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주말 강원도 홍천의 공작산(孔雀山) 수타사(壽陀寺)가 부르고 있었다. 차를 몰아 홍천강(洪川江) 지류인 덕치천(德峙川 )을 따라가는 수타사길로 접어들었다. 온 산과 들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수타사 입구는 사람과 차들로 몹시 붐볐다. 주차장도 꽉 차서 차를 댈 곳이 없었다.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겨우 한 자리를 구해 간신히 차를 댔다. 수타사가 그렇게도 유명한 절이었던가?
수타사계곡 덕치천
수타사를 감돌아 흐르는 덕치천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공작산 약수봉 능선의 가을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덕치천(일명 둔지천)은 홍천군 서석면 어론리에서 발원하여 동면 노천리, 신봉리를 경유하여 덕치리로 흐른다. 덕치천은 동면 월운리 오음산(五音山, 929.4m)에서 발원하여 개운리, 성수리로 흐르는 성수천과 합류한 뒤 홍천읍 검율리에서 홍천강으로 흘러든다.
수타사 부도전
수타사 부도전
수타사로 들어가는 길옆에 부도전(浮屠田)이 있었다. 부도전에는 청송당대사탑(靑松堂大師塔), 기허당대연대사탑(麒虛堂大演大師塔), 서곡대사부도(瑞谷大師浮屠), 유화당대사묘위지탑(遊華堂大師墓暐之塔), 중봉당탑(中峰堂塔), 홍파대사승왕탑(洪波大師勝王塔), 홍우당부도(紅藕堂浮屠,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5호), 무명부도 등 10기의 부도(浮屠)와 3기의 탑비(塔碑)가 있었다. 그중 1기의 부도는 탑신부(塔身部)와 지붕돌(屋蓋石),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기단부(基壇部)만 남아 있었다.
수타사 홈페이지 부도전을 소개하는 페이지에 기허당의 '기' 한자가 빠져 있어서 손종호 문화해설사에게 물어보았다. 사지(寺誌)에는 '기린 기(麒)', 또 다른 자료에는 '사람인 변(亻)'에 '그 기(其)'가 붙은 글자로 나온다는 대답이었다. '亻+其'는 상용한자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였다. 둘 중 어느 것이 정확한 글자인지에 대해서는 손종호 문화해설사도 확신을 하지 못했다. 나는 사지를 따르기로 했다.
홍우당부도는 북쪽 끝에 세워져 있었다. 높이 2.15m의 홍우당부도는 방형판석(方形板石)을 지대석(地臺石)으로 놓고, 그 위에 6각형의 하대(下臺)와 중대(中臺)를 한돌로 만들었다. 하대는 각 면마다 선으로 무늬를 새기고, 윗면에는 두 겹의 복련(覆蓮)으로 장식했다. 중대는 각 면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새기고, 여섯 모서리에는 마디가 있는 작은 기둥을 새겼다. 상대(上臺) 위에는 납작한 공모양의 탑신석(塔身石)을 놓고, 그 위에 6각형의 지붕돌(屋蓋石)을 얹었다. 상대는 아래와 대칭되는 두툼한 앙련(仰蓮)으로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섯 모서리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고, 각 모서리의 귀퉁이가 위로 솟아 있다. 상륜부는 상륜받침 위로 공 모양의 복발(覆鉢)과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서 장식했다.
롱우당부도는 부도의 구성과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우당은 1611년(광해군 3)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에 입적했다. 그의 다비식 때 네모난 사리와 둥근 은색 사리 두 알이 나와 이를 봉안한 것이 홍우당부도다.
수타사계곡 덕치천
수타사 전경
덕치천에 놓인 수타교와 공작교를 건너면 바로 수타사였다. 수타사 동쪽에는 공작산 서남능선의 약수봉(558.6m)이 병풍처럼 솟아 있었다. 약수봉 기슭의 수타계곡에도 울긋불긋 곱게 차려입은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수타계곡은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에 이르는 약 8km 길이의 계곡이다. 수타계곡은 용담(龍潭) 등 암반과 소(沼)가 많고,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비경(秘境)을 이루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과 동면의 경계에 솟은 공작산은 공작새처럼 산세가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암봉과 노송이 어우러진 공작산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산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답다. 정상 일대의 철쭉이 활짝 피면 지리산의 세석평전을 방불케 한다. 정상 직전의 전망대에서는 궁지기골과 문바위골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정상에서는 홍천군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홍천의 진산(鎭山)인 공작산은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도 선정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 1986)'에는 '골짜기가 깊고 기암절벽으로 된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듯 겹겹이 솟아 있는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하여 공작산이라 한다.'고 수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는 "현의 동쪽 25리에 있는데,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태(胎)를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에는 횡성 태기산(泰其山)에서 이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은 수타사 터가 공작새가 알을 품은 듯한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서 공작포란형은 명당 중의 명당이다. 동쪽은 공작이 나래를 펴고 솟아오르는 '동용공작(東聳孔雀)', 서쪽은 소가 내달리는 '서치우적(西馳牛迹)', 남쪽은 용이 승천하는 '남횡비룡(南橫飛龍)', 북쪽은 용의 형상을 닮은 못이 유유히 넘쳐 흐르는 '북류용담(北流龍潭)'으로 묘사되는 터의 한가운데에 수타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인 수타사는 708년(신라 성덕왕 7)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절이름은 일월사(日月寺)였고, 절터도 이곳이 아닌 우적산(牛跡山) 아래였다. 그런데 원효는 686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창건자나 창건연대 중 한 가지는 와전(訛傳)됐을 가능성이 크다.
1568년(선조 2) 일월사는 우적산에서 공작산 약수봉 아래로 옮겨지고, 절 이름도 수타사(水墮寺)로 바뀌었다. 1636년(인조 14) 공잠(工岑)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폐허가 된 수타사를 중창했다. 1644년 학준(學俊)이 선당(禪堂), 1650년(효종 1) 도전(道佺)이 정문(正門), 1658년 승해(勝海)와 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2호)를 지음으로써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670년(현종 11)에는 정지(正持)와 정상(正尙), 천읍(天揖)이 범종(梵鐘)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1674년에는 법륜(法倫)이 봉황문(鳳凰門)을 세웠으며, 1676년(숙종 2)에 여담(汝湛)이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1호)을 조성하였다. 이후 청련당(靑蓮堂)과 향적전(香積殿), 백련당(白蓮堂), 송월당(送月堂) 등이 차례로 중건되었다.
1811년(순조 11) '水墮(수타)'라는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아미타불의 수명을 상징하는 '壽陀寺(수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1년(고종 15) 윤치(潤治)가 수타사를 중수하고, 1878년(고종 15)에는 동선당(東禪堂, 지금의 심우산방)을 다시 세웠으며, 칠성각(七星閣)도 새로 지었다. 1976년에는 심우산방(尋牛山房)을 중수하였고, 1977년에는 삼성각(三聖閣), 1992년에는 관음전(觀音殿)을 새로 지었다.
수타사 현존 당우(堂宇)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호), 원통보전(圓通寶殿), 삼성각, 흥회루, 심우산방, 백련당(西禪堂), 봉황문, 보장각(寶藏閣),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유물로는 보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제745호)와 고려 후기에 조성된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제11호), 홍우당부도(紅藕堂浮屠,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심우산방 옆에는 몇 년 전에 고사한 수령 5백년의 주목(朱木, 강원도보호수 제166호)이 있었다. 이 주목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1568년 수타사 이전을 관장하던 노승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라난 것이 이 주목인데, 나무에 노승의 얼이 깃들어 있어서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이 절을 지켰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수타사 주목 외에도 유서 깊은 사찰에는 고승의 지팡이 전설이 얽혀 있는 나무들이 많다. 백양사 이팝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송광사 고향수와 쌍향수, 쌍계사 국사암의 느릅나무, 오대산 사자암의 단풍나무, 정암사의 주목도 고승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난 것이라고 전해온다.
수타사 봉황문
수타사 봉황문 소조사천왕상
수타사 봉황문 소조사천왕상
수타사의 천왕문(天王門)인 봉황문(鳳凰門)으로 들어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봉황문 통로 양쪽에는 1676년에 조성한 소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사천왕의 좌우에는 천(天), 용(龍),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婆),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 睺 羅伽) 등 천룡팔부(天龍八部)가 시립하고 서 있었다.
봉황문의 오른쪽에는 검을 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왼손으로는 용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여의보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왼쪽에는 긴 당(幢)을 잡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짝을 이루어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평상복 위에 중국식 갑옷을 걸친 용맹스런 무장(武將)의 형상을 한 사천왕상들은 악다문 입과 부릅뜬 눈, 곤두선 이마, 분노에 찬 표정으로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황문을 지키고 있었다. 불법을 수호하는 믿음직한 외호신장(外護神將)들다왔다.
소조사천왕상은 나무로 심을 만든 다음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빚은 후 채색을 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사천왕상은 전체적으로 박락(剝落)이 심하고, 채색도 역시 심하게 퇴색되었다.
수타사사적기(壽陀寺寺蹟記)에 '1674년(현종 15) 법륜(法倫)이 봉황문을 건립하였고, 2년 뒤 여담(汝湛)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봉황문과 사천왕상의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1957년 사천왕상을 해체 수리할 때 복장(腹藏)에서 1459년(세조 5) 간행된 '월인석보' 권17과 권18 목판본 2권 1책이 수습된 바 있다.
수타사 흥회루
수타사 흥회루
수타사 편액
흥회루 편액
흥회루 법고
흥회루 목어
흥회루 처마
봉황문 안으로 들어가서 처음 만난 전각은 흥회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지붕의 흥회루는 이름과는 달리 2층 누각이 아닌 단층 건물이었다. 대적광전을 향해 예배를 드리거나 법회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문과 처마, 방풍판 등 여러 곳을 새로 보수한 흔적이 역력했다.
흥회루 정면 처마에는 '壽陀寺(수타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흰색 바탕에 쓴 편액 글씨는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서 원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편액의 낙관을 보니 박현묵(朴賢默)이란 사람이 글씨를 썼다. 건물 안에는 '興懷樓(흥회루)'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낙관이 없어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흥회루 안 한쪽에는 법고(法鼓)가 보관되어 있었다. 법고대가 다소 특이했는데, 아마도 수미산(須彌山)을 형상화한 듯했다. 4개의 단을 설치한 위에 활짝 핀 연꽃을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팔각형의 보주를 놓았다. 보주 위에는 연밥을 얹고, 다시 4개의 단을 만든 다음 십자형의 대를 만들어 그 위에 법고을 올려놓았다. 법고의 나무로 이루어진 부분에는 독특한 용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법고의 소리는 수미산 꼭대기에서 울려퍼져 세상을 일깨우는 법음(法音)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흥회루 천장의 들보에는 목어(木魚)가 걸려 있었다. 상어를 연상케 하는 목어의 입은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 수타사 동종(銅鐘)도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범종각을 새로 짓고 그곳으로 옮겼다.
흥회루 뒤편 처마 한쪽에는 목판에 쓴 수타사 약사(略史)가 붙어 있었다. 단기 4293년(1960)에 쓴 수타사 약사는 홈페이지의 내용과 차이가 있었다. 절을 옮기고 '水墮寺(수타사)'로 개명한 시기를 수타사 홈페이지는 1568년(선조 2), 수타사 약사는 1457년(세조 2)이라고 했다. 현재의 절 이름인 '壽陀寺(수타사)'로 개명한 시기를 수타사 홈페이지는 1811년(순조 11), 수타사 약사는 1878년(광무 15)이라고 했다. 광무(光武) 연호는 1897년부터 썼으니, 1878년(고종 15)에 광무 연호를 사용한 것은 착오다.
수타사 대적광전과 원통보전
수타사 대적광전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좌상과 영산회상도
대적광전 불단 위의 닫집
대적광전 신중단 신중탱화
대적광전 귀공포
수타사의 본전(本殿)인 대적광전은 수타사 중정(中庭)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존으로 모신 법당으로 대광명전(大明光殿)이라고도 한다.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집인 대적광전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부재(部材) 간의 비례가 잘 맞고, 단정하고 짜임새 있게 지어진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전(佛殿)이다. 지붕의 용마루 한가운데에는 특이하게도 청기와 두 장을 얹어놓았다. 청기와 두 장은 이 뭣꼬? 수타사가 대가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일까? 정면 지붕의 40개 수막새 기와 중 24개의 수막새 기와 위에는 백자 연꽃 봉오리가 놓여 있었다. 수막새 기와 40개 중 24개 위에만 백자 연꽃 봉오리를 올려놓은 것은 또 이 뭣꼬?
건축 방식은 높은 장대석(長臺石)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창방(昌枋)을 놓은 다음 기둥머리(柱頭)를 짜맞추었다. 정면의 기둥머리 사이의 주간포작(柱間包作)은 중앙에 두 개, 양옆에 하나씩 배치하였다. 공포(栱包)는 내2출목(內二出目), 외1출목(外一出目)으로 쇠서받침(牛舌)은 앙서(仰舌)인데, 특이하게도 내출목 도리가 없다. 내부 살미(山彌) 중 일부는 초새김((草刻)이 되어 있다. 문은 중앙칸에 4분합문(四分閤門)의 띠살문을 달고, 양 옆 칸에는 2짝 분합인 빗살문을 달았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불단에 금강계(金剛界) 대일여래(大日如來)인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걸려 있었다. 비로자나불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상징하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나타내는 수인이다. 영산회상도는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석가모니(釋迦牟尼)와 그 권속들을 그린 불화로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나 영산전(靈山殿)에 봉안된다.
연꽃으로 장식된 불단의 맨 아랫부분에는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는 좌대가 이미 구름 위 높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단은 바로 비로자나불이 수미산(須彌山) 위에 앉아 설법하고 있는 수미단(須彌壇)을 상징한다. 구름 무늬 위에는 복련을 새기고, 복련의 위 3단 19칸으로 나눈 각각의 안상 속에는 연꽃을 그려 넣었다. 특히 가운데 단 좌우 끝에는 봉오리 상태의 연꽃과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했다.
불단 위의 보궁형 닫집(唐家)은 정교하면서도 장엄화려했다. 닫집의 처마에는 '寂滅宮(적멸궁)'이라고 쓴 작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적멸궁은 수타사 창건 당시에 올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궁전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적멸궁은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을 말한다. 적멸궁은 번뇌가 사라지고, 생멸(生滅)이 함께 없어져 무위적정(無爲寂靜)하며, 열반(涅槃)의 열락(悅樂)이 있는 궁전을 상징한다.
향나무로 만든 닫집은 황룡(黃龍)과 연꽃, 풍령(風鈴), 극락조(極樂鳥, 迦陵頻伽), 악기(樂器)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닫집 한가운데서 여의주를 입에 물고 머리를 내민 채 비로자나불을 호위하고 있는 황룡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했다. 닫집의 추녀 끝에는 풍령이 4개 달려 있고, 연꽃은 꽃대까지 표현하여 마치 생화처럼 느껴졌다. 닫집의 좌우에서 극락조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면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정말 아름다왔다.
몇 해 전 적멸궁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출토된 바 있다. 진신사리는 1636년(인조 14) 대적광전을 중건할 때 봉안된 것으로 지금은 수타사 원통보전에서 소장하고 있다.
닫집 옆에 있는 대들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6개의 풍령이 달려 있었다. 6개의 풍령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바라밀(波羅蜜) 등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이 풍령들은 수타사에 큰 불공이나 재가 있을 때 실제로 사용했던 것인데, 지금도 법당 뒤쪽으로 줄이 연결돼 있어 필요에 따라 울릴 수 있다고 한다.
대적광전 신중단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었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을 묘사한 불화로 법당의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신중탱화에 나오는 많은 호법신들은 우리나라의 민족신(民族神)들이 많다.
대적광전 계단 바로 옆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석조 청수대(淸水臺)가 있었다. 높이 2.4m의 이 석주(石柱)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을 올리고, 하대석 상부에는 복련(覆蓮)을 새겼다. 하대석 위에는 6각의 긴 간주석(竿柱石)을 세웠는데, 4각의 간주석 상부에는 무슨 모양인지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간주석의 끝에는 앙련(仰蓮)을 새긴 발우(鉢盂) 형상을 올려놓았다. 청수대는 부처에게 공양하는 청정수를 올려놓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타사 원통보전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좌상과 후불탱화
원통보전 영단의 감로탱화
원통보전 신중단의 신중탱화
원통보전에 봉안된 석가모니 진신사리
원통보전(圓通寶殿)은 대적광전 바로 옆에 있었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그 사찰의 본전일 때 붙이는 이름이고, 사찰 내의 일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원통보전은 대적광전과 더불어 수타사의 중심 법당임을 알 수 있다.
1992년에 새로 지은 원통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은 날아갈 듯한 치미(鴟尾)로 장식하여 멋과 위용을 더했다. 단청도 선명하고 장엄화려했다. 대적광전보다도 오히려 원통보전이 수타사 주불전으로 보였다. 관음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주는 보살이라서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보살이 되었을 것이다.
원통보전 안 불단의 연화대좌 위에는 작은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전각의 규모에 비해 아주 작은 크기의 불상이었다. 하지만 그 작음 속에 무한의 미학이 함축되어 있었다. 관세음보살좌상 뒤에는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한 후불탱화가 걸려 있었다. 관세음보살좌상의 좌우 불단에는 천개의 작은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목조십일면관음보살상(木造十一面觀音菩薩像)이 봉안되어 있었다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다.
원통보전 영단(靈檀)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가 걸려 있었다. 감로탱화는 망자(亡者)의 영혼(靈魂)을 천도(薦度)하는 불교의식용 불화로 주로 명부전이나 대웅전에 설치한 영단(靈檀)에 봉안한다.
감로탱화는 도설의 내용상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의 세계, 중단은 재단과 재의식 장면, 하단은 아귀 등 육도 중생과 죄업을 짓는 망자의 생전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감로탱화는 각 단계마다 설정된 주제가 있다. 즉, 과거(하단)에서 현재(중단), 현재에서 미래(상단)로 상승하는 삼세 여행이 도설로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화는 지옥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재의식(齋儀式)을 행하면 그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감로탱화는 수륙재(水陸齋)나 우란분재(盂蘭盆齋) 같은 천도재(薦度齋)에 쓰이는 불화로 아귀에게 감로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도(甘露圖) 또는 감로왕도(甘露王圖)라고도 한다. 정토신앙과 밀교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는 감로탱화는 특히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감로(甘露)는 천신(天神)들이 마시는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인데, 부처의 은덕을 뜻하기도 한다. 감로는 아귀의 목구멍을 열어주어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아귀는 또한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죽은 조상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아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해원(解寃)해야 할 모든 고혼을 상징하며, 육도 중생의 고통을 한몸에 짊어진 존재이다. 그래서, 감로탱화를 고혼탱화(孤魂幀畵)라고도 한다.
신중단에는 신중탱화가 걸려 있었다. 신중탱화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을 중심으로 용맹한 신장들이 칼이나 창 등 무기를 들고 있는데다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느낌이 강렬했다.
주불단 바로 옆에는 대적광전 적멸궁에서 나왔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와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복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3과가 전시되어 있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찰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가 수행이나 도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법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자들이 다비가 끝나고 유골을 수습할 때 식 미리 만든 사리를 몰래 넣기도 한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은 적도 있다. 사리를 가지고 혹세무민해서는 안된다.
수타사 삼성각
삼성각 칠성단 칠성탱화
삼성각 산신단 산신탱화
삼성각 독성단 독성탱화
삼성각(三聖閣)은 대적광전과 원통보전 사이 뒤편에 있었다. 1977년에 새로 지은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었다.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는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상단 한가운데의 칠성단에는 189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七星幀畵), 그 좌우로는 1900년에 조성한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가 봉안되어 있었다.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중단과 상단에는 칠불(七佛),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하였다.
칠원성군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것으로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 등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 별을 자미대제(紫微大帝)로 신격화했다. 옛날에는 북극성이 모든 천체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이 별에서 신령스런 빛이 나온다고 해서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한다. 치성광여래를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일광보살)은 해,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 월광보살)은 달을 각각 신격화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월성수(日月星宿)를 권속으로 삼아 털구멍에서 치성광을 내뿜어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주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이는 약사불과 그 역할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치성광여래를 많이 믿었다.
칠성탱화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 것이다. 칠원성군의 중앙에 자미대제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칠원성군은 보통 도사상으로 그려진다.
칠성신만 봉안한 전각을 칠성각(七星閣) 또는 북두각(北斗閣)이라고 한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이다. 칠성각은 초기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칠성각에는 삼존불과 칠여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된다.
산신탱화는 특이하게도 시봉자가 두 명의 동녀(童女)이고, 산신의 손톱이 길게 표현되어 있어서 호랑이의 발톱을 연상케 했다. 호랑이도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무섭다기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칠성과 마찬가지로 산신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다. 도교(道敎)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신도를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산신도는 일반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과 호랑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맹수인 호랑이를 용감하고 위엄있게 그리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 때로는 백발수염의 신선 옆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우스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산신도의 호상도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입 종교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존의 토착신앙과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서 신앙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는 국가적으로 배불정책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 불교는 살아남아 세계 3대 종교가 되었고, 오랜 기간 한반도의 주류 신앙이었던 칠성과 산신은 불교 사찰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력은 불교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독성단의 독성탱화에는 벗겨진 머리에 백발 머리털과 흰 눈썹, 흰 수염이 덥수룩한 독성이 절벽을 배경으로 앉아 왼손에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있다. 하늘에는 서운(瑞雲)이 떠 있고, 향로에서는 향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향로 위에는 극락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시자는 보이지 않는다.
독성존자를 묘사한 독성탱화를 불교에서는 독수성탱(獨修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하며, 보통 16나한도(十六羅漢圖)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린다. 독성탱화에는 보통 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에 길고 흰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종종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독수선정(獨修禪定)으로 진리를 깨달아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다. 그래서 독성을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한다. 독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독성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가 독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반존자는 옛날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무상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독성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가 부처 없는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도래할 때까지 현세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역할을 맡은 존재라고 믿는다.
독성을 환웅(桓雄)이나 단군(壇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민족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각각 칠성각과 산신각에 안치하는 것처럼 독성각에 모신 독성은 민족신앙의 대상이었던 단군이라는 것이다. 독성이 단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나반존자는 우리나라 민족신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교와 민족신앙의 결합으로 독특한 독성신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핍박받던 말법의 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법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나반존자는 불자들 사이에 매우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삼성신앙은 민족신앙에서 재물과 수명, 복을 각각 관장하는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習合)으로 생겨난 것이다. 어떤 사찰에서는 삼성각에 고려말의 고승인 지공(指空). 도옹(逃翁), 무학(無學)과 칠성. 독성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삼성각에 독성과 산신, 용왕(龍王)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심우산방
목책으로 다른 전각들과 격리된 심우산방(尋牛山房)은 수타사 주지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단층 건물의 처마에는 '尋牛山房(심우산방)'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 글씨는 탄허(呑虛)의 친필이다.
수타사 범종각
범종각 범종
범종각(梵鐘閣)에는 2000년 2월 15일 보물 제11-3호로 지정된 동종(銅鐘)이 걸려 있었다. 조선 현종~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의 뛰어난 주종장(鑄鍾匠) 사인(思印) 비구가 1670년(현종 11)에 만든 높이 110cm의 수타사 범종은 조선 중기의 종으로는 대작에 속한다. 문경의 김룡사 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사인 비구의 완숙미와 독창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작 기법은 특이하게도 범종을 거는 고리인 종뉴(鍾鈕)를 따로 만들어 몸체와 연결하고 음통(音筒)을 붙였다. 종두(中)와 연결된 종신(鐘身) 상부인 상대(上帶) 바로 아래에는 정사각형 유곽(乳廓) 4개가 있고, 각각의 유곽에는 9개의 돌기(乳頭)를 새겼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범종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법이다. 종신의 하부인 하대(下帶)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종을 치는 당목(撞木)이 닿는 부분인 당좌(撞座)는 현란한 꽃무늬로 장식되었다. 당좌의 연꽃잎 수는 8엽이며, 원 밖의 장식은 잎사귀 3개가 결합되어 마치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종의 몸통 윗부분에는 인도의 옛 글자인 범자(梵字)를 새겼다. 범자 아래에는 구름 위에 서서 양손으로 긴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입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종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종을 만든 내력과 시기, 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각각 네모난 틀 안에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범종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다. 사인 비구가 제작한 8개의 종 가운데 수타사 범종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 제작 방법도 독특하여 조선시대 중기의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수타사 보장각
수타사 보장각(寶藏閣)은 2005년 개관한 성보박물관이다. 보장각에는 월인석보 권17~18 (月印釋譜 卷 十七~十八, 보물 제 745-5호)과 영산회상도(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2호),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3호), 관세음보살상, 사리함 등 각종 문화재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수타사 보장각 소장 월인석보(출처 문화재청)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5) 조선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 후의 세조) 등이 석가모니의 가계와 그 일대기를 편역한 책인 '석보상절(釋譜詳節, 1447)'과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노래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9)'을 합하여 편찬한 책이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수양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서적을 참고하고, 한글로 번역하여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두 구절마다 찬가를 지었는데,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 권17~18은 2권 1책으로 세조 때 처음 간행된 초간본이다. 수타사 인왕문(仁王門)에 있는 사천왕상의 복장(腹藏)에서 발견되었다. 권 17은 전부가 완전하고, 권 18은 제87장 하부가 없어졌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권 17은 '월인천강지곡'의 제311장~제317장, 권 18은 제318장~제324장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수타사 보장각 소장 영산회상도(출처 문화재청)
수타사 보장각 소장 영산회상도는 원래 대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의 후불탱화로 걸려 있던 것이다. 세로 278㎝, 가로 263㎝의 크기의 영산회상도는 비단 바탕에 채색한 그림인데,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불화이다. 화면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10대보살상(十大菩薩)과 교화성중(敎化聖衆), 사천왕상 등을 배치하였다.
석가모니불은 두 겹의 흰 연꽃으로 장식한 연화대좌에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여러 가지 무늬로 화려하게 꾸민 붉은색 불의(佛衣)를 입고 있다. 불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하여 비교적 원만한 인상이다. 작은 코와 입에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 정수리의 육계(肉髻)는 높고 뾰족하며, 그 위에는 정상 주(珠)와 중심 주가 장식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소라 모양처럼 구불구불한 나발(螺髮)로 표현하였다. 광배(光背)는 연꽃 봉오리 모양 또는 보주형(寶珠形)의 거신광(擧身光)으로 크게 나타냈다.
그림의 하단 석가모니불의 무릎 왼쪽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 오른쪽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각각 흰 연꽃과 여의(如意)를 들고 서 있고, 그 위로 둥근 두광(頭光)을 지닌 8보살이 좌우에 4구(軀)씩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중단 석가모니불의 어깨 좌우에는 늙은 비구 모습의 가섭(迦葉)과 청년 모습의 아난(阿難)이 서 있다. 그림의 하단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는데, 갑옷의 금색 부분을 오돌토돌 입체감 나게 표현하였다.
수타사 영산회상도는 구성과 표현 기법 등에서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의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다. 화기를 통해 1762년(영조 38) 금어(金魚) 진찰(震刹) 등이 수타사 영산회상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수타사 보장각 소장 지장시왕도(출처 문화재청)
수타사 보장각 소장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로 세로 186㎝, 가로 205㎝의 크기이다. 하단 중앙의 화기(畵記)에는 1776년(영조 52)에 설훈(雪訓) 비구 등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수타사 지장시왕도는 조선 후기의 시왕도 중에서도 권속(眷屬)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들의 정연한 배치를 위해 붉은색 구름으로 화면을 위와 아래로 나누었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사자머리가 장식된 높은 대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고, 그 좌우에 70존(尊)에 이르는 각종 상(像)들을 대칭으로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지장보살은 깎은 머리에 흑갑사(黑甲紗)로 만든 투명한 두건을 쓰고, 손에는 기다란 석장(錫杖)과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불의는 양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이고, 몸에는 귀고리와 팔찌 등의 장신구로 치장하였다. 광배는 녹색으로 두광과 신광(身光)을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지장보살의 무릎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있고, 그 양쪽에 관을 쓰고 홀(笏)을 든 명부시왕(冥府十王)이 각 5구씩 배치되어 있다. 그 위 좌우에는 십대보살이 5구씩, 사천왕상이 2구씩 있다.
구름 하단에는 상단보다 작게 그린 권속들을 배치하였다. 하단의 가장 밑단에는 옥졸(獄卒), 그 위 2단과 3, 4단에는 판관(判官), 사자(使者), 동자(童子), 천녀(天女) 등이 배열되어 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앞쪽의 인물은 작게, 그 위쪽에 위치한 십대보살, 사천왕, 도명존자, 무독귀왕, 명부시왕은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위로 갈수록 인물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지장보살에 모아지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수타사 백련당
수타사 공양간
수타사 백련당은 현재 종무소(宗務所)와 요사(寮舍)로 사용되고 있다. 종무소는 절의 사무를 보는 곳이고, 요사는 잠자고 쉬는 등 승려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이다. 백련당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은 수타사 승려나 신도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공양간(供養間)이다. 쉽게 말하면 사찰의 부엌과 식당이다. 하지만 사찰의 공양간은 수행자의 식생활을 뒷받침해주는 공간인 동시에 수행공간이기도 하다.
수타사 옥수암
옥수암 편액
덕치천을 건너 수타사 북쪽의 옥수암골로 향했다. 옥수암골을 300m쯤 걸어 올라가지 않아 수타사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옥수암(玉水菴)이 나타났다. 옥수암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무단청(無丹靑)의 소박한 건물이었다. 처마에는 흰색 바탕에 쪽빛 물감으로 쓴 '玉水菴(옥수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낙관은 '支山(지산)', '金興洙(김흥수)'인 듯한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옥수암은 인기척도 없고 고요하기만 했다. 정적만이 감도는 암자 주위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나는 누구인가? 또 어디서 왔는가?'를 굴려 보았다.
수타사 삼층석탑
수타사 삼층석탑
옥수암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1.15m의 수타사 심층석탑이 있었다. 돌로 쌓은 담장 안에 세워진 이 석탑은 아쉽게도 2, 3층 몸돌과 상륜부가 사라지고 없었다. 1층 지붕돌 위에는 2, 3층 지붕돌만 얹혀 있었다.
수타사 삼층석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이고, 지대석과 면석(面石)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갑석(甲石)은 바깥쪽으로 경사졌고, 2단의 층단을 새긴 상면이 있어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다. 1층 몸돌은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얕게 새겼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뾰족하게 키켜 올라갔다. 지붕돌 1, 2층은 3단, 3층은 2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3층 지붕돌 윗면에는 상륜부를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석탑은 제작 수법이나 형태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타사 연지
연지 수문에 핀 꽃
수타사 앞에는 넓은 연지(蓮池)가 있었다. 7~8월에는 연지를 뒤덮은 연꽃이 장관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지 뒤로 생태숲 산책길이 나 있고, 이 산책길은 약수봉, 공작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수타사계곡의 용담
공작산 약수봉
공작교에서 수타사계곡을 따라 300m쯤 걸어 올라가자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용담(龍潭)이 나타났다. 용담 바로 위에는 작은 자연호수도 있었다. 호숫가에는 유난히 단풍이 바알갛게 물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단풍나무 뒤로 약수봉이 용담을 굽어보고 있었다. 덕치천 명경지수에는 수타사계곡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폭의 진경산수화처럼 잠겨 있었다.
어느덧 서산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수타사계곡에 깊어가는 가을을 남겨두고 귀로에 오르다.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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