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댕이 돌미륵
미륵당석불(彌勒堂石佛)을 보기 위해 이천시 모가면 두미리(豆美里) 미륵댕이 마을에 들렀다. 미륵댕이는 대덕산 동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륵댕이 웃담에는 대여섯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숲이 있는데, 그 숲 한가운데 돌로 지은 감실(龕室) 안에 91cm 크기의 키 작은 돌미륵 하나가 안치되어 있었다. 감실은 시멘트 바닥에 직사각형 판석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돌미륵의 불두(佛頭)는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나중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듯했다. 불상의 몸체는 이끼가 끼어 있었지만, 불두는 금방 깎은 듯 깨끗한데다가 시멘트로 목 부분을 보수했기 때문이다. 왼쪽 어깨도 조금 파손된 상태였다. 불두는 몸체에 비해 매우 큰 편이고, 귀가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이목구비가 또렷하지 않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코와 입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옆으로 길게 새겨진 눈도 자세히 봐야 흔적만 희미하게 나타났다.
어깨는 머리에 비해 매우 좁은 편이었다. 왼팔은 올려서 가슴에 대고 있으며, 오른팔은 밑으로 내려뜨렸다. 불상의 양식으로 볼 때 두미리 돌미륵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두미리(豆美里)는 200년 전에 두역동(豆亦洞)이라는 마을의 두(豆)와 시미동(侍美洞)이라는 마을의 미(美)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두역동(豆亦洞)은 150년 전에 없어졌다. 미륵댕이는 두미1리를 일컫는다.
미륵댕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전해온다. 450년 전 사나운 산적이 마을사람들을 괴롭혔다. 어느 날 한 장사가 들어와 산적을 내쫓은 뒤 이 마을에 큰 돌미륵을 세우고 지붕까지 만들어 놓고 갔다. 이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미륵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돌미륵 옆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으로 보이는 타다 만 초가 있었다. 돌미륵은 아직도 미륵댕이와 그 인근의 민중들에게 여전히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은 미래불로서 기독교의 구세주와 그 유사성이 있다. 고통스런 현세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던 미륵불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간절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현세에도 수많은 미륵불이 우리에게 왔다갔는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나 전태일이 미륵불은 아니었을까? 미륵불은 언젠가 나타날 구세주가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곧 미륵불이요 구세주인 것이다. 거대한 강물도 가느다란 샘물이 하나 둘 모여서 된 것이다. 미륵생불들이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이상사회를 실현하기를.....
201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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