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은 원래 백제의 옛땅이었다. 그러다가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 영토였던 당성군(唐城郡, 화성시 남양동), 부산현(釜山縣, 金山縣, 평택시 진위면), 사벌홀(沙伐忽, 안성시 양성면) 등의 지역이 고구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이들 지역은 다시 백제 땅이 되었지만 이후에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이처럼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삼국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곳이 바로 안성이었다.
삼국 간에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접경지대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불력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일까! 안성에는 옛날부터 팔만구 곳의 사암(寺庵)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 사찰이 많았다. 특히 안성에는 미륵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어 '미륵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안성에는 현재 16구의 미륵불상이 남아 있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죽주산성(竹州山城)의 남쪽 기슭의 미륵당(彌勒堂) 마을에도 매산리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일명 태평미륵(太平彌勒)이 있다. 미륵당 마을은 충주에서 안성, 평택으로 통하는 동서로와 청주에서 용인, 수원, 한양으로 통하는 남북로가 교차하는 옛날의 삼남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미륵당 마을
미륵당오층석탑과 매산리석불입상
담장으로 둘러싸인 보호각인 미륵당 안에는 경기도 최대의 미륵불인 태평미륵과 미륵당오층석탑(彌勒堂五層石塔, 안성시 향토유적 제20호)이 세워져 있다. 미륵당 문 안으로 들어서면 미륵당오층석탑이 먼저 눈에 띈다. 일주문 형태의 보호각 안에는 태평미륵이 죽주산성을 등지고 죽산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고 서 있다.
미륵당오층석탑
미륵당오층석탑
태평미륵 앞에 세워져 있는 미륵당오층석탑은 높이 1.9m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석재는 화강암이다. 이 석탑이 원래의 자리에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탑지석(塔誌石)의 출토로 이 석탑이 993년에 세워졌으며, 건립 후원자들의 명단도 밝혀졌다.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대석은 1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굄대가 각출되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단층 기단 네 귀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했다. 갑석 아랫면에는 반전 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굄대를 각출했다. 기단과 갑석, 1층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옥신에는 우주를 희미하게 선각했고, 2~3층의 옥신은 사라지고 없다. 4층은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고, 5층 옥신과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는 원호경사가 있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층급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다.
미륵당오층석탑이 세워진 993년은 고려(高麗) 성종(成宗) 12년에 해당한다. 개경과 서경,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한 해이다. 또, 10월에는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면서 제1차 려요전쟁(麗遼戰爭)이 발발하자 대도수(大道秀)가 이끄는 고려군이 안융진(安戎鎭, 安州)에서 거란군을 격파하고, 서희(徐熙)가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거란과 화약을 맺은 해이기도 하다.
매산리석불입상
매산리석불입상
매산리석불입상 일명 태평미륵은 1232년(고종 19) 제2차 려몽전쟁(第二次麗蒙戰爭) 당시 처인성(處仁城, 龍仁)에서 몽골의 대장군 살리타(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인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와 1236년 제3차 려몽전쟁(第三次麗蒙戰爭) 당시 죽주산성전투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죽주산성과 관련된 '오뉘 힘내기' 전설에 등장하는 송장군은 아마도 송문주 장군을 가탁한 전승이 아닌가 한다.
태평미륵은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공무 여행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던 태평원(太平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최태평(崔太平)이라는 졸부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빈민 구제와 호국(護國)의 염원을 담아 세웠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태평미륵이 고려 전기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설들은 후대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당은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일주문 형태의 다포식 건물이다. 미륵당 지붕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관할하는 원찰에만 올릴 수 있는 아주 귀한 청기와 두 장이 올려져 있었는데 1930년대 누군가 훔쳐가고, 최근에 한 장의 청기와를 다시 올려 놓았다고 한다. 불상 앞에는 향과 초를 올릴 수 있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태평미륵은 높이 5.7m, 너비 2.5m로 보개(寶蓋)를 제외한 불신(佛身)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사각형의 보개는 원통형의 높은 보관 위에 얹혀져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둥굴넓적하고 살집이 통통하며, 눈은 약간 외상방으로 길게 뻗어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눈썹과 눈 사이의 간격이 다소 넓은 편이다. 코는 얼굴에 비해 작고 나지막하며, 입은 자그마하다. 뒤로 납작하게 붙은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고, 목에는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또는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뜻하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상호는 원만한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마치 토속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돌기둥 형태의 거대한 몸체는 굴곡이 거의 없으며, 법의(法衣)처럼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둘려진 천의(天衣)에는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로부터 가슴을 지나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 옷주름은 양쪽 다리 위에서 갈라져 U자형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가랑이는 홈을 파서 만들었다. 양쪽 팔목에는 팔찌를 차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올려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구부려 배 위에 놓고 있다.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비슷하지만 시무외인이 아니다. 시무외인이라고 한 안내판의 설명은 수정되어야 한다. 왼손의 수인이 여원인이라는 주장도 내가 보기에는 오류다. 양쪽 손의 엄지와 집게 손가락의 모양을 보면 마치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실제로 무엇을 잡고 있었다면 아마도 연꽃가지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태평미륵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충청남도 논산 관촉사(觀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부여 대조사(大鳥寺) 석조미륵보살입상보다 크기도 작고, 옷주름 문양에서 더욱 형식화가 진행되었으며, 조각 수법도 거칠고 투박하다. 이런 특징들로 볼 때 태평미륵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평미륵 같은 거불(巨佛) 형태의 불상은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석조삼존불상을 계승한 불상으로 고려시대에 주로 충청도나 경기도 일대에서 제작되었다.
옛날부터 태평미륵의 돌을 떼어내 갈아서 먹거나 달여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실제로 태평미륵의 허리께 등 여러 군데에 돌을 떼어낸 흔적이 남아 있어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과 기자신앙(祈子信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죽산은 삼국시대 이래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고, 지금도 남-북 죽양대로와 동-서 서동대로가 교차하는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다. 미륵당의 태평미륵과 석탑은 고려시대부터 매산리에 존재했던 태평원의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태평원은 충북 충주 계립령(鷄立嶺)의 미륵대원(彌勒大院)이나 황해도 봉산 자비령(慈悲嶺)의 미륵원(彌勒院), 전남 장성 노령(蘆嶺)의 미륵원처럼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태평원 숙박시설에서 여독을 푼 여행자들은 태평미륵과 석탑 앞에서 안전한 여행을 비는 예불을 올리고 길을 떠났을 것이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거불과 석탑은 여행자들에게 이정표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전한 여행을 불력에 의지하고자 거불과 석탑 앞에서 예불을 올리는 고려시대 여행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미륵불은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의 부처이다. 정의와 자비의 메시아가 곧 미륵불이다. 조선시대의 혁명가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이야말로 미륵하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광주민중항쟁도 용화정토를 건설하기 위해 미륵불들이 들고 일어난 것인지 모른다. 미륵불은 하늘에서 하강하는 것이 아니러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이 땅에 정의와 자비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동서남북대로 매산리 미륵당에서 태평미륵을 생각하다.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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