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한북정맥 양주 불곡산을 찾아서

林 山 2015. 9. 3. 12:39

8월을 하루 남긴 주말 경기도 양주의 진산(鎭山) 한북정맥(漢北正脈) 불곡산(佛谷山)을 찾았다. 불곡산을 불국산(佛國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곡산 서쪽 기슭의 백화암(白華庵)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佛國山白華寺(불국산백화사)'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불국산은 불곡산의 옛 이름인 듯했다. 불교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는 산이름이었다. 불국산은 곧 이 산이 부처가 사는 세계인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산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불곡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지도를 참작해서 산행 계획을 세웠다. 먼저 악어바위능선을 타고 420m봉을 오른 다음 상투봉(上頭峰, 431.8m)을 거쳐 상봉(上峰, 鬪具峰, 470.7m)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상투봉, 420m봉으로 되돌아와 임꺽정봉(林巨正峰, 449.5m)을 올랐다가 369m봉으로 해서 한북정맥을 따라 내려오기로 했다.   


왼쪽부터 369m봉-임꺽정봉-420m봉-상투봉-상봉에 이르는 불곡산 주능선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대교아파트 앞 불곡산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고추밭과 복숭아 과수원을 지나자마자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왼쪽 길은 김승골 쉼터로 해서 임꺽정봉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불곡산 남근석


악어바위능선 초입에서부터 가파른 능선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숨이 차서 헉헉거려야만 했다. 암벽 위에서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불곡산 남근석이었다.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자지바위 또는 좃바위가 되시겠다. 뭉툭하게 튀어나온 것이 남근석이라고 하기엔 2% 부족해 보였다. 적어도 제천의 동산이나 장흥의 천관산 남근석 정도는 되어야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   


불곡산 복주머니바위


가파른 암릉길을 조금 더 올라가자 이번에는 복주머니바위를 만났다. 능선의 암봉 위에 안정감 있게 올라앉은 바위가 정말 복주머니와 비슷하게 생겼다.    


불곡산 삼층바위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나 할까! 복주머니바위 우회로를 오르다가 자연석 세 개로 탑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삼층바위를 만났다. 자연이 빚어낸 삼층석탑이었다. 삼층바위 앞에는 작은 돌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저 돌탑들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었다.


불곡산 악어바위


삼층바위에서 암릉을 타고 반대편으로 돌아갔을 때 깜짝 놀랐다. 큰 악어 한 마리가 바위벼랑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입과 눈, 다리와 등가죽이 한 마리의 악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다만 꼬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악어바위는 불곡산의 대표적인 기암괴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악어바위가 불곡산의 상징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불곡산 두꺼비바위


악어바위 바로 앞에는 두꺼비바위가 있었다. 두꺼비바위는 실상 복주머니바위의 뒷모습이었다. 앞에서 보면 복주머니, 뒤에서 보면 두꺼비의 모습이었다. 두꺼비바위도 입과 눈, 등가죽이 두꺼비를 그대로 빼닮았다. 배와 옆구리가 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어 황금두꺼비라는 이름이 더 어울렸다.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면 등에 석양빛을 받아 두꺼비는 더욱 더 황금색으로 빛날 것이었다.


두꺼비바위를 보고 나서 다시 악어바위능선을 오르려는데 다리가 풀려서 그런지 너무 힘이 들었다. 마침 배낭에 있던 공진단(供辰丹) 한 알을 꺼내서 먹었다. 두 팔을 벌려(拱) 시간(辰)을 품는 불로장생(丹)의 명약이어서였을까? 공진단을 먹자 피로가 가시면서 힘이 솟는 느낌이 들었다.


불곡신 코끼리바위


악어바위 바로 위에 코끼리바위가 있었다. 덩치에 비해 상아가 너무 작고 코도 짧았지만, 그런대로 코끼리의 형상을 갖추고는 있었다.  


불곡산 공기돌바위


420m봉 정상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암릉에 둥그스름한 바위 하나가 올라앉아 있었다. 이름하여 공기돌바위였다. 공기돌처럼 생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420m봉에서 바라본 상투봉과 상봉


드디어 420m봉에 올라섰다.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상투봉과 상봉을 한눈에 담았다. 산은 이런 맛에 다니는 거다. 상투봉과 상봉은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급경사 암릉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산세가 제법 굳세고 사나왔다.     


불곡산 물개바위


상투봉을 향해 420m봉을 내려가다가 물개바위를 만났다. 물개를 닮았다고 하기엔 뭔가 2% 부족한 듯했지만, 물개를 상상하면서 바라보았다. 쇠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암릉지대가 곳곳에 있어 산행을 힘들게 했다.    


불곡산 상투봉


상투봉도 급경사 암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사다리와 로프, 쇠난간을 잡고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줄을 놓치면 바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애고송


암릉지대를 오르다가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천애고송(天涯孤松)을 만났다. 삭풍한설(朔風寒雪)과 가뭄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은 눈물겨운 소나무였다. 저런 소나무를 볼 때마다 조선의 민초들이 생각난다. 위정자들의 폭정과 가렴주구를 참고 견디면서 목숨을 부지한 조선의 민초들 말이다. 바람이 불면 누웠다가 바람이 그치면 일어나고, 발로 밟으면 밟혔다가 다시 일어서는 잡초처럼 민초들은 그렇게 삶을 이어왔다.     


불곡산 엄마가슴바위


상투봉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생쥐바위와 엄마가슴바위를 만났다. 엄마가슴바위는 정말 여성의 젖꼭지와 꼭 닮았다. 그래서 엄마가슴바위를 엄마젖바위 또는 젖꼭지바위라고도 부른다. 


생쥐바위는 엄마가슴바위 바로 뒤에 있었다. 생쥐바위를 보니 4대강을 망치고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국민 혈세를 낭비한 인간 생쥐가 떠올랐다. 대통령이라는 인간들이 위민정치(爲民政治)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뒷주머니만 챙기려고 눈이 벌개서 날뛰니 이들이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みんな 泥棒です(민나 도로보데스, 모두가 도둑놈이다)! 도적을 대통령으로 뽑는 국민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불곡산 상투봉 정상 상투바위와 표지석


상투봉 정상에서 필자


암릉길을 더위잡아 상투봉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에는 마치 상투머리에 망건을 쓴 것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상투봉이란 이름은 바로 이 바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상투봉은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식민지시대에는 노름꾼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도박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상투봉은 고구려의 제7보루(堡壘, bastion)였다.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였던 불곡산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이 산에 9개의 보루를 세웠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소규모 성곽인데, 주로 군사적 요충지에 집중적으로 세웠다. 상봉은 고구려의 제6보루, 임꺽정봉은 제8보루였다. 고구려는 상봉 남쪽 능선에 5개, 임꺽정봉 북쪽 능선에 1개의 보루를 더 축조했다.   


불곡산 상봉


불곡산 상봉 정상


불곡산 상봉 정상 표지석


불곡산 상봉 정상에서 필자


한동안 땀을 흘리며 가파른 암릉과 계단길을 올라 마침내 불곡산 제일봉 상봉에 섰다. 불곡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상봉이라고 했을 것이다. 동쪽인 산북동에서 바라보면 투구의 모습과 비슷해서 투구봉이라고도 부른다. 


불곡산은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 방성리, 산북동 경계에 솟아 있는 산이다. 양주읍지에는 불곡산을 도봉산(道峰山)의 낙맥(落脈)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불곡산에 회양목이 많아서 겨울이 되면 산록이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회양목이 거의 다 사라지고, 295m봉 서쪽 능선 등지에 소규모의 자생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불곡산(佛谷山)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서부터 확인되고,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에는 불국산(佛國山)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불곡산과 불국산은 혼용되어 왔다.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 1842) 지도에는 1792년 정조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이 산에 옥류산(玉流山)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1895년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일제(日帝)가 제작한 군사지도에는 불광산(佛光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상봉 정상에는 깔따구들이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깔따구들은 나를 보자 맹렬하게 달려들어 맨살이 드러난 목과 팔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깔따구들에게 물린 자리가 따가우면서 빨갛게 변했다. 깔따구들을 손바닥으로 정신없이 때려잡아도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상책이었다.      


상봉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대모산과 호명산, 도봉산


상봉에서 바라본 수락산과 도봉산


상봉에서 바라본 천보산과 의정부


상봉은 전망이 매우 좋아서 불곡산 주능선은 물론 동서남북 사방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불곡산 임꺽정봉과 369m봉에서 뻗어간 한북정맥은 남서쪽으로 대모산(大母山, 모판산, 213m), 호명산(虎鳴山, 423m), 한강봉(漢江峰, 474m), 첼봉(516m), 사패산(賜牌山, 552m)을 지나 도봉산(739.5m)을 향해 치달려가고 있었다. 도봉산 뒤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 837m)도 아스라이 보였다. 


대모산은 산의 형세가 모판과 같다고 해서 모판산이라고도 한다. 대모산에는 대모산성(大母山城, 양주산성)이 있다. 호명산과 한강봉 북쪽 평야지대에는 양주시 백석읍이 자리잡고 있다. 360번 지방도(부흥로)와 유양천의 동쪽 불곡산 기슭에는 유양공단이 있다.  


백화암은 상봉 남동쪽의 435m봉과 314m봉, 361m봉, 그리고 상봉 남쪽의 갈미봉(300m)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백화암 북쪽 불곡산 주능선에는 제5보루, 서쪽의 갈미봉에는 제4보루, 361m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중턱에는 제3보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쪽에서 백화암을 감싸고 있는 갈미봉은 갈매기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뫼가 변하여 된 것으로 보여진다. 즉, 가을뫼-〉갈뫼-〉갈미로 변한 뒤 여기에 봉우리가 덧붙여져 생긴 이름인 것이다. 한자로는 추산(秋山)이라고 쓴다. 


백화암은 원래 불곡사라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898년 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불곡사라 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주목읍지에는 불곡사에 대해서 '현재의 이름은 백화암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엣날 이곳에는 승려들의 화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절 밑에는 수량이 사시사철 일정하게 나오는 약수와 상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한 바위가 있다. 백화암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유양팔경(維楊八景) 가운데 하나인 층층폭포(層層瀑布, 계단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층층폭포 밑에 복구바위와 비단폭포(緋緞瀑布)가 있었다. 현재는 유양공단이 들어서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백화암 진입로 근처에는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혁명가로 일컫는 임꺽정(林巨正, 林居叱正)의 생가가 있다.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조선의 전제왕조정권과 탐관오리들의 폭정과 가렴주구에 저항하여 무리를 이끌고 봉기했다. 황해도로 진출한 임꺽정은 구월산 등지에 근거지를 두고 조선왕조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1562년 정월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미완의 혁명에 그치고 말았다. 임꺽정의 체포에는 선비 출신 부하 서림(徐林)의 배반이 결정적이었다. 


임꺽정 혁명군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임꺽정 혁명군이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착취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조선왕조정권을 타도하고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를 세웠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고 풍부한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서도 미국을 등에 업은 부일민족반역자들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다. 


나는 내 스스로 임꺽정 혁명군 사령관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임꺽정 장군의 후손임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상봉 남쪽 기슭에는 양주시 유양동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의정부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의정부시 뒤로 수락산(水落山, 638m)과 사패산, 도봉산이 솟아 있었다. 양주시청은 불곡산 주능선의 남동쪽 끝자락에 앉아 있고, 광사천(廣沙川) 건너편에 천보산이 솟아 있었다. 천보산(天寶山, 337m)-호명산은 양주시와 의정부시, 수락산-도봉산은 의정부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유양리(維楊里, 지금의 유양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양주에서 제일인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둘째, 조선초기 이 마을 출신 인물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의 유양리를 들렀는데, 그곳이 흡사 자신의 고향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후 자신의 고향을 유양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유양리에는 조선시대 양주목의 관아와 향교, 금화정(金華亭), 객사 등 주요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도 유양동에는 양주시청과 양주시의회, 양주시보건소 등 관청이 들어서 있어 여전히 양주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유양동은 옛 관아터를 중심으로 관광단지 조성계획이 서 있다. 양주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인 양주별산대놀이 전수회관과 놀이마당이 관아터 인근에 조성되어,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상설공연이 열리고 있다. 


유양리에는 옛날 양주목사가 이곳의 경치에 감탄한 나머지 중국의 8경을 본떠서 만든 유양팔경이 있다. 일명 양주팔경이라고도 한다. 유양팔경은 산성낙조(山城落照, 대모산성의 해지는 모습), 기당폭포(妓堂瀑布, 계단폭포, 일명 양주폭포), 화암종성(華庵鐘聲, 백화암의 새벽 종소리), 선동자화(仙洞煮花, 신선이 기당폭포 주변에 머물면서 진달래 꽃지짐을 해먹는 것), 금화모연(金華暮烟, 금화정에서 바라보는 민가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짓는 연기), 승학연류(乘鶴烟柳, 승학교와 어우러진 버드나무), 도봉제월(道峰霽月, 금화정에서 본 도봉산 영봉 위에 뜬 초승달), 수락귀운(水落歸雲, 수락 영봉에 감도는 구름) 등이다.

 

상봉에서 바라본 양주신도시 고읍지구


상봉에서 바라본 양주신도시 회천지구와 옥정지구


저 멀리 동쪽으로 한북정맥 죽엽산(竹葉山, 622m)이 아스라이 보였다. 죽엽산을 떠난 한북정맥이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서쪽으로 불곡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죽엽산을 주엽산(注葉山, 舟葉山) 또는 주업산(注業山)으로 불렀으나, 일제의 식민통치시대부터 죽엽산이라고 표기하였다.


고장산(203m)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에 양주신도시 회천지구(檜泉地區), 남동쪽에는 고읍지구(古邑地區)가 들어서 있었다. 회천지구와 고읍지구 사이에 옥정지구(玉井地區)가 자리잡고 있었다. 양주신도시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꽤 많이 들어서 있었다.       


상봉에서 바라본 상투봉과 420m봉, 임꺽정봉


상봉에서 바라본 상투봉


상봉에 서서 지나온 주능선의 상투봉과 420m봉, 임꺽정봉을 바라보았다. 상투봉의 남쪽은 북쪽에서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상투바위 밑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상투봉에서 바라본 420m봉과 임꺽정봉


상투봉에서 바라본 420m봉


상투봉을 내려가면서 420m봉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420m봉 뒤로 임꺽정봉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420m봉 중턱의 암릉지대를 오르려면 땀 좀 흘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20m봉에서 바라본 임꺽정봉


임꺽정봉에서 바라본 420m봉과 상투봉, 상봉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420m봉에 올라서자 임꺽정봉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 무리의 산악인들이 임꺽정봉 정상 서쪽 암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암벽등반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도전정신과 성취감, 그리고 짜릿한 스릴일 것이다. 나도 한때는 암벽등반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도 먹고 해서 암벽등반을 포기하고 트레킹만 하기로 했다. 


티베트와 네팔의 히말라야산맥, 중앙아시아의 천산산맥을 보고 싶다. 남미의 안데스산맥, 북미의 로키산맥도 보고 싶다. 내가 죽기 전에 그러한 꿈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임꺽정봉 남사면의 암릉지대를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420m봉과 상투봉, 상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상봉을 조망할 수 있는 마지막 전망대였다.        


임꺽정봉 정상


임꺽정봉 정상 표지석

 

임꺽정봉 정상에서 필자


남사면의 암릉지대를 통과하여 한북정맥 임꺽정봉 정상에 올랐다. 산마루에는 널찍한 바위가 병풍처럼 솟아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는 정상 표지석과 임꺽정봉의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도락산과 한북정맥 청업굴고개, 355m봉


임꺽정봉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암봉 전망대와 369m봉


암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꺽정봉


암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369m봉


남한 9정맥 중 하나인 한북정맥은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는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져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말고개(馬峴, 568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촛대봉(1,010m), 복주산(伏主山, 1,152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도마봉(道馬峰, 883m), 국망봉(國望峰, 1,168m), 개이빨봉(犬齒峰, 1,110m), 민둥산(1,023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 운악산(雲岳山, 937.5m),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에 이른다. 


그 한북정맥은 죽엽산에서 서쪽으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서쪽 도락산 남동쪽 능선의 삼거리까지 횡단한 뒤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청업굴고개를 넘고 355m봉을 치달아 불곡산 임꺽정봉으로 이어진다. 임꺽정봉에서 한북정맥은 다시 북서쪽으로 암봉 전망대와 험한 암릉지대를 내려가 369m봉에 이른 다음 다시 남서쪽으로 급선회하여 대모산과 호명산, 한강봉, 사패산을 지나 도봉산을 향해 달려간다. 도봉산에서 한북정맥은 상장봉, 노고산(老姑山, 487m), 현달산(峴達山, 139m),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으로 뻗어가 한강 하구에 이른다. 임꺽정봉 정상에 서서 백두대간 한북정맥의 흐름을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암봉 전망대


암봉 전망대 북쪽의 수직 암벽지대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369봉으로 가는 안부에 이르러 김승골을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김승골은 이 골짜기에 멧돼지를 비롯한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석읍지에는 처음에는 짐승골로 불리다가 김생골->김새이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김승골로 불리고 있다. 


김승골 쉼터를 지나 백석읍 방성리 대교아파트로 내려와 산행을 마쳤다. 불곡산은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아 산행이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오산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탓도 있었지만 가파른 암릉지대가 많아 정말 힘든 산행이었다.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친다'는 오래된 격언을 몸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서녘 하늘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불곡산과 작별하고 귀로에 올랐다.  


2015.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