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망산
주말을 맞아 국망산(國望山, 770m)을 찾았다. 국망산은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와 앙성면 용대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원래 이름은 금방산(金傍山)이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민비(閔妃)가 금방산 남쪽 기슭의 가신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이 산에 자주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해서 국망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은 말티고개-선도산(547m)-우암산(339m)-좌구산(657m)-보현산(481m)을 지나 칠현산(516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보현산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 충주지맥은 부용산(644.3m)-수레의산(679.4m)-원통산(645m)-질마재-승대산(564m)-둔터재-국망산-하남재-보련산(764.9m)-쇠바위봉-동막재-국사봉-무쇠봉을 거쳐 능바위에서 끝을 맺는다. 국망산은 하남재를 사이에 두고 보련산과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다. 두 산은 충주 서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국망산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국망산 정상에는 꽤 넓은 토대(土臺)가 있는데, 전망이 상당히 좋다. 북쪽 앙성면에는 앙성온천이 있고, 남쪽 노은면에는 문성자연휴양림이 있다.
명성황후유허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신흥동 515-2번지 국망산 남쪽 산발치에 있는 명성황후유허지(明成皇后避難地)를 찾았다. 유허지엔 아무런 흔적도 없고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최근에는 명성황후로 부를 것인가 민비(閔妃)로 부를 것인가 하는 호칭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명성황후라는 존호가 추존된 후임에도 '중궁 민씨(中宮 閔氏)' 또는 '민후(閔后)'라고 불렀다. 황현은 그녀를 망국의 원흉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초의 여성의병대장인 윤희순(尹熙順)의 '왜놈 대장은 보거라'라는 글에서도 '민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默)의 중암집(重菴集) '행장(行狀)'이나 '의병가사'에서도 '민비'라고 칭하고 있다. 조선의 민중들도 '민비'라고 불렀다.
구식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이에 합세한 성난 백성들이 외친 구호도 '민비를 잡아 죽여라!'였다. 민비는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에게도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명성황후는 당시 조선의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인터넷 사이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네티즌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유관순, 이순신 장군에 이어 명성황후가 4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명성황후가 드라마와 뮤지컬로 미화되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명성황후는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민자영(閔紫英)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민자영은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원자(元子) 문제로 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1873년 일본 보수파들의 정한론(征韓論) 득세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었다. 이를 이용해서 민비는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앞세워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고종의 친정(親政) 체제를 수립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반대로 개방정책을 펼쳐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朝日修好條規, 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하고 일본과 수교하였다.
개방정책은 과연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한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 척족정권)은 부패했고, 개화정책의 시행은 지지부진했다. 척족정권의 인사행정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국고의 낭비와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한편 직접적으로는 구 오군영(五軍營) 소속 군병들에 대한 군료(軍料) 체불이 누적되면서 임오군란이 터졌다.
임오군란을 거창하게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라고 역사서는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부패한 척족정권에 대한 구식군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저항이었다. 군제 개혁 후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 등 구 오군영(五軍營) 소속 군병들은 대부분 실직하였으며,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에 편입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에 비해 처우가 매우 열악했다. 고관대작의 자제 80명을 선발해서 만든 별기군은 정식군대도 아닌 일종의 사관후보생 집단에 불과했다.
차별대우에다가 1년 이상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던 구 오군영 소속 군병들은 불만이 절정에 달했다. 군료 체불로 고통받던 구식군인들은 봉급을 준다고 해서 군료미를 타러 갔다. 이들이 받은 군료미에는 겨와 모래가 많이 섞였을 뿐만 아니라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구식군인들은 군료미를 나눠주던 관리를 폭행한 뒤 군료 담당 선혜청(宣惠廳) 당상관(堂上官) 민겸호(閔謙鎬)을 찾아가 부당함을 호소했다. 민겸호는 도리어 구식군인들을 체포하고 주동자를 사형에 처하려 했다.
구식군인들의 군료미 지급 담당자는 민겸호의 하인이었고, 군료를 착복한 자는 민겸호였다. 척족정권의 구식군대 차별은 군대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군대 자체를 엉망으로 관리한 것이었다. 군료를 떼인 것도 억울한데 동료들이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구식군인들이 무장봉기하면서 1882년 마침내 임오군란이 터진 것이다. 임오군란은 대원군이 개입하면서 척족정권의 전복과 일본 세력 배척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봉기군은 동별영(東別營)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감금된 동료를 구출한 뒤 민씨척신과 친일 개화파 관료들을 습격하였다. 봉기군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봉기군은 대원군의 형인 영돈녕부사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을 살해하고, 창덕궁(昌德宮)으로 몰려가 민겸호와 전 선혜청 당상관 김보현(金輔鉉)도 죽였다. 시간이 갈수록 척족정권에 불만을 품은 하급군병과 백성들이 가세하면서 봉기군은 대규모 세력을 형성했다.
봉기군은 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민비를 제거하려고 수색했으나, 그녀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와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해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숨었다가 광주(廣州)와 고향인 여주의 민위영 집을 거쳐 장호원(長湖院)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장호원을 떠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을 찾아가던 중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밑 신흥동 이시일(李時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시일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서 팔던 가난한 총각으로 민비를 극진하게 모셨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던 무능한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재집권에 성공한 대원군은 즉시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한 대원군은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복설했다. 구식군인들에게 군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오군영 체제도 복구시켰다.
대원군은 척족을 제거하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인사도 단행했다. 그러나 대원군파는 고종 친정 기간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남아 있는 인사가 거의 없었다. 대원군은 어쩔 수 없이 남인 계열의 노정치가들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세정개혁도 단행하였다.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辛甘菜)와 해홍채(海紅菜)의 징수 금지, 주전(鑄錢) 금지, 도가(都賈)의 민폐 금지, 무명잡세(無名雜稅)의 징수 금지 등을 명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을 이끌고 한양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다. 일본의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운 대원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청군(淸軍)에게 일본군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대원군은 민비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고 정례 절차를 강행하였다. 이에 민비는 윤태준(尹泰駿)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때 청군은 결정적으로 민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청군의 출동으로 봉기군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다.
대원군 정권 33일 천하는 막을 내리고, 최초의 반봉건, 반외세 투쟁이었던 임오군란은 진압되었다. 50여 일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환궁한 민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척족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민비는 청군의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개화당(開化黨) 정권의 3일천하를 무너뜨렸다. 그녀는 대원군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는 한편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올렸다.
민비는 민겸호 같은 척족들을 통해서 착복한 엄청난 재물을 미신과 잡기로 낭비했다. 그녀는 점을 잘 친다는 이유로 무당 이유인에게 비단 백필과 돈 일만냥이라는 거금을 주었고, 세자전담 맹인무당에게는 정이품 벼슬을 내려 처첩들을 거느리며 살게 했다. 또 궁중의 내탕금(內帑金)으로 관우(關羽)를 모시는 북관묘(北關廟)를 세우고 여기에 진령군(眞靈君)이란 무녀를 상주하게 했다. 그러자 진령군을 누님이라 부르며 아부하는 재상도 있었다.
혹자는 민비의 화려한 차림새를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세수입의 부족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 나 관리들의 봉급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왕비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한다. 민비의 사치는 그녀와 척족들의 매관매직으로 받은 뇌물과 부정부패로 모은 돈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나라의 재정을 채울 세금은 민비와 척족들의 곳간으로 흘러들어 갔고,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지방관들의 본전을 뽑기 위한 가렴주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민비에게 뇌물을 상납한 일본상인들이 조선에서 엄청난 양의 쌀을 구매해 가는 바람에 백성들은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을 지경에 처했다. 민비와 척족정권이 대규모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을 방임했기 때문이다.
식량 부족으로 백성들이 아사 상태에 이르자 지방관들은 방곡령(防穀令)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방곡령으로 인한 일본상인들의 손해까지 배상해줘야 했다. 민비와 척족정권의 부정부패가 조선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민비는 막대한 재물을 서양문물의 도입이나 인재 양성에 쓰지 않고 터무니없는 곳에 낭비했다. 나라를 위해서 쓰지도 않았다. 그녀의 씀씀이는 컸으나 이를 과연 여장부답다고 미화할 수 있을까? 조선의 개항을 추진한 인물임에도 민비는 서양의 합리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과학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민비의 외교 전략이 탁월하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 임오군란으로 쫓겨난 민비는 청군을 끌어들여 정권을 되찾았지만,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간섭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마치 조선왕처럼 행세하면서 조선을 청나라에 합병시키려고까지 했다.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과 수교를 맺게 한 것도 사실은 임오군란 직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의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청나라에 의탁한 민비로서는 싫어도 맺을 수 밖에 없었던 수교였다. 청일전쟁 후에 민비가 러시아에 의탁하려 했던 것도 일제가 그녀의 실각을 바랬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1894년 음력 1월 동학(東學)의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에 대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怨運動)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불법 착취,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불만이 고조되면서 동학교도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다. 동학혁명은 조선 전제왕조정권의 억압과 착취,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외세, 반봉건 저항운동이었다. 민비와 척족정권의 전횡과 부정부패는 백성들로 하여금 대규모로 동학혁명에 가담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봉기한 동학혁명은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청국 세력은 조선에서 밀려났다.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1894년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이 들어서고, 그해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부상했다. 위기에 처한 민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고 기도했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일본 낭인(浪人, 로닌)들을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잠입시켜 민비를 암살하고, 시체를 불태운 뒤 뒷산에 묻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 또는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다.
대원군은 일본에 민비의 폐위를 제안했다. 민비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 10월 복호(復號)되었다. 1897(광무 1)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했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대원군도 실각했다. 민비에게는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1월에는 국장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기에 1897년 10월 이전은 민비, 이후는 명성황후라 칭함이 맞다고 본다.
을미사변은 일제가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고 방화까지 한 끔직하고 치욕스런 사건이다. 을미사변을 비롯한 일제가 자행한 수많은 만행들은 명성황후의 과오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녀의 무능과 실책이 크다고 해서 학부대신 이완용 (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 (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 (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과 부일매국노(附日賣國奴)들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명성황후가 비운에 간 것은 분명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하지만 자신과 척족정권의 권력 유지와 부정 축재에만 몰두하다가 조선이 근대화를 이룰 기회를 놓치게 한 명성황후가 너무 미화되고 있음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명성황후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위인과 동렬로 비교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네티즌이 존경하는 위인들 중 명성황후가 4위에 오른 것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그 실상을 말해 준다.
엉터리 역사 교육은 부일매국노 등 외세의 앞잡이들이 진실로 바라는 바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2014.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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