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을 온통 붉게 물들였을 단풍을 보러 길을 나섰다.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내설악광장 휴게소에 들렀다. 된장찌개 백반을 주문해서 먹는데, 내가 끓여도 이것보다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식당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관광객들을 뜨내기 손님으로 취급하는 식당일수록 음식도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다.
미시령(彌矢嶺) 옛길을 넘어서 외설악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민간자본으로 건설된 유료 미시령터널을 통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민자 유료 고속도로나 터널은 분명 특혜사업이다. 국민들이 낸 피같은 세금은 어디다가 쓰고, 국가 기간망 건설에 민간자본을 끌어다가 특혜까지 주는가 말이다. 국민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로 인해 이중으로 세금을 뜯기고 있는 셈이다.
미시령 정상 표지석
미시령에서 바라본 장암계곡
미시령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의 상봉
백두대간 미시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상봉
미시령에서 바라본 미시령계곡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장암계곡 산기슭에는 가을물빛이 물씬했다. 북천(北川)이 흐르는 장암계곡을 구비구비 돌아가는 미시령 옛길은 차량들로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대부분의 차량들은 민자 유료 미시령터널을 이용하기 때문에 미시령 옛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해발고도 826m의 미시령 정상에 올라섰다. 미시령 정상에는 독재자 이승만이 글씨를 썼다는 '彌矢嶺(미시령)'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죽어서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의 북쪽 상봉(上峰, 1,244m)과 남쪽 황철봉(黃鐵峰, 1,381m) 사이의 안부에 있는 미시령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를 잇는 고개다. 조선시대에는 미시령을 미시파령(彌時坡嶺)이라고 했다. 미시령은 예로부터 대관령, 한계령, 진부령, 대간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고려 때 미시령을넘는 길이 있었으나 너무 험준하여 폐지했다가 1493년(성종 24) 다시 도로를 정비하고 길을 열었다. 조선 말기에도 도로가 폐쇄되었다가 1960년경 다시 개통되었다. 2006년 5월 3일 민자 유료 미시령터널(3.69㎞)의 개통으로 기존 22.7㎞의 구간이 7㎞로 단축되고, 통행 시간도 20분 정도 단축됨으로써 미시령 옛길을 넘는 차량의 수가 급감했다.
미시령휴게소는 1990년 (주)미시령이 준공 후 기부채납 조건에 따라 20년 동안 무상으로 임대하다가 2010년 계약기간이 종료되면서 유상 임대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수익성 악화에 따른 경영난을 이유로 운영업체가 운영을 포기함으로써 2011년 계약이 종료되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미시령휴게소 매입 의사를 밝혔다. 휴게소 운영 중단과 함께 폐쇄되었던 주차장도 2014년 5월부터 개방돼 차량 주차가 가능해졌다.
백두대간 미시령에 서서 서쪽의 장암계곡과 동쪽의 미시령계곡, 북쪽 설악산 북주릉의 상봉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었다. 서쪽에는 매봉산이 장암계곡을 가로막듯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지난 주말에 올라 동해 해돋이를 감상했던 상봉 남동능선의 성인대가 저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미시령계곡 뒤로 동해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백두대간 미시령
백두대간 상봉
미시령계곡을 내려가다가 전망이 좋은 곳이 있길래 길가에 차를 세우고 미시령에서 상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을 싫도록 감상했다. 백두대간 순례를 떠났던 나는 2001년 7월 10일 미시령에서 상봉을 향해 무거운 배낭을 지고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백두대간 마룻금에 두고 온 내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설악산 울산바위
백두대간 미시령
백두대간 미시령과 상봉, 신선봉
미시령 옛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성인대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성인대가 바로 올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봉우리는 울산바위 조망 명소였다. 울산바위는 성인대에서 바라볼 때보다도 훨씬 더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울산바위 아래 산기슭에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설악산 북주릉의 황철봉에서 미시령을 넘어 상봉과 신선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울산바위는 정말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울산바위 공룡릉과 용아릉, 화채릉과 더불어 설악의 압권이었다. 울산바위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01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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