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곰배령에는 어떤 들꽃들이 피어 천상의 화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을까? 곰배령 천상의 화원을 보기 위해 국도 31호선(내린천로)을 따라가다가 418번 지방도(조침령로)로 접어들어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향했다. 조침령로는 점봉산에서 발원하는 방태천을 따라가는 도로였다. 늦게 길을 떠난 탓에 밤은 이미 깊어 사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조침령로에서 설피밭길로 접어들자 방태천변 곳곳에 자리잡은 펜션들이 나타났다. 진동리 설피밭 마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와 있었다. 강선리골 입구 주변에는 여기저기 펜션들이 몰려 있었다. 전화로 빈방을 물어보니 펜션마다 이미 투숙객들로 만원이었다.
마침 빈방이 있다는 펜션이 있었다. 숙박비는 8만원이라고 했다. 내일 곰배령을 갈 거라고 했더니 펜션 주인이 안된다고 했다. 곰배령을 가려면 하루 전에 미리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난감했다. 사전에 잘 알아보고 왔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 상남천 계곡
상남천 계곡의 용소폭포 일명 하트폭포
물봉선
이튿날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에 있는 용소폭포(龍沼瀑布)를 찾았다. 용소폭포는 가마봉(1191.5m)과 대바위산(1091.4m) 사이를 흐르는 상남천 중하류의 바위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 상남천을 따라 3백미터쯤 올라가자 용소폭포가 나타났다. 하트 꼴을 한 폭포 외벽 속에 용소폭포가 있었다. 말 그대로 하트폭포였다.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용소폭포 아래의 소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이 소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수동에 살던 한 할망의 꿈에 백발 할방이 나타나 '내일 일찍 용소로 오면 나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일찍 할망이 손녀를 앞세우고 용소로 가보니 엄청나게 큰 황구렁이가 폭포를 칭칭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망은 무서워서 손녀와 함께 상남까지 도망쳤다. 그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안개가 자욱한 골짜기 위로 무지개가 뜨더니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믿거나 말거나.....
폭포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폭포 아래에서는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족대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아빠가 물고기를 건져 올릴 때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여기서는 시간도 멈춘 듯 참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개울가 저만치에서 물봉선이 연분홍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 산과 물이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세파에 물든 욕망에서 벗어나자!'고 가슴에 새기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라고 읊은 나옹화상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 용궁사 대웅전
용궁사 대웅전 법당
용궁사 대웅전 법당
용소폭포 아래 작은 다리 건너편으로 용궁사(龍宮寺)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니 민가 두어 채가 나타났다. 앞쪽 민가에 사찰 표시가 있어 그 집이 용궁사이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용궁사는 가마봉과 백암산 중간쯤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끝에 솟은 아주 작은 산봉우리 정상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아름드리 참나무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퇴락한 작은 절 용궁사가 있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 규모의 대웅전과 그 뒤편으로 요사채로 보이는 움막 비슷한 작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렸다. 불상 따로 보살상 따로 봉안한 특이한 법당이었다. 불상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고행상을 봉안했다. 석가모니는 6년 동안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모진 고행을 했지만 끝내 팔고(八苦)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이 살아서 생로병사고(生老病死苦),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초월할 수 있을까? 초월할 수 있다면 그는 해탈한 사람이니 곧 부처인 것이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사랑하는 딸 유민이를 잃은 김영오 씨가 7월 14일부터 책임규명을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부처요 예수라고 생각한다. 김영오 씨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건이나 대선 부정선거 의혹처럼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은 어려울 것이다. 권력 기관과 권력 핵심 개입설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야당도 진상규명을 어렵게 하는 데 한몫 거들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에 의해 부일민족반역자들이 사회 전분야를 장악하면서 대한민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사회정의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부일 민족반역자들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교육기관, 언론, 관변단체 등을 동원해서 전방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켜 온 결과'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왜곡된 역사, 거짓을 옳은 것인 양 가르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홍천군 내촌면 와야리 연화사 전경
연화사 대웅전
연화사 대웅전 법당
연화사 대웅전 법당 신중탱화
연화사 삼성각
인제군 상남면 용궁사를 떠나 31번 국도(방내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상남리에서 451번 지방도(아홉사리로)로 접어들었다. 상남리에서 아홉사리재를 넘으면 홍천군 내촌면 와야리로 이어졌다. 아홉사리재는 가득봉(可得峰, 1,060m)과 백암산(白巖山, 1,099m)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안부에 있는 고개로 가득령(可得嶺)이라고도 했다. 가득령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근처에 솟아 있는 가득봉에서 유래한 듯했다.
아홉사리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에 사는 열여섯 살 먹은 처녀가 험한 고개를 넘어 홍천군 내촌면 와야리 권씨 댁으로 시집을 왔다. 시집을 온 지 1년만에 아들을 낳은 색시는 부모님이 몹시 그리워 친정에 가고 싶어 했다. 상남의 친정에 가려면 시집 올 때 넘어온 고개를 넘어야만 했는데, 아기와 함께 도저히 그 고개를 넘을 수가 없었다. 색시는 아기가 스스로 먼길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디. 아기는 자라서 어느덧 아홉 살이 되었다. 색시는 아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험한 고개를 넘어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아기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고개를 넘었다 하여 아홉사리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전설도 있다. 장가를 든 신랑이 혼례를 올린 지 3일만에 아흔아홉 굽이 험준한 길을 뚫는 공사에 동원되어 끌려갔다. 부역으로 끌려간 지 10달 뒤 아들이 태어났지만 신랑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공사는 끝날 줄을 몰랐다. 마침내 길을 닦는 공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아홉 살이 되었더란다. 이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홉살이재의 유래다.
아홉살이재를 내려오다가 '홍천구경(제5경) 가령폭포(可靈瀑布)'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와야리 도로변에 있는 폭포식당에서 우회전하여 가령폭포길을 따라 집골로 들어섰다.
1km쯤 올라가자 연화사(蓮華寺)가 나타났다.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만 갖춘 작은 절이었다. 요사채에서는 토종꿀과 음료수, 과자 등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대웅전 앞 화단에는 다알리아와 백일홍이 한창이었다. 법당으로 들어가 합장반배로 석가모니 삼존불에 예를 올렸다. 삼성각에도 들러서 예를 올리고 연화사를 떠났다.
홍천 백암산 가령폭포
백암산 등산로를 따라 약 5백m쯤 더 올라가자 가령폭포가 나타났다. 백암산 남남서쪽 계곡에 있는 가령폭포는 팔봉산, 가리산, 미약골, 금학산, 공작산 수타사, 용소계곡, 살둔계곡, 가칠봉 삼봉약수와 함께 홍천9경에 속한다. 낙차가 43m에 이르는 가령폭포는 가뭄 탓인지 물줄기가 가느다랗게 떨어지고 있었다. 장마철 수량이 늘어나면 폭포의 위용이 대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폭포는 길을 떠나 길을 묻는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이번의 여정은 사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성찰하는 과정이었다. 여정 내내 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즉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타불이(自他不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길을 가면서 만났던 산과 하늘, 바람과 물, 그리고 구름은 그 자체로 나의 스승이었다.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벗이자 스승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201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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