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충주 경종대왕태실을 찾아서

林 山 2015. 11. 20. 19:59

충주시 엄정면 논강리 빌미산(352.2m)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에 좌청룡 우백호(左靑龍右白虎)를 갖춘 안산(案山)이 낮으막하게 솟아 있다. 이름하여 태봉(胎峰)이다. 엄정면 괴동리 태봉에는 조선왕조 제20대 왕 경종대왕태실(景宗大王胎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호)이 있다. 억정사지대지국사탑비(忠州億政寺址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가 있는 괴동리 비석마을에서 북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이다.


예로부터 태(胎)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태를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달랐다. 왕실에 아이가 태어나면 관상감(觀象監)에서는 태를 묻을 길지(吉地)와 길일(吉日)을 정하고,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의 호송과 태실(胎室)의 조성을 담당했다. 태를 호송하는 안태사(安胎使)는 당상관으로 임명하고, 배태관(陪胎官)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다. 전향관(傳香官)과 주시관(奏時官)은 안태사와 배태관을 보좌하였다. 별도로 임명한 감동관(監董官)은 태실 공사 일체를 감독하고, 공사가 끝나면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하여 태실이 길지인지를 확인하도록 했다.


태실 조성이 마무리되면 토지신에게 태를 안장했음을 고하고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을 위로하는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토지신에게 감사하는 사후토제(謝后土祭)를 올렸다. 또 태봉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태실 주변의 벌목이나 채석 등 일체의 훼손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의 범위는 왕 300보(540m), 대군 200보(360m), 왕자와 공주 100보(180m)였다. 관할구역의 수령은 봄, 가을로 태실을 순찰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했으며, 벌목이나 채석 등으로 태실을 훼손하면 국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졌다.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은 태봉(胎峰)으로 가봉(加封)되는데 이를 태봉(胎封)이라고 한다. 태봉으로 봉해지면 여러 가지 석물을 추가하여 태실을 위엄 있게 장식했다. 가봉 후에는 유공자에게 상을 내리고, 태봉이 들어선 고을의 격을 높여 주었다. 


빌미산 태봉


경종대왕태실 하마비


경종대왕태실 전경


경종대왕태실 전경


경종대왕태실


경종대왕태실


경종대왕태실비


경종대왕태실비


원자아기씨태실비


태봉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나 대궐문 앞, 서원이나 향교의 홍살문 앞에 세운 비석으로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지위나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 또는 가마에서 내려야만 했다. 하마비에서 태봉 정상의 경종대왕태실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린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숙종(肅宗)과 희빈장씨(禧嬪張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 그는 세자로 책봉되고, 태실도 이조판서인 안태사(按胎使) 심재(沈榟)의 집례로 같은 해 2월 22일 진시(辰時) 태항아리를 석함에 넣어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태봉에 장태(藏胎)한 뒤 봉토하였다. 


흔히 노론(老論) 시대의 소론(小論) 왕으로 일컬어지는 경종은 1720년 왕위에 올라 재위 4년만인 1724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에 묻혔다. 경종이 죽자 그의 이복동생 영조(英祖)가 왕위를 계승했다. 영조는 1726년 9월 8일 경종의 태실을 웅장하게 정비하고 태실비를 세워 16명의 순호군(巡護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냈다. 


경종태실은 1831년(순조 31)에 주민 김군첨(金君瞻) 등이 태봉직(胎封直)에게 화를 입히려고 석물 일부를 훼손하는 변작사건(作事件)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경차관(敬差官)을 보내 작변(作變) 주범 김군첨을 처벌하고, 공범 11인은 원악도(遠惡島)에 보내 종(奴)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경종태실은 다음해에 보수하였다. 


1928년에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는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태실을 창경원(昌慶苑, 현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때 경종의 태항아리를 꺼내가면서 해체된 석조물들은 엄정면사무소로 옮겨져 방치되었다가 1976년이 되어서야 중원군(현 충주시)에서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태실은 둥근 대석(臺石) 위에 종 모양의 중동석(中童石)을 놓고 그 위에 팔각형 지붕돌을 올린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형식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에는 합각선(合角線)이 뚜렷하게 돌출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보주(寶珠)를 조각하였다. 태실 주위에는 팔각으로 전석(磚石)을 깔고, 여러 모양의 석재들로 가구(架構)한 8각형 석조난간(欄間)을 둘렀다. 


태실 앞에는 1726년(영조 2)에 세운 경종대왕태실비(景宗大王胎室碑), 옆에는 1689년(숙종 15)에 세운 원자아기씨태실비(元子阿只氏胎室碑)가 있다. 경종대왕태실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잘 갖추어져 있다. 


경종은 비운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종은 폐비 장희빈의 소생이라는 점과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에 속한다는 점으로 인해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西人) 세력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강력한 의지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사사(賜死)되고 서인 세력은 실각했다. 


그러나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을 낳자 경종의 비운은 시작되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경종 또한 부왕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치적으로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되면서 숙빈최씨는 노론,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희빈장씨가 폐출되어 사사되고, 숙종으로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경종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경종은 세제(世弟) 연잉군(영조)이 보낸 게장과 감을 먹고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리고, 연잉군이 왕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경종독살설이 나온 배경이다. 소론과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노론이 연잉군과 결탁하여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경종독살설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비운의 왕 경종을 생각하면서 태실을 떠나다.


2015.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