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순례한 다음 13정맥(正脈) 가운데 남한 9정맥을 다 돌아보는 것이 꿈일 것이다. 나도 그런 꿈을 가진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는 지난 2001년 5월 12일부터 7월 10일까지 백두대간을 순례한 바 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등뼈, 정맥은 갈비뼈에 해당하는 산맥이다. 백두대간 마룻금을 걸어보면 우리나라의 지세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남한 9정맥까지 다 돌아보고 나면 비로소 전국 방방곡곡의 지세 뿐만 아니라 세세한 땅의 생김새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불곡산에서 바라본 대모산
산성말에서 바라본 대모산
산성말에서 바라본 대모산
백두대간 순례를 마친 이후 요즘에는 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산들을 찾아가고 있다.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라고 해서 한북정맥이라고 한다. 한북정맥은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나는 그동안 한북정맥의 말고개, 수피령, 운악산, 불곡산, 노고산 등을 올랐다.
노고산에 이어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에 있는 한북정맥 대모산(大母山, 212.9m)을 찾았다. 한북정맥 불곡산 임꺽정봉과 한강봉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산인 대모산은 그 형세가 모판과 같다고 해서 모판산이라고도 한다. 대모산은 남쪽으로는 양주시 어둔동, 동쪽으로는 유양동, 서쪽으로는 백석읍 방성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모산 정상부에는 대모산성(大母山城, 양주산성, 대한민국 사적 제526호)이 있다.
'깨닫는 농원'에서 바라본 대모산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산성말에서 대모산 산행을 시작했다. '전주리씨 효령공파 안간도정종회재실'을 지나 '깨닫는 농원'에 들렀다. 농원의 주인은 평생을 교단에서 보내고 은퇴한 이경복 선생이었다. 선생의 안내로 농원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농원의 여기저기 놓여 있는 자연석에는 이경복 선생의 교육 철학이 담겨 있는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농원을 돌아본 뒤 이경복 선생의 초대로 거실로 들어가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은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듯이 사람도 생각의 뿌리가 튼튼해야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각의 뿌리는 자연, 생명, 사랑, 지혜에 튼튼하고 깊게 뻗어야 험한 세상에서도 잘 자라서 좋은 꽃이 피고 탐스러운 열매가 열립니다'라고 강조했다. 농원을 떠날 때가 되자 이경복 선생은 친필 서명을 한 자신의 저서 '생각의 뿌리' 한 권과 집 바로 옆 아름드리 밤나무 밑에서 주운 알밤 한 봉지를 선물로 주었다.
'깨닫는 농원'은 공교롭게도 '전주리씨 효령공파 안간도정종회재실'(유교)과 대성사(大盛寺, 불교), 사랑교회(기독교)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깨닫는 농원'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유교와 불교,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로 회통하라는 운명적 계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대성사 대웅전
대성사 종각
대성사 오층석탑
'깨닫는 농원' 바로 위에 있는 대성사에 들렀다. 보살이 나오더니 '어디서 오셨나요?'하고 물었다. 내가 '지나가는 길손으로 절이 있기에 잠깐 들렀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보살은 도로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대성사는 대웅전과 종각, 요사채만을 갖춘 단출한 절이었다. 마당에는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 석탑과 그 양식이 비슷한 탑이었다. 전체적으로 볼륨감이 없고, 호리호리해서 안정감이 적어 보였다. 기단(基壇)도 없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곧바로 몸돌과 지붕돌을 쌓아 올리고, 상륜부는 간단하게 보개(寶蓋) 위에 보주(寶珠)만을 얹은 투박한 양식이었다. 몸돌에는 우주(隅柱)만 표현되어 있고 탱주(撑柱)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지붕돌받침은 3층으로 되어 있고, 귀마루가 살짝 들어올려져 있어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대모산 나들목
참외밭
'깨닫는 농원'의 끄트머리에 대모산 나들목이 있었다. 나들목 산밭에는 노랗게 익은 참외며 수박이 말라버린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바싹 다가온 가을이 거기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대모산성 서문지 북쪽 성벽
대모산성 서문지에서 바라본 백석읍
조금 가파르기는 했지만 잠깐만에 대모산성 서문지(西門址)에 올라섰다. 서문지 성곽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명색이 국가 사적인데 관리가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대모산성 서문지에서는 백석읍내 일대가 한눈에 바라보였다. 산성말 일대 논에는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대모산성 북문지
대모산성 북문지 동쪽 성벽
대모산성 북문지 서쪽 성벽
대모산성 서문지에서 밤나무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북문지(北門址)로 향했다. 밤나무 밑에는 아람 벌어진 밤들이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산밤은 다람쥐나 청설모가 좋아하는 먹이일 뿐 아니라 이들이 엄동설한을 날 양식이었다.
북문지도 역시 풀과 너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북문은 북쪽의 계곡을 향한 부분에 문의 바깥이 단절된 현문식(懸門式)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현문식 다락문은 주로 신라가 쌓은 성에서 발견되는 양식이다.
북문지 앞 산비탈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불곡산(佛谷山, 470.7m))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조망할 수가 없었다. 불곡산 임꺽정봉을 떠난 한북정맥은 대모산 북문지 바로 오른쪽으로 올라와 작고개(어둔동고개)를 향해 치달려가고 있었다. 대모산 정상부는 비교적 평평한 평전을 이루고 있었다.
대모산성 동문지
대모산성 동문지에서 바라본 불곡산과 한북정맥 임꺽정봉
성곽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 대모산성 동문지(東門址)에 도착했다. 동문지에서는 한북정맥 임꺽정봉(林巨正峰, 449.5m)에서 상투봉, 상봉에 이르는 불곡산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불곡산과 대모산 사이에는 유양공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문지는 불곡산 최고 전망처였다. 불곡산은 마치 거대한 부처가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래서 불곡산(佛谷山)이라고 했을까?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은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말고개(馬峴, 568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촛대봉(1,010m), 복주산(伏主山, 1,152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도마봉(道馬峰, 883m), 국망봉(國望峰, 1,168m), 개이빨봉(犬齒峰, 1,110m), 민둥산(1,023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 운악산(雲岳山, 937.5m),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을 지나 양주 불곡산 임꺽정봉에 이른다. 임꺽정봉에서 369m봉으로 달려간 한북정맥은 다시 남쪽으로 급선회하여 백석삼거리를 지나 대모산으로 이어진다.
대모산을 떠난 한북정맥은 호명산(虎鳴山, 425m), 한강봉(漢江峰, 474m), 챌봉(遮日峰, 518m), 사패산(賜牌山, 552m), 도봉산(道峰山, 740m), 상장봉(上將峰, 543m), 노고산(老姑山, 487m), 현달산(峴達山, 139m),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을 지나 한강 하구에 이른다. 대모산 정상에 서서 백두대간 한북정맥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꼈다.
대모산성 동문도 계곡을 향한 위치에 현문식으로 설치되었다. 동문지 문초석(門礎石)이 아직도 남아 있고, 문짝을 지탱하면서 여닫는 장치에는 반원구상(半圓球狀)의 중심 축수(軸受) 장치가 박힌 채 발견되었다.
대모산성 동문지를 떠나 남문지(南門址)로 추정되는 곳에 이르렀다. 남문 추정지도 역시 풀덤불이 우거져 있었다. 한북정맥은 남문지 근처에서 성곽을 넘어 작고개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모산성은 동북쪽이 높고, 남서쪽으로 경사진 산 정상부를 가공된 할석으로 빙 둘러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일명 양주산성(楊州山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을 근거로 대모산성을 나당전쟁기(羅唐戰爭期)의 매초성(買肖城)으로 비정(比定)하는 설도 있다. 지금까지 매초성은 지금의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한 양주 지역은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이 지역은 고구려가 6세기 중엽까지 차지하였고, 그 이후는 신라의 영토로 들어갔다. 즉 이 지역은 삼국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대모산성의 둘레가 906척, 높이가 5척이라고 하였지만 실제 둘레는 약 1.4km이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다. 성벽과 현문 등의 시설은 초축(初築) 당시의 상태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서문지와 북문지, 동문지 등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잔존 성벽을 보면 체성을 보수하여 기초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게 하는 한편 시각적으로 대단히 높게 보이도록 축성하였다. 이런 축성법은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阿嵯山城)이나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 470년), 경주의 명활산성(明活山城) 등 5~6세기 중엽의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된다.
대모산성은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에 의해 산성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 등 3곳에 문지가 있음이 확인되었지만 남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성안 정상부의 평탄한 암반에서는 군창지(軍倉址) 등 건물터 10곳과 우물터 5곳이 확인되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 토우(土偶) 등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금속 유물은 활촉이나 투겁창 등의 무기류, 말재갈 등의 마구류, 솥 등의 생활용구, 보습이나 낫, 도끼 등의 농기류, 청동 도장(靑銅印)이나 청동 거울(靑銅鏡), 청동 말(靑銅馬), 청동 팔찌(靑銅環) 등의 청동기류, 중국 당나라의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寶) 등 총 635점이 나왔다. ‘德部(덕부), 德部舍(덕부사), 官(관), 草(초), 富部(부부), 大浮雲寺(대부운사), 城(성)’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도 출토되었다.
청동 도장이나 거울, 팔찌 등의 청동기는 고대의 귀족 등 지배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물건들로 당시 대모산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대모산성은 군사기지와 행정치소(行政治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각종 농기류 등으로 볼 때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그 관할지에서 농업과 수공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군사기지와 행정치소를 겸했던 대모산성은 자연스럽게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수공업품의 유통과 물류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와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삼국시대 이후로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출토 유물과 축성 양식 등으로 볼 때 대모산성은 신라가 쌓은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방시설로 계속 사용되었다. 현존 성벽은 6세기 중엽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고, 수락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교통과 통신의 요지에 자리잡은 대모산성은 당시 산성의 특성과 축성기법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어 대한민국 사적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백석읍과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대모산성은 당시 의정부로 내려오는 외적의 방어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춘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모산성 북문지 북쪽에서는 백제계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석축(石築) 성벽이 축조되기 이전에 대모산에는 이미 백제의 토루(土樓)나 목책(木柵) 같은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건물터 지하층에서는 반월형(半月形) 석도(石刀)가 발견되었다. 이는 선사시대 이래 대모산에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 왔음을 알려준다.
대모산 아래의 드넓은 평야를 버리고 산 정상부의 고지성 취락 형태를 선택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집단간에 발생한 정치, 군사적 갈등과 긴장 때문이다. 영토나 농경지 확보를 위한 집단간의 투쟁 과정에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고지성 취락 형태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모산성은 과연 나당전쟁기의 그 매초성이 맞을까? 맞다면 대모산성은 신라의 운명을 가른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신라와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675년 돌궐족(突厥族), 거란족(契丹族) 등과 20만 연합군을 형성하여 매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는 말갈족(靺鞨)의 이근행(李謹行)으로 하여금 연합군을 이끌게 했다. 신라는 전군(九軍)을 동원해서 당 연합군을 처절하게 궤멸시켰다. 결국 이근행의 당 연합군은 만주(滿洲)의 랴오닝(遼寧)으로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매초성 전투에서 당 연합군이 이겼다면 파죽지세로 경주까지 밀고 내려갔을 것이고, 신라는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진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총력전을 펼친 신라에게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약 3만여 필의 말과 엄청난 무기를 노획했다. 매초성 전투의 승리로 신라는 처음으로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회복했다.
내가 만약 삼국시대에 이곳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어느 나라 군사가 되어 전쟁터로 나갔을까? 대모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삼국 병사들의 함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대모산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호명산과 홍복산
대모산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호명산
대모산성 성곽을 넘어 남서쪽으로 작고개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마룻금을 따라서 걸었다. 지대가 낮고 숲이 우거져 있어 전망은 좋지 않았다. 작고개에 가까워져서야 한북정맥 호명산이 눈에 들어왔다.
한북정맥 작고개(어둔동고개)
잠깐만에 한북정맥 작고개(어둔동고개)로 내려왔다. 작고개에는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와 의정부시 녹양동을 연결하는 양주산성로가 지나고 있었다.
산성말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호명산과 한강봉
산성말에서 바라본 한북정맥 호명산
산성말로 내려와 벼들이 익어가는 들판 건너편의 한북정맥 호명산과 한강봉을 바라보았다. 한북정맥이 나를 부르는 한 호명산과 한강봉도 언젠가는 가야 할 산이었다.
산으로 가는 인생길이 이번에는 한북정맥 대모산으로 나 있었다. 대모산 정상부의 산성에 서서 나는 우리 역사를 돌아보았다.
2015.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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