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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길을 묻다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찾아서

林 山 2014. 8. 8. 17:44

익산 동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서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마면(金馬面) 고도리(古都里)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6호)을 찾았다. 남녀로 보이는 한쌍의 석불입상이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떨어져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에 얼굴과 손, 대좌 등이 표현된 석불입상은 흡사 장승처럼 보였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높은 관 위에 다시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었다.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표현된 사각형의 얼굴은 토속적인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목은 어깨와 얼굴이 붙어 있을 정도로 짧고, 몸통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거의 없으며, 팔은 생략한 채 배에 손만 겨우 표현되어 있었다. 긴 소매의 장삼은 몇 줄의 선으로 간략하게 나타냈다. 대좌(臺座)는 돌기둥 하단의 앞면을 약간 깍아서 만들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절제된 신체의 표현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음력 섣달 그믐날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두 석불입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칠월칠석날 단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는견우와 직녀처럼 안타깝고 슬픈 사랑의 전설이다. 서고도리 석상은 남자, 동고도리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지금은 옥룡천 위에 다리가 놓여 얼음이 얼지 않아도 언제든지 두 석불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동고도리 석불 뒷편에는 군남쌍석불중건기비(郡南雙石佛重建記碑)가 세워져 있었다. 비문에 의하면 1858년(철종 9)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땅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석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또, 금마(金馬)는 동쪽과 서쪽, 북쪽 등 삼면이 산으로 가로막히고 남쪽만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는 형국이기에 허술한 수문을 막기 위해 석불을 세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金馬山, 116m)은 말의 형상인데,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기에 마부 역할을 하는 인석(人石)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도리 석불입상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워진 것임을 시사한다.


일년에 단 하루 밖에 만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지 않울 수 없으리! 그 사랑이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두 석불입상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생각하면서 고도리를 떠나다. 


2014.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