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로부터 충주호관광선 무료 초대권을 선물로 받았다.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을 맞아 유람선을 타고 충주호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유람선 관광은 청풍나루에서 장회나루 구간이 가장 경치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청풍나루
충주에서 차를 몰아 청풍나루로 향했다. 청풍나루는 연휴를 맞아 유람선을 타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충주호관광선 청풍영업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ROTC 후배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초대권을 승선권으로 바꾼 뒤 청풍1호에 올랐다.
청풍문화재단지
청풍1호가 청풍나루를 떠나 장회나루를 향해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3층 갑판으로 올라가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장회나루 뒤로 청풍문화재단지의 육각정과 망월루가 충주호를 굽어보고 있었다.
청풍대교와 청풍교
청풍대교(淸風大橋)와 청풍교(淸風橋)를 지났다. 제천시 청풍면 읍리와 도화리를 연결하는 청풍교는 1985년 8월 13일 준공되었다. 그러나, 부실 공사로 인한 붕괴 사고 위험 때문에 2002년 청풍교의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통행량이 급증하면서 사장교식(斜長橋式) 청풍대교를 새로 건설했다. 청풍대교는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아 7년간의 공사 끝에 2012년 5월 7일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청풍대교의 건설로 청풍교의 쓸모가 없어지자 제천시는 미관과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소관 자치단체인 충청북도에 철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관리 주체인 충청북도는 70억 원에 이르는 비용 부담 때문에 철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철거를 하지 않아도 문제다. 왜냐하면 청풍교의 안전 유지와 보수 관리에 매년 2억여 원에 달하는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풍교 부실 공사로 인해 국민의 혈세 낭비라는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청풍교 시공사인 동아건설과 책임감리원, 관련 공무원에 대한 철저한 문책이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월악산 원경
저 멀리 국립공원 월악산(月岳山)이 바라보였다. 영봉과 중봉, 하봉의 형상이 흡사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에서 월악산을 바라보면 누워 있는 여인의 얼굴 형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월악산을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금수산
상천천 하류를 지날 때 비로소 금수산(錦繡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산기슭에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저 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白雲山)이었으나 조선조 중엽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이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한 나머지 금수산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옥순봉과 옥순대교
옥순봉
김홍도의 옥순봉도(출처 호암미술관)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와 괴곡리를 잇는 옥순대교(玉筍大橋)를 지나자 오른쪽으로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玉筍峯)이 솟아 있었다. 옥순봉은 돌기둥처럼 생긴 석봉들이 비가 갠 후 옥처럼 푸르고 흰 대나무 순이 돋아난 듯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옥순봉은 단양팔경(丹陽八景) 중 유일하게 단양이 아니라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옥순봉은 청풍에 속했고,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청풍은 제천에 속하였다. 옥순봉은 애초부터 단양에 속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단양팔경을 정한 사람은 이황이다. 그는 상선암(上仙岩), 중선암(中仙岩), 하선암(下仙岩), 도담삼봉(島潭三峯),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岩), 구담봉(龜潭峰) 등 칠경에 옥순봉을 포함시켜야 단양팔경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옥순봉을 단양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풍부사에게 청했다가 거부당한 이황은 이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기고 이곳을 단양의 관문으로 정했다고 한다. 훗날 이 글씨를 보고 감탄한 청풍부사가 옥순봉을 단양에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실제로 옥순봉이 단양에 속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황은 옥순봉을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보다 더 빼어난 경승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서 '구담봉에서 여울을 따라 남쪽 언덕으로 가다 보면 절벽 아래에 이른다.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깎은 듯 서 있는데 천 길이나 되는 죽순과도 같은 바위가 높이 솟아 하늘을 버티고 있다. 그 빛은 푸르고 혹은 희며 등나무 같은 고목이 아득하게 침침하여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이 바위를 옥순봉이라 한 것은 그 모양에서 연유한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이황의 문인 황준량(黃俊良)은 옥순봉을 지나는 나룻배를 보고 '조각배에 탄 사람이 병풍 속으로 들어간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조선 정조 때 연풍현감을 지낸 김홍도(金弘道)는 실경산수(實景山水)의 화법으로 '옥순봉도(玉筍峯圖)'를 그려 1796년에 만든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호암미술관 소장)'에 실었다. '옥순봉도'는 수직 암봉들이 하늘을 떠받치듯 웅장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의 옥순봉은 그림처럼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충주댐 건설로 인해 옥순봉 하단부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엄치욱(嚴致郁), 이윤영(李胤永) 같은 화가들도 옥순봉의 절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가은산과 둥지봉
새바위와 둥지봉을 지나자 암봉 뒤편으로 가은산(可隱山)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가은산은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와 성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가음산(加陰山),가는산,가늠산이라고도 한다. 가은산(加隱山)이라 표기된 곳도 있다. 가은산은 '간신히 몸만 피난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가늠산은 가은산 주능선 서쪽 끝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가는산의 유래는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마고할미가 나물을 뜯으러 왔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온 산을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아흔아홉 번째 골짜기에서 반지를 찾았다. 반지를 찾은 마고할미는 '이 산에 골짜기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한양이 들어설 골짜기인데, 내가 이곳에 눌러 앉아 살려고 해도 한양이 될 땅이 못 되니 떠나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로부터 가는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
가은산은 금수산맥이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남서쪽으로 갈라진 지맥에 솟아 있다. 가은산 주능선과 지능선에는 새바위를 비롯해서 벼락바위, 투구바위, 미륵불바위, 곰바위, 기와집바위, 손바닥바위, 석문, 굴바위, 마당바위, 코끼리바위, 물개바위, 촛대바위, 처마바위, 시계바위, 거북바위, 학바위, 전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즐비하여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가은산 정상은 숲이 우거져 있어 전망이 전혀 없다. 오히려 가은산 지능선의 새바위나 둥지봉이 최고의 조망처라고 할 수 있다. 새바위나 둥지봉에 오르면 옥순봉과 구담봉은 물론 말목산, 제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가은산에 올랐을 때 정상부 남쪽 기슭에서 산성터를 발견했다. 나는 이 산성터가 말로만 듣던 가은암산성(可隱巖山城) 유적이 아닌가 추정했다. 지도에는 이 산성이 가은산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가은산과 말목산 사이의 계곡인 성골(城谷)은 제천시 수산면 성리(城里)와 단양군 적성면 성곡리(城谷里)의 경계가 된다. 지명으로 보아도 이곳이 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제천군지(1969)'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백제의 성인 가혜성(加兮城)을 이곳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가은산성터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성골 상류의 옥천암터에서도 기와 조각이 나왔다. 곡식을 찧은 돌확과 자기 조각도 발견되었다. 가혜성은 둔저성(屯猪城), 가음산성(可陰山城)으로도 불렸다. 이것으로 볼 때 가은암산성은 가음산성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말목산-661m봉-801.5m봉-고갯골등-가은산-둥지고개-둥지봉에 둘러싸인 성골은 입구만 막으면 천혜의 요새지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구담봉
구담봉과 말목산 사이의 좁은 구역을 빠져나가면 목적지인 장회나루에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담봉은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와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옥순봉과 이웃하고 있다.
'청풍부읍지(淸風府邑誌)'에는 '그 동쪽의 한쪽 면은 중첩하여 가파른 절벽의 꼭대기가 들어올린 거북의 머리같이 기이한 장관이다.'라고 했고,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예부터 꼭대기 바위의 형세가 거북과 같다고 하여 구봉(龜峰)이라 일컬었고, 강물 속의 바위에 모두 거북 문양이 있다는 연유로 구담(龜潭)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 봉우리 꼭대기의 바위들이 거북이가 머리를 들어올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구봉, 봉우리 아래에 남한강의 담소(潭沼)가 있어서 구담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지함(李之菡)의 형 이지번(李之蕃)은 일엽편주를 타고 구담봉을 유람하면서 스스로 구옹(龜翁)이라 일컬었다. 이황은 '강물이 장회탄을 내려서 서로 구봉 언덕에 부딪혀 돌아 구담의 머리가 되고, 또 북으로 돌아서 서로 꺾여서 구담의 허리가 되고, 구담의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다하였다.'고 하였다. 구담봉에는 이지번이 수도하던 토실(土室)이 있었고, 단양으로 내려온 이윤영이 1752년 구담봉을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은 창하정(蒼霞亭)이 있었다. 채운봉은 지금의 어느 봉우리인지 알 수 없다. 이황의 글을 상고하건대 채운봉은 아마도 가은산이 아닌가 한다.
윤제홍의 구담봉도
조선 정조 때의 문인 화가 윤제홍(尹濟弘)은 '구담봉도(龜潭峰圖)'를 남겼다. 지두화법(指頭畵法)으로 그린 '구담봉도'는 구담봉의 실경과는 좀 거리가 있다. 구담봉 강 건너편에는 이윤영이 세운 창하정과 유람객을 태운 배가 그려져 있다. 구도로 볼 때 이 그림은 북서쪽 가은산 둥지봉에서 내려다본 구담봉 풍경이다. 둥지봉에서 바라보면 이런 구도가 나온다.
지두화법으로 표현한 구담봉 옆에는 '蒼霞亭望龜潭 余嘗云 玉筍淸秀 龜潭雄渾 壺天特一奇格 丹陵題名又一奇 覽者以爲如何'라는 내용의 제발(題跋)을 썼다. 윤제홍은 제발에서 "창하정에서 구담봉을 바라보면서 내가 예전에 '옥순봉은 맑고 빼어난 아름다움이 있고, 구담봉은 웅장하며 막힘이 없다. 별세계 같이 특별하고 기이한 격을 지녔으며 단릉(丹陵, 李胤永)이 자신의 호를 그렇게 칭한 것 또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말하고 있다. 제발에서는 구담봉이 '웅장하며 막힘이 없다.'고 했지만, 실제 그림은 지두화법으로 그려서인지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제발 반대편에는 '濟弘景道作'이란 서명을 넣었다. '濟弘(제홍)'은 이름이고, '景道(경도)'는 자이다.
말목산
구담봉 맞은편에는 말목산이 솟아 있었다. 말목산은 마항산(馬項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세가 말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제비봉과 마주보고 있는 말목산은 전망도 매우 뛰어나다. 말목산에서는 충주호와 구담봉, 제비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말목산 남쪽 산자락에는 이황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강선대(降仙臺)와 두향묘(杜香墓)가 있다.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넓은 바위인 강선대는 충주댐 건설로 만수위가 되면 수면 아래로 잠긴다. 강선대 바위의 '降仙臺' 글씨는 1717년 충청감사 윤헌주(尹憲柱)가 쓰고, 석공 진삼용이 새긴 것이다.
두향묘는 사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무연고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드러났으며, 1980년대 초 현지를 답사한 소설가 정비석이 그의 소설 '명기열전'에 두향전을 실으면서 두향과 이황의 사랑 이야기는 세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두향묘도 더 위쪽으로 이장을 했지만 만수위가 되면 상석까지 물이 찬다.
두향은 제비봉 자락 두항리에서 태어나 단양군 관아에 관기(官妓)로 들어갔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두향과 아주 짧은 기간 사랑을 나눈다. 48세의 이황은 당대의 대학자였고, 낭랑 18세의 두향은 시와 문장, 가야금에 능했다. 또, 난초 묵화에도 능했으며,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시인묵객으로 대하면서 자주 강선대를 찾아 정분을 쌓았다.
이황의 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옮겨 갔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지 9개월만이었다. 이별을 앞두고 이황을 정성스레 모신 두향은 흰 속치마를 벗어 글 한 줄을 청했다. 이제는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님이었다. 붓을 잡은 이황은 두향의 속치마에다 두보(杜甫)가 꿈에 본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면서 쓴 '夢李白二首(몽이백이수)'를 빌어 이별의 소회를 전했다.
死別已呑聲(사별이탄성) 사별은 울음조차 삼키게 하고
生別常惻惻(생별상측측) 생이별 또한 서럽고 서럽구나
두향은 이황을 향한 애절함과 안타까움을 시에 담았다. 그것은 끝난 사랑에 대한 절망, 자신의 신분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탄이었다. 이황에게 두향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두향에게 이황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떠나간 뒤 두향은 수절한 채 그와 함께 자주 찾던 남한강변의 강선대 아래에 초막을 짓고 평생 님과의 사랑을 추억하면서 살았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두향 38세, 이황 68세 되던 해였다. 얼마나 이황이 그리웠을까? 두향은 옛 이방한테 부탁해서 홍매(紅梅) 화분 하나와 전별시를 적은 속치마를 안동 도산서원에 기거하던 이황에게 보냈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덧 술 다 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을 하루도 잊지 못했던 이황은 5언시(五言詩) 옆에 7언시(七言詩)를 덧붙여 적었다.
相看一笑天應許(상간일소천응허) 서로 만나 한번 웃은 것도 하늘이 허락했음일세
有待不來春慾去(유대불래춘욕거) 기다려도 오지 않고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이황도 두향을 몹시 그리워했음일까? 이황은 속치마와 함께 도산서원 계곡에서 뜬 물 한 동이를 이방편에 보냈다. 두향의 나이 40세 되던 해, 물에서 역한 냄새가 나고 물동이가 깨지는 일이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예감한 두향은 안동으로 이황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황은 이미 죽고 없었다. '매화 화분에 물을 잘 주라'는 유언과 시 한 수를 남긴 채.....
黃券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옛 책을 펴서 성현을 마주하고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텅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은 봄소식을 전하는데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요금 안고 줄 끊겼다 한탄 마라
*梅 - 두향이 이황에게 보내준 홍매 화분
*絶絃 -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을 상징함
두향은 문상도 못하고 도산서원 뒤편 언덕에서 눈물만 흘리다가 단양으로 돌아왔다.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자신을 이황과 노닐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남한강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이승을 하직했다. 사랑하는 이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50여년 뒤 조선 영정조 때의 학자이자 문인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는 두향의 묘소를 찾아 추모시를 남겼다.
孤墳臨官道(고분임관도) 외로운 무덤 하나 한길가에 있는데
頹沙暎紅萼(퇴사영홍악) 황량한 모래밭엔 붉은 꽃이 피었네
杜香名盡時(두향명진시) 두향이라는 이름 들리지 않을 때면
仙臺石應落(선대석응낙) 강선대 바윗돌도 사라지고 없으리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그만큼 더 안타깝고 애절했던 두향의 사랑은 당대의 시인 이광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두향의 일편단심이 꽃으로 환생했는지 해마다 봄이 되면 강선대는 진달래꽃으로 짓붉게 물든다고 한다. 두향과 이황의 사랑 이야기는 4백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단양군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5월이 되면 두향의 넋을 기리는 두향제(杜香祭)를 지낸다. 두향제를 지내기 전 옛날에는 단양의 기생들이 해마다 두향묘를 찾아 술잔을 올렸다고 한다.
제비봉
드디어 제비봉과 장회나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제비봉도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제비봉 정상에 올라서면 구담봉과 옥순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말목산과 금수산은 물론 소백산까지 조망된다. 제비봉의 북서쪽에는 학선이골, 서쪽에는의 설마동계곡이 있다.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이나 말목산 쪽에서 제비봉 바위 능선들을 바라보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제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백산 연화봉과 소백산천문대 원경
저 멀리 동쪽으로 백두대간 소백산 연화봉과 소백산천문대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소백산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도 육안으로 소백산천문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물결은 잔잔했다.
장회나루
장회나루에서
충주호관광선 청풍1호가 목적지인 장회나루에 닿았다. 장회나루에서 승선한 승객들이 썰물처럼 유람선을 빠져나갔다. 새로운 승객을 태운 청풍1호는 곧 청풍나루를 향해 장회나루를 떠났다.
시월하고도 닷새 충주호의 가을 풍경에 젖다.
201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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