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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전적지 소난지도를 가다

林 山 2013. 6. 6. 20:24

도비도

 

항일의병 전적지가 있는 소난지도(小蘭芝島)를 돌아보았다. 소난지도는 충청남도 당진시 최북단 석문면에 있는 섬이다. 소난지도를 가려면 도비도 포구에서 카페리를 타야 한다. 도비도는 1984년 대호방조제의 준공으로 현재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석문면 교로리 도비도는 당진 6경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농촌휴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호농어민복지센터가 운영하는 단지에는 숙박시설과 암반해수탕, 유람선 선착장, 전망대, 조각공원, 환경농업 체험장, 갯벌 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7.8㎞에 이르는 대호방조제와 한국 5대 철새 도래지인 대호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동지도' 당진편에는 도비도가 '가비도(加非島)'로 나와 있다. '더할 가(加)'자로 보아 '더비도'가 '도비도'로 변한 뒤 한자로 '도비도(搗飛島)'로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지형도' 풍도편에는 도비도로 표기되어 있다.

도비도 근해에서는 새우, 조기, 민어, 갈치, 꽃게 등이 많이 잡힌다. 넓은 간석지에는 바지락, 백합, 굴, 맛조개 등을 양식하고 있다.

 

소난지도와 분도, 우무도

 

도비도 선착장(041-352-6862~5)에서 소난지도를 오가는 카페리는 오전 8시, 오후 1시, 오후 5시 등 하루에 세 번 있다. 7월 20일~8월 15일까지의 성수기에는 수시로 운항한다. 도비도-소난지도-난지도-도비도 노선이다. 소요 시간은 소난지도까지 10분, 대난지도까지 30분이다. 운임은 1인 왕복 6천원(편도 3천원)이고 5인 이하 승용차는 3만원, 5인 이상 승용차는 4만원, 승합차(1톤 트럭)는 5만원이다. 차량 운임에는 운전자 1명의 운임이 포함되어 있다. 


소난지도, 분도 우무도, 소조도

 

 

소난지도


소난지도는 도비도 북서쪽으로 약 9㎞ 정도 떨어진 아산만 입구에 자리잡은 섬이다. 대난지도 옆의 작은 섬이라 하여 소난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난지도는 소난지도 북서쪽으로 400m의 거리에 있다. 


면적은 2.63㎢의 소난지도에는 40여 가구, 60여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섬에는 입구가 남동쪽으로 향한 만이 있다. 만의 안쪽에는 방조제를 쌓아 넓은 간석지를 만들었다. 간석지에는 염전이 있다. 주민들은 연안에서 전복과 굴 등 조개류를 양식한다.


조선시대 소난지도는 전라도의 세곡을 한양의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태풍을 피해 기항하던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으로 수적(水賊)들의 활동 무대가 되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많은 피난민의 유입으로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유적으로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홍일초 의병대장 휘하 150여 의병의 무덤, 일명 백인총(百人塚)이 있다.  


소난지도 남쪽 선착장 바로 앞에는 우무도(牛舞島)남서쪽에는 분도가 있다. 우무도와 분도는 소난지도와 거의 붙다시피 가까이 있다. 우무도는 무인도로 암소가 엎드린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우모도(牛母島)라고도 한다. 면적은 약 26,700m²이다. 


우무도에는 오래된 암자인 보월암이 있었으나 1972년 여름 장마 때 무너져 폐사되었다. 암자 터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소사나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이 섬에는 광산이 있었다. 


대난지도 북서쪽에는 야생화로 유명한 풍도가 있다. 우무도 남쪽에는 소조도와 대조도, 분도 남서쪽에는 비경도가 있다.

  

소난지도의 난지도바다체험학교 캠핑장


소난지도 항일의병 무덤


소난지도 항일의병 추모탑

 

카페리는 도비도에서 10분 정도 걸려 난지도바다체험학교 캠핑장이 있는 소난지도 북쪽 해안 선착장에 도착했다. 소난지도 항일의병 무덤(Sonanjido Graveyard of men who stood against Japan)은 소난지도 동쪽 끝 둠바벌 바닷가에 있었다. 왕릉처럼 잘 단장된 묘소에는 '의병총(義兵塚)'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무덤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항일의병 추모탑은 무덤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야산 기슭에 있었다. 산기슭을 깎아서 만든 언덕에는 돛대 형상의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고, 바로 옆에는 의병들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청동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정면에는 의병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석부조상을 새겨 놓았다. 추모탑 앞에는 소난지도 항일의병항쟁의 날 107주년(매년 6월 1일)을 맞아 당진군 관내 기관장과 사회단체장들이 보내온 조화가 놓여 있었다.  


107년 전 소난지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소난지도 항일의병항쟁 역사의 현장을 따라가 보자. 


1905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과 강압적인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고 국권을 강탈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에 맞서 치열한 항전을 전개했다. 경기도와 충청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남 당진에서는 최구현 의병장, 홍주(현 홍성군)에서는 민종식 의병장 등이 창의했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홍일초 의병장, 수원에서는 홍원식 의병장, 용인에서는 당진 출신의 정주원 의병장 등이 창의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우국충정만으로 창의했기에 의병들의 무기와 장비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들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군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그 일부가 소난지도로 이동했다. 섬 일대에서 활동하던 수적들도 의병군에 가담했다. 의병군은 소난지도에 보급로를 확보하고 대일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 소난지도 의병군은 당진, 서산, 태안 등 충남 서북부는 물론 화성, 수원 등 경기도 남부 일대까지 진출해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섬은 의병군이 활동하기에는 작은 섬인데다가 뭍에서도 너무 가까왔다. 일본군과 경찰은 이 섬이 의병군의 근거지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이 의병군을 토벌하기 위해 경찰대를 파견하면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1906년과 1908년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해였다. 


1906년의 전투는 최구현 의병장이 이끌었다. 최구현 의병장은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여 1906년 봄 기지시(현 당진시 송산면)에서 창의했다. 그의 창의문을 보고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서 370여명의 의병들이 달려왔다.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된 최구현 의병장은 창과 칼, 화승총 등 구식 무기로 무장한 370여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1906년 4월 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수비대의 반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최구현 의병장은 눈물을 머금고 의병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36명의 의병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최구현 의병장은 36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섬에 먼저 들어와 있던 홍일초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군과 당진 의병군 등 40여명도 최구현 의병군에 합류했다.  


윤4월 5일(5월 27일)에는 관군에게 쫓기던 서산 의병군 참모 김태순이 이끄는 28명, 윤4월 16일(6월 7일)에는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차상길 의병 등 15명의 의병이 소난지도로 들어와 합류했다. 소난지도 의병군은 120여명으로 불어났다. 최구현 의병장은 항일의병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만주의 간도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최구현 의병군이 간도로 떠날 항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1906년 음력 7월 5일(7월 24일) 새벽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 200~300명이 나무를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를 타고 소난지도 의병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다.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격으로 최구현 의병장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그해 12월 순국했다. 


최구현 의병장의 순국 이후 1907년부터 소난지도에는 100여명의 홍일초 의병군이 남아 있었다.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 대일항전 역사상 가장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격전은 사실상 소난지도 의병군의 마지막 전투였다


일본인 순사 6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4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찰대는 새벽에 배를 타고 건너와서 의병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투는 9시간 동안이나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로 의병군은 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섬의 동쪽 끝 해안까지 밀려난 의병군은 탄약이 떨어지자 육탄전을 벌여야만 했다. 


이날의 전투에서 홍일초 의병장과 박원석 선봉장 등 41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9명이 체포되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의병도 50여명에 이르렀다. 100여명의 의병들은 결국 전원 옥쇄했다. 바다에 투신한 의병들의 시신은 물고기밥이 되거나 바닷물에 떠내려갔다. 격전지 건너편인 삼길포와 교로리에서는 어부들의 그물에 의병들의 시신이 걸려 올라오기도 했다. 수습된 시신은 곳곳에 가매장되거나 격전지였던 장안여 해변에 매장되었다. 


 

일설에는 홍일초 의병장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섬을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본군에 의해 죽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홍일초 의병장은 자결을 결심하고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절벽 중간의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걸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홍 의병장은 섬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당진 방면으로 탈출했는데, 그 후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홍일초 의병군의 궤멸로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한 항일의병항전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10년 5월까지 당진과 인근 지역에서 몇 차례의 항일의병항전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규모와 횟수는 감소되었다. 그마저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 8월 이후에는 더 이상 항일의병항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소난지도 의병총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월등한 무력을 갖춘 일본 경찰대와 관군의 기습 공격에 육탄전으로 맞서 싸우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들의 무덤이다. 소난지도는 바로 항일의병항쟁의 성지인 것이다. 


경술국치로 한반도가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자 나라의 독립을 고취시키는 행위는 금기시되었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한편 친일 매국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통해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기도했다.  


8.15 해방이 되자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중용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이번에는 미국을 위해 기꺼이 민족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던 이승만 독재정권도 독립지사들을 배제하고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중용했다. 이후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정치와 경제, 군대와 경찰 등 모든 분야를 장악했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권력을 잡고 득세하자 학교에서는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를 주입시켰다. 


그 결과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국가유공자로 둔갑하고 독립지사들은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피맺힌 항일의병항전사는 세인들에게 점차 잊혀져 갔다. 소난지도 항일의병항전사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당시 섬 주민들이 조성한 의병총은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파도에 씻겨 봉분이 무너지고 유골이 나뒹굴었다. 석문중학교 교직원과 주민들은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1973년 힘을 모아 봉분을 새로 만드는 등 무덤을 새로 단장했다. 1982년에는 교사와 학생들의 성금으로 의병총비를 건립했다. 1997년 5월에는 소난지도 의병항쟁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매년 소난지도에서 희생된 의병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한말의 삼별초'라고도 불리는 소난지도 항일의병항전사는 2003년 9월 17일 '광무십년면천창의영도장유곡최구현선생묘지(光武十年沔川倡義領導將楡谷崔九鉉先生墓誌)'가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2008년에는 당진군이 5억원의 예산으로 의병항쟁 추모탑을 건립하고 묘역을 정비했다. 2009년 9월 추모탑과 의병총은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고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항일의병과 같은 지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가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군 초급장교로서 만주에서 조선 광복군을 토벌하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지사들이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쓴 탓으로 그들의 후손은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최구현 의병장도 면천 아문에 30결(1결은 3만~30만평)의 방대한 토지를 몰수당했다. 전 재산을 몰수당한 최구현 의병장 후손들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만약 우리나라가 또 다시 나라를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싸울 것인가? 피흘려 되찾은 나라에서 또 다시 민족반역자 매국노들이 득세한다면 그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하겠는가!  


올해 의병의 날 행사는 재향군인회에서 주관했다. 재향군인회 참석자들은 의병총 참배도 하지 않았으며, 추모탑 앞에서 진행된 추도식도 일사천리로 끝났다. 추도식이 끝나자 재향군인회 참석자들은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직행했다. 평화재향군인회 관계자들과 박기서 선생만이 의병총을 참배했다. 박기서 선생은 정의봉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처단한 사람이다. 

최구현 의병장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산기슭에 올라앉은 작은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그 배가 마치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2013.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