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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길을 묻다 - 천마부대를 찾아서

林 山 2014. 8. 12. 11:26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떠나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지로 향했다. 동고도리 금마면 소재지를 지나 신용리로 들어섰다. 신용리에는 내가 소싯적에 근무했던 제7공수특전여단이 있었다. 


옛날 2년여 내 청춘 시절을 보냈던 천마부대를 방문했다. 위병에게 내가 옛날에 여기서 장교로 복무했노라고 이야기하니 정문 출입을 허용했다. 위병소 앞 더 이상은 부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 위병소 앞에서 내가 근무했던 32대대 막사를 바라보았다. 옛날의 낡은 단층 막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34,5년 전의 공수특전단 청년 장교 시절로 돌아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팀원들과 함께 구보를 마친 후 매일 1시간 동안 막사 옆에 설치된 아름드리 통나무를 치면서 수도격파와 태권도 수련을 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10kg짜리 배낭과 총을 메고 10km의 거리를 팀원들을 이끌고 호각을 불면서 무장구보하는 모습도 떠올랐다.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한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혀 정말 힘들었다. 매주 M16 소총탄을 20발씩 쏘는 주간 사격과 야간 사격 훈련도 했다. 나는 사격 하나만큼은 특등사수였다. 


낙하산 강하 훈련은 3개월마다 한 번씩 했다. 문득 언젠가 낙하산 강하 훈련을 나갔을 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옆 중대 하사관이 점프를 했는데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엉겁결에 낙하산을 펴고 내려오던 앞엣 사람을 꽉 끌어안았다. 땅에 떨어졌을 때 낙하산을 편 사람은 대퇴골 골절상을 입고 후송되었는데, 낙하산 신세를 진 사람은 말짱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그 하사관은 왕빈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사자는 그 별명을 매우 싫어했다. 이름이 아마 무슨 도삼이었을 거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일년에 한 번은 천리행군을 나갔다. 1주일간은 적 후방 가상 침투 훈련으로 밤이나 낮이나 내내 걷기만 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큰 산을 하루에 두 번이나 넘은 적도 있었다. 2주일 동안은 작전, 도피 및 탈출 등의 훈련을 하고, 나머지 1주일은 복귀 훈련으로 또 내내 밤이나 낮이나 부대를 향해서 걷고 또 걸었다. 부대에 복귀할 때쯤 되면 얼굴은 타서 시커멓게 그을리고 수염은 꽤 웃자라 있었다. 용화산과 미륵산 사이에 있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부대가 보이기 시작하면 왜 그리도 반가운지...... 가족이 있는 부사관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밤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저녁에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전 부대원은 완전군장에 실탄을 휴대하고 부대 대연병장에 대대별로 집합했다. 여단장이 단상에 오르더니 '31대대 목표 전주, 32대대 목표 대전, 33대대와 35대대 목표 광주 지금 즉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것은 곧 유혈진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내가 속한 32대대는 대전으로 출동을 했다. 우리 대대는 충남대학교 유성캠퍼스에 주둔하면서 계엄군 임무를 수행했다.  


위관급 장교들은 순번을 정해 충남대학교 유성캠퍼스 정문에 설치된 위병소 당직을 섰다. 당시 대학생들은 계엄군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이유도 없이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대학 교수를 학생으로 오인하고 구타를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병 장교를 설 때 나는 부하들에게 일체 대학생들을 때리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 번은 대학 캠퍼스 근처에서 지나가던 여성을 추행하던 강간범을 붙잡아 경찰에 인계한 적도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유혈진압되자 계엄군 임무도 비로소 끝났다. 비록 광주에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광주 시민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 당시 7여단장이 신군부를 평정하는 진압군의 선봉에 섰다면 나도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7여단장은 신군부의 편에 섰다. 당시 육군 중위였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특전사령부에 파견되어 정훈참모 밑에서 '검은 베레'라는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신문이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특전사령부에 근무할 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장교식당이었다. 사령부 장교식당의 메뉴는 거의 호텔급이었다. 여단에 근무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Z지역에 파견나갔을 때의 일도 기억났다, Z지역은 국가 방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지역이라 보병부대가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보병부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군에서는 특전사 1개 지역대의 지원을 받아 경비를 보강하도록 했다. 그 지원 임무가 우리 여단, 우리 대대, 우리 지역대에 떨어졌다. Z지역에 파견을 나가면 힘든 훈련도 없이 경비와 수색 임무만 수행하기에 다들 좋아했다.


Z지역에 파견 나간 어느 날 낯익은 보병부대 사병이 눈에 띄었다. 이런 우연이! 바로 중학교 동창이었다. 'oo야!' 하고 부르자 그는 일순 경계하는 눈빛이더니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무척이나 반가와 했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동창 녀석을 장교 휴게소로 불러 통닭 튀김과 양주를 사줬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동창은 술이 오르는가 싶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양주를 먹였으니 탈이 날 법도 한 일이었다. 동창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튿날 동창은 술이 덜 깨서 누렇게 뜬 얼굴로 내게 와서 그동안 모아 뒀던 건빵 몇 봉지와 필터 없는 담배 몇 갑을 내밀었다. 내게 무언가 주고 싶었던 동창의 마음을 읽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동창은 나에게 줄 게 그것이 전부였으리라. 동창의 성의가 담긴 선물을 나는 기꺼이 받았다. 그후 나는 Z지역에서 돌아왔고 그 친구는 제대를 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만나면 옛날의 그 이야기를 하면서 껄껄껄 웃곤 한다. 


1981년도 6월 말 나는 2년 4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내가 걸어 나갔던 부대 정문으로 다시 들어오기까지 34,5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흘렀다. 풋풋했던 그 청년 장교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내 청춘의 흔적이 묻어 있는 막사와 연병장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뒤 천마부대를 떠났다. 위병이 34.5년 전처럼 부대 정문을 나서는 나를 거수 경례로 배웅했다. 


2014.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