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기념관 구역
의상기념관
다래헌
해동화엄초조의상대성화적비와 오봉산낙산사제6차중창사적비
무료 국수공양실
보타전 구역 관음지에서 조금 내려오면 의상기념관 구역이다. 이곳에는 의상기념관(義湘記念館)을 비롯해서 다래헌(茶來軒), 해동화엄초조의상대성화적지비(海東華嚴初祖義相大聖華跡之碑)와 오봉산낙산사제6차중창사적기(五峰山洛山寺 第六次重創事蹟記), 무료 국수공양실 등이 있다.
의상기념관에는 낙산사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과 의상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의상 관련 자료로는 그의 진영과 일대기를 그린 불화, 그의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와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담은 병풍, 각종 서적과 논문들을 만날 수 있다. 2005년의 산불로 녹아버린 동종과 불에 탄 기둥들의 잔해도 전시되어 있다. 한때 보물 제479호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던 낙산사 동종이 형체를 잃은 쇳덩이로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산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할 수 있다.
의상기념관 앞에는 커다란 해동화엄초조의상대성화적지비(海東華嚴初祖義相大聖華跡之碑)와 오봉산낙산사제6차중창사적기(五峰山洛山寺第六次重創事蹟記)가 돌거북 위에 세워져 있다. 음양오행설에서 수기(水氣)가 강한 북현무(北玄武)의 거북은 불기운을 억누르는 의미가 있다. 낙산사는 예로부터 화재로 인한 피해가 빈번했기에 불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조형물 하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동화엄초조의상대성화적지비에는 '義湘'이 아니라 '義相'으로 새겨져 있다.
다래헌은 연꿀빵으로 유명한 전통찻집이다. 여기서는 전통차 뿐만 아니라 커피 등 각종 음료와 차를 마실 수 있다. 여러 가지 기념품도 판매한다. 다래헌 뒤뜰의 의상대와 바다 풍경도 좋다.
의상기념관 뒤편에는 무료 국수공양실이 있다. 2005년 산불로 낙산사가 불탔을 때 복원불사 성금을 보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무료 국수공양을 한다고 한다. 매년 1월 1일에는 오전 6시 30분무터 8시까지 해맞이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 무료 떡국공양도 하고 있다.
무료 국수공양실 바로 옆에는 고려 말의 문인 근재 안축(謹齋安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큼지막한 자연석으로 만든 시비에는 안축이 1320년에 쓴 한시 '낙산사시운(酪山寺詩韻)'이 새겨져 있다.
大聖圓通境(대성원통경) 관세음보살은 두루 통하는 경지라
曾聞海上峰(증문해상봉) 일찌기 바다 위 섬에 계셨다 하네
恩同甘露潤(은동감로윤) 은혜가 달콤한 감로처럼 윤택하니
香有紫泥封(향유자니봉) 임금님도 조서로 향을 하사하셨네
隨類身常現(수류신상현) 사람의 근기에 따라 늘 나타나지만
纏迷眼不逢(전미안불봉) 번뇌 미혹한 눈으로는 만나지 못해
莫論眞與假(막론진여가) 관음 진신이다 아니다 따지지 마소
但自禮慈容(단자예자용) 다만 자비로운 모습에 절하면 되지
안축은 고려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을 때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내용을 담은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겼다. '낙산사시운'도 그가 강원도존무사로 있던 1330년에 낙산사 관음굴, 지금의 홍련암에서 체험한 관음신앙기(觀音信仰記)를 오언율시(五言律詩)로 읊은 것이다. 안축은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작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에는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낙산사 의상대
의상대에서 바라본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바닷가 절벽 위에는 의상의 좌선(坐禪) 수행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명승 27호,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가 자리잡고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이 671년에 낙산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 머물면서 좌선을 했다고 한다.
2005년의 대형 산불에서 살아남은 아름드리 노송 서너 그루가 의상대 곁을 지키고 있다. 의상대 바로 뒤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가 관음송(觀音松)이다. 당시 관음송도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전문가들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고 소생했다고 한다.
偶然飛錫洛伽樓(우연비석낙가루) 우연히 낙산사에 와 누대를 노닐다가
湘老臺高洗客愁(상노대고세객수) 높고 오랜 의상대에서 시름을 씻누나
師去千年不復返(사거천년불부반) 스승 가신 지 천 년 돌아오시지 않고
但看山下碧波流(단간산하벽파류) 산 아래 흘러가는 푸른 파도만 보누나
18세기 승려인 용암 체조(龍巖體照)의 '등낙가의상대(登洛加義湘臺)'란 칠언절구(七言絶句) 한시다. 한시를 보면 적어도 1700년대까지는 의상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폐허가 되었다가 1925년 만옹(晩翁)이 팔각정(八角亭)를 새로 지었으며, 만해 한용운(萬海韓籠雲)은 '의상대기(義湘臺記)'를 썼다. 1937년 태풍으로 무너진 의상대 정자를 새로 지었으며,1975년에도 한차례 중건했다. 1995년 8월 마근(馬根)은 의상대를 해체하고 육각정으로 복원했다. 2009년 9월에 다시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는 아름드리 해송과 기암절벽, 바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동해안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주변의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일찌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송강 정철(松江鄭澈)의 '관동별곡'에도 소개된 의상대 일대는 일출경(日出景)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요즘 의상대는 강릉의 경포대와 정동진, 포항의 호미곶, 동해시 추암해변의 촛대바위 등과 더불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의상대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의상대를 찾아 유람기와 시, 그림을 남겼다.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도 낙산사 창건 기록이나 중수 기록, 유람기, 경치를 읊은 시문이 다수 전하고 있다.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의 옛 모습은 조선 후기의 시화첩(詩畫帖)인 '관동십경(關東十境)'에 잘 남아 있다. 이 시화첩은 강원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이 1746년(영조22) 도내 여러 고을을 순시할 때 화원에게 경치를 그리게 하고, 화첩을 돌려본 지인들의 시를 받아 완성한 것이다. '관동십경'에는 통천 총석정(叢石亭), 고성 삼일포(三日浦), 간성 청간정(靑澗亭),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 울진 망양정(望洋亭), 평해 월송정(越松亭) 등 관동팔경에 흡곡 시중대(侍中臺)와 고성 해산정(海山亭) 두 곳이 더 들어 있다. 아쉽게도 '관동십경'에는 월송정 그림이 빠져 있다. 누군가가 월송정 그림을 오려냈기 때문이다.
낙산사 연하당
의상대에서 홍련암 가는 길 중간쯤에 연하당(蓮河堂)이 있다. 연하당은 낙산사를 방문하는 여성 불자들이 묵는 장소로 금남의 집이다.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
공중사리탑비가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면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이 나타난다. 홍련암은 본절인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되는 암자라고 할 수 있다. 팔작지붕에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홍련암 법당에는 작은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619년(광해군 12) 관음굴(觀音窟)을 중건한 뒤, 1683년(숙종 9)에는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했다.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이 홍련암을 중수했고, 1797년(정조 21)에는 혜민(慧旻)이 또 다시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큰 비가 내려 홍련암이 무너지자 3년 뒤에 의연(義演)이 중건했고, 1908년 관음굴이 무너지자 3년 뒤 흥운(興雲)과 청호(晴湖)가 중건했다. 1975년 홍련암을 중창하면서 제석천룡탱화(帝釋天龍幀畵) 등 탱화를 함께 조성했고, 1999년 지홍(知洪)은 홍련암을 해체 복원했다.
낙산사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1475년(성종 6)에는 낙산사 당우들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1489년(성종 20)에는 산불로 관음전이 불에 탔다.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으로 관음전과 관음상, 정취전, 금불상 등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에도 화재가 나서 낙산사가 불에 탔고, 1777년(정조 1)에도 화재로 인하여 원통보전만 남기고 사찰 전체가 불에 탔다. 1895년(고종 32)에는 화재로 승당이 소실되었으며, 1930년에도 화재가 나서 사찰 일부가 불에 탔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의 참화로 낙산사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2005년에는 대형 산불로 낙산사의 거의 모든 전각이 잿더미가 되었다.
낙산사는 지난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항상 화재에 대비하지 않으면 2005년의 경우처럼 소중한 불교 문화재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 것이다.
의상대를 떠나며 시 한 수를 남기다.
새벽처럼 달려 낙산 의상대에 올라서니
청양 초하루 태양이 홍련처럼 떠오르다
관음굴은 의구한데 푸른 새는 어디 갔나
2015.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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