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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 의병장의 대일항전의 현장 면천읍성을 가다

林 山 2013. 6. 15. 11:02

내가 면천읍성(沔川邑城)을 찾아가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지난 2013년 3월 15일 사랑하는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남은 조위금을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좋은 일에 쓰기로 하고 기부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충청남도 당진시 '유곡최구현의병장유족장학회'를 알게 되어 소정의 장학금을 보내주었다. 유족장학회는 내가 보내준 후원금으로 송산중학교와 석문중학교 학생 5명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  


유족장학회로부터 6월 1일 소난지도에서 열리는 의병의 날 행사에도 초대를 받았다. 내가 직접 참석해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요일의 진료 약속 때문에 나는 의병의 날 행사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부득이 다음날 당진으로 가서 대일의병항전지인 석문면 소난지도와 의병총을 둘러보았다. 송산면 매곡리 유곡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어둠컴컴해서 제대로 참배도 하지 못했다.  


유곡 선생 묘소 참배를 마쳤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라 선생이 거병 후 최초로 대일항전 작전을 벌였던 면천읍성 답사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하고 귀로에 올랐었다. 그 일주일 뒤 당진을 다시 찾아 유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뒤 면천읍성을 답사하기 위해 면천면으로 향했다. 


면천읍성


면천읍성은 면천면사무소 소재지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읍성의 서쪽 성벽 위에 올라서자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을 기습 공격하는 최구현 의병군의 함성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면천읍성 위에서 바라본 면천 거리 

 

1904년(고종 41년)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것을 목격한 유곡 최구현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39세의 나이로 군부참서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1905년(고종 42년) 11월 일제의 협박과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노한 유곡 선생은 이듬해 봄(음력 3월 경) 기지시(현 당진군 송산면)에서 창의했다.

 

최구현 의병장의 창의도소에는 370여명의 의병들이 달려왔다. 창과 칼, 화승총 등 구식 무기로 무장한 370여명의 최구현 의병군은 1906년 4월 17일 초저녁 면천읍성을 기습 공격했다. 최구현 의병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에 읍성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수비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최구현 의병군은 그만 패퇴하고 말았다. 의병군의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읍성을 점령하기 위해 용감하게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조일연합군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쓰러져 가는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친일 매국노들이 망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최구현 의병군 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면천읍성 공격에 실패하자 유곡 선생은 책임을 통감하고 의병군을 해산시킨다. 그리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선생의 곁에 남은 36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석문면 소난지도로 들어간다.(최구현 의병장의 소난지도 대일의병항전에 대해서는 필자의 '항일의병 전적지 소난지도를 가다'라는 글 참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병력과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조일연합군보다 열세였던 최구현 의병군은 어째서 많은 피해가 예상됨에도 면천읍성을 정면 공격했을까? 상대방보다 전력이 월등하게 약세일 때는 적 후방을 교란시킴과 동시에 내부에서 호응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유격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면천읍성은 면천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로서 비인읍성, 남포읍성, 해미읍성, 홍주성과 더불어 내포지방의 방어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읍성에는 군창도 있었다. 읍성을 점령한다면 당진지역 일대를 최구현 의병군이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읍성의 점령은 당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유곡 선생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유격전보다 모든 역량을 투입해서 속전속결로 읍성을 점령하기 위해 전면전을 택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면천읍성 복원계획 조감도와 당진의병 전투지-면천성 안내판


최구현 의병장의 대일의병항전의 현장이었던 면천읍성에 대해 알아보자. 면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1439년(세종 21년) 11월 이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기미년(己未年)'이라 새겨진 성돌로 보아 기미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沃川), 진잠(鎭岑), 석성(石城) 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이 읍성의 서북쪽에 있는 잣골의 몽산성(蒙山城)에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대에 들어 왜구 방어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으로서 읍성의 축조가 필요했다. 읍성의 축조 계획에 따라 자연석을 잘 다듬어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아래쪽은 커다란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차츰 작은 할석을 사용하였다. 또 성벽의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평지읍성으로 축조된 이 성은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실측 결과 성벽의 둘레는 약 1,336m로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과 옹성(甕城,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의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가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옹성 1개소, 문터 4개소,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다. 치성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길이와 너비가 7m 이상이다. 

 

면천읍성이 축조된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451년(세종 33년)의 기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3,225자(약 986m), 높이가 12자(약 3.5m), 여장(女墻, 성가퀴, 성 위에 활 또는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은 56개이고 여장의 높이는 3자, 적대(敵臺, 망루, 성문 양옆에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지키기 위해 치성 위에 설치한 방형의 대)가 7개, 문이 3개인데, 2개는 옹성이 없고, 성안에 우물이 3개가 있고, 성 밖에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 판 못)가 파여 있었다고 나온다.

 

7개소의 적대가 있었다면 치성도 7개소가 있었을 것이다. 적대는 치성 위에 설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옹성은 3개의 문 중 남문에만 있었는데, 반달꼴의 편옹성(片甕城) 형식이었다. 남문과 서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현재 성 안에는 군자지(君子池)라는 연못이 있고, 성의 북쪽 산기슭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이 북벽을 통과한다. 이처럼 조선 초기 해안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성은 조선시대 관방(關防) 시설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1993년 12월 3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면천읍성은 해방 무렵까지도 원래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무분별한 개발로 대부분 훼손되었다. 읍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면 면천면사무소와 보건지소, 노인정, 면천초등학교, 풍락루(豊樂樓) 등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일 것이다. 그러나 읍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은 허물어지고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았다. 서쪽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약 6.8m, 높이 3.6m, 성벽 윗면의 너비는 2.4m다. 


지난 2001년 당진군은 정밀실측과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서쪽 성벽 일부를 원래의 형태대로 복원하였다. 나머지 성벽도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면천읍성은 내포문화권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2012년에 복원을 시작해서 2017년에 완료된다고 한다.    


면천군지(沔川郡址) 표지석


면천읍성이 있던 면천군(沔川郡)의 연혁에 대해 알아보자. 면천군은 1914년까지 현 충남 당진군 면천면, 순성면, 송산면, 송악면, 우강면 일대에 있었던 행정구역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혜산군(槥山郡)이었다. 757년 신라는 혜성군(槥城郡)으로 개칭해서 웅주(熊州, 공주)에 예속시켰으며, 당진현(唐津縣)과 여읍현(餘邑縣), 신평현(新平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에는 홍주(洪州, 홍성)의 속현으로 만들었다가 1290년(충렬왕 16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1293년(충렬왕 19년)에는 면주(沔州)로 승격시켰다. 조선 1413년(태종 13년)에는 면주를 면천군으로 고쳤다. 별호는 마산(馬山), 해종(海宗)이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홍주부 관할이 되었고, 1896년에는 충청남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주의 합남면, 합북면, 신남면, 신북면, 현내면과 아산의 이서면, 덕산의 배방곶면, 천안의 우평면의 편입으로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면천군이 폐지되면서 면천면으로 강등되어 당진군에 병합되었다. 면의 통폐합도 이루어져 읍내면과 마산면, 송암면이 마암면으로, 송산면과 감천면, 창택면이 송산면으로, 죽림면과 가화면, 덕두면, 정계면이 순성면으로, 범천면과 이서면, 손동면, 초천면, 신북면 일부, 중흥면이 송악면으로, 신남면과 현내면, 신북면 일부는 신평면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면천군은 당진현보다 상위의 행정구역이었다.  


 면천 유래 표지석


성벽 앞에는 면천(沔川)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은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면수편(沔水篇)의 '沔彼流水 朝宗于海(철철 넘치는 저 물은 흘러서 신하가 임금께 조회하듯 바다로 들어가나니)'란 구절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면천이라는 이름이 시경 면수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표지석에는 '물이 가득 흘러서 바다로 모여 들어간다'고 풀이했다. 지도를 보아도 옛 면천에서 발원하는 여러 시내와 강들이 모두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외교정책을 썼다. 지명을 정함에 있어서도 사대주의 사상이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우리나라의 지명에 중국과 같은 이름이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국호도 명나라가 정해준 것임에랴!     


풍락루(豊樂樓)


서쪽 성벽 안으로 들어가니 면천면사무소 바로 앞에 2층 누각형식 팔작지붕 건물인 풍락루(豊樂樓)가 서 있다. 풍락루는 옛 면천관아의 문루(門樓)였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852년 당시 면천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뒤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풍락루'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건 뒤 풍락루기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누각이 노후되어 붕괴될 지경에 처하자 1943년 풍악루를 철거한 뒤 2007년 11월 1일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면천의 유적에는 풍락루 외에도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과 군자정(君子亭) 등이 있다. 면천향교, 충청남도기념물 제82호 은행나무, 회화나무 보호수,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 안샘도 찾아보는 것이 좋다. 면천의 특산물로는 두견주가 있다. 


건곤일초정은 1800년(정조 24)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세워진 정자로 면천면 성상리 골정지(骨井池) 안에 있다. '乾坤一草亭’이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는 의미로 두보의 시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해결하기 위해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 실학사상을 담은 책들을 저술한 박지원의 애민사상을 기리기 위해 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당시 버려진 연못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만든 인공섬 위에 육각정자를 지었다. 건곤일초정은 일제강점기에 유실되었다. 2006년 골정지 한가운데 예전처럼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초정(草亭)을 짓고 돌다리를 놓았다.  


군자정(君子亭)은 면천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군자지(君子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팔각정자다. 처음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19년(숙종 45년) 복지겸의 후손 복지구가 육모정으로 중수한 이후 1800년대의 면천읍지에 '계해년(1803년)에 새로 건립했다'는 중수기록이 남아 있다. 현 정자는 1994년에 팔각정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자 옆에는 이태백이 썼다는 '낭관호(郞官湖)'라는 글씨를 새긴 비석이 있다. 연못을 건너는 돌다리는 고려 때 만든 것으로 길이 7.4m, 폭 65cm이며 4개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자지는 고려 공민왕 때 지군사인 곽충룡이 조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못 가운데에 연꽃을 심어 '연당'으로도 불렀으나 1994년에 준설한 이후 바닥에 잔돌을 깔아 연꽃이 모두 없어졌다. 


면천향교는 1392년(태조 1년) 또는 1413년(태종 1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외삼문(外三門), 명륜당, 내삼문(內三門), 대성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이다. 1966년 대성전과 동재(東齋)를 보수하였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석전(釋奠) 제향을 올린다. 


충청남도기념물 제82호 면천 은행나무는 2그루로 수령이 1100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둘레는 6m, 높이는 각각 20m, 21m이다. 면천초등학교 교정 동쪽에 서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의 딸 영랑(影浪)이 심었다고 한다. 복지겸이 병을 얻었는데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자 그의 딸 영랑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 마지막 날 신선이 나타나 두견주를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그곳에 은행나무 2그루를 심은 뒤 정성을 드리면 나을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았다. 영랑이 신선의 계시 그대로 하자 아비의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면천의 명물인 이 나무는 일제시대 때만 해도 백로가 많이 날아와 앉아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회화나무 보호수는 면천초등학교 교정 서쪽 면천면사무소와 담을 이룬 곳에 있다. 수령은 약 300년이고, 높이는 20m 정도 된다.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당진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다. 면천학생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안샘(內井) 또는 꽃샘(花井)은 면천읍성 안에 있는 유일한 샘으로 군자지 바로 위쪽에 있다. 이 샘도 복지겸 전설과 관련이 있다. 


면천두견주(沔川杜鵑酒, 중요무형문화재  제86-2호)는 진달래 꽃잎을 원료로 빚은 전통주다.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 술이다. 연한 황갈색으로 단맛이 나는 두견주는 진달래 향이 일품이다.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피로회복에도 좋으며, 특히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어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2013.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