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도 막바지에 접어든 주말, 불곡산(佛谷山) 기슭에 자리잡은 백화암(白華庵)을 찾아서 경기도 양주로 향했다. 때마침 절기가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다는 처서(處暑)라서 그런지 산과 들에는 벌써 가을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한북정맥에서 바라본 불곡산
양주의 진산인 불곡산은 불국산(佛國山)으로도 불린다. 양주시 산북동과 유양동의 경계에 솟아 있는 불곡산은 최고봉인 상봉(上峰, 470.7m)과 상투봉(431.8m), 임꺽정봉(林巨正峰, 449.5m)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고, 규모도 작지만 기암으로 이루어진 정상부의 암릉미가 뛰어나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양주시와 의정부시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임꺽정봉은 한북정맥(漢北正脈)에 속하는 산봉우리다.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은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말고개(馬峴, 568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촛대봉(1,010m), 복주산(伏主山, 1,152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도마봉(道馬峰, 883m), 국망봉(國望峰, 1,168m), 개이빨봉(犬齒峰, 1,110m), 민둥산(1,023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 운악산(雲岳山, 937.5m),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까지 달려와서는 불곡산 임꺽정봉을 지나 호명산, 한강봉, 사패산, 도봉산(道峰山, 717m), 상장봉, 노고산(老姑山, 487m), 현달산(峴達山, 139m),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에 이른다.
불곡산 남쪽 유양동에는 옛 양주군 동헌과 어사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국가 무형문화재 제2호) 전수회관, 양주목사가 휴식을 취하던 금화정, 양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143호) 등 많은 문화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곡산 중턱에는 백화암이 있고, 백화암 진입로 오른쪽 산발치에는 임꺽정생가터가 있다. 유양동 마을의 전통 순대는 유명하다. 불곡산에서 내려와 전통 순대 안주에 하산주 한 잔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유양동 불곡산입구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백화암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도로는 가파르고 폭도 좁은 편이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도로는 백화암까지 이어져 있었다.
백화암 약수터
가파른 산길을 오른 끝에 백화암 경내로 들어섰다. 요사채 마당 한켠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백화암 신도와 산객들을 위해 설치한 것이리라. 바가지로 물을 떠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이 약수는 여름철 심한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고 추운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백화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해 불곡사(佛谷寺)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고, 조선 후기에 백화암이라 개칭하였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화암은 관음기도 도량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극락세계의 백화도량(白幻場)에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1868년(고종 5)에는 축성루(祝聖樓)를 신축했고, 1923년에는 월하(月河)가 사찰 전체를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탔다. 1956년 성봉(性峰)의 복원을 거쳐, 1968년 비구니 무상(無常)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신축했으나 옛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백화암에는 특별한 문화재도 없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2009년에 세워진 원통전(圓通殿), 삼성각(三聖閣), 설법전(說法殿), 요사채 2동, 속청(俗廳) 1동이 있다.
백화암 대웅전
백화암 대웅전 법당의 석가모니삼존불과 후불탱화
백화암 대웅전 법당의 신중탱화
백화암 주불전인 대웅전 법당의 석가모니삼존불(釋迦牟尼三尊佛) 앞에서 합장반배의 예를 올리면서 세계의 평화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법당의 정면 한가운데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봉안되어 있었다. 석가모니삼존불 뒤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 동쪽 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었다.
백화암 원통전
백화암 원통전의 관세음보살좌상과 후불탱화
서쪽에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원통전(圓通殿)이 있었다.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大悲殿), 대비전, 보타전(寶陀殿)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전각이다. 정면 3 칸 , 측면 3 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원통전은 원래 주지실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원통전 법당의 정면 한가운데는 관세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뒤에 루불탱화가 걸려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협시하고 있었다.
백화암 삼층석탑
동자승상
대웅전 앞에는 신복사지(神福寺址) 삼층석탑을 본 떠 만든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다. 삼층석탑의 기단부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끼워져 있었다. 연화대좌는 아마도 이 절의 창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건립된 지 몇 년 안되는 듯 보이는 삽층석탑은 직선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다소 빈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석탑 앞에는 무릎을 꿇은 채 공양을 올리는 동자승상이 세워져 있었다. 석탑의 기단부에 끼워진 복련(覆蓮) 문양이 새겨진 연화대좌는 다른 탑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석탑을 세울 때 연화대좌의 부드러운 곡선미를 살릴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보수할 때는 미적 감각을 갖춘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백화암 느티나무 보호수
양주목사 서염순의 영세불망비
대웅전 앞마당 한켠에는 35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1841년(헌종 7)에 세운 양주목사(楊州牧使) 서염순(徐念淳)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었다. 비석 앞면에는 '牧使徐公念淳恤吏民永世不忘碑(목사서공염순휼리민영세불망비)', 뒷면에는 '道光二十一年辛丑正月日立(도광21년신축정월일립)'이라 새겨져 있었다.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는 대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양주목사의 선정비는 어째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백화암에 세워졌을까? 그 연유가 자못 궁금했다. 당시 조선 후기의 양주 관아와 백화암의 관계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서염순은 1819년(순조 19) 식년시(式年試), 1827년(순조 27)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양주목사를 비롯해서 승지(承旨),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융희 4)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서염순이 조선 후기 양주 목사로 있으면서 어떤 선정을 펼쳤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프로필에 '1832년(순조 32) 안주목(安州牧)에서 민가 3백 81호(戶)가 불에 탔을 때, 별겸춘추(別兼春秋)로서 왕명으로 나아가 백성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조선시대 학정(虐政)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은 자신의 추악한 행적을 세탁하기 위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탐관오리들의 선정비를 세우는 비용과 노동력조차도 백성들을 쥐어짠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로정
원통전 바로 옆에는 다로정(茶露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는 천장의 줄에 매어진 두레박이 놓여 있었다. 백화암의 승려들은 다로정의 물로 차를 달여서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수행을 하지 않나 생각되었다.
백화암 삼성각
백화암 삼성각 법당의 탱화
다로정 위에 삼성각이 있었다. 삼성각 법당 정면에는 칠성(七星), 그 좌우에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탱화가 봉안되어 있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것으로 인간의 수명과 재복(財福), 강우(降雨)를 관장한다.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독성은 독수선정(獨修禪定)하여 깨달음을 얻은 성인으로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라 부른다. 산신 또는 산령대신(山靈大神)은 불교가 수입되기 전부터 한민족의 신앙 대상이었다. 산신은 무속의 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신이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산신신앙을 수용하면서 사찰 경내에 산신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백화암 아미타마애삼존불
아미타불좌상
관세음보살입상
대세지보살입상
불곡산백화암마애삼존불조성연기문
백화암에서 위로 100여m쯤 떨어진 암벽에는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마애삼존불(阿彌陀磨崖三尊佛)이 있었다. 입구 바위에는 '불곡산백화암마애삼존불조성연기문'이 새겨져 있었다. 높이가 10여m에 이르는 암벽에는 아미타불좌상(阿彌陀佛坐像)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보처(補處) 보살로서 자비문(慈悲門)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과 지혜문(智慧門)을 성징하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입상이 부조되어 있었다.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합장반배로 예를 올렸다.
아미타불좌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아미타구품정인(阿彌陀九品定印) 가운데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었다. 중품중생( 中品中生)은 불교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수행에 용맹정진(勇猛精進)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뜻한다 .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에 머물면서 설법을 한다는 부처로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정토종(淨土宗)에서 숭앙하는 구제불(救濟佛)이다.
관세음보살입상의 관발(冠髮)에는 화불(化佛)을 이고 있고, 교차한 두 손의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들고 있었다. 감로(甘露)는 불교에서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에 있는 달콤하고 신령스런 액체를 말한다. 감로를 마시면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그 맛이 꿀처럼 달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관발에 모신 화불은 항상 아미타불이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소원을 성취케 하는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관세음보살의 서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念佛)할 때는 보통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 하고 두 부처와 보살의 명호를 함께 부른다.
대세지보살입상의 관발에는 보병(寶甁)을 이고 있고, 두 손은 합장인(合掌印)을 취하고 있었다. 대세지보살은 보배병 속에 담긴 모든 종류의 광명으로써 보현불사(普現佛事)를 행한다. 합장인은 본존에게 예배를 드리거나 스승과 문답(問答)을 나눌 때 취하는 수인이다. 나머지는 관세음보살과 큰 차이가 없다.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기 전 이곳의 화강암 암벽은 정승권등산학교 동문산악회이자 의정부 암벽전문산악인들의 모임인 골수회의 암벽훈련장이었다. 골수회의 멤버 최승철, 김형진, 정승권 등은 1992년부터 병풍처럼 펼쳐진 이 암벽에 17개의 코스를 개척하고 1993년 9월 26일 이곳에서 루트 개척 보고회를 가졌다. 골수회는 이 암벽의 이름을 골수암이라 명명했다. 골수암 루트 개척자인 최승철, 김형진 두 사람은 신상만 대원과 함께 1998년 9월18일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 '악마의 붉은 성벽' 탈레이사가르(Thalay Sagar, 6,950m) 북벽(North Face) 일명 '하늘 오르는 길'에서 정상을 코앞에 두고 1,300여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골수암은 백화암의 사유지였던 모양이다. 백화암에서 골수암에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면서 이곳의 암장은 폐쇄되었다. 골수회를 비롯한 경기 북부의 산악인들로부터 사랑받던 암장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있었다. 백화암을 내려와 귀로에 올랐다.
201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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