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북한산, 837m)의 최고 조망처라는 한북정맥(漢北正脈) 노고산(老姑山, 487m)으로 들어가는 길에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에 있는 흥국사(興國寺)를 찾았다. 흥국사는 노고산 남서쪽 능선 산발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절 바로 앞에는 산세도 웅장한 삼각산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사찰 안내판에는 '노고산(한미산) 흥국사'라고 되어 있었다. 한미산은 노고산의 다른 이름이다. 한북정맥 도봉산(道峰山, 740m) 상장봉(上將峰, 543m)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노고산은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과 양주시 장흥면의 경계를 이룬다. 노고산 북쪽으로는 공릉천(恭陵川), 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른다. 공릉천을 예전에는 곡릉천(曲陵川)이라고 했다.
노고산은 조선 영조(英祖) 때의 '여지도서(輿地圖書)'나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集)', 일제가 제작한 '조선지도(朝鮮地圖)'에 '한미산(漢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조 연간에 작성된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8세기경의 '여지도(輿地圖)', 19세기의 '광여도(廣輿圖)' 등에는 '한미산(漢尾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자산(雌山)과 웅산(雄山)을 연결하는 산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노고산은 조선 후기까지 한미산(漢美山, 漢尾山)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일주문
흥국사 일주문
속계(俗界)와 불계(佛界)의 경계인 흥국사 일주문 앞에 섰다. 처마에는 한자로 '興國寺(흥국사)'라고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흥국사는 말 그대로 나라의 흥성을 기원하는 절이었다. 특히 '國(국)'은 '國泰民安(국태민안)'으로 나라의 태평과 왕실의 흥성,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일주문 편액 글씨는 당대의 명필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썼다. 왼편에는 '八十二翁海로(鹵 밑에 土가 있음)堂'이라 낙관(落款)하고 낙관인(落款印)을 찍었다. 김성근이 82세 되던 해인 1916년에 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의 가운데 글자가 '鹵'자 밑에 '土'자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한자에는 이런 글자가 없었다.
김성근은 1910년 이전에는 해사(海士)라는 호를 쓰고, 그 이후에는 海로堂이라는 호를 썼다. '鹵'자 밑에 '土'자가 붙어 있는 '짠땅 로'는 '소금 로(鹵)'의 속자(俗字)로 '염전, 척박한 땅, 포로의 땅'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김성근이 국권을 잃은 슬픔을 호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일합방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성근은 조선 철종 13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판서(吏曹判書),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그는 미남궁체(米南宮體, 미불체)의 대가였다. 그의 서체는 유려하면서도 웅건해서 특히 큰 글씨에 능했다.
감성근의 전생과 관련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가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에 갔을 때, 처음 보는 전각들인데도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그중 유달리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건물은 바로 선암사 4대 강백(講伯) 중 한 사람인 해봉 성찬(海峯聲贊)의 영당(影堂)이었다. 해봉 강백은 열반에 들면서 '언젠가 내가 여기 다시 올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김성근이 영당에 들어가니 해봉의 글씨가 있었다. 그런데, 해봉과 자신의 서체가 같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봉의 열반게(涅槃偈)를 본 그는 해봉이 자신의 전생임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 입에서 사리 3개를 토했다고 한다.
仙岩山上一輪月(선암산상일륜월) 선암산 위에 뜬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
影墮都城作宰臣(영수도성작재신) 그 그림자 한양에 떨어져 재상 되었네
甲午年前海峯僧(감오년전해봉승) 갑오년 이전에는 승려 해봉이었지만
甲午年後金聲根(갑오년후김성근)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으로 올 걸세
해봉의 열반게이다. 열반게에 나오는 갑오년은 1834년이고, 김성근은 갑오년 이듬해인 을미년(1835년)에 태어났다. 믿거나 말거나다.
김성근의 전생 이야기는 조선 말기 승려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런 까닭에 전국 사찰에 그가 쓴 편액과 주련이 많이 전한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흥국사 일주문의 편액을 비롯해서 전남 해남 대흥사의 ‘두륜산대흥사(頭輪山 大興寺)’, ‘백설당(白雪堂)’, ‘응진당(應眞堂)’, ‘명부전(冥府殿)’, 경북 울진 불영사의 ‘극락전(極樂殿)’, 부산 범어사 일주문의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대구 동화사의 ‘영산전(靈山殿)’ 등의 편액 글씨를 모두 그가 썼다. 경북 의성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 연수전(延壽殿) 옆 건물에 걸려 있는 ‘고운대암(孤雲大菴)’ 편액도 그의 글씨다. 퇴계 이황(退溪李滉)의 태실이 있는 안동 노송정종택(老松亭宗宅) 대문에 걸린 ‘성림문(聖臨門)’, 안동 하회마을 북촌댁의 ‘북촌유거(北村幽居)’, ‘수신와(須愼窩)’ 등의 편액도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김성근은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親日派)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6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친일파는 부일민족반역자(附日民族反逆者)가 더 정확한 용어다.
김성근은 과연 전생을 보았던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해봉 강백이 그의 전생임을 알았다면 한일합방에 기여하는 등 부일민족반역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오명으로 얼룩진 김성근의 편액 글씨는 지금도 여전히 흥국사 일주문에 무심한 듯 걸려 있다.
그런데, 일주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둥을 시멘트로 만들었다. 일주문이 최근에 세워진 것임이 분명했다. 고색창연한 지붕과 처마의 단청에 시멘트 기둥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편액과도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년고찰(千年古刹) 흥국사라면서 시멘트 기둥이 웬말인가! 문화재의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만드는 것도 백 년, 천 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이다. 흥국사의 시초는 흥성암(興聖庵)이라 전해진다. 미타전(彌陀殿) 아미타불(阿彌陀佛) 복장연기문(腹藏緣起文)에 따르면 661년(신라 문무왕 원년) 한산(漢山, 삼각산, 북한산) 원효봉(元曉峰) 기슭의 원효암(元曉庵)에서 수행하던 해동(海東) 화엄초조(華嚴初祖) 원효(元曉)는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이르러 서기를 발하는 석조(石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보았다. 이곳이 인연도량임을 깨달은 원효는 본전(本殿)에 약사여래를 봉안한 뒤, '지기(地氣)가 상서로운 곳이라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면서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지었다. 복장연기문과는 달리 창건 당시의 이름은 흥서사(興瑞寺)라고 알려졌다.
흥성암은 이후 오랫동안 잊혀진 암자가 되었다가 1686년(숙종 12) 중창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1758년(영조34)에는 미타전(彌陀殿)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수개금불사(重修改金佛事)하였다. 1770년(영조46)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인 파주 소녕원(昭寧園)에 다녀오던 길에 큰 눈을 만나 이 절에 들러 하룻밤 묵은 뒤 아침에 일어나 지었다는 한시 한 수가 전한다.
朝來有心喜(조래유심희) 아침이 돌아오니 마음이 기쁘도다
尺雪驗豊徵(척설험풍징) 눈이 많이 왔으니 풍년 들 징조로세
영조는 자신이 지은 시를 편액으로 만들어 하사하는 한편 약사불(藥師佛)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치고, 절이 자리잡은 산 이름도 노고산에서 한미산으로 바꿨다. 기록이 맞다면 이 산의 원래 이름이 노고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명으로 하루아침에 사찰명이 바뀌었을 때 흥국사 승려들은 황공(惶恐)했을까, 아니면 황당(荒唐)했을까?
'노고(老姑)'는 '할미'의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고산->할미산->한미산(漢美山, 漢尾山)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한미산(漢尾山)'은 한양(漢陽)의 북쪽 끝(尾)에 있는 산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실제로 노고산은 서울의 북쪽, 삼각산의 북서쪽 끝에 있다.
영조는 흥국사를 숙빈 최씨의 원찰(願刹)로 삼아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본전인 약사전(藥師殿,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호)을 중창하고, 미타전을 신축하였으며, 상궁(尙宮)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불공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약사전 현판 글씨도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흥국사는 1785년(정조 9)의 중창을 거쳐 1792년(정조 16)에는 약사여래후불탱화(藥師如來後佛幀畵)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경기 유형문화재 296호)를 제작해서 봉안하였다.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의 개금불사에 대한 일이 탱기(幀記)에 전한다. 1854년(철종 5)에는 황해도 장연군 학서사(鶴棲寺)에서 4백근짜리 범종(梵鐘)과 칠성목탱(七星木撑). 삼존불상(三尊佛像)을 옮겨와 봉안했다. 1867년(고종 4)에는 약사전, 1876년(고종 13)에는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하였다. 1878년(고종 15) 가을 내탕금으로 길이 22자, 너비 11자의 괘불탱(掛佛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을 제작했고, 1886년(고종 23)에는 칠성각에 단청을 입히는 한편 팔상탱(八相幀)과 신중탱(神衆幀)을 조성해서 안치했다. 1902년에는 나한전(羅漢殿,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4호)과 산신각(山神閣)을 새로 지었다. 1904년 10월 완해(玩海)를 회주(會主)로 하여 만일회(萬日會)가 열렸다.
흥국사 현존 당우로는 전각(殿閣) 문화재인 약사전과 나한전을 비롯해서 대방(大房, 등록문화재 제592호),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종각(鐘閣), 선원(禪院), 승방(僧房), 종무소(宗務所), 요사채(寮舍寨), 객실(客室) 등이 있다. 흥국사 불상, 불화 문화재로는 괘불탱을 비롯해서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4호)이 있다. 천년고찰임에도 국보급이나 보물급 문화재는 한 점도 없다. 주차장 모퉁이에는 부도(浮屠) 1기가 있다. 경내에는 느티나무 보호수 한 그루와 상수리나무 보호수 두 그루가 있다.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 뒷면
일주문 바로 뒤에는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가 세워져 있었다. 비기는 1929년 귀산사문(龜山沙門)의 정호(鼎鎬)가 썼고, 비기의 글씨는 김창웅(金昌雄)이 새겼다.
비기에는 흥국사 창건 연기가 새겨져 있어 원효와 관련된 사찰의 주요 연혁을 알 수 있다. 비기는 '661년 원효는 양주(梁州, 지금의 경남 양산) 천성산(千聖山)을 떠나 삼각산에 마물면서 북한산성 서쪽에 있는 원효대(元曉臺), 노고산 흥서암을 짓고, 약사불 석상을 조성했다. 암자를 절로 바꾸어 흥국(興國)이란 호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며, 산이름을 한미(漢美)로 바꾼 것은 노고(老姑)의 뜻을 옮긴 것으로 별다른 뜻은 없다'고 전한다.
만일회(萬日會)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준말로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한다. 만일회는 정토종(淨土宗)에서 1만일을 기한으로 잡고 아미타불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염불수행하는 불교 행사다. 염불계는 신라시대에 처음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행했다.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대해 승려들은 극락세계 아미타불회(阿彌陀佛會)에 다시 나기를 서원하는 만일회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0년이 3650일, 20년이 7300일이니 1만일은 27년 하고도 145일이 남는다. 이렇게 오랜 기간 대중이 모여서 염불수행을 하려면 많은 재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만일회를 위해 전답과 재정을 충분히 마련한 뒤에 시작한다.
만일회비 뒤에는 만일회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大衆秩)과 재정을 많이 댄 사람의 명단(大檀越秩)이 기록되어 있다. '단월(檀越)'은 '시주(施主) 또는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단월질(大檀越秩)에는 고종(高宗)을 비롯해서 순비(淳妃) 엄씨(嚴氏), 귀인(貴人) 양씨(梁氏 普明行), 상궁(尙宮) 김씨(金氏 淨德行), 장씨(張氏 妙心華), 정씨(鄭氏 大德華), 김씨(金氏 大慧心), 김씨(金氏, 悟眞行), 이씨(李氏 聖德行), 김씨(金氏 實相行)와 비구(比丘) 회명(晦明), 정씨 원만월(鄭氏 圓滿月) 등 신녀(信女) 8명, 원학주(元鶴柱) 등 신사(信士) 2명이 올라 있다.
대중질(大衆秩)에는 주지(住持) 해송(海松)을 비롯해서 회명(晦明), 관허(貫虛), 진하(震河), 완선(玩船), 완해(玩海), 풍곡(豊谷), 뇌응(雷應), 호봉(虎峰), 중봉(中峯), 해월(海月), 덕률(德律), 원각(圓覺), 하옹(河翁), 일운(一雲), 일암(一庵), 석지(碩池), 상월(霜月), 영운(影雲), 화월(華月), 미봉(彌峰), 임우(林牛), 경협(璟協), 순봉(順奉) 등 비구 26명, 영일(映一) 등 사미(沙彌) 2명, 정오(正悟) 등 비구니(比丘尼) 2명, 장재근(張在根) 등 신사 5명이 올라 있다. 해송과 뇌응, 풍곡, 호봉 등이 만일회를 이끌었고, 감원(監院)은 임우가 맡았다.
흥국사 부도
거사 부도
주차장 끄트머리에는 작은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1기가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찾아보지 않으면 부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빈약한 부도전은 천년고찰 흥국사를 무색케 했다.
석종형 부도 앞면에는 만월탑(滿月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부도의 주인공은 혹시 만일회비 시주자 명단에 등장하는 신녀 정씨 원만월은 아닐까? 공양간 보살에게 물어보니 이 부도가 비구니의 부도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흥국사가 비구니 사찰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깊은 산중에 있는 사찰의 비구니에 대한 하산령이 내려진 이후 흥국사는 비구승 사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나 비구니의 기일에는 81세의 손녀가 이 부도를 찾아온다고 했다. 비구니에게 어떻게 손녀가 생겼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나 더 이상 알 수는 없었다.
석종형 부도 바로 옆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부도 2기가 있었다. 부도의 주인공은 청주 한씨와 단양 우씨로 흥국사 신도로 보였다. 사찰 경내에 부도가 세워질 정도면 흥국사에 엄청난 액수의 시주를 했을 것이다.
흥국사 느티나무 보호수
흥국사 바깥마당 입구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보호수(2003년 고양시 보호수 32호 지정)가 있었다. 부러져 나간 원둥치에서 두 개의 새 가지가 나와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었다. 2003년 당시 수령이 450년이었으니까 2015년 현재 462살이라고 할 수 있었다. 462살이라면 이 느티나무는 1553년 전후 조선 명종대에 이 자리에 심겼을 것이고,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물론 일제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까지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무능하면서도 탐욕스런 지배세력이 이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망쳐 왔는지도 생생하게 목격했을 것이다.
흥국사 전경
흥국사 약사전과 명부전
흥국사 약사전과 나한전
흥국사 오층석탑
흥국사 약사전
흥국사 약사전 편액
흥국사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영산회상도
흥국사 약사전 관세음보살좌상과 후불탱화
흥국사의 전각은 약사전과 대방(大房, 등록문화재 제471호)이 마주보고 있고, 약사전의 좌우에 명부전과 나한전이 협시하고 있는 형태다. 이들 전각으로 둘러싸인 중정의 한가운데에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약사전과 나한전을 제외한 전각과 석탑은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삼성각과 선원은 따로 떨어져 있다. 흥국사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전각은 약사전과 나한전이다.
약사전은 흥국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이 절이 약사도량(藥師道場)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인 1867년(고종 4)에 뇌응(雷應)이 다시 세운 약사전은 이후 몇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낙관이 없는 약사전 현판은 영조가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기둥머리(柱頭)에는 용(龍)을 새긴 안초공(按草工)을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에 직각으로 놓아 결구(結構)시켰다. 건물 안에도 대들보 위에 직각으로 놓인 충량(衝樑)의 머리에 새겨진 용 조각이 공포(拱包)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약사전은 19세기 중반의 건축물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약사전 법당에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약사여래후불탱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296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었다. 약사여래좌상의 왼쪽에는 천수천안십일면관세음보살좌상(千手千眼十一面觀世音菩薩坐像)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었다.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에게 합장반배로 예를 올리면서 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구원해 주기를 기원했다.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는 약사여래가 대선배인 셈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중생의 질병을 낫게 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부처로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대원(大願)을 세웠다. 민간신앙에서는 약사여래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병이 효과적으로 치료된다고 믿는다.
관세음보살좌상의 광배에는 수많은 손과 눈으로 자비를 베푸는 천수천안관음, 보관에는 대승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자비로운 십일면관음이 표현되어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그 모습이 천변만화하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불보살은 관세음보살이 아닌가 생각된다. 염불을 할 때 가장 많이 부르는 불보살의 명호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이다.
영산회상도 하단의 화기(畵記)를 보면 이 그림은 1792년(乾隆 57년 壬子, 정조 16) 수화승(首畵僧) 상훈(尙訓)을 비롯해서 삼유(三裕), 최순(最淳), 덕초(德楚), 품윤(稟允) 등이 약사전 후불탱으로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가로 227cm, 세로 151cm이다. 그림은 정중앙의 석가모니(釋迦牟尼 · Śākyamuni)를 중심으로 6대보살과 4대제자, 사천왕(四天王)이 외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상단 왼쪽 끝에는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 오른쪽 끝에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쪽으로 좌우에 각각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약상보살(藥上菩薩)과 약왕보살이 그려져 있다. 4대제자 중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뚜렷하게 그렸는데, 나머지 두 제자와 양쪽 하단의 사천왕 등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약사전 영산회상도는 바탕천과 채색의 박락(剝落)이 심하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있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수화승 상훈은 1777년 수밀과 함께 서울 봉은사(奉恩寺) 시왕도(十王圖, 동국대박물관 소장)를 그렸으며, 1786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 묘소 조성소(造成所)에 화승으로 참여하였다. 1788년에는 수화승 연홍(鍊弘)과 함께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석가모니후불도(釋迦牟尼後佛圖)와 삼장도(三藏圖)를 그리고, 1798년 장조(莊祖) 현릉원(顯陵園) 조성소에 화원으로 참여했다.
흥국사 나한전
흥국사 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화
흥국사 나한전 16나한상(본존의 오른쪽)
흥국사 나한전 16나한상(본존의 왼쪽)
약사전 서쪽에 있는 나한전은 1878년(고종 15)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7년 이 전각을 중수했을 때의 이름은 칠성각이었다. 원래 나한전 처마에는 김성근이 송판(松板)에 초서체(草書體)로 '七聖閣'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최근에 법당에 나한(羅漢)을 모신 까닭에 전각 이름과 현판을 나한전으로 바꿨다.
약사전보다 작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나한전은 화강석의 기단(基壇)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礎石)을 두르고 있다.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다. 기둥머리에 평방과 창방을 올리고, 그 위에 여러 개의 공포를 짜 맞췄다. 건물의 측면에는 단청을 한 방풍판(防風板)이 달려 있다. 정면에는 3개의 문이 있으며, 무늬가 매우 세밀하고 화려한 문살을 가지고 있다.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한전 법당에는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과 그 좌우에 각각 8나한씩 도합 16나한(十六羅漢)이 봉안되어 있었다. 석가여래좌상 뒤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었다. 합장반배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에 예를 올리면서 '대한민국에서 부일민족반역자들과 부패한 권력자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하고 기원했다.
본존불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제1 빈도라발라타사존자(賓頭羅跋黎墮闍尊者)로부터 제2 가락가벌차존자(伽洛伽伐蹉尊者), 제3 가락가발리타사존자(伽洛伽跋釐墮闍尊者), 제4 소빈다존자(蘇頻陀尊者), 제5 낙구라존자(諾矩羅尊者), 제6 발다라존자(跋陀羅尊者), 제7 가리가존자(迦理迦尊者), 제8 벌사라불다라존자(伐闍羅弗多羅尊者), 제9 수박가존자(戍博迦尊者), 제10 반탁가존자(半託迦尊者), 제11 나호라존자羅怙羅尊者), 제12 나가서나존자(那伽犀那尊者), 제13 인게라존자(因揭羅尊者), 제14 벌나바사존자(伐那婆斯尊者), 제15 아시다존자(阿氏多尊者), 제16 주디반탁가존자(周利半託迦尊者)까지 순서대로 명호(名號)가 붙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다. 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로 일체의 번뇌를 끊고 끝없는 지혜를 얻어 세인은 물론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를 말한다. 상좌부(上座部)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 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흥국사 괘불(출전 불교신문)
나한전 괘불함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괘불은 1878년(고종 15)에 조선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계비(繼妃)의 지위에 오른 순비(淳妃) 엄씨가 발원과 왕실 하사금으로 제작되었다. 순비는 왕실의 안녕과 극락에서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을 친견하고자 하는 서원을 담아 이 불화를 흥국사에 봉안했다.
높이 6.6m, 폭 3.3m 크기의 영국 맨체스터산 면에다가 그린 이 괘불은 근대의 대표적인 화승인 경선당(慶船堂) 응석(應碩)이 그렸다. 응석은 왕실이 발원한 불화를 여러 차례 조성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화승이었다. 그는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70여점의 불화를 그렸다. 흥국사 괘불은 평소에는 나한전에 보관하다가 매년 4월 초파일 대법회 때 설법전 앞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에 전시한다.
흥국사 괘불은 아미타삼존불화(阿彌陀三尊佛畵)이다. 아미타삼존불화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하는 것을 기본 구도로 하며,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 괘불에는 아미타삼존불 외에 마하가섭과 아난존자, 문수동자(文殊童子), 보현동자(普賢童子)도 그려져 있다.
불화 가운데의 아미타불은 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가늘게 뜬 눈, 도톰한 입술 등 전체적으로 원만한 얼굴을 하고 있다. 불의는 양쪽 옆의 협시보살에 의해 가려졌지만 복부의 띠매듭과 그 아래 옷주름은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길게 내려져 있고, 왼손은 가슴께에서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댄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짓고 있다. 두 손의 수인이 같으면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이다. 아미타불의 길게 내민 오른손은 극락에 왕생할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고, 오색구름과 상서로운 기운이 삼존불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얼굴 모습도 아미타불과 매우 비슷하다. 크기만 약간 작을 뿐이다. 아미타불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화불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는 모란꽃을 들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이 올려진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는 연꽃을 들고 있다.
두 보살 밑에는 마하가섭과 아난존자가 아미타불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데, 둘째 손가락을 서로 맞댄 마하가섭의 수인이 다소 특이하다. 두 존자 밑에는 해태(海陀, 원말 獬豸)에 탄 채 연꽃을 들고 있는 문수동자와 코끼리에 탄 채 여의주를 들고 있는 보현동자가 그려져 있다.
흥국사 명부전
흥국사 명부전 지장보살좌상과 후불탱화
흥국사 명부전 감로탱화
명부전은 약사전 동쪽에 있는 전각이다. 1997년에 기존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나한전과 대칭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명부전을 세웠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명부(冥府)는 염라부(閻羅府)라고도 하는데, 죽은 이들이 사는 영혼의 세계인 명계(冥界)를 말한다. 명계에는 염라대왕(閻魔大王)을 비롯하여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함께 있다고 한다. 명부전에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시왕을 모시기도 하므로 시왕전(十王殿)이로고도 한다.
명부전 법당에는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연화대좌에 앉은 지장보살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선정에 든 듯 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머리에는 띠를 매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박혀 있었다. 불상의 오른쪽에는 석장(錫杖)을 세워 놓았다. 지장보살의 석장은 지옥문을 열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왼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로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짓고 있었다. 오른손의 수인은 아미타구품정인(阿彌陀九品定印) 중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과 같았다. 중품중생(中品中生)은 불교의 계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열심히 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뜻한다.
지장보살좌상 뒤에는 후불탱화인 지장탱화가 걸려 있었다. 지장탱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고 붉은색 가사를 입고 있었다. 불상과는 달리 두 눈은 뜨고, 머리털이 있으며, 두광(頭光)과 광배(光背)가 표현되어 있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사자(使者), 장군(將軍), 졸사(卒使), 사천왕(四天王) 등이 옹위하고 있었다.
지장보살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 하늘 등 육도(六道)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이다. 그는 악도(惡道)에 떨어져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빠짐없이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했다. 사실상 성불을 포기한 것이다. 지장보살을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장보살은 정해진 업(業)도 모두 소멸시킬 수 있어서 그에게 귀의하면 악도를 벗어나 극락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미륵불이 강림하기 전까지 부처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모든 중생의 행복을 책임지는 보살이다. 현실의 죄나 고통을 없애 주는 으뜸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라면, 죽은 뒤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구제해 주는 으뜸 보살은 지장보살인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나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지장보살좌상의 오른쪽 영단(靈壇)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가 걸려 있었다. 탱화 상단에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보승여래(寶勝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등 7여래(七如來)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인로왕보살은 망자의 영혼(靈魂)을 접인(接引)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중단에는 일반적으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재단(齋壇)과 법회(法會) 장면이 묘사되는데 흥국사 감로탱에서는 생략되어 있었다.
감로탱의 하단에는 장발에 험상궂은 모습을 한 두 아귀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중생계와 고혼(孤魂)이 된 망령(亡靈)들의 살아생전 모습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하단의 아귀의 오른쪽에는 부채를 든 무녀(巫女)가 굿을 하는 장면, 그 위에는 승려 악사들이 대북과 날라리, 바라를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두 아귀상은 아귀도에 빠진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화현한 비증보살(悲增菩薩)과 지증보살(智增菩薩)로도 본다. 비증보살은 이타(利他)의 선근과 자비의 선근이 많은 보살로 육도 윤회의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해 속히 성불하기를 원하지 않는 보살이다. 지증보살은 지혜를 닦고 번뇌를 끊으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리(自利)의 선근은 많지만 이타(利他)의 선근이 적은 보살이다.
감로탱은 도설의 내용상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의 세계, 중단은 재단과 재의식 장면, 하단은 아귀 등 육도 중생과 죄업을 짓는 망자의 생전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감로탱은 각 단계마다 설정된 주제가 있다. 즉, 과거(하단)에서 현재(중단), 현재에서 미래(상단)로 상승하는 삼세 여행이 도설로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은 지옥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재의식(齋儀式)을 행하면 그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감로탱은 수륙재(水陸齋)나 우란분재(盂蘭盆齋) 같은 천도재(薦度齋)에 쓰이는 불화로 아귀에게 감로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도(甘露圖) 또는 감로왕도(甘露王圖)라고도 한다. 정토신앙과 밀교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는 감로탱은 특히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감로(甘露)는 천신(天神)들이 마시는 음료 또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인데, 부처의 은덕을 뜻하기도 한다. 감로는 아귀의 목구멍을 열어주어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게 한다.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아귀는 또한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죽은 조상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아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해원(解寃)해야 할 모든 고혼을 상징하며, 육도 중생의 고통을 한몸에 짊어진 존재이다. 그래서, 감로탱화를 고혼탱화(孤魂幀畵)라고도 한다.
흥국사 대방
흥국사 대방 극락구품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흥국사 대방 극락구품도(출처 문화재청)
흥국사 대방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흥국사 대방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수인(출전 문화재청)
흥국사 대방(大房, 등록문화재 제592호)의 처마에는 전각명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지 않았다. 대방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4호)과 극락세계를 묘사한 극락구품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가 봉안되어 있어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부른다. 대방은 또 설법이나 법회를 하는 설법전(說法殿)으로도 쓰인다.
대방은(大房) 주불전 맞은편에 자리잡은 건축물로 정토신앙의 염불수행이 크게 성행하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흥국사 대방은 큰방과 승방, 누각, 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갖춘 복합 법당으로 주불전인 약사전을 불단으로 삼아 염불수행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크기가 작고 아담했다. 1758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은 18세기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머리는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고, 이마에는 백호가 박혀 있었다. 얼굴은 미소를 머금은 듯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 불의는 양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通肩)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주름을 양각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틀고,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양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왼손에 오른손을 포갠 뒤 배꼽 부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면 아미타구품정인 가운데 상품중생인의 수인이다. 상품중생인도 중품중생인도 하품중생인도 아닌 저 수인은 어떤 뜻을 품고 있을까?
그런데, 흥국사 대방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오른손 수인과 문화재청에 등재된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오른손 수인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흥국사 대방의 아미타여래좌상의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반면에 문화재청에 등재된 아미타여래좌상의 손바닥은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흥국사 극락구품도는 아미타여래좌상의 후불탱화로 걸려 있었다. 극락구품도 또는 아미타구품도는 관경변상도(觀經燮相圖)의 일종으로 19세기 경기도 일원에서 주로 보이는 그림으로 아미타불의 염불왕생극락도(念佛往生極樂圖)를 9장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로 205㎝, 세로 146㎝의 크기의 흥국사 극락구품도는 서방정토의 아미타회상(阿彌陀會上, 4면) 장면과 극락왕생(極樂往生, 5면) 장면으로 나눠서 전체 화폭을 9등분하여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상단 중앙의 아미타극락회를 중심으로 하품과 중품이 에워싸고 있는 구도를 보여 준다.
중생들은 수행이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상품(上品)에서 하품(下品)에 이르기까지 구품(九品) 가운데 하나의 극락으로 왕생한다. 구품은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중생을 근기에 따라 상품과 중품(中品), 하품으로 나누고, 각각의 품을 다시 상생(上生)과 중생(中生), 하생(下生) 등 9단계로 나눈 것이다. 국락왕생자 가운데 상품은 보살형, 중품은 비구형, 하품은 속인으로 표현된다.
아미타회상 장면은 상단의 3면과 중단의 가운데면에 배치하였다. 상단 중앙에는 아미타극락회(阿彌陀極樂會)의 장면으로 아미타불의 설법을 경청하는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등 극락천중(極樂天衆)을 그렸다. 향 공양을 올리는 동자는 관상자(觀相者) 자신이 극락에 왕생하는 모습을 상상한 보관(普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단 중앙의 왼쪽 면에는 보살의 극락정토참예도(極樂淨土參詣圖)를 배치했다. 극락정토참예도는 아미타 회상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드는 보살의 무리와 극락의 궁전, 극락조, 연못 등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 중앙의 오른쪽 면에는 성중극락정토참예도(聖衆極樂淨土參詣圖)를 그렸다. 성중극락정토참예도는 극락의 성스러운 무리와 아미타 회상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오는 8인의 성문상(聲聞像) 등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단의 중앙에는 '수마제(須摩提)'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이 있다. ‘수마제’는 산스크리트어 ‘sukhavati’를 음차한 것으로 안락(安樂)이나 극락(極樂)을 뜻하는 말이다. 곧 이 전각은 극락전을 뜻하며, 이곳이 서방정토임을 보여 준다. 극락정토를 장엄하기 위하여 궁전 주위에 연못과 보리수, 나무, 구름, 사자, 코끼리 등을 배치하였다.
극락왕생 장면은 4면의 아미타 회상 장면 그림의 나머지 5면에 그려져 있다. 중단의 중앙의 좌우에는 연지(蓮池)에서 왕생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의 중앙면은 상품의 왕생, 중단과 하단의 왼쪽 두 면은 하품의 왕생, 중단과 하단의 오른쪽 두 면은 중품의 왕생을 도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화기(畵記)가 없어 각 화면이 어느 품으로의 극락왕생을 묘사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흥국사 극락구품도의 극락왕생 장면에 대해 두산백과사전은 '왕생정토(往生淨土) 장면은 중단 오른쪽에 상품의 극락정토로부터 중상품(中上品)·중중품(中中品)의 왕생정토, 왼쪽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人)이나 하품왕생인(下品往生人)의 극락정토, 하단의 가운데에는 상품인(上品人) 또는 중품상(中品上)·중인(中人)의 왕생정토, 오른쪽에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人) 또는 하품왕생인(下品往生人)의 왕생정토, 왼쪽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人)이나 하생인(下生人)의 왕생연못으로 나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극락의 왕생은 보통 상품(上品)에서 하품(下品)에 이르기까지 9품으로 왕생하고 있는데 흥국사본의 도상은 어느 품으로 도상화하고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모르겠다.
흥국사 극락구품도는 흥천사 구품도(1885년)와 거의 같은 구도나 형식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경기도 양주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곡당(金谷堂) 영난(永煖)의 유파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이 성행한 시대였으며, 극락정토의 세계를 도상화한 아미타계 불화인 극락구품도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화승들이 많이 그렸다.
고려시대의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 관경변상도)는 명상과 염불을 통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것이다. 관경변상도는 정토종(淨土宗)의 근본 경전인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나오는 인도 마가다(摩揭陁, Magadha)왕국의 빈파사라왕(頻婆娑羅王)의 전설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빈파사라왕은 태자인 아사세(阿闍世)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긴 인물이다.
관경변상도는 빈파사라왕의 전설 중에서 위데희왕비(韋提希王妃)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도해한 것이다. 고난에 빠진 위데히왕비는 석가모니에게 청하여 아미타여래의 찬란한 극락정토를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석가모니는 16관을 통해서 설법하여 위데히왕비로 하여금 극락세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16관 중 명상인 1관∼13관은 중생들이 행하기 어렵고, 14관∼16관은 염불을 통해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6관 중 14관∼16관을 도상화한 것이 극락구품도 또는 아미타구품도이다. 이것이 고려시대의 관경변상도와 조선시대의 아미타구품도의 차이점이다.
흥국사 삼성각
흥국사 삼성각 칠성단
흥국사 삼성각 산신단
흥국사 삼성각 독성단
삼성각은 흥국사 경내의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삼성각은 1996년 김용대 거사의 설판(設辦) 시주로 건립되었다. '三聖閣' 편액 글씨는 혜암(慧菴) 전 조계종 종정이 쓴 것이다.
삼성각 법당 정면 중앙의 칠성단(七星壇) 석조연화대좌(石造蓮花臺座) 위에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그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의 삼존좌상(三尊坐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칠성단에 삼존상을 안치하는 예는 거의 없고, 칠성각 또는 삼성각에 후불탱화로 모신다. 삼존상 뒤에는 목각칠성탱화(七星木刻幀畵)가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었다. 흥국사 칠성탱화(칠성도)는 1893년(고종 30)에 조성된 것이다.
칠성도 왼쪽의 산신단(山神壇)에는 산신탱화(山神幀畵, 산신도), 오른쪽의 독성단(獨聖壇)에는 독성탱화(獨聖幀畵, 독성도)가 모셔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동쪽 벽면에는 산신탱화가 하나 더 걸려 있었다. 칠성과 산신, 독성을 함께 봉안한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것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고도 하며, 도교적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이기도 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물, 재능 등을 관장하며, 농경시대에는 비를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이 별을 자미대제(紫微大帝)로 신격화했다. 옛날에는 북극성이 모든 천체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이 별에서 신령스런 빛이 나온다고 해서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했다. 치성광여래를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일광보살)은 해,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 월광보살)은 달을 각각 신격화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월성수(日月星宿)를 권속으로 삼아 털구멍에서 치성광을 내뿜어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주며, 무병장수하고,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이는 약사불과 그 역할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자, 자녀의 수명을 기원하는 이들이 치성광여래를 많이 믿었다.
목각칠성탱화는 머리와 수염, 입술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금칠을 하였다. 칠성도에서 분리된 치성광여래삼존불 뒤에는 두광과 광배가 표현되어 있었다. 상단의 오른쪽 4자리에는 관복과 관모를 쓴 7존상, 왼쪽 두 자리에는 도사상의 6존상과 3존상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상단의 7존상은 칠원성군, 3존상은 3태(三台), 6존상은 6성(六星)을 도설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광보살 왼쪽의 관복에 관모를 쓴 존상은 자미대제로 보였으나, 월광보살의 오른쪽 타원 안에 새겨진 도사상의 7존상은 무엇을 도설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칠성도는 보통 치성광여래와 일광여래, 월광여래 삼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 칠여래, 하단에 칠원성군, 그리고 좌우에 삼태, 육성,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도상화한 것이다. 칠원성군의 중앙에 자미대제를 도설하는 경우도 있다. 칠원성군은 보통 도사상으로 그려진다.
산신단에 봉안된 산신도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폭포와 노송(老松)을 배경으로 신선풍의 산신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고, 그 왼쪽과 앞쪽에 동남(童男), 동녀(童女)와 호랑이 두 마리, 사슴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백발에 흰 수염이 길게 늘어진 산신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왼손에는 깃털 부채를 들고 있었다. 두건을 쓴 머리 뒤에는 두광이 표현되어 있고,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떠 있었다.
흥국사 산신도에는 특이하게도 사슴이 등장한다. 제주도 영실 존자암(尊者庵)의 산신도에도 흰 사슴(白鹿)이 등장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산신도에는 종종 학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학 대신 새를 그리기도 한다.
동쪽 벽면에 걸려 있는 산신도는 역시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두 그루의 노송 아래 신선풍의 산신이 의자에 앉아 오른손에 깃털 부채를 들고 있었다. 차림새는 산신단의 산신과 대동소이했다. 산신의 오른쪽에는 세 명의 시자(侍者)를 배치했고, 왼쪽에는 호랑이가 뒤에서 산신을 호위하고 있었다. 한 시자는 차를 달이고 있고, 나머지 두 시자가 이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나무를 감고 올라간 덩굴은 송라(松羅)를 표현한 것이다.
산신은 불법 수호의 서원을 세운 호법선신(護法善神) 중 하나인 산왕대신(山王大神)으로 흔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산신은 가람 수호신이자 산중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은 옛날 농경민들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産神), 유목민 또는 수렵민들에게 사냥감을 풍성하게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신은 또 인간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칠성과 마찬가지로 산신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다. 도교(道敎)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신도를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도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보아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산신도는 일반적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과 호랑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맹수인 호랑이를 용감하고 위엄있게 그리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 때로는 백발수염의 신선 옆에 고양이처럼 귀엽고 우스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친군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산신도의 호상도 조선시대 민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입 종교다. 칠성신앙과 산신신앙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앙이었다. 이질적인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기존의 토착신앙과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서 신앙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는 국가적으로 배불정책을 펼쳤던 시대였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 불교는 살아남아 세계 3대 종교가 되었고, 오랜 기간 한반도의 주류 신앙이었던 칠성과 산신은 불교 사찰의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용과 관용 나는 이것이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쪽 독성단의 독성도에는 심산유곡의 폭포와 아름드리 낙락장송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와 길고 흰 눈썹에 수염이 덥수룩한 독성이 바위에 앉아 오른손에는 경전 두루마리, 왼손에는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두광이 표현되어 있고, 하늘에는 서운(瑞雲)이 떠 있었다. 선학(仙鶴)을 안고 있는 홍의동녀(紅衣童女)와 청의동자(靑衣童子)는 시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노송에는 송라가 표현되어 있었다.
독성존자를 묘사한 독성도를 불교에서는 독수성탱(獨修聖幀)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하며, 보통 16나한도(十六羅漢圖)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린다. 독성도에는 보통 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삭발 머리에 길고 흰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종종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독수선정(獨修禪定)으로 진리를 깨달아 부처의 반열에 오른 성자다. 그래서 독성을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한다. 독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독성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가 독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흥국사에서도 독성도 앞에 '나반존자'라는 명패를 붙여 놓았다. 나반존자는 옛날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무상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독성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가 부처 없는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도래할 때까지 현세 머물러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역할을 맡은 존재라고 믿는다.
독성을 환웅(桓雄)이나 단군(壇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칠성과 산신을 각각 칠성각과 산신각에 안치하는 것처럼 독성각에 모신 독성은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단군이라는 것이다. 독성이 단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으로 독특한 독성신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핍박받던 말법의 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법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나반존자는 불자들 사이에 매우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 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흥국사 상수리나무 보호수
흥국사 뒤편 산기슭에는 상수리나무 보호수 두 그루가 있었다. 나한전 뒤에 있는 상수리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에 수령이 250년이었다. 2015년 현재 280살이 넘은 상수리나무다.
흥국사 상수리나무 보호수
명부전 뒤에 있는 상수리나무는 2003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수령이 250년이었다. 이 상수리나무는 2015년 현재 260살이 넘을 것으로 보였다. 원줄기는 부러져 나가서 없고 곁가지 하나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자라나 있었다.
흥국사 종무소와 종각
흥국사 종각
종각은 종무소 위 옥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종각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인 듯 단청이 선명했다.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 산사의 범종 소리는 마음을 평화로와지게 하는 힘이 있다.
흥국사 인욕실 지계실 보시실
종무소 바로 위에는 주방, 그 앞에는 '인욕실', '지계실', '보시실'이란 방이름이 붙어 있는 건물이 있었다. 주방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공양간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흥국사 무명 전각
명부전 뒤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이름 없는 건물이 있었다. 기와가 금방 구은 듯하고, 단청도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지은 건물임이 분명했다.
흥국사 선원
무명 전각 동쪽에는 흥국사 선원(禪院)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 지어진 지 아직 얼마 안되어 보였고, 전각명을 새긴 편액도 걸려 있지 않았다. 선원은 수행승들이 선정(禪定)을 닦는 도량으로 선방(禪房)이라고도 한다. 수행승들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도 선원에서 열린다. 승려의 나이를 뜻하는 법랍(法臘)은 하안거를 지낸 햇수에 따라 정해진다.
옛날에는 수행승이 선원에 들어가서 하안거를 스무 번 이상 수행하고, 법랍이 20년 이상 되어야만 대선사(大禪師)나 대교사(大敎師)의 당호(堂號)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법랍이 10년 이상 되어야만 주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지금도 지켜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흥국사에서 바라본 삼각산
흥국사에서 바라본 삼각산 의상능선
삼각산(三角山)이 노고산 능선 너머로 흥국사를 굽어보고 있었다. 삼각산은 정말 장엄화려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 삼각산의 주봉인 백운대(白雲臺, 836.5m)를 비롯해서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 노적봉(露積峰, 716m)은 바라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멋진 산봉우리들이다.
백운대에서 염초봉(廉峭峰,662.2)과 원효봉(元曉峰, 505m)으로 뻗어내린 원효능선, 문수봉(文殊峰, 727m)에서 나한봉(羅漢峰, 688m)과 나월봉(蘿月峰, 657m), 증취봉(甑炊峰, 593m), 용혈봉(龍穴峰, 581m), 용출봉(龍出峰,571m), 의상봉(義湘峰, 502m)으로 뻗어내린 의상능선은 정말 쌍벽을 이루는 능선이었다.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은 죽어서도 산봉우리가 되어 우뚝 솟아 있었다. 원효가 인생 선배이니 더 높은 봉우리을 원효봉, 낮은 봉우리를 의상봉이라고 했을까?
원효와 의상은 같은 꿈을 꾸었지만 걸어간 길은 서로 달랐다. 의상이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자를 가지고 불법의 진리를 추구했다면, 원효는 그 잣대마저 버린 사람이다. 의상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구도자로서의 길을 갔다면, 원효는 조금도 걸림이 없는 무애도인의 길을 갔다. 의상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렀고, 원효는 잣대보다도 더 큰 것을 헤아렸다.
하지만 세상에 불법을 전파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지향점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로 통했다. 모든 면에서 달랐으면서도 가까운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줄 수 있었다. 서로의 장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의 개성을 존중했다. 원효봉과 의상봉이 되어 저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얼마나 정다운가!
고양 흥국사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 원효와 의상을 생각하다.
201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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