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겨울 낙산사 가는 길 1

林 山 2015. 1. 20. 18:58

2015년 1월 1일 한계령을 넘어서 양양 오봉산(五峰山) 낙산사(洛山寺,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가는 길을 떠났다. 낙산사 해돋이를 보고 싶어서였을까? 동해 바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의상대 해돋이를 바라보면서 참선을 했을 의상대사(義湘大師)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낙산사 의상대 해돋이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36호) 일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7시 41분 43초! 드디어 찬란한 태양이 수평선에 드리운 구름을 뚫고 장엄하게 떠올랐다. 동해 바다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새해 소망을 기원했다

 

태양이시여! 새해에는 나를 더 낮아지게 하소서. 나를 더 겸허하게 하소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천지신명이시여!

 

낙산사 일주문

 

낙산사 부도전

 

낙산사 오솔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동해대로에서 낙산사로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현판에 '五峰山洛山寺(오봉산낙산사)'라고 씌어진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다. 일주문 바로 옆에는 부도전이 자리잡고 있다. 선정(禪定)에 드신 선사(禪師)들의 부도 앞에서 합장반배(合掌半拜)로 예를 표했다.


오봉산을 낙산(洛山)이라고도 한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 관음보살, Avalokiteshvara)이 항상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인 낙산사는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觀音祈禱道揚) 중 하나이다.


2005년 4월 4일 오후 11시 50분경 양양군 강현면 사교리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경내 16채의 전각들이 불에 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보타전(寶陀殿) 홍련암紅蓮庵), 사천왕문(四天王門), 의상대(義湘臺)만 화재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일주문 일대의 아름드리 노송들도 다행히 불길을 피했다.

 

낙산사 인월요

 

낙산사 산불재난안전체험장

 

낙산사 산불재난안전체험장의 동종 모형과 석조물, 누각


일주문에서 아름드리 소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낙산사 수련원인 인월요(印月寮)에 이른다. 인월요에서 왼쪽 샛길로 내려가면 산불재난안전체험장이 나타난다. 낙산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곳이다. 체험장에는 2005년 4월 6일 산불로 검게 탄 고목, 부서진 기와로 쌓은 탑, 녹아버린 동종 모형 등을 전시해 놓았다. 누각에는 산불 당시 화재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낙산사 홍예문


산불재난안전체험장을 올라서면 바로 홍예문(虹霓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이 나타난다. 홍예문은 1466년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세운 석문이다. 당시 세조의 뜻에 따라 강원도 26개 고을의 수령이 하나씩 보낸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의 기단부(基壇部)는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뒤 두 줄로 쌓아 무지개 모양의 문을 만들었다. 문의 좌우에는 돌로 벽을 쌓아 사찰의 경내와 밖을 구분하였다. 1962년에 홍예문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門樓)는 2005년의 산불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200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홍예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낙산사 경내가 시작된다. 낙산사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보타전(補陀殿), 홍련암 구역 등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낙산배 시조목


홍예문 안 바로 왼쪽 잔디밭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기념식수 반송이 자리잡고 있다. 반송 뒤로 각계 인사들의 기념식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2005년의 산불로 불탄 낙산사 복원을 기념하면서 심은 나무들이다.


심검당(尋劍堂) 길머리에는 낙산배 시조목(落山梨 始祖木)이 서 있다. 낙산 주변에서는 예로부터 재래종 황실배(皇室梨)를 재배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성종(成宗) 때 황실배 상품(上品)은 궁중의 진상품(進上品)으로 올렸다. 1893년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재배하던 장십랑(長十郞)을 일본으로 가져가 개량한 품종을 1915년 낙산사 주지가 국내로 들여와 도내 최초로 심었다는 배나무가 바로 이 낙산배 시조목이다.


심검당(尋劍堂)부터는 원통보전 구역이다. 원통보전 구역에는 원통보전을 비롯해서 사천왕문(四天王門)범종루(梵鐘樓), 빈일루(賓日樓), 응향각(凝香閣), 설선당(說禪堂), 정취전(正趣殿), 근행당(勤行堂), 송월요(送月寮)와 심검당(尋劍堂), 선열당(禪悅堂), 취숙헌(聚宿軒) 등이 있다.    

 

낙산사 심검당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다. 검(劍)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끊어서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케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실(禪室)이나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있으면 적묵당은 선원(禪院), 심검당은 강원(講院)으로 쓰인다. 이곳은 수행처이기에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낙산사 취숙헌


심검당 아래층에는 공양실인 선열당이 있다. 선열당과 그 맞은편의 취숙헌, 인월요는 산사의 체험을 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 공간이다. 낙산사 템플스테이는 '꿈길 따라서', '파랑새를 찾아서', '길에서 길을 묻다', '마음학교' 등의 주중 또는 주말 프로그램이 있다.

 

낙산사 원통보전 구역

 

낙산사 사천왕문

 

낙산사 서방 광목천왕(좌), 북방 다문천왕(우)

 

낙산사 동방 지국천왕(좌), 남방 증장천왕(우)


사천왕문부터 본격적으로 원통보전 구역이라 할 수 있겠다. 사천왕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金剛門)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으로 천왕문(王門)이라고도 한다. 사천왕문에 안치된 사천왕상이 다소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1950년 6.25 전쟁과 2005년 양양 산불에도 사천왕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천왕의 가호였음일까? 


사왕천(四王天) 또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은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다는 불교의 육욕천(六欲天) 중 첫 번째 하늘이다. 사왕천은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大悲多聞天) 등 네 개의 하늘이다. 각각의 하늘은 천왕이 다스린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 광목천왕은 용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다. 증장천왕은 장검을 들고 있는 모습, 다문천왕은 창과 보탑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사천왕은 팔부신장(八部神將, 八部衆)을 거느리고 불자들을 수호하는 신들이다. 또,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국정토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 사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자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낙산사 범종루

 

2005년 화재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문화재청)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십자형(十字型) 팔작지붕의 범종루(梵鐘樓)가 있다.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洛山寺 銅鐘)은 조선의 예종이 1469년 부왕 세조를 위해 보시한 종이었다. 이 동종은 2005년 4월 5일 산불로 녹아내려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현재 이곳에 걸려 있는 범종은 2006년 10월 문화재청이 복원한 것이다. 

 

낙산사 빈일루


빈일루는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이다. 만해 한용운이 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 두 번에 걸쳐 빈일루를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의 낙산사도


빈일루도 2005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빈일루는 조선 정조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에게 명하여 제작한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에 나온 낙산사도(洛山寺圖)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현판 글씨는 지관(智冠), 현판 서각은 김각한(金閣漢)의 작품이다.    


빈일루는 전돌을 깐 바닥에 16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면 4간에 옆면 3간의 누각을 올렸다. 16개의 기둥 중 4개는 2005년에 불탄 낙산사의 거목을 손질해서 세운 것이다. 누각의 정면은 팔작지붕, 후면은 응향각과의 조화를 고려해서 맞배지붕으로 지었다. 2층의 단청은 청학(靑鶴)과 비천상(飛天像), 용왕 등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특히 난초 화분과 붓, 서책을 들고 있는 정면 단청의 비천상은 다소 특이한 문양이다.    

 

낙산사 응향각

 

낙산사 설선당

 

낙산사 정취전


응향각은 원통보전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연꽃 봉오리 형상의 응향각 문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응향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설선당, 왼쪽에는 정취전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다. 설선당은 선실 겸 승방, 정취전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정취전에는 원래 극락 또는 해탈의 길로 빨리 들어서는 방법을 일러주는 보살인 정취보살을 봉안했을 것이다.   

 

원통보전 출입문과 담장

 

낙산사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보타전, 해수관음상과 함께 관음기도도량 낙산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당우(堂宇)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전각으로 원통전(圓通殿) 또는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한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 법당으로서 이 사찰이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三國遺史)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 등에 기록된 낙산사 창건 설화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당(唐)에서 귀국한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해안의 동굴에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위해 멀리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의상은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데, 그 새는 석굴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의상은 7일 동안 재계한 뒤 천(天), 용(龍) 등 팔부신장(八部神將)의 인도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의상은 수정염주와 동해의 용이 바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얻었다. 의상은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마침내 바다에 떠오른 홍련 위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 관세음보살은 그에게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계시를 내렸다. 의상은 그 자리에 홍련암을 세우고 관음보살상을 모셨다. 푸른 새가 사라졌다는 동굴이 관음굴(觀音窟)이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도 의상대사가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세음보살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중심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또 원효(元曉)와 관련된 설화도 실려 있다. 원효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고 낙산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원효는 낙산사에 이르기 전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낙산사에 이르러서도 풍랑이 심해 원효는 결국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동굴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낙산사 관음상에는 조신(調信)의 설화가 전해 온다. 명주(溟洲) 날리군(捺李郡, 捺城郡)에 있는 농장의 지장(知莊) 조심은 군수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반하여 낙산사 관음상 앞에서 염원했다. 마침내 소원대로 그는 김흔의 딸을 얻어 5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이후 살림살이가 구차해지자 온가족이 떠돌이로 구걸하다가 큰아들이 굶어 죽자 명주 해현령에 묻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만난 지 50여년만에 고통스럽게 서로 헤어지려고 하다가 깨어 보니 한바탕 허무한 꿈이었다. 조신은관음상 앞에 참회하고 해현령에 묻은 아이를 파보니 미륵석상(彌勒像)이 나왔다. 미륵상을 근처의 절에 모신 조신은 출가하여 정토사를 짓고 불도에 정진했다고 한다. 


786년(원성왕 2) 화재로 낙산사 대부분이 불에 탔다. 858년(헌안왕 2)에는 선종(禪宗)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闍崛山派)의 개산조 범일(梵日)은 낙산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법당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때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건국 직후 봄과 가을에 낙산사에서 재를 올리게 했다. 10세기 중엽 산불로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탔으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법당은 화마를 면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낙산의 동굴에서 기도를 올리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다. 1185년(명종 15) 병마사 유자량(庾資諒)이 동굴 앞에서 예불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44권에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에 감격해서 지은 '낙산사'이란 제목의 오언율시가 실려 있다. 


해애고절처(海崖高絶處) 바닷가 벼랑 높고도 외딴 곳

중유낙가봉(中有洛迦峰) 그 가운데 보타락가산 있네

대성주무주(大聖住無住) 부처는 머문 듯 머물지 않고

보문봉불봉(普門封不封) 보문은 닫힌 듯 열리어 있네

 

명주비아욕(明珠非我欲) 명주는 내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시인봉(靑鳥是人逢) 나는 파랑새를 만날 수 있었네

단원홍파상(但願洪波上) 다만 원컨대 너른 바다 위에서

친첨만월객(親瞻滿月客) 만월 같은 모습 친히 보고 싶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략해서 낙산사를 불사를 때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법당도 소실되고 말았다.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의 진용(眞容), 수정염주, 여의보주는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가 양주성마저 함락되자 낙산사의 노비 걸승(乞升)이 땅에 묻고 달아났다. 이때 관음상은 화를 당하여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보물은 몽골군에게 약탈당했다. 


몽골군이 물러간 뒤 걸승은 두 보주를 파내어 패주도감창사(浿州道監倉使) 이녹수(李祿綏)에게 주었고, 이녹수는 이를 감창고(監倉庫)에 보관했다. 1258년 기림사(祇林寺)의 각유(覺猷)가 어부(御府)로 옮길 것을 청하자, 명주성(溟州城)에서 이를 가져다 내부(內府)에 보관했다. 이규보(李奎報) 등은 관음상을 복구해서 다시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 오약(五藥), 색실, 비단주머니 등을 불상에 복장했다. 


1399년(정종 1)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낙산사에 행차하여 능엄법회(楞嚴法會)를 열었고, 1403년에는 태종이 선공소감(繕工少監) 김계란(金桂欄)을 보내 재이(災異)를 없애는 도량을 봉행했다. 1466년 낙산사에 행차한 세조는 2년 뒤 학열(學悅)에게 이 절의 중창을 명하였다.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喜王后)는 세조를 위해 발원하여 범종(梵鐘)을 주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양양 낙산사는 오봉산에 있으며,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전각에는 건칠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예로부터 숭앙되어 왔으며 신령스럽고 기이한 영험이 많았다.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전각과 요사가 낡고 누추한 것을 보고는 새로 지을 것을 명해, 그로부터 아주 크고 훌륭하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에 이어 조선 왕조에서도 낙산사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낙산사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좌상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세음보살좌상(화재청)


원통보전에는 건칠관세음보살좌상(乾漆觀世音菩薩坐像, 보물 제1362호)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는 아미타극락회도(阿彌陀極樂會圖)가 걸려 있었다. 관음상 오른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와 동종(銅鐘), 의상대사 진영 등을 조성하였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건칠관음상은 근처의 영혈사(靈穴寺)에서 모셔왔다고 전해진다. 원통보전은 2005년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건칠관음상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팔각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의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쪽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손가락은 가냘프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어 온화한 인상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으며, 내의 깃은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원통보전 건칠관음상은 건칠상(乾漆像)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고려 말 조선 초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보관은 고대 이래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보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낙산사 칠층석탑


원통보전 앞마당에는 7층석탑(七層石塔, 보물 제499호)이 세워져 있다. 2005년 4월 5일 산불이 낙산사를 덮치면서 이 탑도 깨지고 갈라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칠층석탑은 조선 세조 때 낙산사 중창과 함께 건립된 것이다. 당시 낙산사 중창은 왕실 차원에서 각종 물자를 조달하여 1466~1468년에 완성되었다.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중창할 때 높이 6.2m의 7층석탑으로 조성했다. 이때 탑 속에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봉안했다고 한다. 


탑의 기단부는 한 돌로 된 방형(方形)의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로 높고 큼직한 2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기단을 받게 하였다. 한 돌로 만든 방형 하대석(下臺石) 윗면에는 24잎의 복판복련화문(複瓣覆蓮華紋)을 새겼으며, 가운데는 1단의 낮은 받침을 내어 기단면석을 받고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서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버팀기둥)를 새기지 않았다. 면석 위의 갑석(甲石)은 위 아래가 평평한 하나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얕은 부연(副椽, 쇠시리)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게 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쪽으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살짝 들어올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相輪)은 청동제(靑銅製)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들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칠층 옥개석 위에 굄대를 올리고, 그 위에 3단 받침이 있는 노반(露盤)을 얹은 다음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를 중심으로 상륜부재를 겹쳐 쌓았다. 노반 위에는 원형의 복발(覆鉢), 그 위에 원형의 앙화(仰花), 그 위에 6륜(六輪)의 원추형 보륜(寶輪)을 얹고, 마지막을 보주(寶珠)로 장식했다.


하대석 위쪽의 복련 장식이나 각층 탑신 아래에 굄돌을 받친 점 등 이 탑의 전체적 양식은 고려시대의 탑인 강릉시 내곡동 신복사지삼층석탑(보물 제87호)이나 평창의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탑신부와 유사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여 석탑의 건립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잘 계승한 낙산사 칠층석탑은 당시의 석탑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낙산사원장(뒤)

 

낙산사원장(앞, 문화재청)


낙산사원장(洛山僿垣墻,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은 원통보전 둘레를 삭가으로 에워싸고 있는 담장이다. 조선 세조의 명으로 낙산사를 중창할 때 처음으로 이 담장을 지었다. 본래는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하였다. 높이는 3.7m, 길이는 220m이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의 담벽은 막돌로 쌓았다. 담장 안쪽 담벽의 밑부분은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 암키와)를 차례로 쌓아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벽면을 멋스럽게 장식하였다. 담장 바깥쪽의 벽면은 막돌로 벽면을 고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회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덮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과 기와와 흙으로 높고 반듯하게 쌓은 이 담장은 매우 아름다운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 담장은 원통보전 구역을 신성한 지역으로 구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낙산사 근행당

 

낙산사 송월요


응향각 서쪽에는 요사채인 근행당이 자리잡고 있고, 근행당 안으로 들어가면 송월요가 있다. 달을 떠나보내는 송월요는 해를 맞이하는 빈일루와 대를 이루는 의미가 있다. 빈일루와 송월요처럼 당우의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낙산사 보타전 구역


원통보전에서는 보타전 구역과 해수관음상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보타전은 해수관음상 능선과 원통보전 능선 사이의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두 능선이 하늬바람과 바닷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아늑하고 포근한 곳이다. 풍수지리로 말하자면 명당 자리다.  

 

산사 원통보전 옆문


원통보전 담장의 동쪽 끝에는 응향각의 문처럼 연꽃 봉오리 형상의 문이 붙어 있다. 곡선의 부드러움을 한껏 살린 아름답고 정겨운 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액자 속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낙산사 원통보전 구역


원통보전에서 오봉산 주능선을 따라 정상부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다. 오솔길을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원통보전 구역이 눈 아래로 굽어보이고, 그 너머로 낙산해수욕장이 아스라이 보인다. 

 

낙산사에서 바라본 설악산


오봉산 산마루에 오르면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을 비롯해서 중청봉과 소청봉, 화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봉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1347m봉과 관모봉, 741m봉, 383.9m봉을 지나 오봉산을 향해 우렁찬 기세로 치달려 내려온다. 관모봉과 대청봉, 화채봉 사이에서 발원하는 청렴골,곧은골(직골), 원골, 아홉살골, 매봉골, 쇠꼬전골, 너래골은 모두 둔전골(복골)로 합류하여 둔전저수지에 모였다가 물치천을 거쳐 동해로 흘러든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 해수관음상 종각

 

낙산사 관음전


해수관음상 앞에는 새해 초하루를 맞아 불공을 올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종각에도 소원성취 타종을 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결국 수복강녕(壽福康寧)과 부귀영화(富貴榮華)일 것이다. 미혼남녀들의 소망은 자신의 영원한 반쪽을 찾는 것이리라.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은 높이 16m, 둘레 3.3m로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조각가 권정환이 5년 걸려서 제작한 이 관음상은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했다. 좌대의 앞에는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2005년의 대형 산불 이후 해수관음상 둘레에 불법의 번창과 중생의 제도를 기원하는 뜻에서 108법률석을 조성하였다.


해수관음상은 좌대에 올린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남향으로 안치하였다. 왼손에는 감로수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에서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미간에는 백호(白毫)가 뚜렷하다. 백호는 온누리에 비치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한다. 


절집의 규모와 불상의 크기는 사실 불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으리으리한 절집에 과연 부처가 거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가난하고 힘없는 중생들이 있는 낮은 곳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관음전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처럼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다. 북쪽으로 난 창을 통해서 보이는 해수관음상이 관음전의 불상인 셈이다.

 

낙산해변

 

정암해변


해수관음상이 있는 봉우리는 전망이 매우 좋아서 설악산과 동해 바다가 시원하게 바라다보인다. 남쪽으로는 의상대와 낙산항에서 낙산해변 너머 오산해변까지 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설악해변과 정암해변에서 물치항과 대포항, 외옹치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해수관음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해수관음공중사리탑(海水觀音空中舍利塔)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서 있다. 공중사리탑과 탑비塔碑) 및 사리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일괄 보물 제17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중사리탑은 1692년(숙종 18)에 석겸(釋謙) 등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長明燈)과 유사한 형태의 승탑형 불사리탑이다. 2005년의 산불로 손상을 입어 2006년 해체 보수할 때 사리가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공중사리탑의 양식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반에 장대석을 깔고 그 위에 팔각 기단을 얹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옆면에 안상(眼象)을 넣었고, 그 안에 태극 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에 16잎의 복련(覆蓮)을 장식했다. 중대석은 각 면을 아래 위로 연결한 연주문(連珠紋)으로 나눴으며, 그 안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밑부분을 앙련(仰蓮)으로 장식하고, 그 위의 옆면에 안상을 새겼다. 안상의 안에는 범자를 음각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은 구형이고, 옥개석은 팔각지붕형이다. 처마는 길이가 짧고, 끝에서 살짝 들어올려져 있다. 낙수면에 기와골은 표현되지 않았다. 윗부분은 복련으로 장식했다. 상륜부는 한 돌에 앙련, 복발, 보륜, 보주 등을 큼직하게 조각했다.         


공중사리탑은 조성연대가 확실하고 탑과 비, 장엄구를 모두 온전하게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 사리 매납 방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문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사리장엄구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수습되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사리병―금합―은합―동합 순으로 제작한 사리기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사리장엄구의 전통적인 방식이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리장엄구와 함께 나온 11점의 비단 보자기는 보존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색채와 무늬도 선명하고 다양해서 한국 직물사 연구에 있어 소중한 자료이다. 


풍수인들은 공중사리탑이 서 있는 자리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지세(包卵之勢)의 명당이라고 전한다. 1683년 홍련암에서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할 때 방안이 서기로 가득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떨어졌다고 한다. 석겸은 9년에 걸쳐 이 탑을 쌓고 구슬을 봉안한 뒤 수춘거사(壽春居士)를 초빙하여 그 유래를 탑비에 적게 했다. 이 탑비는 현재 홍련암 옆에 있다.  

 

낙산사 보타전 구역

 

낙산사 보타락

 

낙산사 지장전


공중사리탑에서 산허리를 감고 도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보타전 구역에 이른다. 보타전 구역에는 보타전을 비롯해서 관음지(觀音池), 보타락(補陀落), 지장전(地藏殿), 해우당(解憂堂) 등이 있다. 


관음지 바로 위에는 2층 누각인 보타락이 날아갈 듯 늘씬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보타락(potalaka)은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으로 보타락가(補陀落伽), 보달락가(補怛洛迦), 포달락가(布呾洛迦), 포탈라(布達拉), 포다라(逋多羅), 포타(逋多)라고도 한다. 광명(光明), 해도(海島), 소화수(小花樹)라 번역되는 보타락은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이다. 보타락은 인도의 남해 봄베이 근방, 중국 절강성 영파부 남쪽 바다 주산열도(舟山列島) 보타산(普陀山) 진제사(晋濟寺)티베트 중부 라싸(拉薩)의 포탈라궁(布達拉宮)에 있다고 전해진다. 한국의 강원도 양양군 낙산(洛山)과 경기도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도 보타락으로 알려져 있다. 


보타락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은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지장보살은 악도(惡道)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한 보살이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도(人道), 천도(天道) 등 육도(六道)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이기에 지장보살은 내가 가장 흠모하는 보살이다. 


지장전을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른다. 명부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다. 사람이 죽으면 49일까지 7일마다 제1 진광왕(秦廣王), 제2 초강왕(初江王), 제3 송제왕(宋帝王), 제4 오관왕(五官王), 제5 염라왕(閻羅王), 제6 변성왕(變成王), 제7 태산왕(泰山王)이 순서대로 심판을 맡고, 그 뒤 백일에는 제8 평등왕(平等王), 소상 때는 제9 도시왕(都市王),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심판한다고 한다.

 

낙산사 보타전

 

낙산사 보타전 관음상

 

낙산사 해우당


보타전은 원통보전과 함께 낙산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보타전에는 성관음(聖觀音)을 비롯해서 천수관음(千手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提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應身像),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모든 관음상을 다 봉안한 셈이다.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거처하는 관세음보살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밀호(密號)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다. 관음보살의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상징한다. 꽃이 활짝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는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상징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푸는 보살이다.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관음보살은 6관음이 일반적인데,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나머지는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천수관음은 주로 지옥중생을 구제하고, 성관음은 주로 아귀도를 구제하며, 마두관음은 주로 축생의 고통을 구제한다. 십일면관음은 주로 아수라의 고통을 구제하고, 준제관음은 주로 인간의 고통을 구제하며, 여의륜관음은 주로 천상의 고통을 구제한다.

      

보타전 옆에는 단청을 칠하지 않은 해우당이 있다. 속세의 번뇌와 근심을 푸는 집이라는 뜻이다. '解憂堂' 현판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작품이다. 해우당은 현재 승방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