을 오백결집이라 부른다. 석가모니 열반 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부의 가습미라(迦濕彌羅)에서 열린 제4결집, 즉 비바사론결집(毘婆沙論結集)에는 500비구가 참가하였는데 이들도 오백나한으로 받들어진다. 또 당나라 사람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옛날 한 바라문이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500상인의 동자를 가르쳤는데 그 500동자가 지금의 500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그때의 500상인이 지금의 500나한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생존시의 500제자나 열반 후 결집한 500나한, 500비구 등을 두루 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백나한은 우리나라의 불자들에게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백나한은 10대 제자를 비롯해서 석가모니에게 직접 설법을 들은 제자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특히, 제1결집 때 칠엽굴에 모였던 500나한이 숭앙되고 있다. 이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하여 법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적 가교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에 오백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16나한, 오백나한전은 석가모니삼존불을 중심으로 500나한을 모신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 그 다음에 16나한상, 양끝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모신다. 아난과 가섭 대신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갈라보살(羯羅菩薩) 등 삼세불을 봉안하기도 한다. 후불탱화(後佛幀畫)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16나한도를 건다. 보물 제730호로 지정된 울진 불영사(佛影寺) 응진전과 경주 기림사(祗林寺) 응진전(應眞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214호)이 유명하다. 


오백나한전은 영천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組庵) 영산전(靈山殿)의 석조 오백나한상과 청도 운문사의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특히 거조암 영산전의 오백나한상은 그 형상이 모두 다르고 특이하다. 또, 영주 성혈사(聖穴寺) 나한전(羅漢殿, 보물 제832호), 하동 쌍계사(雙磎寺) 나한전(羅漢殿, 경남 유형문화재 제124호)도 유명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오백나한은 숭배의 대상이다. 중국은 푸젠성(福建省) 서풍암(瑞豊巖)의 오백나한원(五百羅漢院)과 저장성(浙江省) 서암사(西巖寺)의 철조(鐵造) 오백나한상이 유명하다. 일본은 도쿄(東京)의 라칸사(羅漢寺)와 교토(京都)의 다이도쿠사(大德寺), 도호쿠사(東福寺)의 오백나한상이 유명하다.


아미타삼존불입상 


오백나한상을 본 뒤 은이산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자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佛)이 나타났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렸다.

 

아미타불입상은 한가운데에 판석으로 지대석(址臺石)과 하대저석(下臺底石)을 놓고 그 위에 기단(基壇)을 올렸다. 기단의 전후좌우에는 한쌍의 비천상이 부조되어 있었다. 기단에 앙련(仰蓮) 대좌를 올리고 그 위에 아미타불입상을 모셨다. 


골뱅이처럼 오톨도톨한 나발 위에는 비교적 큰 육계가 얹혀 있었다. 지긋이 감은 눈과 다문 입은 선정에 든 듯한 표정이었다. 몸체에 비해 얼굴은 다소 작은 편이었다. 불의는 통견으로 가사와 군의 자락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오른손은 아미타정인 가운데 중품하생인, 왼손은 여원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었다. 여원인은 왼손을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것을 상징한다. 삼국시대의 불상에서 여원인은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수인이다.


아미타불입상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脇侍)하고 있었다. 복련(覆蓮) 위에 원통형 기단을 세운 뒤 앙련 대좌을 놓고 보살좌상을 모셨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욕망으로 인한 갈증과 고통을 덜어주는 감로수가 든 정병(淨甁), 대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경책(經冊)을 들고 있었다. 두 보살좌상은 아미타불에 비해 왜소한 편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빈약하여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아미타불입상은 가운데 토막이 져 있었다. 상체와 하체를 따로 제작해서 붙인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불상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대석과 기단, 복련, 앙련도 조각을 이어붙였는지 몰타르로 마감을 했다. 통일의 탑이나 5층와탑을 만든 방식처럼 시멘트 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우고 조각조각들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어떤 곳은 틈이 벌어져 있기도 했는데, 시간이 흘러 풍화가 진행되면 불상이 무너질 위험성도 있어 보였다. 불상 조성에 몰타르로 마감을 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한다는 부처로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이자 정토신앙의 핵심이 되는 부처다.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은 서역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 전파되었다.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었다. 


법장보살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세우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본원(本願)으로서의 48대원(大願)을 세웠다. 그는 마침내 대원을 성취하고 부처가 되었는데,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의 일이다. 48대원은 자비심과 이타행(利他行)으로 가득하여 보살행(菩薩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2번째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에는 아미타불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18번째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중생들에게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아미타불은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불토(十萬億佛土)를 지나서 있는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적인 세계다.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해도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위없는 깨달음과 무량수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 바로 아미타정토신앙이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민중 속에 뿌리깊이 자리잡았다. 신라의 원효(元曉)를 비롯한 많은 교학승(敎學僧)들은 정토신앙을 보급하기 위해 아미타염불을 민중들에게 널리 권장했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는 집집마다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의 치열한 싸움으로 인한 수많은 전사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민중들은 자연스레 아미타불에 귀의하였으며, 또 많은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다.


아미타신앙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져 온다. 신라 문무왕 때 '원왕생가(願往生歌)'의 작자 광덕(廣德)과 그의 도반 엄장(嚴莊)은 염불수행을 통하여 정토왕생을 했다고 한다. 10구체 향가인 '원왕생가'는 작자의 깊은 아미타신앙을 노래한 것이다. 신라 성덕왕 때  백월산(白月山)의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설화도 있다. 노힐부득은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미륵보살이 되고, 달달박박은 현신의 몸 그대로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신라 경덕왕 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여종 욱면(郁面)이 늘 절에 가서 염불정진을 한 결과 서방정토를 향하여 날아갔다는 설화도 있다. 불교설화를 통해서 아미타불에 대한 신라인의 믿음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신앙은 선(禪)과 회통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원효가 '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를 천명한 이래 아미타불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전통은 고려시대 지눌(知訥)과 보우(普愚), 나옹(懶翁)으로 이어졌다. 고려 희종 7년(1211) 요세(了世)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는 법화사상(法華思想)의 지관(止觀)을 바탕으로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면서 날마다 53불(佛)을 12차례씩 돌며 예참(禮懺)하고 동시에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했다.


선정불이의 전통은 조선시대 기화(己和), 휴정(休靜) 등으로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각 사찰에서 결성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에서는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통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했다. 이같은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다. 현재 아미타불은 우리나라에서 타력신앙(他力信仰)의 중심 부처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대부분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을 갖추고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좌협시보살, 대세지보살을 우협시보살로 하여 삼존불로 봉안된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아미타정인 중에서 한 가지나 불가사의한 힘으로 모든 법을 관찰하여 설법하는 지혜를 드러내는 수인인 묘관찰인(妙觀察印)를 취하며 설법인,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상으로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아미타불과 연관된 탱화로는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畫),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을 묘사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린 아미타불이 염불수행자의 극락왕생을 맞으러 오는 광경을 묘사한 극락내영도(極樂來迎圖), 염불왕생첩경지도(念佛往生捷徑之圖), 인로왕보살도(引路王菩薩圖) 등이 있다.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는 '관무량수경'을 근거로 극락세계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와우정사는 '한국의 사찰중에서 가야산 해인사, 양상 통도사, 순천 송광사, 경주 불국사, 문경 봉암사, 용인 와우정사 6개의 사찰이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과 명찰(名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99년 한국관광공사가 와우정사를 한국의 6대 명찰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와우정사는 고찰도 아니거니와 명찰이라는 것도 금시초문이다. 사찰의 역사로 보아도 그렇고 전각이나 불상, 석탑, 탱화 등 성보문화재의 보유 여부 등으로 볼 때도 와우정사의 6대 사찰 선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찰의 건립 역사가 오래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찰이 배출한 고승대덕도 중요하다. 그래서 고승대덕이 열반한 뒤 선정에 든 부도전을 뺀 채 고찰이니 명찰이니 논할 수 없다. 전각이나 석탑, 불상의 규모만으로 사찰을 평가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나 다름없다. 불상이나 범종이 기네스북에 올랐다든가 국내 최대라든가 또는 세계 최대라든가 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고, 깨달음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이런 것들은 그저 눈요기나 구경거리일 뿐이다.


와우정사는 외국의 관광객과 불교 신도들이 많이 온다고 자랑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이들이 한국의 불교에 대한 오해를 안고 돌아갈까봐 저어된다. 와우정사의 불두와 와불 등 겉모습만 보고 한국의 불교를 평가하지나 않을까 생각되어서다. 조계종단의 추상같은 선풍(禪風)을 접하지 않고 어찌 한국 불교의 진수를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와우정사를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미륵보살에게 서원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미륵보살이 되어 낡고 썩은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용화세상을 실현하고 싶다. 


2013.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