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주말을 맞아 내 고장 충주의 문화 유적 탐방길에 나섰다. 먼저 억정사지대지국사탑비(億政寺址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가 있는 충주시(忠州市) 엄정면(嚴政面) 괴동리(槐東里)로 향했다. 대지국사탑비는 빌미산(353.1m) 남동쪽 지능선 기슭에 자리잡은 비석마을에 있었다. 마을 이름은 대지국사탑비에서 유래한 듯했다. 비석마을 앞으로는 원곡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장병산이 솟아 있었다.
엄정면에 있는 신명중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나는 그동안 괴동리에 대지국사탑비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갈한 바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잔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슴에 두고두고 새겨두어야 할 경고다. 내 고장의 역사도 제대로 몰랐던 내 자신부터 먼저 반성한다.
대지국사탑비는 명색이 국가 지정 보물인데도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갖춰줘 있지 않았다. 안내판도 부실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물어서야 대지국사탑비를 찾을 수 있었다. 탑비와 경종태실(景宗胎室)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안내판을 하나 더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각
대지국사탑비 비대석
대지국사탑비 비신
충주억정사지대지국사탑비(忠州億政寺址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에는 단청도 선명한 비각(碑閣)에 세워져 있었다. 탑비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높이 2,67m, 너비 1,3m, 두께 24㎝의 비신은 화강암 석재를 깎아서 만들었다. 탑비는 비좌(碑座)와 비신(碑身)만 있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없다. 비신의 윗부분은 크게 귀접이를 했다.
탑비는 대지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1393년(태조 2)에 세웠다. 비문(碑文)은 고려 우왕(禑王) 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박의중(朴宜中)이 지었다. 글씨는 승려 선진(旋軫)이 해서(楷書)로 쓰고, 전액(篆額)도 하였다. 전액은 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이나 비갈(碑碣)의 제액(題額)을 말한다. 각자(刻字)는 혜공(惠公)이 했다.
탑비 앞면의 양기(陽記)에는 대지국사의 학력과 경력, 인품, 공로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비석 뒤편의 음기(陰記)에는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지국사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에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복직장(司僕直長)을 지낸 한적(韓績), 어머니는 선관서승(膳官署丞) 청주곽씨(淸州郭氏) 곽영반(郭永潘)의 딸이다. 속명은 한찬영(韓粲英),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이다. 시호(諡號)는 지감원명(智鑑圓明), 혜월원명(慧月圓明)이다.
1341년 대지국사는 14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원증국사(圓證國師)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은사로 출가하여 법을 전수받았다. 그 뒤 정혜국사(淨慧國師)의 가르침을 받고 가지산총림(迦智山叢林)에 참여하여 제2좌(第二座)가 되었으며, 다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수자화상(守慈和尙)에게서 선법(禪法)을 배웠다. 1350년(충정왕 2)에는 구산선과(九山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1353년에는 승과(僧科)의 공부선(工夫選)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흥사(大興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주지가 그의 소임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양주 소설산(小雪山, 용문산)으로 들어가 정진했으며,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에서도 3년 동안 머물렀다.
1359년 봄에는 공민왕(恭愍王)의 부름을 받아 승록사(僧錄司)의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가 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가도승록대사직에서 물러나 석남사(石南寺)와 월남사(月南寺), 신광사(神光寺), 운문사(雲門寺) 등의 주지를 맡아 선법(禪法)을 선양했다. 1372년 공민왕은 대지국사에게 정지원명무애국일대선사(淨智圓明無礙國一大禪師)라는 호를 내리고,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발우(鉢盂), 묘필(妙筆), 친필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등을 하사하였다. 공민왕의 명으로 그는 내원당(內願堂)에 들어가 왕을 보필하였다.
1374년 우왕은 대지국사를 가지사(迦智寺) 주지로 임명하고, 선교도총섭정지원명묘변무애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淨智圓明妙辯無碍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내렸다. 1377년(우왕 3) 그는 병을 핑계로 주지에서 물러나 보개산(寶蓋山)으로 들어가 은둔했으나 이듬해 우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가지사로 돌아왔다. 1379년 왕명으로 태자산(太子山) 태자사(太子寺) 주지가 되었다. 1382년 주지를 사양한 그는 다시 청량산(淸凉山)으로 들어갔다. 1383년 3월 22일 우왕은 그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우왕은 또 그를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소재 억정사(億政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1384년 대지국사는 스승인 태고화상(太古和尙)의 비를 삼각산 중흥사에 세웠고, 이듬해 왕명을 받고 광명사(廣明寺)로 옮겼다. 1388년(창왕 1) 창왕(昌王)은 그를 왕사로 불렀으나, 그 해 10월 흥성사(興聖寺)로 옮겨 세 번 사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도 공양왕(恭讓王)이 왕사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억정사로 내려가 은둔했다.
억정사 주지로 있던 어느 날 대지국사는 문득 세상 인연이 다한 것을 알았다. 그는 문인들을 불러 열반당(涅槃堂)을 구성하도록 한 뒤 7언절구로 된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바로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서
그 소리와 색을 그대에게 드러내 보여줄 수 없다네
그 중 세상이 온통 무사(無事)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체용이 나눠지든 나눠지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네
1390년 6월 28일 임종게를 남긴 대지국사는 세수 63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공양왕은 그에게 시호 지감(智鑑)과 탑호 혜월원명(慧月圓明)을 내렸다. 3년 뒤 조선 태조(太祖)는 시호 대지(大智)와 탑호 지감원명(智鑑圓明)을 내리고, 박의중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여 억정사에 탑비를 세웠다.
비각 주위를 거닐면서 대지국사가 어떤 사상을 가진 고승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태고 보우의 제자였기에 그는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의 화두를 참구(參究)했을 것이다. 동시에 태고화상의 자심(自心) 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지국사는 고려 공양왕과 조선 태조로부터 시호와 탑호를 하사받았다. 그만큼 그는 법력이 높은 고승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또 이성계(李成桂)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거나 조선의 건국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2015.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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