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 탄생일인 12월 25일 충주시(忠州市) 노은면(老隱面) 수룡리(水龍里) 보련산(寶蓮山, 764m) 기슭에 있는 조덕공(趙德恭, 1547 ~ 1607) 의병장의 묘소를 찾았다. 조덕공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노은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영조 때인 1630년경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낸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이 숲이 우거진 이 곳에 들어와 바깥 세상과의 접촉을 피한 채 노모를 봉양하며 은거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정경연이 살던 곳을 노은고개(老隱峴) 또는 논고개(老峴)라 불렀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면의 이름도 노은현면(老隱峴面) 또는 노은면(老隱面)이 되었다.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대상마을에서 바라본 보련산
조덕공 의병장 묘소 진입로
수룡봉황길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 수룡계곡으로 들어가 조덕공 의병장의 묘소를 찾았다. 하지만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수룡계곡을 찾은 사람들에게 묘소의 위치를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때 수룡계곡 표지석 바로 뒤에서 보련산 기슭으로 난 우마차길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길을 따라 올라갓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바로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조덕공 의병장의 묘소가 있었다.
내가 만약 충주시 문화관광과 주무관이라면 조덕공 의병장 묘소 진입로에 안내판을 하나 더 세웠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처럼 헤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민행정(爲民行政)의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충주시 문화관광과는 안내판 하나라도 충주의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 입장에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덕공 의병장 묘소 전경
조덕공 의병장 묘소
조덕공 의병장 묘소
조덕공 의병장 묘소 안내판
조덕공 의병장 묘소는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산 45번지 보련산 수룡계곡의 순창조씨(淳昌趙氏) 선영에 있다. 중앙의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그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좌측에는 신도비(神道碑), 우측에는 장명등(長明燈), 좌우측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묘소의 아래 우측에는 추모기념비(追慕紀念碑)가 있다.
조덕공의 본관(本貫)은 순창(淳昌)이고, 자(字)는 사원(士愿)이다. 1547년(명종 2)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槐山郡) 송평동(松坪洞)에서 한성좌윤(漢城左尹) 조승(趙勝)의 3남(2남설도 있음)으로 태어나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에 이주하여 살았다.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지용(智勇)을 겸비했던 조덕공은 학문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예(武藝)와 병법(兵法)에도 능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조덕공은 선전관(宣傳官)에 이어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 1584년 부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로 복직되었다가 경기도(京畿道)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갔다.
1592년(선조 25)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街道) 요구를 조선(朝鮮)이 거절하자 20만 대군을 보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켰다. 정발(鄭撥)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宋上賢)이 지키는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왜군(倭軍)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여 음력 4월25일에는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이끄는 팔천여 군사를 전멸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충주에서 합류하여 수도 한양으로 진군하였고,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제3군은 김해에서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였다. 왜군이 파상공세로 북상하자 선조(宣祖)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도주한 조선왕실에 분노한 나머지 한양의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7월21일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피신했다.
조선왕조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하자 조덕공은 종숙(從叔, 숙부설도 있음) 조복(趙福), 조반(趙絆), 아우 조덕검(趙德儉), 조덕수(趙德洙)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충주 남쪽 우목(牛牧,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 들판에서 왜군과 싸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우목에서 왜군과 전투 중 조복이 전사하자 조덕공은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종숙의 시신을 찾아서 돌아와 장사를 지내 주었다.
1605년(선조 38)는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조덕공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권(錄券)되었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왜란이 끝나자 그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에 돌아와 술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 1607년 음력10월 20일 조덕공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조덕공은 순창조씨(淳昌趙氏) 문중에서 배출한 여섯 명의 고려조와 조선조 충신인 조신(趙紳), 조종(趙悰), 조복(趙服), 조반(趙胖), 조덕용(趙德容), 조기(趙圻)와 함께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칠충사(七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201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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