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을 제대로 보려면 그 산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다. 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북한산, 837m)의 최고 조망처는 어디일까? 한북정맥(漢北正脈) 노고산(老姑山, 487m)은 삼각산의 최고 조망처 가운데 하나이다. 남한 9정맥 중 하나인 한북정맥은 우리나라의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 중 가장 북쪽에 있다. 한강의 북쪽에 있는 정맥이라고 해서 한북정맥이라고 한다. 한복정맥은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는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인 나도 그래서 60일 동안 백두대간을 순례한 바 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등뼈, 정맥은 갈비뼈에 해당하는 산맥이다. 백두대간 마룻금을 걸어보면 우리나라의 지세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 순례를 마친 다음 정맥을 모두 다 돌아보고 나면 비로소 전국 방방곡곡의 지세 뿐만 아니라 세세한 땅의 생김새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한북정맥 솔고개에서 바라본 상장능선
한북정맥 솔고개에서 바라본 노고산
한북정맥 솔고개는 도봉산(道峰山, 740m) 상장능선과 노고산 사이에 있는 고개다. 우이능선의 우이령과 육모정고개 사이에 솟은 산봉우리에서 상장봉(上將峰, 543m)을 거쳐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상장능선이다. 솔고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과 양주시 장흥면의 경계이자 공릉천(恭陵川, 曲陵川)과 창릉천(昌陵川, 德壽川)의 분수령이 된다.
고양 노고산 흥국사
노고산 남서쪽 산발치에 자리잡은 흥국사(興國寺)를 산행 날머리로 잡았다. 39번 국도 북한산로를 따라가다가 사곡교(寺谷橋)를 건너면 고양시 지축동 사곡(寺谷)마을이다. 사곡은 절골이니 흥국사로 인해 생긴 이름인 듯했다. 절골의 끝에 흥국사가 있었다.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이다. 흥국사의 시초는 흥성암(興聖庵)이라 전해진다. 미타전(彌陀殿) 아미타불(阿彌陀佛) 복장연기문(腹藏緣起文)에 따르면 661년(신라 문무왕 원년) 한산(漢山, 삼각산, 북한산) 원효봉(元曉峰) 기슭의 원효암(元曉庵)에서 수행하던 해동(海東) 화엄초조(華嚴初祖) 원효(元曉)는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이르러 서기를 발하는 석조(石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보았다. 이곳이 인연도량임을 깨달은 원효는 본전(本殿)에 약사여래를 봉안한 뒤, '지기(地氣)가 상서로운 곳이라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면서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지었다. 복장연기문과는 달리 창건 당시의 이름은 흥서사(興瑞寺)라고 알려졌다.
흥성암은 이후 오랫동안 잊혀진 암자가 되었다가 1686년(숙종 12) 중창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1758년(영조34)에는 미타전(彌陀殿)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수개금불사(重修改金佛事)하였다. 1770년(영조46)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인 파주 소녕원(昭寧園)에 다녀오던 길에 큰 눈을 만나 이 절에 들러 하룻밤 묵은 뒤 아침에 일어나 지었다는 한시 한 수가 전한다.
朝來有心喜(조래유심희) 아침이 돌아오니 마음이 기쁘도다
尺雪驗豊徵(척설험풍징) 눈이 많이 왔으니 풍년 들 징조로세
영조는 자신이 지은 시를 편액으로 만들어 하사하는 한편 약사불(藥師佛)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치고, 절이 자리잡은 산 이름도 노고산에서 한미산으로 바꿨다. 기록이 맞다면 이 산의 원래 이름이 노고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명으로 하루아침에 사찰명이 바뀌었을 때 흥국사 승려들은 황공(惶恐)했을까, 아니면 황당(荒唐)했을까?
'노고(老姑)'는 '할미'의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고산->할미산->한미산(漢美山, 漢尾山)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한미산(漢尾山)'은 한양(漢陽)의 북쪽 끝(尾)에 있는 산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실제로 노고산은 서울의 북쪽, 삼각산의 북서쪽 끝에 있다.
영조는 흥국사를 숙빈 최씨의 원찰(願刹)로 삼아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본전인 약사전(藥師殿,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호)을 중창하고, 미타전을 신축하였으며, 상궁(尙宮)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불공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약사전 현판 글씨도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흥국사는 1785년(정조 9)의 중창을 거쳐 1792년(정조 16)에는 약사여래후불탱화(藥師如來後佛幀畵)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경기 유형문화재 296호)를 제작해서 봉안하였다.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의 개금불사에 대한 일이 탱기(幀記)에 전한다. 1854년(철종 5)에는 황해도 장연군 학서사(鶴棲寺)에서 4백근짜리 범종(梵鐘)과 칠성목탱(七星木撑). 삼존불상(三尊佛像)을 옮겨와 봉안했다. 1867년(고종 4)에는 약사전, 1876년(고종 13)에는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하였다. 1878년(고종 15) 가을 내탕금으로 길이 22자, 너비 11자의 괘불탱(掛佛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을 제작했고, 1886년(고종 23)에는 칠성각에 단청을 입히는 한편 팔상탱(八相幀)과 신중탱(神衆幀)을 조성해서 안치했다. 1902년에는 나한전(羅漢殿,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4호)과 산신각(山神閣)을 새로 지었다. 1904년 10월 완해(玩海)를 회주(會主)로 하여 만일회(萬日會)가 열렸다.
흥국사 현존 당우로는 전각(殿閣) 문화재인 약사전과 나한전을 비롯해서 대방(大房, 등록문화재 제592호),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종각(鐘閣), 선원(禪院), 승방(僧房), 종무소(宗務所), 요사채(寮舍寨), 객실(客室) 등이 있다. 흥국사 불상, 불화 문화재로는 괘불탱을 비롯해서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4호)이 있다. 천년고찰임에도 국보급이나 보물급 문화재는 한 점도 없다. 주차장 모퉁이에는 부도(浮屠) 1기가 있다. 경내에는 느티나무 보호수 한 그루와 상수리나무 보호수 두 그루가 있다.
노고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삼각산
노고산 남서쪽 능선은 활엽수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전망이 좋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상수리나무 숲 위로 삼각산의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각산의 전모를 보여주기 전의 맛뵈기라고나 할까! 이제 곧 웅장한 삼각산과 대면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각시원추리
물봉선
꽃며느리밥풀꽃
싸리꽃
노고산 주능선 산길에서 봄꽃인 각시원추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5~6월에 피는 각시원추리가 9월에 피어나다니! 진달래, 개나리도 가을에 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가을의 기후가 봄과 비슷해서 개화 시기를 착각한 것이리라.
사람들은 꽃이 제철이 아닐 때 피면 세월이 수상하다고들 한다. 수상한 것은 세월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부일민족반역자들이 지배세력이 되면서 우리나라는 정의가 사라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멀쩡한 새만금 갯펄을 죽이고, 4대강을 막아 썩게 하고, 우량 공기업들을 팔아먹고, 국립자연공원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는 수상한 인간들 천지다. 수상한 인간들이 수상한 세월을 만든 것이다.
물봉선, 꽃며느리밥풀꽃, 싸리꽃 등 가을을 알리는 야생화들도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산길을 걷다가 들꽃 산꽃을 만나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다. 이름을 불러주면 그 꽃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꽃과 함께 걷는 산길은 발걸음도 가벼웁다.
노고산 정상부
한북정맥 노고산 정상
한북정맥 도봉산
우이능선과 삼각산, 효자리계곡
우이능선의 왕관봉과 영봉, 효자리계곡
삼각산
삼각산과 원효능선, 의상능선, 효자리계곡
삼각산과 원효능선, 의상능선, 응봉능선, 비봉능선
삼각산
흥국사에서 3km쯤 걸었을까 드디어 한북정맥 노고산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의 전망이 뛰어난 바위에 오르자 장엄한 삼각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범접을 불허하는 듯한 도인풍의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유구무언(有口無言)! 시적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산에서 울고 내려왔다던 정지상(鄭知常)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삼각산에서 눈을 돌려 노고산을 향해서 치달려오는 한북정맥을 바라보았다.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은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말고개(馬峴, 568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촛대봉(1,010m), 복주산(伏主山, 1,152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도마봉(道馬峰, 883m), 국망봉(國望峰, 1,168m), 개이빨봉(犬齒峰, 1,110m), 민둥산(1,023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 운악산(雲岳山, 937.5m),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 불곡산(佛谷山) 임꺽정봉(林巨正峰, 449.5m), 대모산(大母山, 212.9m), 호명산(虎鳴山, 423m), 한강봉(漢江峰, 474.8m), 챌봉(遮日峰, 516m), 사패산(賜牌山, 552m)을 지나 저 도봉산(道峰山, 740m)까지 달려와 솟구쳐 올랐다. 도봉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한북정맥은 우이능선에서 북서쪽 상장봉(上將峰, 543m)으로 방향을 튼 다음 솔고개를 건너뛰어 노고산(老姑山, 487m)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노고산에 이른 한북정맥은 현달산(峴達山, 139m)과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으로 뻗어가 한강 하구에 이르러 긴 여정을 마친다. 노고산에 서서 백두대간 한북정맥을 온몸으로 느꼈다.
도봉산은 자운봉·(紫雲峰, 740m)과 신선대(神仙臺, 725m), 만장봉(萬丈峰, 718m), 선인봉(仙仁峰:708m) 등 일련의 암봉군(岩峰群), 삼각산은 백운대(白雲臺, 836.5m)와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 노적봉(露積峰, 716m), 염초봉(廉峭峰,662.2), 용암봉(龍巖峰, 616m) 등 일련의 암봉군으로 이루어진 대골산(大骨山)이었다. 포대능선에서 도봉산, 우이능선, 삼각산, 북한산성주능선을 지나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병풍처럼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오봉능선은 우이능선에서 갈라져 오봉(五峰, 680m)과 여성봉(女性峰, 495m)을 지나 북서쪽으로 뻗어내렸고, 상장능선도 우이령과 육모정고개 사이의 산봉우리에서 갈라져 상장봉을 지나 북서쪽으로 뻗어내렸다. 오봉능선과 상장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이 송추계곡이다. 상장능선과 숨은벽능선 사이의 계곡이 효자리계곡, 숨은벽능선과 염초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사이의 계곡이 밤골계곡이다.
삼각산 백운대에서 서쪽의 염초봉, 원효봉(元曉峰, 50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원효능선, 북한산성주능선의 문수봉(文殊峰, 727m)에서 나한봉(羅漢峰, 688m), 나월봉(蘿月峰, 657m), 증취봉(甑炊峰, 593m), 용혈봉(龍穴峰, 581m), 용출봉(龍出峰,571m), 의상봉(義湘峰, 502m)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의상능선이다. 원효봉과 의상봉은 서로 마주보고 나란히 솟아 있었다.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은 죽어서도 멋진 산봉우리로 살아 있었다. 원효가 나이가 더 많으니 더 높은 봉우리을 원효봉, 낮은 봉우리를 의상봉이라고 했을까?
원효능선과 의상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이 북한산성계곡, 의상능선과 용출봉 서쪽 능선 사이의 계곡이 백화사계곡이다. 의상능선과 비봉능선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응봉능선 사이의 계곡이 삼천계곡, 응봉능선과 비봉능선의 향로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사이의 계곡이 진관계곡이다.
삼각산과 노고산 사이를 흐르는 내가 창릉천, 창릉천으로 따라가는 도로가 39번 국도 북한산로이다. 삼각산과 창릉천 사이는 고양시 효자동, 창릉천과 노고산 사이는 고양시 지축동이다.
노고산은 조선 영조(英祖) 때의 '여지도서(輿地圖書)'나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集)', 일제가 제작한 '조선지도(朝鮮地圖)'에 '한미산(漢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조 연간에 작성된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8세기경의 '여지도(輿地圖)', 19세기의 '광여도(廣輿圖)' 등에는 '한미산(漢尾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자산(雌山)과 웅산(雄山)을 연결하는 산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노고산은 조선 후기까지 한미산(漢美山, 漢尾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노고산에서 바라본 서울시 은평구
노고산에서 바라본 경기도 고양시
노고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군부대 주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군부대 헬기장 바위에 올라서자 서울시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노고산 서쪽 산기슭은 양주시 장흥면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삼각산은 그야말로 자연이 빚은 천하의 예술품이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멋진 삼각산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문득 서슬퍼런 기상과 의연한 자세로 솟아 있는 삼각산을 만분의 일이라도 닮고 싶다는 마음이 거세게 일어났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이름난 고승들이 많이 나온 것은 다 그 이유가 있다. 까마득한 설산 히말라야는 바라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었을 거다.
삼각산의 진수를 가슴에 담은 채 한북정맥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면서 산을 내려가다.
201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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