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연인산(戀人山, 1,068m)에 올랐을 때 남서쪽에 산세가 좋은 산이 솟아 있었다. 나중에 지도에서 찾아보니 그 산은 바로 운악산(雲岳山, 937.5m)이었다. 기회가 되면 운악산을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에서 바라본 운악산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조종천변(朝宗川邊)에 서서 운악산을 바라보았다. '악(岳)' 자가 들어가는 산답게 운악산은 멀리서 바라봐도 산세가 험한 골산(骨山)이었다.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1,468.3m),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675m), 서울의 관악산(冠岳山, 632m),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488m)과 함께 경기 5악에 속하는 운악산은 '경기금강(京畿金剛)'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세가 뛰어나다.
운악산에는 현등사(懸燈寺)라는 고찰이 있는데, 그래서 이 산을 현등산(懸燈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경대(萬景臺)를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것처럼 하늘로 솟았다고 하여 운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악산은 동봉(東峰, 937.5m)과 서봉(西峰, 935.5m)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봉을 청학대(靑鶴臺)라고도 한다. 서봉 근처에는 전망이 좋은 망경대(望景臺)가 있다.
운악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한북정맥(漢北正脈)에 속한다. 추가령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은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국망봉(國望峰, 1,168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을 지나 운악산으로 달려와서는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 불곡산 임꺽정봉, 호명산, 한강봉, 사패산, 도봉산(道峰山, 717m), 상장봉, 노고산(老姑山, 487m), 현달산(峴達山, 139m),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으로 뻗어가 한강 하구에 이른다.
운악산에는 여러 곳의 폭포가 있다. 동쪽 계곡에는 백년폭포(百年瀑布)와 무우폭포(舞雩瀑布), 절고개폭포, 빙벽폭포(氷壁瀑布)가 있고, 서쪽 계곡에는 무지개폭포(虹瀑)와 고꼬리폭포가 있다. 무지개폭포는 무지치폭포라고도 하는데, 옛날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치다가 이 폭포에서 상처를 씻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무지개폭포 위쪽에는 궁예의 옛 대궐터가 있고, 운악산의 서쪽 능선에는 궁예의 전설이 서려 있는 운악산성(雲岳山城)이 있다.
가평군 하면 상판리 귀목봉(鬼木峰, 1,036m)에서 발원한 조종천은 남류하여 청평면 청평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운악산의 동북쪽에는 연인산, 명지산(明智山, 1,267m), 화악산(華岳山, 1,468m) 등의 명산이 있다.
운악산에도 팔경이 있다. 제1경은 백년폭포(百年瀑布), 제2경은 다락터 오랑캐소, 제3경은 눈썹바위, 제4경은 코끼리바위, 제5경은 만경대, 제6경은 민영환암각서(閔泳煥岩刻書), 제7경은 큰골내치기 암벽, 제8경은 노채애기소이다.
운악산 등산로 입구
하판리 운악산 등산로 입구에는 현등사 일주문이 세워져 있었다. 일주문은 일심(一心) 곧 부처의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야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일주문 앞쪽 처마에는 한글로 쓴 '운악산 현등사' 편액이 걸려 있었다. 글씨는 운허(耘虛)의 작품이다. 일주문 뒤쪽 처마에는 '漢北第一地藏極樂道場(한북제일지장극락도량)'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일주문의 좌우에는 운악산 표지석과 삼충단(三忠壇)이 있었다. 운악산 표지석에는 운악산의 절경을 노래한 시조 한 수를 새겨 놓았다.
雲岳山 萬景臺는 金剛山을 노래하고
懸燈寺 梵鐘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百年沼 舞雩瀑布에 푸른 안개 오르네
삼충단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조병세(趙秉世),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등 세 열사의 추모비를 모신 곳이다. 1910년에 조성된 삼충단은 오랜 세월 훼손된 상태로 버려졌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출입문 왼쪽 모퉁이에는 삼충단복원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운악1경 백년폭포
운악계곡에서 처음 만난 폭포는 백년폭포(百年瀑布)였다. 낙폭이 10여m에 이르는 3단 폭포인 백년폭포는 가뭄으로 인해 거의 말라붙어 있었다. 가뭄이 심하긴 심한 모양이었다.
운악산 무우폭포
백년폭포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무우폭포가 있었다. 낙폭이 20m인 무우폭포도 물이 거의 말라붙어 있었다. 무우(舞雩)는 안개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를 뜻한다. 폭포수가 쏟아지면서 물보라가 이는 모습에서 폭포 이름을 딴 것일 수도 있다. 무우는 기우제(祈雨祭) 또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아마도 옛날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일까?
운악6경 민영환바위
무우폭포에서 더 올라가자 '민영환 바위'라는 큼직한 바위가 나타났다. 바위 윗부분에는 세로로 '閔泳煥(민영환)'이라고 새긴 암각 글자가 있다. 이름하여 '민영환 암각(岩刻)'이라고 한다. 1906년 내시부지사(內侍府知事) 나세환(羅世煥) 등 12명이 새긴 것이다. 세 글자의 길이는 민영환 선생의 키와 같게 했다는 설이 있다. 선생은 가평군 하면 현리에 은둔하고 있을 때 이 바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탄식하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운악산 현등사
민영환바위에서 현등사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인도에서 온 승려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오랜 세월 폐사가 되었다가 898년(신라 효공왕 2)에 도선(道詵)이 재창(再創)했다. 1210년(고려 희종 6)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주춧돌만 남은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삼창(三創)한 뒤 현등사라 했다. 지눌의 꿈에 등불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
현등사는 1411년(조선 태종 11)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사창(四創)했다. 1447년(세종 29)에 세종은 현등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대사의 상수제자인 혜각 신미(慧覺 信眉)에게 명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케 했다.
1812년(순조 12)~1826년(순조 26)까지 구암(龜巖)과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현등사를 오창(五創)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현등사의 당우(堂宇)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지금의 현등사는 1961년 성암(省庵)이 중수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등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불교인들에게 현등사는 강화도 보문사, 관악산 연주암과 더불이 경기도 3대 기도 성지 중 하나라고 한다.
현등사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과 관음전(觀音殿), 극락전(極樂殿), 지장전(地藏殿), 삼성각(三聖閣), 영산대전(靈山大殿), 만월보전(滿月寶殿), 적멸보궁(寂滅寶宮), 요사(寮舍)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교 교섭에 대한 선물로 보낸 금병풍(金屛風)이 보관되어 있었다는데,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
현등사 석탑 문화재로는 지진탑(地鎭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과 삼층석탑(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이 있다. 지진탑은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재창하고 절터의 땅기운를 진정시키기 위해 칠층의 석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는 삼층만 남아 있다. 삼충석탑은 1470년(성종 1) 세종의 8남인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탑을 개탑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를 봉안했다고 한다. 왕실 발원으로 삼층석탑의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등사 부도전의 함허당득통탑
현등사에서 절고개 방향으로 산을 오르기로 했다. 50m쯤 걸었을까? 현등사 부도전을 만났다. 부도전에는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涵虛堂得通塔,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9호)과보봉당충현지탑(寶峰堂忠鉉之塔), 명문이 없는 석종형 부도가 세워져 있었다.
함허화상(涵虛和尙)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1396년(태조 5)에 출가했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에서 무학(無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1404년(태종 4)에 깨달음을 얻었다.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의 법통을 이은 함허화상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원각경소(圓覺經疏), 영가집설의(永嘉集說誼), 현정론(顯正論), 윤관(綸貫),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화담당 경화는 말년에 현등사에 들어와 불법을 강론하고 수도에 전념하다가 1848년에 입적했다. 무명 부도는 혹시 기록에 보이는 북악부도(北岳浮屠)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운악산 절고개폭포
현등사 부도전을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암릉길이 시작되었다. 가끔 빈 물병 같은 쓰레기들이 바위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행을 하면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소리를 질러대고, 심지어 희귀식물을 몰래 캐 가거나 덫을 놓아 야생동물들을 밀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산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산은 곧 자연이요, 산을 망치는 것은 자연을 망치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빌려 쓰고 빚임을 명심해야 한다.
암릉길을 얼마쯤 올랐을까? 절고개폭포를 만났다. 백년폭포나 무우폭포보다 낙차가 훨씬 더 큰 폭포였지만 역시 물은 병아리 오줌만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등산로가 폭포 바로 옆으로 나 있어서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리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다.
절고개를 향해 오르다가 이끼간 낀 바위에서 미끄러져 왼쪽 발목을 다친 여성 등산객을 만났다. 발목이 퉁퉁 부은 것을 보니 언뜻 보기에도 중상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통증도 심하고 걷지도 못해서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나는 한의사임을 밝히고 응급치료를 받을 것인지 물었다. 치료를 받겠다고 하자 나는 급한 대로 그녀에게 소염진통어혈방(消炎鎭痛消瘀血方) 침법을 시술했다. 침 시술 후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통증이 상당히 가라앉았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산행을 하기에는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는 119 구조대가 보낸 헬리콥터에 실려 후송되었다.
운악4경 코끼리바위
폐허가 된 기도터를 지났다. 절고개를 100여m 정도 남겨 두었을까? 코끼리 코와 꼭 닮은 코끼리바위를 만났다. 상아는 부러져 있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바위가 부서지고 떨어져 나가면서 코끼리 코의 형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역시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이다.
운악산 절고개 고갯마루
드디어 한북정맥 절고개(800m)에 올라섰다. 여기서 남쪽으로 한북정맥을 타고 가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넘어 한강 하구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면 대성산과 백암산을 지나 추가령에서 백두대간과 만난다. 그 백두대간은 북으로 백두산, 남으로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한북정맥에 서서 백두대간에서부터 고동쳐 오는 지맥에 내 온몸을 맡겼다.
운악산 남근석
운악산 현등사
한북정맥의 연인지맥
한북정맥의 연인지맥
절고개에서 운악산 최고봉 동봉까지는 640m의 거리였다. 작은 봉우리 두 개를 넘어서 운악산 전망대에 올랐다. 바로 앞에 남근석(男根石)이 보였다. 그런데 운악산 남근석은 아무리 보아도 거시기 같지가 않았다. 제천 동산이나 장흥 천관산의 남근석 정도는 되어야 명실상부한 남근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전망대에 있던 다른 등산객들도 남근석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남근보다는 머리가 큰 아기를 더 닮았다고들 했다. 그래서 남근석에 '아기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운악계곡에 자리잡은 현등사도 빤히 내려다보였다. 하판리 조종천 건너편으로 한북정맥에서 갈라진 연인지맥(戀人支脈)이 남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연인지맥은 한북정맥의 한나무봉과 청계산 중간쯤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귀목봉을 지난 다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애재비고개-연인산-우정봉-우정고개-매봉-깃대봉-약수봉-대금산-불기산-주발봉-호명산으로 달려가 조종천 하류에서 꼬리를 감춘다.
연인지맥을 명지지맥(明智支脈)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명지산(明智山, 1,267m)은 물론 명지2봉(1250m)과 명지3봉(1199m)도 연인지맥 마룻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오류는 빨리 수정하는 것이 좋다. 명지지맥은 이제 연인지맥으로 부르자.
운악산 서봉
운악산 백호능선
한북정맥과 아기봉 능선
915봉에 오르자 비로소 운악산 서봉이 보였다. 서봉의 서쪽 능선에는 망경대와 면경대(面鏡臺)가 있다. 태봉(泰封)의 왕 궁예는 면경대에 산성을 쌓고 반년 동안 왕건의 군대와 싸웠다고 한다.
지나온 절고개도 보였다. 절고개를 서쪽으로 넘으면 절골로 해서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대원사로 내려가게 된다. 한북정맥은 여기서 절고개와 825봉을 넘어 철암재-735봉을 지나 수원산을 향해 뻗어간다. 절고개에서 남동쪽으로 825봉-820봉-675봉-625봉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백호능선(白虎稜線)이다.
백호능선 뒤쪽으로 또 하나의 능선이 한북정맥의 735봉에서 남동쪽으로 715봉-아기봉(772m)-695봉-675봉-655봉으로 뻗어간다. 아기봉은 어머니산인 운악산에 안긴 아기와 같은 형상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기봉을 악귀봉(惡鬼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운악산 정상
운악산 비로봉 정상 표지석
915봉에서 내려와 나무 계단을 오르면 동봉이었다. 동봉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상의 바위에는 '飛虎決死隊, 決死突進隊, 決死突擊隊, 名譽, 忠誠, 團結'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가평 현리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기사) 맹호부대원들이 운악산 산악훈련 중에 새긴 것으로 보였다. 맹호부대원들은 스스로를 비호결사대라 부른다고 들었다.
운악산 비로봉 정상 표지석 이면 함허득통선시 비
'雲岳山毘盧峯(운악산비로봉)' 표지석 뒤에는 현등사를 4창한 함허 득통(涵虛得通)의 '題雲岳山(제운악산)'이란 선시(禪詩)가 새겨져 있었다. 7언절구(七言絶句) 한시(漢詩)였다. 첫 구를 조금 달리 해석해 보았다.
題雲岳山(제운악산)-운악산에서
雲岳山帶懸燈寺(운악산대현등사) 운악산 자락에 등처럼 걸려 있는 절
落石飛泉上下聲(낙석비천상하성) 위로는 돌 구르고 아래에선 물소리
出自千尋與萬丈(출자천심여만장) 천년전부터 뭇 지식인의 발길 이어져
滄溟未到不曾停(창명미도불증정) 밝고 환한 날에도 오고감 멈추지 않네
涵虛得通禪詩(함허득통선시) 兪衡在謹書(유형재근서)
운악산 정상 표지석의 백사 이항복 시
'雲岳山(운악산)' 표지석 뒤에는 포천이 낳은 인물이라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5언율시(五言律詩)가 새겨져 있었다. 첫 구와 다섯째, 여섯째 구를 조금 달리 해석해 보았다.
雲岳山深洞(운악산심동) 운악산 심심 깊은 골에
懸燈寺始營(현등사시영) 현등사 처음으로 지었네
遊人不道姓(유인불도성) 노는 사람들 성을 말하지 않는데
怪鳥自呼名(괴조자호명) 괴이한 새는 스스로 이름 부르네
沸白天神壯(비백천신장) 물안개 날리는 폭포수 웅장하고
橫靑地軸傾(횡청지축경) 푸른 산 가로질러 지축이 기운 듯
慇懃虎溪別(은근호계별) 은근히 호계에서 이별하니
西日晩山明(서일만산명) 석양 속에 저문 산 밝아 오네
운악산 동봉 정상에서 필자
운악산 동봉에서 바라본 915봉, 820봉, 악귀봉
동봉에 서서 지나온 산길을 돌아보았다. 울창한 활엽수림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았지만, 바로 앞의 915봉과 백호능선의 820봉, 그 뒤로 아기봉 능선은 볼 수 있었다.
운악산 서봉에서 바라본 동봉
운악산 서봉 정상 표지석
운악산 서봉에서 바라본 한북정맥과 아기봉
동봉에서 서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서봉에 올랐다. 청계산에서 남서쪽으로 길마봉을 지나 노채고개를 넘은 한북정맥은 원통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봉까지 달려와서는 동봉-915봉-절고개-825봉-철암재-735봉을 지나 수원산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서봉에서 서서 백두대간을 통해서 한북정맥으로 전해지는 백두산과 지리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운악5경 만경대
만경대에서 바라본 현등사
운악산 청룡능선
한북정맥의 길마봉과 청계산, 연인지맥의 귀목봉과 연인산, 우정봉, 그리고 명지산
서봉에서 동봉으로 돌아와 청룡능선(靑龍稜線)을 타고 만경대에 올랐다. 만경대는 전망이 매우 뛰어난 암봉이었다. 이름 그대로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만경대에서 토봉(725m)-625봉으로 뻗어내린 청룡능선은 물론 운악계곡과 백호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동쪽으로는 길마봉과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이 뻗어가고 있었고, 한북정맥에서 갈라진 연인지맥은 귀목계곡을 휘감고 돌아 연인산-우정봉-매봉-깃대봉-양수봉을 지나 대금산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운무가 짙어서 명지산과 귀목봉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산을 오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배우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다. 산세가 가파르고 험한 골산에서는 지조와 용기, 부드럽고 듬직한 육산에서는 관용과 덕망을 본받게 된다. 산을 오를 때는 숨이 차고 힘들지만, 일단 산마루에 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멋진 경치를 바라보노라면 그간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이처럼 산행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산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산을 닮아서 성품이 선하고 진득하다.
청룡능선의 암릉지대
청룡능선은 곳곳에 가파른 암릉지대가 도사리고 있어서 상당히 위험했다. 험한 암릉지대 곳곳에 설치한 철계단과 철다리, U 자형 쇠를 박은 발디딤대, 쇠말뚝을 박아서 연결한 쇠줄 덕분에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청룡능선의 천애고송
청룡능선의 운악7경 큰골내치기바위와 입석대, 토봉, 625봉
운악산 백호능선의 675봉과 625봉
만경대에서 내려오다가 쇠다리를 건너 깎아지른 듯한 암봉에 올라섰다. 암봉에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 그루 천애고송(天涯孤松)이 꿋꿋이 서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나이는 상당히 많아 보였다. 저 소나무는 틈도 보이지 않는 바위에서 어떻게 뿌리를 박고 오랜 세월 가뭄과 삭풍한설(朔風寒雪)을 견뎠을까! 사람들의 발길에 수없이 채인 흔적도 소나무 밑둥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었다. 천애고송은 바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 외세와 위정자들의 가혹한 억압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소나무였다.
천애고송 암봉도 전망이 매우 좋았다. 큰골내치기바위-미륵바위-토봉-625봉으로 이어지는 청룡능선과 백호능선, 그리고 두 능선 사이에 자리잡은 운악계곡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청룡능선의 미륵바위
천애고송 암봉에서 조금 더 내려오자 바위 기둥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치솟아 있었다. 미륵바위 일명 입석대(立石臺)였다. 언뜻 보면 미륵불상이 돌아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운악산 만경대와 미륵바위, 병풍바위
천사바위
천사바위
도인바위
도인바위
토봉 전망대에 오르자 만경대와 큰골내치기바위 미륵바위, 병풍바위 일대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운악산을 경기의 소금강이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이 일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병풍바위에는 날개가 있는 천사처럼 생긴 바위와 도인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각각 천사바위, 도인바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병풍바위 안내판에는 '옛날 신라 법흥왕(514년) 때 인도승 마라하미(滅訶彌)가 이 산을 오르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와 맞닥뜨렸는데, 정신이 헛갈리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허나, 이것도 부처님의 뜻이라 여겨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으나 자꾸만 미끄러졌다. 마치 바위가 오르지 말라고 내치는 듯했다. 결국 마라하미는 바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행을 하다 죽었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인바위를 마라하미바위라고 부르면 어떨까? 마라하미가 병풍바위를 오르다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그럴 듯하지 아니한가!
소나무 고사목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을 때 토봉을 넘었다. 바위 벼랑에서 생을 다한 소나무 고사목(枯死木)을 만났다. 소나무 밑둥은 거의 수평에 가까운 나선형으로 배배 돌아가 있었다. 바위 벼랑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 나무가 살아남으려면 가능한 한 키를 키워서는 안된다. 소나무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나무는 나선형으로 자라면서 자신의 키 성장을 억제하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소나무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룡능선의 고인돌바위
토봉을 넘어서 내려오다가 고인돌을 닮은 바위를 보았다. 버섯이나 삿갓 같기도 했다. 이 바위에 고인돌바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하산길을 서둘렀다.
청룡능선의 눈썹바위
625봉을 넘어서 눈썹바위에 이르렀다. 암벽 위에서 튀어나온 바위가 정말 눈썹처럼 생겼다. 눈썹바위 유래가 재미있었다.
눈썹바위 안내판에는 '옛날에 한 총각이 계곡에서 목욕하는 선녀들을 보고는 치마를 하나 훔쳤다. 총각은 치마가 없어 하늘에 오르지 못한 선녀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선녀는 치마를 입지 않아 따라갈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에 총각은 덜컥 치마를 내주었고, 치마를 입은 선녀는 곧 돌아오겠다며 하늘로 올라갔다. 총각은 선녀 말만 믿고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이 바위가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다.
청룡능선의 모자바위
눈썹바위를 떠나 산길을 내려오다가 중절모를 엎어놓은 듯한 바위를 만났다. 이 바위에는 모자바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판리 등산로 입구로 내려와 산행을 마무리했다. 다음에 또 운악산에 오게 되면 이번과는 반대로 청룡능선으로 올라 백호능선으로 내려가고 싶다.
운악산을 뒤로 하고 귀로에 오르다.
201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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