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길을 떠나 길을 묻다 - 익산 미륵사지를 찾아서

林 山 2014. 8. 13. 19:11

익산 미륵사지 서탑 복원 현장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 복원 현장


해체된 미륵사지 서탑의 부재들


미륵사지 동탑에서 필자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천마부대를 떠나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彌勒山) 남쪽 기슭에 있는 미륵사지(彌勒寺址, 사적 제150호)로 향했다. 34,5년 전 천마부대에 근무할 당시 무장구보를 하면 영내를 출발해서 미륵사지 앞을 지나 삼기면 삼거리 반환점을 돌아오게 되어 있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삼복더위에 무장구보를 하다가 낙오하는 팀원이 생기면 미륵사지에서 쉬게 했다가 팀이 반환점을 돌아 부대로 복귀할 때 다시 합류시키기도 했다. 


34,5년 전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는 폐허가 된 절터에 석탑 한 기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미륵사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미륵사지는 잔디가 깔린 드넓은 부지에 잘 정비된 유적지로 바뀌어 있었다.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 미륵사(彌勒寺)는 무왕(武王, 재위 600~641) 때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도 번성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 창건에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인 일명 서동설화(薯童說話)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익산토성, 쌍릉이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서동은 서동요를 유포하여 마침내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백제 제30대 왕에 올라 무왕이 된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獅子寺)로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다가 큰 연못에 이르렀을 때 물속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부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미륵삼존에 예를 올렸다.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자고 간청했다. 이에 무왕은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 새 산을 헐어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 이때 미륵삼존을 본받아 금당(金堂)과 탑과 회랑(回廊)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명명했다.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기술자를 보내 사찰 건축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발굴조사를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미륵사는 실제로 산의 흙으로 메운 연못에 자리잡았고, 가운데 목탑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석탑이 있었으며, 목탑과 두 석탑의 북쪽에는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금당을 하나씩 세운 뒤 회랑으로 구분한 삼원일가람(三院一伽藍) 형식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건물터에서 발견된 온돌시설은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원일가람 가람배치로 볼 때 미륵사는 미륵불을 주불로 모셨던 절로 추정된다. 미륵하생경에는 미륵이 도솔천에서 56억 7천만년 후에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한다고 했다. 미륵을 모신 금당과 탑을 이렇게 각각 세곳에 세운 것은 삼회의 설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미륵이 하생할 인연의 땅 금마에 용화세상을 가람으로 구상화한 사찰이 바로 미륵사였다. 부여가 아니라 이곳에 미륵사를 지은 것은 무왕이 수도를 금마로 옮기려고 했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당시 금마는 정치, 군사, 종교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쪽 금당 앞에 있던 석탑(미륵사지 서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4.24m.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당시 최고 수준의 석조건축술을 보여주는 이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미륵사지 서탑은 서남쪽 부분은 무너지고 북동쪽 6층까지만 남아 있었다. 현재 이 석탑은 복원을 위해 해체되었다. 석탑의 부재들은 해체된 채 복원된 동탑 앞 잔디밭에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미륵사지 서탑 복원 현장은 6~7층 높이의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륵사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건물지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막새 기와류와 명문 기와, 토기류, 금속, 목재 등 많은 유물도 출토되었다. 


2009년에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석탑 1층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가로 15.5㎝, 세로 10.5㎝의 금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로 쓴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봉안기로 인해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리봉안기는 백제의 서체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금제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 기법은 백제 금속공예가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쪽 금당 앞에 있던 석탑(미륵사지 동탑)은 1992년 문화재관리국과 전라북도에 의해 복원이 되었다. 동탑의 기단(基壇)은 목탑처럼 낮게 한단으로 만들었다. 1층은 몸돌 각 면을 3칸으로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 사방에서 내부로 통하게 만들었다.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서리기둥을 네 개씩 세웠다. 모서리기둥 위에는 목조건축을 본떠서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 처마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2층부터는 형태는 같으나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면서 7~8층은 모서리기둥을 각 면에 3개, 9층은 2개로 마무리했다. 9층 지붕돌 위에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용차-보주-찰주가 완벽하게 갖춰진 상륜부를 세웠다. 


미륵사지 서탑의 규모와 형태도 동탑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탑이 복원되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좀 더디더라도 세밀한 고증을 통해서 완벽하게 복원하기 바란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은 1994년에 완공되어 1997년 5월 9일 개관했다. 전시관 중앙실에는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한 성과를 토대로 제작한 미륵사 1/50 축소 가람모형이 있었다. 유물실은 사리장엄, 금동향로, 치미 등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약 1만9천여 점의 유물을 소장 또는 전시하고 있었다. 그외 문헌실과 건축문화실도 있었다.


천마부대에 근무할 당시에는 미륵사지를 무심코 지나치기만 했다. 문화적 소양이 부족했던 탓이다. 34,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미륵사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언젠가는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금마였다. 언제 다시 금마에 올 수 있을까? 미륵사지를 떠나면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생각하다. 세월의 무상함이여! 


2014.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