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가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불현듯 단양이 보고 싶어졌다. 단양에는 소백산이 솟아 있고, 남한강이 흐르며, 도담삼봉과 사인암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단양중학교는 내가 교단에서 해직된 지 10여 년만에 복직이 되어 부임했던 곳이다. 단양중학교에는 내 삶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그리우면 만나야 하고, 보고 싶으면 찾아가야 한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단양으로 향했다.
단양 영천리 측백나무 숲
제천에서 단양으로 가다가 국도변에 있는 매포읍 영천리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62호)에 들렀다. 나무들마다 바로 근처의 석회석(石灰石) 광산과 시멘트 공장에서 날아온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름드리 측백나무 숲을 기대하고 왔는데, 나무들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보고는 사실 좀 실망했다. 그래도 측백나무들을 보자 옛날 내 고향 시골집이 떠올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내 어릴 적 시골집도 측백나무를 빙 둘러 심어서 울타리를 했었다.
측백나무는 노간주나무, 회향목과 함께 석회암지대에서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양은 대부분 석회암지대라 곳곳에서 측백나무와 노간주나무, 회향목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도담삼봉
남한강
도담삼봉에서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매포읍 하괴리 도담삼봉(島潭三峯)에 들렀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푸른 물 한가운데 중봉을 중심으로 북봉과 남봉 등 바위섬 세 개가 나란히 떠 있었다. 북봉의 위쪽으로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중봉을 장군봉, 북봉을 첩봉, 남봉을 처봉이라고도 한다는데 지금 같은 남녀평등시대에는 큰일 날 소리다. 그래서북봉을 딸봉, 남봉을 아들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봉의 남쪽 중턱에는 아담한 정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삼도정(三島亭)이었다. 1548년(명종 4)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저 자리에 삼봉정(三峰亭)이 있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단양군수 조정세가 정자를 새로 짓고 능영정(凌瀛亭)이라 이름했다. 지금의 삼도정은 성신양회 김상수 회장의 희사로 1976년에 세운 것이다.
단양은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풍기 사람 정운경(鄭云敬)은 젊은 시절 도담을 지나다가 관상(觀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정운경에게 10년 뒤에 혼인하면 재상 재목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10년 뒤 다시 돌아온 정운경은 삼봉에서 천한 신분의 여인을 만나 정을 통했다. 10달이 지나 여인은 현재의 단양읍 도전리에서 남자 아이를 낳았다. 길에서 아이를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지었으며, 부모가 인연을 맺은 삼봉(三峰)을 그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정도전은 비록 천출(賤出)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 도담삼봉은 정도전의 유년시절을 함께 한 벗이었다. 단양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도담삼봉에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었다. 어느 해 큰 홍수가 났을 때 삼봉산이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삼봉에 대한 세금을 정선군에 내야만 했다. 그 말을 들은 소년 정도전은 '우리가 삼봉을 떠 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삼봉이 오히려 물길을 막아 우리가 피해를 당하고 있기에 아무 소용도 없는 저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 정선에서 삼봉을 도로 가져가라'고 일갈했다. 그 뒤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1548년(명종 4)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은 도담삼봉을 비롯해서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등 단양의 아름다운 명승지 8곳을 단양팔경이라 명명했다. 1557년부터 1559년까지 단양군수를 지낸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은 도담삼봉의 풍경을 '이방백과 더불어 도담에 배 띄우다(與李方伯泛島潭)'라는 한시에 담아 노래했다. 황준량은 이황의 문인이다.
山明楓葉水明沙(산명풍엽수명사) 산은 단풍으로 불타고 물은 모래벌로 빛나는데
三島斜陽帶晩霞(삼도사양대만하) 석양이 지는 도담삼봉엔 저녁노을 드리웠네
爲泊仙槎橫翠壁(위박선사횡취벽) 신선은 뗏목을 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待看星月湧金波(대간성월용금파) 별빛 달빛 너울지는 금빛 물결 보려 기다리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도 암행어사 시절 이곳을 찾았다. 김정희는 '도담삼봉의 품격과 운치는 신선 그 자체'라고 극찬했다. 김정희 말고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도담삼봉을 찾아와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다.
영의정과 영중추부사를 지낸 이종성(李宗城:1692~1759)은 도담삼봉을 구경하고 그 감상을 '도담(島潭)'이라 제(題)한 칠언절구의 한시로 남겼다.
無窮造化轉移功(무궁조화전이공) 천지신명의 무궁한 조화신공 옮겨 와
天外三山落此中(천외삼산낙화중) 하늘의 세 봉우리 이곳에 떨어뜨렸네
今對宛然眞面目(금대완연진면목) 지금 그 완연한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秦皇何事畵瀛蓬(진황하사화영봉) 진시황은 어이해 영주 봉래를 찾았던고
이종성은 도담삼봉을 진시황이 찾으려 했던 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보다 낫다고 노래했다. 도담삼봉 예찬가라고나 할까!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도 도담삼봉을 찾았다. 그도 '도담(島潭)'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로 된 한시를 남겼다.
蓬島飛來落翠池(봉도비래낙취지) 봉래섬이 날아와 푸른 못에 떨어진 곳
石門穿出釣船遲(석문천출조선지) 낚싯배 조심스레 바위문을 뚫고 가네
誰將一顆雲松子(수장일과운송자) 어느 누가 솔씨 하나 가져다가 심어서
添得颼飅到水枝(첨득수류도수지) 물 위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 보탰을꼬
마지막 싯구 '添得颼飅到水枝(물 위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 보탰을꼬)'란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물에 비친 소나무 가지에 이는 바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조선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도 도담삼봉을 찾아서 그림을 남겼다. 거기재 최북(居基齋 崔北, 1712~1760)과 심재 이방운(心齋 李昉運, 1761~?)도 도담삼봉을 화폭에 담았다.
최북의 도담
거기재 최북(居基齋 崔北, 1712~1760)은 1749년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園嶠 李匡師, 1705~1777)와 함께 단양을 청유(淸遊)하면서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를 그렸다. 최북은 자신의 눈을 찌른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광사는 최북의 도담 그림에 해제(解題)를 썼다. 도보(道甫)는 이광사의 자(字)다. 해제를 풀이하면 '기사년 봄에 한벽루에서 글씨를 썼다. 그리고 월성 최씨인 식과 함께 놀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다.
최북의 그림은 지금의 도담 나루터에서 바라본 도담삼봉을 진경산수의 기법으로 그린 실경이다. 도담삼봉을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한 느낌이 든다.
김홍도의 도담삼봉
김홍도는 현풍현감으로 있던 1794년 단양을 유람한 뒤 1796년 도담삼봉, 사인암, 옥순봉이 들어 있는 '병진화첩'을 그렸다. 김홍도의 도담삼봉도 최북과 같은 방향에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사진으로 찍은 도담삼봉의 모습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 그림은 사실적이다.
도담삼봉은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도담삼봉 앞에는 나룻배가 떠 있고, 물가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과 나귀를 몰고 가는 사람을 아주 작게 그려 놓았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비밀한 이야기를 알아내는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 각자의 몫이다.
이방운의 도담
이방운의 도담은 북쪽의 석문에서 바라보고 그린 실경이다. 청색(靑色)과 녹색(綠色), 황색(黃色)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산뜻한 느낌을 준다. 근경(近景)은 석문, 중경(中景)은 도담삼봉, 원경(遠景)은 소백산에서 도담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표현되어 있다. 나룻배에 탄 사람들은 도포에 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들임을 알 수 있다. 또는 산천을 유람하는 시인묵객일 수도 있겠고 화가 자신일 수도 있겠다. 나룻배와 유람객은 정적인 산수화에 동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석문의 실경은 커다란 아치형인데 그림의 석문은 직사각형으로 그렸다. 석문을 실경과 다르게 그린 까닭은 무엇일까? 화가는 석문을 실제로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1802년 가을 청풍부사 조영경(趙榮慶, 1742~?)은 단양을 유람하면서 자신의 서정을 한시로 노래하는 한편 당대 유명 화가인 이방운에게 단양의 명승지를 그리게 했다. 이때 그린 것이 '사군강산삼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이라는 화첩이다. 표지를 포함해서 모두 16쪽의 화첩에는 도화동(桃花洞)과 평등석(平等石), 금병산(錦屛山), 도담(島潭), 구담(龜潭), 의림지(義林池), 사인암(舍人巖) 등 여덟 곳의 명승지가 그려져 있다.
이방운은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 모두 능한 화가였다. 그는 정선(鄭敾, 1676~1759)과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의 남종문인화와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받았다. '사군강산삼선수석첩'에서도 남종문인화풍이 드러난다.
석문
도담삼봉 바로 위에 있는 절벽에는 단양팔경 중 하나인 석문이 있다. 도담삼봉을 찾아왔던 김정희는 석문도 돌아보고 완당집(玩堂集)에 ‘석문(石門)’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한시를 남겼다.
百尺石霓開曲灣 (백척석예개곡만) 백척의 돌무지개는 물굽이를 열었는데
神工千佛杳難攀 (신공천결묘난반) 신이 빚은 천불에 오르는 길 아득하네
不敎車馬通來跡 (불교거마통래적) 거마가 오가는 발자취 허락치 않으니
只有煙霞自往還 (지유연하자왕환) 다만 안개와 노을만이 오고 갈 뿐이네
명암 이해조(鳴巖 李海朝, 1660~1711)는 석문을 중국의 명산 구지산(仇池山)에 비유하고, '돌부채가 하늘에 매달려 있다'고 노래했다.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다. 하지만 도담삼봉과 석문이 단양팔경 중 제일경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향정
남쪽 터널 위 산기슭에 있는 이향정(離鄕亭)은 도담삼봉을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명소다. 달 밝은 밤이 좋다. 이향정에 오르면 도담삼봉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술 한 잔 있으면 금상첨화다. 단양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대성산을 넘어서 이향정에 올라 도담삼봉의 멋진 경치를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었다.
도담삼봉을 바라보면서 흥취를 노래하다.
이종성 정약용은 선경을 노래하고
김홍도 이방운은 화첩에 담았으니
나 또한 선인의 발자취 이으려 하네
단양중학교
단양중학교 체육관
단양읍내로 들어와 15년 전쯤 내가 국어 선생으로 근무했던 단양중학교에 들렀다. 인조 잔디가 깔린 단양중학교 교정에 서니 감회가 새로왔다. 단양중학교에서의 아련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교육민주화운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으로 충주 산척중학교에서 해직된 지 거의 10년만인 1998년 10월 10일 정부의 특별임용조치로 나는단양중학교에 복직이 되었다. 당시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1학년생이었던 나는 복직에 대비해서 휴학계를 제출했다. 1년만 복직을 한 뒤 다시 한의과대학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충북도교육청은 나를 단양중학교로 발령을 냈다. 산을 좋아했기에 소백산이 있는 단양은 바로 내가 바라던 곳이었다. 소백산이 솟아 있고, 남한강이 흐르며, 명승 팔경이 있는 단양만큼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어디 또 있던가!
단양군교육지원청 교직원 사택
단양군 교육청에서는 상진리에 새로 지은 원룸식 사택에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내 마지막 교직생활 1년간을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미완성의 교단일기를 보람있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단양중학교에 부임하던 날 월요일 조회시간이었다. 삭발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개량한복 차림으로 부임인사를 하러 조회단에 오르자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내 모습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교육은 곧 새로운 문화적 충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내 모습은 동료 교직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단양읍내에도 단양중학교에 스님이 교사로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단양은 산악지대여서 겨울이 일찍 왔다. 본관 뒤에는 과학과 교무실이 따로 있었다. 나는 매일 과학과 교무실 난로에 쌍화차를 달였다. 동료 교사들이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과학과 교무실에는 늘 쌍화차를 달이는 향기가 감돌았다. 점점 더 많은 교사들이 쌍화차를 마시려고 과학과 교무실로 모여 들었다. 과학과 교무실은 쌍화차의 향기와 교사들의 대화로 넘쳐났다. 나중에는 단양군 교육청까지 소문이 나서 장학사도 쌍화차를 마시러 왔다. 별것도 아닌 쌍화차가 교무실에 이런 변화를 몰고 왔던 것이다.
쌍화차를 달이는 난로 옆에 누군가 꽤 큰 저금통을 갖다 놓았다. 쌍화차를 마신 교사들은 자발적으로 저금통에 백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넣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전은 점점 더 많이 쌓여 갔다. 마침내 저금통이 가득찼다. 때는 천주교를 중심으로 흉년이 든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저금통에 모인 돈을 단양의 천주교를 통해서 굶주리는 북녘 동포에게 보냈다.
날씨가 추워지자 감기에 걸리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조퇴를 하러 교무실로 찾아온 감기 환자들을 나는 침으로 치료해 주었다. 또 도시락을 먹다가 체한 아이들도 침으로 치료해 주었다. 어느 때던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골대에 머리를 박아 자라목이 된 학생을 현장에서 즉시 고쳐 준 적도 있다. 이를 목격한 학생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후 몸이 아픈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와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덧 단양중학교 주치의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단양의 양호교사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얼마 후 단양의 양호교사들로부터 아이들 치료를 위한 침술강좌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양호교사들에게 한의학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단양고등학교 교무실을 빌어 침술강좌를 열었다. 양호교사들은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침술강좌에 참여했다.
1999년도 새학기에 나는 2학년 2반 담임을 맡았다. 특별활동에서는 산악부 지도교사가 되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2학년 2반 아이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수업이 끝나면 종종 대성산 정상에 올라가 종례를 하기도 했다. 대성산 종례날에는 으레 소백산을 향해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산악부원들과는 소백산 야간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소백산의 골짜기와 능선들을 누비고 다녔다. 소백산 야간등반을 다녀온 아이들의 가슴속에는 점차 호연지기가 자라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태도는 의젓해졌고, 마음자세도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 입에서 공부보다 쉬운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도 어느덧 소백산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양중학교 소백산 등반대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나는 동료 교사들과도 소백산을 비롯해서 단양의 여러 산들을 오르내렸다. 나로 인해 단양중학교에는 산바람이 불었다. 여름방학에는 산악부원과 동료 교사 등 일곱 명이 지리산을 종주하기도 했다. 내가 단양중학교에서 퇴직한 후에도 그 끈끈한 정은 이어져 동료 교사들의 초청으로 설악산 공룡능선을 함께 등반하기도 하였다.
시간은 흘러 내가 다시 한의과대학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1999년 9월 1일 나는 복학을 위해 단양중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직했다.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섭섭해 했다. 2학년 2반 학부모들은 내가 단양중학교를 떠나기 전날 조촐한 송별연까지 열어 주었다.
단양중학교에서의 마지막 1년간의 교직생활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후회없는 교직생활이었다.
어둠에 싸인 적성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에 있는 적성산성(赤城山城)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할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하고 귀로에 올랐다.
2014. 12. 14.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천 두미리 미륵댕이의 돌미륵을 찾아서 (0) | 2015.01.12 |
---|---|
국망산과 명성황후유허지 (0) | 2014.12.31 |
가리봉 필례약수를 찾아서 (0) | 2014.09.22 |
설악산 용소폭포를 찾아서 (0) | 2014.09.19 |
길을 떠나 길을 묻다 - 에필로그 (0) | 201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