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어린 시절 언제부터였을까? 해가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면 저 멀리 북서쪽 산기슭에서 아스라이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마치 저 하늘의 별처럼..... 나는 늘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불빛은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 불빛을 꼭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업장을 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되풀이되었다. 이러구러 세월은 반세기가 흘렀다. 소년은 초로(初老)가 되었고, 그리움의 불빛은 어느새 가슴 속에서 시나브로 잊혀졌다.
초로가 된 소년은 오늘 억정사지대지국사탑비(億政寺址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와 경종대왕태실(景宗大王胎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호)을 보기 위해 충주시(忠州市) 엄정면(嚴政面) 괴동리(槐東里)를 찾아왔다. 대지국사탑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장병산(帳屛山)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움의 그 불빛이 떠올랐다.
족동마을에서 바라본 장병산 신흥사
어린 시절 아스라이 보이던 불빛의 주인공은 바로 장병산 신흥사(新興寺)였다. 신흥사를 찾아가기 위해 신만리 장병산 바람맞이골에 자리잡은 족동마을로 향했다. 신흥사는 바로 장병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흥사 부도전
족동마을에서 장병산 산비탈을 타고 신흥사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팔랐다. 겨울에 눈이 와서 빙판이라도 지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주차장은 부도전(浮屠田) 바로 앞에 있었다.
부도전에는 세운 지 아직 얼마 안되어 보이는 부도(浮屠) 두 기가 있었다. 부도명(浮屠銘)을 보니 '海雲堂大宗師耕牛(해운당대종사경우)', '胤榮雲松堂(윤영운송당)'의 부도였다. 두 승려에 대한 행적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신흥사 1890년(조선 고종 27) 오영근(吳永根)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오영근은 장병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석간수(石澗水)를 발견했다. 그는 석간수를 마시고 소원을 빌었는데, 곧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석간수는 영천(靈泉)으로 이름이 났다. 오영근은 석간수 근처에 초가 2칸을 짓고 절을 창건했다.
1905년 주지 이영월(李泳月)은 절을 중창했다. 1920년에 이영월은 꿈에 현몽한 백의철불(白衣鐵佛)이 일러주는 대로 절터를 파자 종(鐘)과 운판(雲板)이 나왔다. 그는 종을 관청에 보고하고 보상금을 받아서 1924년 법당을 중창한 뒤 절 이름을 신흥사로 바꾸었다. 1952년에도 중창 불사를 하였다. 1970년에는 4구의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0호)과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形浮屠) 재료, 고려청자 1점 등이 출토되었다. 부도 재료와 고려청자 1점은 현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6년에는 삼성각(三聖閣)과 범종각(梵鐘閣)을 중수하였다.
신흥사는 1980년까지는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 1981년부터는 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에 속하였다가 1998년부터 대한불교해동종(大韓佛敎海東宗)으로 소속을 바꿨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 삼성각(三聖閣), 범종각(梵鐘閣), 용신각(龍神閣), 요사채인 해운당(海雲堂) 등이 있다. 신흥사 문화재로는 4구의 고려시대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0호)이 있다.
신흥사로 오르는 길
신흥사 범종각
신흥사 전경
신흥사 전경
주차장에서 신흥사 경내로 오르는 길도 상당히 가팔랐다. 붉게 물든 단풍이 떠나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신흥사는 장병산 중턱의 절벽처럼 가파르고 좁은 터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좁은 마당을 넓히기 위해 산비탈에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철판을 깐 다음 쇠난간을 설치했다. 가파르고 높은 곳이라 전망은 매우 뛰어났다.
신흥사 대웅보전
신흥사 대웅보전 편액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24년 세워진 건물이라는데 기와가 새것이고, 단청도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다시 지은 듯했다.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작품이다.
신흥사 대웅보전 석가모니삼존불
법당 안 중앙에는 석가모니삼존불(釋迦牟尼三尊佛)과 그 뒤에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덕의 상징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연꽃을 들고 협시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본존불을 아미타불(阿彌陀佛)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미타불이라면 항마촉지인이 아니라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어야 한다.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볼 때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 확실하다.
신흥사 대웅보전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
삼존불 향우측(向右側)에는 역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석조 16나한상(羅漢像)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불 앞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는 어린 고타마싯다르타(瞿曇悉達多, Gotama Siddhrtha) 태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16나한상 중 옛 절터에서 출토된 4구의 채색 나한상을 일명 충주신흥사석조나한상군(忠州新興寺石造羅漢像群,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0호)이라고 한다. 재질은 대리석이고, 높이는 51cm이다. 이들 나한상들을 통해서 신흥사는 16나한을 봉안하는 나한도량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는 토제불상(土製佛像) 1구와 석조나한상 6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토제불상은 훼손이 심하여 땅에 묻었고, 북쪽 바위벽에 있던 목이 결실된 2구의 석조나한상은 도난당했다고 한다. 나머지 나한상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석고상들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한상들은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나한상들과는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쓴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이다. 얼굴의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목의 삼도(三道), 옷 주름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손 모양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한 것,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무릎에 놓은 것 등 여러 가지 모습이다. 근래에 채색을 하여 본래의 색상은 알 수 없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불상 양식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신흥사 대웅보전 지장보살좌상
신흥사 대웅보전 해운당 대종사 진영
대웅보전 서쪽 벽에는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과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황금색으로 채색한 해운당대종사의 진영이 걸려 있다.
신흥사 대웅보전 관음탱화
신흥사 대웅보전 신중탱화
대웅보전 동쪽 벽에는 천수관음보살탱화(千手觀音菩薩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모셔져 있다. 천수관음보살은 27개의 얼굴, 천 개의 손과 눈올 가진 것으로 지옥에 있는 중생의 고통을 자비로써 구제해주는 보살이다. 천수천안자재보살(千手千眼自在菩薩), 천안천비관세음(千眼千臂觀世音), 대비관음보살(大悲觀音菩薩)이라고도 한다.
신흥사 삼성각
신흥사 삼성각
심흥사 삼성각 칠성단과 산신단, 독성단
삼성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겹팔작지붕 건물이다. 법당 안 정면 한가운데에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칠성탱화(七星幀畵)가 봉안된 칠성단(七星壇)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 호랑이를 탄 산신상(山神像)과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모신 산신단(山神壇), 동쪽에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봉안한 독성단(獨聖壇)이 있다.
치성광여래는 도교(道敎)에서 유래한 칠성신앙(七星信仰)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그 중 북극성(Polaris, 北極星)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이다.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북두칠성(Great Bear, 北斗七星)은 칠여래(七如來), 해는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달은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로 바꾸어 부른다.
신흥사 범종각
바위 벼랑 위에 세워진 범종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樓閣)으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2층 마루에는 닭다리 모양의 계자다리(鷄子多里)가 난간대(欄干竹)를 지지하도록 만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신흥사 석가모니불입상
신흥사 석가모니불입상
신흥사에서 바라본 천등산
신흥사에서 바라본 천등산과 인등산, 지등산
신흥사에서 바라본 인등산과 지등산, 계명산
신흥사 경내 서쪽 끝 가장 높은 곳에는 시멘트와 석고 혼합재료로 빚은 것으로 보이는 석가모니불입상이 남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불상의 왼손은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불입상이 세워진 곳은 신흥사 최고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엄정면 신만리 일대는 물론 남쪽으로 세고개 너머 산척면 소재지까지 볼 수 있다. 산척면 소재지 뒤로 용천산(龍天山, 293.3m), 그 뒤로 충주의 진산 계명산(鷄鳴山, 774m)이 솟아 있다. 남동쪽으로는 충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천등산(天登山, 807m)과 인등산(人登山, 667m), 지등산(地登山, 535m)으로 이어지는 천등지맥(天登支脈)이 뻗어간다. 천등산과 인등산 사이로 머리만 내민 면위산(免危山, 釜山, 780m)도 보인다. 남서쪽으로는 보련산(寶蓮山, 764m)이 솟아 있다.
내 고향 시골집은 천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 산발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 고향 시골집이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초로는 시골집 마당 어귀에서 어둠을 뚫고 꺼질 듯 말 듯 비치는 불빛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반세기 전의 그 소년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불빛의 근원을 찾아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신흥사 석가모니불입상 마당에 서서 호기심 많았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감회에 젖다.
2015.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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