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변산아씨가 봄소식을 전하는 가야산을 가다

林 山 2014. 3. 14. 12:25

올해는 열흘이나 앞당겨서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솟아 있는 내포(內浦)의 명산 가야산(伽倻山)에 변산바람꽃이 피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길을 나섰다. 언제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변산아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이제나저제나 변산아씨 소식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곤 했다. 봄이 왔다고 하더라도 변산아씨를 만나지 못하면 내게는 아직 봄이 온 것이 아니었다. 나만의 보춘화(報春花) 변산아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가슴이 몹시도 설레었다. 


 남연군 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옥계저수지에는 엄청나게 많은 철새들이 물 위에 떠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옥계저수지는 가야산 동사면에서 발원하는 옥계천(덕산천)을 막아서 만든 저수지다. 옥계저수지 북안의 야산 명월봉에는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憲宗)의 태실(胎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가(王家)의 자손이 태어나면 태(胎)를 백자항아리에 보관했다가 길일을 잡아 전국 산천의 명당을 찾아서 태실을 만들어서 묻었다. 태실을 태봉(胎封), 태묘(胎墓)라고도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에 태묘를 쓴 것은 왕손의 무병장수와 왕가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했서였다.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귀부석(龜趺石)을 세우는 등 태묘를 중수(重修)하고, 그 지역을 한 단계 승격시켰다. 덕산현은 헌종 13년인 1847년에 덕산군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태실 고장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태실의 설치는 지방 군현의 승격이나 위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관할구역의 확대 등 특혜가 있었으므로 각 군현은 태실을 자기 지역으로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실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던 제국주의 일본이 1927년 헌종의 태항아리를 이전한 뒤, 태실과 석물은 훼손된 채 방치되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비석은 옥계저수지에 수몰되어 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복원에 필요한 주요 석물인 태주석은 도난당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          


덕산천의 상류 상가리 가야산 석문봉 동쪽 지능선 언덕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문화재자료 제187호)가 있다. 이구는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7대손으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된 뒤 남연군에 봉해졌다. 1815년(순조 15)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남연군의 사후 대원군은 명당으로 소문난 가야사(伽倻寺)를 불태운 뒤 부친의 묘를 면례(緬禮)하였다. 대원군은 절 뒤에 있던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세운 금탑(金塔)도 허물어 남연군의 묘 안에 부장했다고 한다. 이후 가야사는 폐사(廢寺)가 되었다. 나중에 남연군은 순조(純祖)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였다가 뒤에 충정(忠正)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하여 교세를 확장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서구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하고 천주교도들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남종삼(南鍾三) 등 신도 8천여 명이 학살되고, 프랑스인 신부 9명도 처형되었다. 이때 생존 신부 리델이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공사(公使) 벨로네에게 이 사실을 전함으로써 서양에 널리 알려졌다. 2년 뒤인 1868년(고종 5)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대한 두 차례의 통상 요구를 거절당하자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진 대원군은 척양(斥洋),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며 쇄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기 전 상가리(上加里)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가야사를 비롯한 100여 개에 이르는 절과 암자에는 수많은 승려들이 있었을 것이다. 상가리를 갯골 또는 윗갯골이라고도 하는데, 갯골은 가얏골의 줄임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얏골을 가야동(伽倻洞)이라고 불렀다. 갯골이란 이름이 가야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가리도 원래는 승가(僧伽里)였다. 승가(僧伽, samgha)는 불교 승려를 뜻하는 말이다. 승려들이 사는 마을=승가마을 곧 승가리가 변해서 상가리가 된 것이다. 가야산이란 이름도 가야사에서 유래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한때 수덕사(修德寺)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했던 가야사는 사라지고 지금은 가야사지(伽倻寺址, 충남기념물 제150호)만 남아 있다. 가야사의 유구(遺構)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지금은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절의 규모를 추정할 수 없다. 다만 상가리 계곡의 논과 밭에서 발견되는 기와조각과 석재, 자기조각 등으로 보아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남연군묘(南延君墓) 부근에도 기와조각과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옥계리와 상가리에는 남연군묘 외에도 흥녕군묘(興寧君墓), 연령군(延齡君)과 명빈박씨(榠嬪朴氏)의 묘, 아씨묘골 등이 있다. 아씨묘골은 대원군의 가족 중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의 애장터다. 아씨묘골에는 원찰과 재각, 탑 등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상가저수지


가야산은 충청남도 서부 지역에서 가장 높고 자연 경관이 빼어난 산으로 신라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졌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있는 이 산은 덕산도립공원에 속한다. 가야산의 기암과 능선을 따라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억새풀이 유명하다. 


남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주봉인 가사봉(袈裟峰, 가야봉, 678m)을 중심으로 상왕산(象王山, 307m), 일락산(日樂山, 521m), 수정봉(水晶峰, 453m), 옥양봉(玉洋峰 , 621m), 석문봉(石門峰, 653m), 원효봉(元曉峰, 605m) 등이 연봉을 이루며 솟아 있다. 석문봉은 마치 커다란 문을 열어 놓은 듯한 형상으로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이곳 주민들은 석문봉을 가야산의 주봉으로 여겨 왔다. 남연군묘와 가야사터의 지맥(地脈)이 석문봉에서 흘러내려오기 때문이다.


옥양봉 동쪽 지능선에는 서원산(書院山, 481m), 가야산 남쪽에는 수덕산(修德山, 덕숭산, 495m), 그 동남쪽에는 홍성의 용봉산(龍鳳山, 381m)이 자리잡고 있다. 수덕산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가 있다. 


가야산은 서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급경사를 이룬다. 가야산 서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용비저수지와 산수저수지를 비롯해서 신창저수지, 황락저수지로 흐르고, 북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고풍저수지로 흘러든다. 고풍저수지 상류는 용현계곡(龍賢溪谷)으로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다. 동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상가저수지와 옥계저수지, 남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광천저수지로 흘러든다.  


가야산 기슭에는 가야사지 외에도 많은 불교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상왕산 기슭에는 충남의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인 개심사(開心寺), 일락산 기슭에는 일락사(日樂寺)가 있다. 또, 서원산 기슭에는 보덕사, 원효봉 기슭에는 원효암이 있다. 용현계곡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이 있는 보원사지(普願寺地)가 있다. 가야산 자체가 내포 불교의 역사이자 내포 문화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가야산 주변에는 또 조선시대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설치되었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과 당진의 면천읍성(沔川邑城, 충남기념물 제91호), 예산의 추사김정희선생고택(秋史金正喜先生古宅,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이 있다. 추사고택 근처에는 화순옹주정려문(和順翁主旌閭門, 충남유형문화재 제 45호)도 있다. 예산군 덕산면 원효봉 남동쪽에는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梅軒尹奉吉義士事蹟地, 사적 제229호)와 덕산온천이 있다.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한 독립운동가이다.   


옥계천과 상가천이 흐르는 가야계곡에는 조선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가 자신의 문집에 가야구곡(伽倻九曲)이라 칭한 아름다운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병계는 '가야구곡(伽倻九曲) 서곡(序曲)'이란 시에서 가야구곡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伽倻九曲 序曲

 

伽倻秀氣炳三靈 가야산 빼어난 기운은 삼령처럼 빛나고

一道巖泉九曲淸 한 길 암천은 아홉 굽이굽이 맑구나

鬼護神呵千載秘 귀신이 보살펴 천 년 동안 감췄는데

淙然和我膝琴聲 물소리 내 무릎 위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네

 

병계는 가야구곡의 수려한 경치를 삼령(三靈) 즉 해와 달, 별에 견주고 있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바위 위를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거문고를 타는 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나타낸다. 자연에 합일되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넋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승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요 행운이다.  


병계는 제일곡(第一曲) 관어대(觀魚臺)로부터 제구곡(第九曲) 옥량폭(玉梁瀑)까지 가야구곡의 명칭을 열거한 뒤 위치를 설명해 놓았다. 가야구곡의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一曲觀魚臺 在谷口淸風山之西(1곡은 관어대니 골짜기 입구의 청풍산 서쪽에 있다), 二曲 玉屛溪 在壽星峯之北(2곡은 옥병계니 수성봉 북쪽에 있다), 三曲 濕雲川 玉屛溪向上少北 小澗之自東北 入於屛溪者也(3곡은 습운천이니 옥병계에서 위로 향해 조금 북쪽에 있다. 작은샘이 동북으로부터 병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四曲 石門潭 在濕雲之小西 衆仙洞北(4곡은 석문담이니 습운천의 조금 서쪽 중선동 북쪽에 있다), 五曲 暎花潭 去石門一轉 在靑龍坊(5곡은 영화담이니 석문을 지나 한번 돌아 청룡방에 있다), 六曲 卓錫川 在白塔南(6곡은 탁석천이니 백탑 남쪽에 있다), 七曲 臥龍潭 在迦葉峯之東趾 能仁菴下(7곡은 와룡담이니 가섭봉의 동쪽 발치 능인암 아래에 있다), 八曲 孤雲壁 在靈臺少下溪南(8곡은 고운벽이니 영대 조금 아래 계곡 남쪽에 있다), 九曲 玉梁瀑 在龍潭北 紫玉峯下 山之僧稱古梁洞者也 示別派也-9곡은 옥량폭이니 용담 북쪽 자옥봉 아래 있다 산승이 고량동이라 일컫는 것은 다른 갈래를 보인다). 

 

가야구곡 명칭 가운데 옥병계와 석문담, 와룡담 등 삼곡은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명명하고 예서(隸書)의 일종인 팔분체(八分體)로 써서 바위에 새겨 놓았다. 나머지 육곡은 병계가 옥계에 살면서 아우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 1688~1769)와 함께 명명한 것이다. 예산군에서는 옥계천과 상가천 주변에 가야구곡 녹색길을 조성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변산바람꽃


상가저수지 상류에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양지바른 곳에 이제 막 피어난 변산바람꽃을 만났다. 변산아씨는 열흘이나 먼저 달려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이쁜 변산아씨를 어찌 만나러 달려오지 않을 수 있으랴!      


변산바람꽃


올해는

뭐가 그리도 급했을까


열흘이나 먼저 달려와서는

가쁜 숨 몰아쉬며 봄을 알리네


엄동설한 기다림에 지쳤음인가

변산바람꽃


가사봉(가야봉) 중계탑


가사봉 북쪽 능선의 석문봉과 옥양봉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전경


헬기장과 가사봉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곧 계곡의 가파른 너덜겅길이 나타났다. 너덜겅길이라 걷기도 쉽지 않았다. 산중턱을 지나면서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들이 곳곳에 보였다. 정상부에 가까와질수록 경사는 더 가파랐다. 머리에서는 연신 땀이 이마와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마침내 가사봉 정상에 올라서자 가사봉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가야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쪽으로는 천수만과 간월호 일대의 서산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북동쪽으로는 상가저수지 건너편으로 서원산이 솟아 있고, 남동쪽으로는 옥계저수지와 드넓은 삽교평야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사봉 정상에는 출입금지구역인 중계탑 기지가 차지하고 있어서 가야산맥 남쪽 주능선의 원효봉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명산의 정상에 왜 흉물스럽게 저런 중계탑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대안을 마련해서라도 명산의 풍경을 망치는 중계소나 군사시설은 조속히 철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七長山, 516m)에서 금북정맥(錦北正脈)과 한남정맥(漢南正脈)으로 갈라진다.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이별한 금북정맥은 충청남도 천안의 청룡산(靑龍山, 400m)과 성거산(聖居山, 579m)을 지나 천안과 공주의 경계인 차령(車嶺), 아산의 광덕산(廣德山, 699m), 공주의 차유령(車踰嶺, 차동고개)과 국사봉(國師峰, 489m), 청양의 백월산(白月山 혹은 飛鳳山, 560m), 보령의 오서산(烏棲山, 791m), 홍성의 보개산(寶蓋山, 274m)과 월산(月山 혹은 日月山, 395m), 예산의 수덕산(495m)까지 달려와서는 가야산의 원효봉을 거쳐 가야산 가사봉(678m)에 이른다. 가사봉을 떠난 금북정맥은 다시 석문봉과 일락산, 상왕산으로 올라가 서산의 성국산(聖國山)과 팔봉산(八峰山, 326m), 태안의 백화산(白華山, 284m)을 지나 태안반도의 지령산(知靈山, 218m)에 이르러 여정을 끝낸다. 


금북정맥은 금강의 북쪽에 있는 정맥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길이는 약 240㎞에 이른다. 금북정맥의 북서쪽으로는 안성천과 삽교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금강이 굽이쳐 흐른다.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와 삽교읍 전경


원효봉


가사봉


해는 어느덧 서해바다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고, 천수만과 간월호에는 황금빛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사봉 정상부는 출입금지구역이라 헬기장으로 내려가려면 동사면을 횡단해야만 했다. 가사봉 동사면을 횡단하던 중 전망이 좋은 바위가 딱 한 군데 있었다. 전망바위에서는 옥계저수지와 덕산면, 삽교평야, 그리고 헬기장 건너편의 원효봉이 잘 바라다보였다. 헬기장으로 내려와서 지나온 가사봉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가사봉이 저만치서 무언의 인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큰 산 산길을 가다가 문득 되돌아보면 저 험하고 먼 길을 어떻게 걸어왔을까 하고 감탄할 때가 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삶이 비록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때가 많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편도선 열차를 탄 것과도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길이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서 종종 회한에 잠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자신이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연극에서 흥행과 성공은 오롯이 그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없다면 김빠진 연극이 되고 말 터!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연극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열연을 했을까?


가야산의 아늑한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산을 내려오다.  


201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