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죽산은 삼남요로보장지진(三南要路保障之鎭)이라고 하여 기호지방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죽산은 한양과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영조 대에 전국의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죽산은 '삼남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다'라고 하였다. 이같은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비봉산의 동쪽 성산 정상부에 죽주산성을 쌓아 죽산의 방비에 힘써 왔던 것이다.
죽산면 매산리 옛날의 삼남대로, 지금의 국도 17호선 죽양대로변 죽주산성 동문 들머리에는 역대 죽산 수령들의 선정비를 세워 놓은 비석거리가 있다.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죽산 비립거리(碑立巨里, 비석거리)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는 진촌(陣村)에서 길이 갈린다'고 했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죽산 비석거리에서 진리(陣里)를 지나 양지에 이르는 남북로와 음죽(장호원)에서 양성에 이르는 동서로가 교차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비석거리는 옛날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비석거리
죽산부사 우홍규 청덕애민선정거사비
비석거리 남쪽 끝에 있는 귀부와 비신, 옥개석을 갖춘 비석은 '부사우후홍규청덕애민선정거사비(府使禹侯弘圭淸德愛民善政去思碑)'이다. 우홍규(禹弘圭)의 자(字)는 공백(功伯)으로 죽산부사(竹山府使)를 거쳐 종2품 벼슬인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지낸 인물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쓴 목민심서(牧民心書) 형전편(刑典篇) 제6조 '제해(除害)'에 우홍규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정약용도 우홍규를 옾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일화를 들어보자.
'우홍규가 죽산부사가 되었을 때 용인현(龍仁縣)에 갔다. 그 고을의 어떤 사람이 소를 시장에서 팔고 받은 돈 10냥을 옆에 놓아두었다가 도둑을 맞았다. 소를 판 사람이 도둑을 따라가 잡으니, 그 사람은 또한 자기 소를 판 돈이라고 하여 송사가 걸리게 되었다. 용인 현령이 '돈꿰미의 노끈을 무엇으로 하였느냐?' 하고 심문하니, 도둑질해 간 자는 대답을 했지만, 정작 소를 판 자는 알지 못했다. 현령은 도둑질한 자가 옳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러나 우홍규는 이를 의심하여 두 사람의 사는 곳을 묻고 가둔 다음,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서 그 아내를 각각 잡아다가 문초하였다. 소를 판 자의 아내는 그 남편이 소를 팔려고 시장에 갔다 하고, 도둑질한 자의 아내는 그 남편이 빈손으로 저자에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도둑질한 자를 심문하여 사실을 알아내니 온 고을 안이 놀라고 탄복하였다.'는 내용이다.
비석거리 비석들
비석거리에는 죽산부사 심능석(沈能奭), 목장흠(睦長欽), 죽산현감 목성선(睦性善) 등의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져 있다. 북쪽에서 세 번째 비석은 명나라 부총병(副總兵) 오유충(吳惟忠)의 청덕비(淸德碑)이다.
심능석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목장흠에 대해서는 황호가 지은 비명(碑銘)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비명에는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호조참의로 임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죽산부사가 되었으며, 반년만에 돌아왔는데, 거사비(去思碑)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성선은 목장흠의 장남이다.
명나라 장수 오유충은 제1차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1593년에 우군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참전했다. 오유충은 제4차 평양전투 때 왜군의 조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작전을 지휘했다.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그는 죽산을 지나 충주까지 진격해서 왜군을 물리쳤다.
오유충은 청렴한 행실과 높은 인품을 갖춘 장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오유충의 군사가 지나간 죽산, 충주, 단양, 풍기, 영천(榮川, 영주), 안동, 신녕 등 일곱 군데에는 조선의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들 중 현재는 죽산면 매산리 비석거리에 세워진 비석만 남아 있다.
충주에 세워진 비석은 '청숙비(淸肅碑)'였고, 영천의 비석은 오유충의 군사를 뒤이어 들어온 북병 소속의 마군(馬軍)에 의해 파괴되었다. 배용길의 '天將吳侯頌德碑銘(천장오후송덕비명)'과 손기양의 '吳總兵惟忠碑銘(오총병유충비명)'은 안동과 신녕에 각각 세워진 오유충의 청덕비 비명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신임 감사 또는 관찰사나 부사, 군수, 현령 등 지방 벼슬아치들이 부임하면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쇄마전(刷馬錢)이라고 해서 백성들에게 따로 돈을 거둬 바치게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또, 지방 벼슬아치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자신의 선정비, 청덕비, 송덕비(頌德碑), 애민비(愛民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우기 위해 비채(碑債) 또는 입비전(立碑錢)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거둬 바치게 했다. 지방 벼슬아치들의 재임시에는 관아를 수리한다는 둥 툭하면 갖가지 명목으로 공사를 벌여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조선 후기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이 문란해지면서 벼슬아치들의 악정과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지방 벼슬아치들은 상관에게 뇌물을 주고 환심을 산 뒤 백성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선정비는 물론 상관의 선정비까지 세워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지방 벼슬아치가 부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의 선정비를 미리 길목에 세워 선정을 바라는 일도 많았다. 이방(吏房) 등 지방 아전들은 선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실제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갈취해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 심지어 감사나 유수 같은 벼슬아치들은 재임시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건 생사당(生祠堂)까지 짓게 하는 일도 있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현존 선정비의 상당수가 조선 왕조와 지방 벼슬아치들의 학정에 저항하는 농민봉기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시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조선 왕조와 벼슬아치들의 극심한 가렴주구(苛斂誅求)와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한은 깊어갔고,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벼슬아치가 벼슬에서 물러나면 분노한 백성들은 그의 선정비를 도끼와 망치로 깨부수기도 하였다. 벼슬아치가 떠난 뒤 그가 강요해서 세운 '愛民善政碑(애민선정비)'의 비문을 몰래 '愛緡善丁碑(애민선정비)'로 고쳐 새기는 일도 있었다. '緡(돈꿰미)를 사랑하여 돈 긁어모으는 丁(고무래)질을 잘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지배자들에 대한 무력한 백성들의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조선 후기 서민층들이 부르던 잡가(雜歌)에 '비석(碑石)타령'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를 보면 당시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가 얼마나 백성들의 원성을 샀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문 앞에 서 있는 건 개꼬리 목비요
동구 밖에 서 있는 건 수렁밭 목비라
'개꼬리 목비(木碑)'는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듯 지방 수령이 부임하면 아전들이 아부하려고 세우는 선정비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수렁밭 목비'는 감사가 부임하거나 어사가 오면 목비를 수렁 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세워 마치 오래전에 세운 것처럼 보이도록 급하게 만든 선정비를 빗댄 것이다.
이황(李滉, 1501∼1570)은 유서에 선정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황 이후의 안동에 비석이 없는 것은 바로 그의 유언 때문이다. 지방 벼슬아치들의 선정비 건립에 의한 폐단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도 보인다. 1719년(숙종 45년) 사헌부는 왕명으로 지방 수령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영조는 선정비의 폐단이 심하다는 보고를 받고 ‘능관(陵官)도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는데, 군수가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면서 개탄했다. 1789년 정조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처럼 조선 조정에서도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 건립이 민폐로 이어져 백성들의 저항이 왕실로 향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지방관들이 교활한 향리(鄕吏)를 시켜 송덕비나 생사당을 세우게 하거나 이방으로 하여금 돈을 거둬 선정비를 세우게 한다'면서 '선조 때 30년 안에 세워진 이 생전(生前) 선정비를 모두 두들겨 부수었는데, 그 금령이 해이해져 비채 또는 입비전이란 명목으로 가렴주구가 혹심하다.'고 개탄했다. 사실 조선 왕조는 지방관들의 가렴주구를 구조적으로 강요했고, 지방관들은 이방 등 향리들의 부정부패를 구조적으로 강요한 측면이 있다. 정약용도 백성들을 억압과 착취의 도탄에 빠트린 근본 원인이 조선 왕조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니면 백성들의 근본 모순이 조선 왕조 전제정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가.
한국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과연 선정비가 사라진 것일까? 조금만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전국 각지에 현대판 선정비들이 수없이 세워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재와 부정부패가 심했던 자일수록 현대판 선정비 즉 기념비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그런 기념비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을 보면 조선시대 백성들의 정의감이 요즘보다 오히려 훨씬 더 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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