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금강산 화암사를 찾아서

林 山 2015. 10. 24. 14:10

동해 해돋이와 울산바위 조망 명소 설악산(雪嶽山) 상봉(上峰, 1241m) 능선의 성인대(聖人臺, 또는 石人臺, 현지인들은 神仙臺라고 부름, 645m)를 오르던 날 화암사(禾巖寺)를 찾았다. 화암사는 백두대간(白頭大幹) 설악산 북주능선(北主稜線) 상봉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성인대능선과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사이의 화암사골에 있다. 


백두대간 상봉


상봉은 백두대간 미시령(彌矢嶺, 826m) 북쪽에 있으며, 상봉에서 북쪽으로 약 1.2㎞의 거리에 신선봉(神仙峰, 1,204m)이 솟아 있다. 상봉 정상에는 돌탑이 세워져 있다. 상봉과 신선봉 사이에는 화암재가 있다. 화암재는 서쪽의 인제군 북면 용대리 소간령(小間嶺, 작은새이령, 585m), 마장터와 동쪽의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2003년 8월 설악산국립공원으로 편입된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멸종위기 1급인 산양과 2급인 삵의 서식지로서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봉 남동쪽 능선의 성인재와 성인대


금강산 화암사


상봉 남동능선인 성인대능선은 성인재(643m)에서 다시 두 줄기의 지능선으로 갈라진다. 두 지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이 수바위골이다. 수바위골 북쪽 지능선에는 수바위(穗岩, 또는 秀岩), 남쪽 지능선에는 3단 암릉으로 이루어진 성인대가 있다. 수암은 볏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화암(禾岩)이라고 불렸고, 화암사(禾巖寺)라는 절이름도 이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바위에는 욕심 많은 객승에 얽힌 전설이 하나 전한다. 옛날 화암사에는 승려 두 명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수행을 하면서 탁발을 하러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겨울이 닥치면 끼니가 걱정이었다. 수바위에서 수행을 하면서 민가로 탁발을 하러 다니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수행승의 꿈에 백발도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 끼니 때마다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쌀이 나올 것이다'라고 계시했다. 이튿날 두 수행승은 꿈을 생각하면서 수바위로 달려가 백발도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정말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 이후 수행승들은 끼니 걱정 없이 불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객승(客僧)이 수바위를 찾아와 ‘3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오니 6번 흔들면 4인분의 쌀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지팡이를 구멍에 넣고 6번 흔들었다. 객승의 욕심에 산신이 노하여 바위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수바위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볏짚으로 위장한 화암사 수바위를 본 왜군들은 군량미를 쌓아둔 것으로 착각해 군사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이곳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수바위 꼭대기에는 깊이 1m, 둘레 5m의 샘이 있다. 이 샘이 마르면 이 고장에 가뭄이 든다고 하여 당시 부사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화암사 일주문


화암사골 초입에 화암사 일주문이 세워져 있었다. 일주문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고, 진(眞)과 속(俗)도 하나이며, 만법이 일심(一心)의 소현(所顯)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일주문에는 '金剛山禾巖寺(금강산화암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 글씨는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1999)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합천 해인사(海印寺) '해탈문(解脫門)'을 비롯해서 진주 촉석루(矗石樓) '남장대(南將臺)'와 '서장대(西將臺)', '진남루(鎭南樓)', 비봉산(飛鳳山) '비봉루(飛鳳樓)', 문경 묘적암(妙寂庵) '일묵여뢰(一默如雷)' 등이 있다. 


일주문의 처마를 바라보다가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의 휨 현상을 발견했다. 휨 현상 뿐만 아니라 잔 갈라짐 현상도 많이 보였다. 휨과 잔 갈라짐 현상을 계속 방치하면 창방과 평방이 부러지면서 일주문이 무너져내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설악산화암사'라고 하지 않고, 그 이름도 낯선 '금강산화암사'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로부터 미시령 이북은 금강산에 속했기 때문이다. 북설악의 상봉과 신선봉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봉우리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 문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암사 부도전


화암사 부도전


화암사 부도전


일주문 바로 위 길옆에 화암사 부도전(浮屠田)이 있었다. 부도전에는 죽암당(竹岩堂)과 월송당(月松堂) 능허당(凌虛堂), 인봉당(印峯堂), 자운당(慈雲堂), 청암당(淸岩堂), 화월당(華月堂), 원봉당(圓峯堂), 광명당(廣明堂), 영담당(影潭堂), 화곡당(華谷堂) 등의 부도와 춘담당(春潭堂)의 탑비(塔碑) 등 꽤 많은 부도와 탑비가 세워져 있다. 담연당 도명(湛淵堂道明)과 강산당 정휴(剛山堂 正休)의 탑비, 무생당 동환(無生堂東煥)의 탑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부도전에는 그 절의 역사와 흥망성쇠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화암사도 역사가 오래되었고, 많은 선지식들이 이 절에 머물다 열반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에는 사명(寺名)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율사는 이 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 서쪽에 장안사(長安寺),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다. 이 절의 이름을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講)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다. 진표율사는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친견한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 그에게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하늘로 올라갔으며, 69명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었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출가하기 전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온다. 진표율사의 속성은 정씨(井氏)였다. 소년 진표는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다. 어느 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논둑에서 쉬면서 반찬으로 쓰려고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었다. 그리고는 산에 가서 사슴을 쫓다가 다른 길로 집에 돌아와서는 개구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듬해 봄 사냥을 나갔다가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자 문득 지난해 일이 떠올라 소리나는 쪽으로 가보니 과연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었다. 진표는 탄식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고는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숭제(崇濟)에게 출가하였다. 


진표율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온다. 진표율사는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다. 임종이 가까와지자 그는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앉은 채로 입적했다.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그대로 두고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지자 비로소 흙을 덮고 돌을 세워 표시했다.   


941년(고려 태조 24)에는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고, 1401년(조선 태종 1)에는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개명했다. 


화암사 미타암(출처 화암사 홈페이지)


1623년(인조 1) 절이 불에 타자 1625년에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하고,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했다. 1633년(인조 11) 이식(李植)이 간성현감으로 내려와 있으면서 쓴 간성군지(杆城郡誌)인 '수성지(水城誌) 화암사조'에 '천후산(天吼山, 울산바위) 미시파령(彌時坡嶺, 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禾岩寺)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633년 이전에 사명이 화암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635년 산불로 절이 다시 불타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로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절을 불살랐다. 이에 승려들은 동쪽의 무릉도(武陵島)로 떠났다가 1721년(경종 1) 옛터로 돌아와 절을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大雄殿)과 향각(香閣), 승당(僧堂)이 불타자 이듬해에 승당,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각각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道閑)이 약사전(藥師殿)에서 왕실을 위한 불공을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빛이 뻗치더니 한양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正祖)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씨(崔氏)로 하여금 도한을 궁궐로 데려와 그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한 나머지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요사(寮舍) 2동을 지어 주었다. 2년 뒤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六疊書屛), 가마(輦)를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1860년(철종 11) 큰 산불로 본사는 물론 암자까지 타버리자 춘담(春潭)은 왕실의 도움을 받아 본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불화를 조성하여 봉안했다. 1864년(고종 1)에도 절이 산불로 소실되자 수바위 아래로 옮겨 중건한 뒤 바위의 이름을 따서 수암사(穗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불이 자주 나자 화재를 면하기 위해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쪽의 화기(火氣)를 지닌 수바위와 북쪽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그 아래에 절을 지었던 것이다. 이 해 지장탱화(地藏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 현왕탱화(現王幀畵)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872년 수봉은 새 절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樓閣), 요사를 중건했다.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은 철원의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과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을 옮겨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무너진 안양암을 1894년 축성(竺星)이 중수했고, 1909년 영운(影雲)은 안양암에 칠성각(七星閣)을 세웠다.


1912년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하나인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면서 화암사로 개명했다. 1915년 9월 화재로 소실된 화암사를 2년 뒤에 중건하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크게 파손되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건봉사 극락암(極樂庵)에 있던 비구니가 화암사에 와서 머물렀다. 현재의 화암사는 1986년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한 것이다. 1991년에는 신평벌에서 열린 세계잼버리대회에 참가한 천여 명의 불교국가 청소년들이 화암사에서 수계식(受戒式)을 가졌다. 


화암사의 당우(堂宇)로는 대웅전,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설법전(設法殿),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미타암(彌陀庵), 일주문, 요사 등이 있다. 화암사에는 현재 특별한 문화재가 없다. 정조가 하사한 관세음보살상과 6첩서병(六疊書屛), 진표당(眞表堂)을 비롯해서 청허당(淸虛堂), 사명당(泗溟堂), 광명당(廣明堂), 해성당(海城堂), 춘담당(春潭堂), 화성당(華城堂), 화곡당(華谷堂), 풍곡당(豊谷堂), 회광당(晦光堂), 덕봉당(德峯堂), 용화당(龍華堂), 응암당(應庵堂), 계운당(桂雲堂), 연성당(蓮城堂), 월봉당(月峯堂)의 진영(眞影) 16점은 해방 후 사라졌다. 현판과 탱화도 도난당했다. 


수바위와 화암사 갈림길


'杆城郡 金剛山 華嚴寺(간성군 금강산 화엄사)' 암각자(岩刻字)


수바위->성인재와 화암사 갈림길에 있는 큰 바위에는 '杆城郡 金剛山 華嚴寺(간성군 금강산 화엄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간성군을 고성군으로, 군내면을 간성면으로 개칭한 때는 1919년이다. 따라서 1919년 이전에는 이 절의 이름이 화엄사였음을 알 수 있다.    


화암사 전경


화암사골 또는 신선계곡을 흐르는 개울에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 화암사 경내로 들어섰다. 대웅전 뒤로 병풍처럼 솟은 금강산 상봉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포털 사이트 다음과 네이버 지도에는 두 개의 신선봉이 표기되어 있다. 두 포털 사이트의 지도상에서는 사진에서 앞에 바라보이는 왼쪽 봉우리가 상봉, 오른쪽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신선봉 북쪽에 화암재, 화암재 북쪽에 또 다른 신선봉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봉이라고 알려진 봉우리가 두 포털 사이트 지도에는 신선봉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지도에 지명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화암사 설법전


화암사 설법전 '無量壽(무량수)' 편액


너른 마당에는 감로수(甘露水)가 있었다. 감로수 음수대에는 ‘한모금의 청정수로 갈증을 가시옵고 원컨대 위업의 깨달음을 얻으소서’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었다.  


감로수 바로 뒤에는 一자형 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린 설법전(說法殿, 강원도문화재자료 114호)이 있었다. 설법전은 경전 강의를 하거나 참선 수행을 하는 법당으로 현재는 인법당(因法堂)과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설법전 처마에는 '无量壽(무량수)'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낙관을 보니 '勝蓮老人(승련노인)'이 아닌가! 승련노인(勝蓮老人)은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3여 종에 이르는 김정희(金正喜)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저 글씨가 진정 추사의 작품이란 말인가! 추사가 쓴 예산 화암사 '无量壽閣(무량수각, 수덕사 박물관 소장)' 편액의 서체와 유사했다. 그러나, 추사가 고성 화암사의 편액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는 일찌기 들어보지 못했다. 모각(模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인법당 안에는 아담한 크기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과 탱화 3점이 봉안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 등 총 3불을 화암사로 옮겨와 안치했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백담사 극락보전으로 다시 옮겨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되었고, 명호를 알 수 없는 불상은 분실되었다. 현재 인법당의 아미타여래좌상은 훼손이 심한 불상의 수인을 약사여래에서 아미타여래로 개금(改金)하여 봉안한 것이다.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8세기 전반기의 목불상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장명부시왕탱화(地藏冥府十王幀畵)와 칠성탱화(七星幀畵)는 1868년(고종 5)에 조성된 것이다. 백의관음탱화(白衣觀音幀畵)는 아름다운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화암사 범종루


범종루에서 바라본 수바위


대웅전(大雄殿)으로 오르는 돌계단에는 용을 새겨 이 법당이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임을 상징하고 있다. 계단의 끝에 세워진 범종루(梵鐘樓)에는 ‘풍악제일루(楓嶽第一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범종소리는 지옥의 고통을 쉬게 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다고 한다. 또, 중생의 각성을 일깨우는 지혜의 소리라고도 한다. 범종루에서는 수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화암사 대웅전과 명부전, 구층석탑


화암사 구층석탑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 대웅전 편액


석가모니 고행상


마당 한가운데의 구층석탑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 대웅전, 북쪽에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1991년에 세워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의 꽃 문살과 단청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화려하다. '大雄殿(대웅전)' 편액도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의 글씨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지혜의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삼존불의 배치는 법화경에 의한 것이다. 삼존불 위의 보궁형(寶宮形) 닫집에는 구름 속을 노니는 두 마리의 용과 극락조(極樂鳥) 등이 조각되어 있다.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過去佛)인 연등불(燃燈佛)이 부처가 되기 전의 이름이다. 과거세에서 선혜보살(善慧菩薩)로 수행 중이던 석가모니는 연등불에게서 '다음 세상에서 여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현재불(現在佛)이 되었고, 석가모니불은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미륵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내렸다. 서로 수기를 주고받은 세 불보살을 모신 것을 삼세불(三世佛) 또는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라고 한다. 


구층석탑도 최근에 쌓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화암사 터는 기운이 매우 센 곳이라 예로부터 많은 화재가 발생하였다. 구층석탑은 화암사 터의 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비보탑(裨補塔)으로 세운 것이다. 


구층석탑 동쪽에 있는 전각은 명부전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 오른쪽에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있고, 명부 시왕(十王)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시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판관(判官)과 기록 및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錄事), 수명이 다한 사람을 잡아간다는 저승사자, 지옥의 옥졸(獄卒)인 우두나찰(牛頭羅刹)과 마두나찰(馬頭羅刹)이 있다. 


대웅전 북쪽 산기슭 고목 아래에는 석가모니 고행상이 있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할 당시 고행은 인도에서 가장 일반적인 수행 방법이었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육신이 장애가 되어 욕망을 끊을 수 없으며, 육체에 극단적인 고통을 주어 죽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만 비로소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6년 동안 고행을 했지만 이 수행법이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고타마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서 7주야간 명상을 한 끝에 깨달음에 이른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 고행으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뼈만 남은 얼굴 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고행상이다.따라서, 고행상에는 부처의 상징인 32상을 찾아볼 수 없다.


화암사 삼성각


칠성단


독성단


산신단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건물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삼성각은 불교가 들어와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의 칠성(七星)과 독성(獨星), 산신(山神)을 수용하면서 세워진 전각이다. 이들 세 신은 불교의 주류가 아니기에 삼성각은 대부분 사찰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다. 


삼성각 안 정면에는 중앙의 칠성탱화(七星幀畵)를 중심으로 왼쪽에 산신탱화(山神幀畵), 오른쪽에 독성탱화(獨聖幀畵)가 그려져 있다. 독성탱은 1981년, 칠성탱과 산신탱은 1982년에 조성된 것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불가에서는 독성을 나반존자(那畔尊者)로 본다. 그러나, 나반존자가 한민족 고유의 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민속학자들은 단군(檀君) 독성설을 제기하고 있다.  


삼성각 안 좌우측 벽에는 금강산 천선대(天仙臺), 상팔담(上八潭), 세존봉(世尊峰), 삼선대(三仙臺)의 절경이 그려져 있다. 화암사가 금강산 1만2천봉 8만9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 봉인 신선봉 아래의 첫 번째 암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뜻으로 그린 것이리라.    


화암사 영은암


삼성각 서쪽 산기슭에는 ㄱ자 건물인 영은암(靈隱庵)이 자리잡고 있다. 영은암은 현재 화암사 조실(朝室)이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영은암 뒤쪽 능선을 타고 오르면 설악산 북주능선의 상봉에 이르게 된다.


화암사 미륵대불입상


화암사 미륵대불입상


동해를 향해 서 있는 화암사 미륵대불입상


화암사 미륵대불입상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 


화암사 미륵대불입상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


화암사 미륵대불입상에서 바라본 수바위


설법전 뒤로 난 산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낮으막한 봉우리에 미륵대불입상(彌勒大佛立像)이 세워져 있다. 이 불상은 2014년 10월 25일에 점안식을 올렸다. 웅장하기보다는 아담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륵대불입상의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중생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미륵대불입상 외호벽 위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 아홉 마리를 조각했다. 아홉 마리의 용은 미륵불의 탄생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외호벽 전면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부조해 놓았다. 금강역사는 불탑 또는 사찰의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외호선신(外護善神) 가운데 하나이다.


화암사에 미륵대불을 조성한 것은 이 절이 1400여년 전 진표율사가 미륵신앙을 선양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창건한 다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미륵봉 동편에 발연사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어 가뭄으로 발생한 기민(飢民)들을 구제하였다. 진표율사는 당시 화암사를 발연사와 함께 미륵도량으로 창건했다. 지난해 미륵대불을 건립하면서 화암사는 용화도량의 맥을 다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륵불입상에서는 동해와 고성군 토성면 일대는 물론 속초까지도 시원하게 바라보인다. 뒤로는 설악산 북주능선의 신선봉과 상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동쪽으로는 수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수바위 뒤로는 울산바위와 달마봉도 보인다. 


화암사 앞 신선계곡의 실폭포


화암사 앞 신선계곡 옥문바위의 와폭


화암사 앞 신선계곡의 단풍



영은암 앞 화암사골 신선계곡에는 여성의 성기를 닮아 옥문바위라고 불리는 널찍하고 커다란 반석이 있었다. 와폭으로 떨어지는 계곡물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신선계곡의 단풍이 붉게 불타고 있었다. 화암사골 신선계곡에는 가을이 한창 깊어가고 있었다. 


201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