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백두대간 백복령-원방재 마룻금을 걷다

林 山 2014. 5. 27. 12:34

김형산 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동해 들풀여행' 카페 회원들과 함께 백복령(百福嶺)에서 원방재까지 백두대간 마룻금을 걷기로 한 날이다. 묵호시장 '어시장회식당'에서 회덮밥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마침 묵호항에서 해산물 쇼핑몰을 운영하는 장성열 씨와 연락이 되어 만났다. 장성열 씨는 물회를 안주로 아침부터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자칭 아나키스트인 그는 소설 '청수원(부제 : 강릉 그 해 여름의 초상, 2006, 책향출판사)'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백복령


김형산 원장과 '동해 들풀여행' 회원들을 동해시청에서 만나 백복령으로 향했다. 2001년 백두대간을 홀로 순례 중이던 나는 6월 23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원방재를 출발하여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백복령에 도착한 적이 있다. 달도 없는 밤길을 걷느라 주변 풍경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그저 새빠지게 걷기만 했었다. 백두대간 순례를 마치고 나서 원방재-백복령 구간을 다시 보고 싶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오늘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백복령에 거의 다다랐을 때 산중턱부터 송두리째 잘려나가고 흔적도 없는 백두대간 자병산(紫屛山)이 나타났다. 한라시멘트 석회석 채석장으로 전락한 자병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세계자연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는 백두대간 자병산에 채석장 허가를 내주다니 도대체 문명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자연은 우리가 아껴쓰고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주어야 할 빚이다. 한라시멘트는 석회석 채굴로 떼돈을 벌어 재벌이 되겠지만 5천만의 한국인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연유산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자병산이라는 이름은 돌의 색깔이 불그레하여 주위가 늘 붉게 보이는 데서 생겨났다. 그런 자병산을 두고 '병산야월(屛山夜月)'이라고 했다. 백두대간 자병산에 달빛이 비쳐 붉게 반사되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훼손되기 전의 자병산이 빼어난 경치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사라져 간 자병산에 삼가 조의를 표했다. 자본의 논리 앞에 백두대간의 허리가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정말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문이 들었다.


백두대간 백복령 표지석


국도 42호선을 타고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백복령(百福嶺, 750m)에 올랐다. 백복령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 강릉시 옥계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마루에는 '白頭大幹 백복령'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저 표지석 뒤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조금만 더 가면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정선 백복령 카르스트지대가 있다. 카르스트지대에 이어서 사라진 자병산이 있었다. 카르스트지대를 천연기념물로 보호하려면 석회암지대인 자병산도 함께 보호해야 했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천연기념물 보호정책이 아닐 수 없다.  


백복령은 조선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현종 때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삼척조에 '희복현(希福峴)' 또는 '희복령(希福嶺)'으로 기록했다. 영조 때 여지도서(輿地圖書) 삼척조에는 '희복현'의 일명으로서 '百福嶺'을 언급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81)의 산경표(山經表)와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 산천조에도 '百福嶺'으로 표기했다. 


'희복현(희복재)'의 발음이 불편하여 '‘희'를 '흰 백(白)'의 훈(訓)을 빌어 '白福嶺'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白福'이 의미상 서로 맞지 않자 음은 그대로 두고 '복이 많다(百福)'는 뜻의 '百福嶺'으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복령은 조선 전기까지는 '希福峴'으로 불리워 오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百福嶺'이 정식 명칭이 되었고, 일명 '希福嶺'이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1751) 팔도총론(八道總論) 강원도조에는 '白鳳嶺'으로 기록했다. 아마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영조 때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百復嶺' 또는 '百腹嶺',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에는 '白福嶺'으로 표기했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는 '白伏嶺'으로 되어 있다.  


백복령을 '白茯嶺'으로 표기한 곳도 있다. 옛날 이 고개에서 한약재 백복령(白茯)이 많이 났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은 사실이 아니다. '白茯嶺'은 일제시대인 1915년경 조선총독부가 근세한국오만분의일지형도를 제작하면서 '福' 자를 '복령 복(茯)' 자로 잘못 표기하면서 굳어진 이름이다. 오늘날 사전이나 지도, 한국지명총람 등 각종 문서에는 아직도 일제가 남긴 잘못된 지명인 '白茯嶺'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백복령의 한자 표기는 '福嶺'이 맞다고 본다. 오류를 발견했으면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백복령을 '福嶺'으로 표기할 생각이다.


백복령은 강릉과 삼척에서 소금장수들이 지게에 소금을 지고 정선을 넘나들던 고개였다. 또 동해안에서 나는 해산물과 정선 지역에서 나는 곡식이 오가는 고개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음은 정선아라리의 한 대목이다.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 사러 가셨는데 / 백복령 구비 부디 잘 다녀오세요.


정선아라리는 백복령을 넘어서 강릉, 삼척으로 소금을 사러 먼 길을 떠난 서방님을 노래하고 있다. 백복령을 넘던 옛 사람들의 애환은 이제 정선아라리 한 자락으로만 남았다. 요즘도 백복령을 넘으려면 차로도 한참 걸린다. 옛날 무거운 짐을 지고 높고 험한 이 고개를 넘어다녔던 사람들은 몹시 고달프고 힘들었을 것이다. 강릉, 삼척에서 이른 새벽부터 소금장수들이 소금을 지게에 지고 백복령을 오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백두대간 1022m봉


백복령에서 남쪽으로 7.3km 떨어진 원방재를 향해 출발했다. 초입부터 숲이 우거진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832m봉을 오르는 산길에는 연청색 구슬붕이가 피어 있었다. 구슬붕이의 꽃은 용담(龍膽)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구슬붕이는 용담에 비해 키와 꽃이 다 작아서 소용담(少龍膽)이라고도 한다.  

 

832m봉을 넘어 859m봉으로 이어지는 산기슭에는 군데군데 처녀치마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보라색 꽃들이 모여 고개를 숙인 채 피어난 처녀치마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었다. 처녀치마는 겨울철에도 잎이 마르지 않고 땅에 깔려 겨울을 난 뒤 봄에 꽃대가 바로 올라온다. 그래서 잎은 보이지 않고 꽃대만 올라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땅에 퍼져 있는 잎은 마치 치마폭을 펼쳐 놓은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처녀치마는 일본명으로 쇼오죠오바카마(ショウジョウバカマ)라고 한다. 즉 성성이치마(猩猩袴)라는 뜻이다. 붉은색 처녀치마를 주홍색의 긴 털을 가졌다는 상상의 동물인 성성이(猩猩)에 비유한 것이다. 일본 전통의상인 하카마(袴)는 기모노 위에 입는 겉옷으로 하반신에 걸치는 옷이다. 바지로 된 것을 우마노리하카마(馬乗袴), 치마로 된 것을 안돈바카마(行灯袴)라고 한다. 처녀치마는 쇼오죠오(ショウジョウ, 猩猩)와  쇼오죠(ショウジョ, 少女, 處女)의 발음이 비슷하여 성성이치마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래도 성성이치마보다는 처녀치마라는 이름이 더 낫지 않은가!

 

백두대간을 순례할 때 칠흑처럼 어두운 밤 이 구간 어디쯤 산기슭에서 별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발하던 한 무더기의 찔레꽃을 보았었다. 습기를 머금고 밤공기에 실려온 찔레꽃 향기는 참으로 진했었다. 그 찔레꽃 향기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시 이 구간을 지나게 된다면 그 찔레꽃을 꼭 다시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859m봉을 넘어서도 울창한 숲길은 계속 이어졌다.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단풍취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잎이 단풍잎과 비슷해서 단풍취라고 하며, 개발딱주라고도 한다. 땅을 뚫고 나온 어린 순의 모양이 강아지 발과 닮았다고 해서 개발딱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때때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쁜 걸음으로 총총히 지나쳐 갔다. 백두대간은 보고 느끼며 깨달으면서 걷는 길인데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산길을 걷는 것일까?


987m봉에서 김형산 원장과 함께


987m봉에서 '동해 들풀여행' 카페 회원 단체사진


987m봉에 올라서자 비로소 시야가 툭 터진 바위 전망대가 나타났다. 안부(鞍部) 건너편에는 앞으로 넘어야 할 1022m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었고, 그 뒤로 이름도 희한한 달팽이산(螺螄山, 1018m)이 솟아 있었다. 987m봉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987m봉 전망대를 떠나자 또 다시 울창한 숲길이 계속 이어서 나타났다. 백복령-원방재 백두대간길은 그저 무념무상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제철을 만난 철쭉꽃이 백두대간 산기슭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있는 숲 터널을 걷고 또 걸어서 1022m봉에 올랐다. 1022m봉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었다. 


달팽이산은 1022m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간 능선의 끝에 있었다. 산 이름을 왜 달팽이산이라고 했을까?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22m봉 정상에서도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원방재까지는 이제 862m봉 한 봉우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1022m봉을 지나 862m봉을 넘어가다가 퍼뜩 이 산의 생긴 모습이 달팽이와 꼭 닮았음을 깨달았다. 백두대간은 1022m봉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862m봉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원방재를 향해 휘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1022m봉에서 달팽이산에 이르는 부분은 달팽이의 몸통, 1022m봉에서 862m봉까지는 달팽이의 입, 862m봉에서 원방재에 이르는 부분은 달팽이의 뿔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달팽이산에서 나는 드디어 달팽이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1022m봉-원방재 구간을 달팽이뿔 능선으로 명명했다.   


달팽이뿔 능선 전망대


백두대간 상월산


백두대간 달팽이산


달팽이뿔 능선의 금강송 숲과 철쭉꽃


달팽이뿔 능선에는 기가 막힌 바위 전망대가 있었다. 바위 틈을 뚫고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팔자도 참 사나운 소나무였다. 저런 바위틈에서 어떻게 살아올 수가 있었을까?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냈을 소나무에 대해 경외심마저 들었다.

 

달팽이뿔 능선 전망대 위에 올라가 달팽이산에서 상월산(上月山, 970m), 갈미봉(1260m), 고적대(高積臺, 1354m), 청옥산(靑玉山, 1304m), 두타산(頭陀山, 1353m)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은 벌써 백두대간을 타고 두타산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달팽이산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나서 전망대를 떠났다. 


달팽이뿔 능선에는 아름드리 금강송(金剛松)들이 하늘을 향해 기상도 좋게 쭉쭉 뻗어 있었다. 소나무의 제왕인 금강송은 예로부터 궁궐의 기둥이나 왕실의 관으로 쓰인 귀한 목재였다. 금강송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많이 난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 목질 부분이 누런 색을 띤다고 해서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한다. 충북 단양과 경북 문경 사이에 있는 황장산(黃腸山)은 조선 왕실에 황장목을 공급하던 유명한 산이다. 활짝 핀 철쭉꽃이 금강송 숲을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백두대간 원방재

 

원방재 와폭


달팽이뿔 능선의 전망대에서 한달음에 원방재(730m)로 내려왔다. 원방재는 동해시 신흥동 관촌과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베리를 이어주는 매우 험준한 고개다. '원방'은 '먼 곳'을 뜻하는 말로 멀고도 험한 고개를 힘들게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개 이름으로 보인다. 부수베리(火石舃洞)는 옛날 이곳에 부싯돌로 쓰는 돌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원방재에 비가 내리면 동쪽으로 동해시 신흥동 서학골을 따라 신흥천이 되어 동해로 흘러든다. 서쪽으로는 부수베리에서 임계천이 되어 흐르다가 임계면 낙천리에서 골지천과 합류한다. 골지천은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받아들이고, 북평면 나전리에서 오대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이 된다. 


임계면 도전리와 직원리에서 시작되어 부수베리를 지나 원방재에 이르는 임도가 나 있다. 이 임도는 괘병산과 수병산, 중봉산, 넓덕동산을 휘돌아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 중봉계곡까지 이어진다. 원방재에서 부수베리쪽으로 150m 정도 내려가면 달팽이산과 달팽이뿔 능선 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와폭 바로 옆에 야영장이 있다. 


야영장 옆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김 원장은 부인이 정성스레 싸준 점심 도시락 하나를 내게 내주었다. 들꽃여행 회원들이 싸가지고 온 밥과 반찬을 풀어 놓자 풍성한 식탁이 마련되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다. 단풍취에 밥과 된장을 올려서 싸먹는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서학골 와폭


      987m봉과 1022m봉 사이 계곡 하류의 와폭


원방재에서 서학골로 내려섰다. 서학골 초입을 지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백복령이 개통된 뒤로 서학골은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특전사 시절의 경험을 살려 길라잡이를 자청하고 길을 찾았다. 길라잡이가 길을 잘못 들면 뒤따라오는 사람이 고생하기 마련이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길을 찾았다. 일반인이 찾기 어려운 길도 전문가의 눈에는 보이는 법이다. 


2002년 1월 8일이었던가? 지리산에 폭설이 내렸을 때 일곱 명이 성삼재를 출발해서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만복대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다. 정령치를 2km 앞두고 캄캄한 밤에 엄청나게 쌓인 눈을 뚫고 가는 도중 세 번이나 길을 잃었었다. 위험을 직감한 나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서 전원 무사히 정령치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위기에 처하자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본능적으로 길이 보였던 것이다. 만약 그때 길을 못찾고 헤맸더라면 아마도 인명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국가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광역과 기초의회 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을 잘못 뽑으면 국민들이 고생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친일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에게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기 때문에 정치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일갈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노예정신이 몸에 밴 국민들은 자신들을 흑사리 껍데기로 알고 함부로 대하는 독재정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서학골은 가파르고 험했다. 밀림이 우거진 곳에서는 몇 번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멈추게 한 뒤 길을 찾았다. 산기슭에는 더러 산당귀가 보였다. 산당귀의 잎을 따서 씹으니 향긋한 향이 입안에 가득 감돌았다. 얼마쯤 내려가자 계곡의 수량이 늘어나면서 와폭(渦瀑)이 보이기 시작했다. 쌍갈래로 흐르는 무명 와폭에 '쌍폭(雙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987m봉과 1022m봉 사이를 흐르는 계곡이 원방재 계곡과 합류하기 직전의 지점에도 와폭이 있었다. 이 무명 와폭도 '서학폭포(棲鶴瀑布)'라고 명명했다. '학이 깃드는 폭포'라는 뜻이었다. 서학폭포에서 임도로 올라서면 신흥동 서학(棲鶴) 마을이었다. 관촌 마을은 서학 마을에서도 한참을 내려가야만 했다. 그래도 길은 편해서 좋았다.  


 신흥동 관촌 마을에서 바라본 원방재


오후 4시쯤 신흥동 관촌 마을로 내려왔다. 오후 4시가 넘어 달방저수지 상류의 서학교에 도착했다. 지나온 원방재와 서학골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원방재 오른쪽으로는 전망대에서 862m봉을 지나 1022m봉에 이르는 내가 명명한 백두대간 달팽이뿔 능선이 서학골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왼쪽으로는 상월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었다.


신흥동은 조선 세종 19년(1437) 삼척에서 백복령을 넘어 영서지방으로 통하는 신흥역(新興驛)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역관과 역에 소속되었던 농경지를 기반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역원(驛員)은 삼화사(三和寺)의 노예들과 범죄자들을 징집하여 충당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신흥역은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도상면(道上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학(棲鶴), 사곡(寺谷), 관촌(館村), 용소(龍沼), 도화곡(桃花谷), 덕서(德瑞) 마을을 합하여 도상면·도하면·견박곡면 통합면인 북삼면(北三面) 신흥리(新興里)에 편입되었다. 1945년에는 북삼면이 북평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4월1일 동해시 창설로 동해시 삼흥동 6통, 1998년 11월 2일 동 통합으로 삼화동 16통으로 변경되었다. 법정동은 신흥동이며, 청정신흥마을 또는 청정신흥정보화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신흥동에는 삿골(사곡), 관마을(관촌), 복상골(도화동), 샛말(간촌) 등 네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오늘 내 인생길은 백두대간 백복령-원방재-서학골로 나 있었다. 나의 인생길에는 김형산 원장과 '동해 들풀여행' 회원들이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나의 인생길을 외롭지 않게 동행해 준 '동해 들풀여행' 회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동해 들풀여행' 회원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관촌 마을을 떠났다. 저 멀리서 원방재가 잘 가라고 무언의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2014.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