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를 지나는 길에 비봉산(飛鳳山, 369.7m) 동쪽의 성산(城山, 227.8m)에 있는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을 찾았다.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에 들렀을 때 언젠가 죽주산성에 꼭 한 번 가보리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죽주는 곧 죽산(竹山)의 옛 이름이다.
칠장사는 후삼국시대 태봉(泰封,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절이고, 그가 처음 몸을 의탁하려 했던 사람이 바로 죽주(竹州)의 호족이었던 기훤(箕萱)이었다. 기훤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신라 말 농민반란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죽산면 죽산리에서 바라본 태봉산(왼쪽)과 비봉산(가운데), 죽주산성이 있는 성산(오른쪽)
죽산은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백제 때의 고을이라고 되어 있다. 본래 백제의 개차산(皆次山)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에 따라 이곳을 점령하여 죽주산성을 쌓은 뒤 개차산군(皆次山郡)으로 삼으면서 군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안성은 내혜홀(奈兮忽)이었다. 475년부터 501년까지 약 35년 동안 개차산군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죽주산성은 마이산(馬耳山, 472m)의 망이산성(望夷山城)과 함께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고구려의 전진기지였다.
죽주산성의 내성은 신라 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내성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류,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류 등이 발견되었다.
신라는 죽산을 점령한 이후에 대당 해상교통의 중심지 당항성(黨項城)을 개척할 수 있었다. 당시 죽주산성은 행정치소, 망이산성은 군사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주산성 남쪽 기슭 죽산면 죽산리에는 고려시대 사찰 봉업사(奉業寺) 터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자리에 화차사(華次寺)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는 화차사를 대당항로의 안전을 비는 의지처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죽주산성 동문
757년(경덕왕 16) 신라 경덕왕이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세 자가 넘는 지명을 두 자 지명으로 고칠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바꿔 한주(漢州)에 소속시켰다. 신라 말기에는 진성여왕의 실정과 잇따른 재해의 발생으로 여러 주와 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국고가 텅 비어 재정이 어려웠다. 국고를 채우기 위해 신라 조정이 조세와 공물의 납부를 독촉하자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란이 889년(진성여왕 3)부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반란을 시작으로 890년대에만 20여 차례의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당시 죽주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기훤도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기훤의 세력은 신라 조정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 891년(진성여왕 5) 궁예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전 몸을 의탁하기 위해 죽주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기훤을 찾아갔으나 그로부터 냉대와 무시를 당했다. 이에 분노한 궁예는 기훤의 부하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을 회유하여 892년 북원(北原, 원주)의 농민반란군 지도자 양길(梁吉)에게로 갔다. 이를 계기로 기훤의 세력은 빠르게 무너져 갔다.
892년 무진주(武珍州, 광주)에서 견훤(甄萱)이 거병하면서 후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견훤도 9년 동안 죽주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후백제(後百濟)의 기초를 닦았다. 궁예가 견훤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곳도 죽주산성이었다. 이처럼 죽주산성은 기훤, 견훤 등이 근거지로 삼았을 만큼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영웅호걸들이 자웅을 겨루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죽주산성 동문
죽양대로변에 있는 죽주산성휴게소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 죽주산성의 정문격인 홍예문의 동문이 나타난다. 동문에는 위풍당당한 누각 형태의 문루(門樓)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산성을 복원할 때 문루도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죽주산성 안
동문 안으로 들어서면 죽주산성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의 성산 정상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흐르는 경사가 완만한 계곡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내부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물이 흐르고 있어 외적의 침입 등 유사시에 수비대가 장기간 입보농성(入保籠城)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죽주산성 북치성의 포루
죽주산성 포루
북치성에서 바라본 죽주산성 동북부 성곽
죽주산성 포루에서 바라본 죽산면 매산리, 일죽면 방초리 일대
서쪽에서 바라본 죽주산성 남치성
동쪽에서 바라본 죽주산성 남치성
죽주산성에서 바라본 죽산교차로 일대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포루가 있는 북치성, 남쪽 끝에는 남치성이 있다. 치성은 적이 접근하는 것을 조기에 관측하고, 적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본성의 바깥에 덧쌓은 성벽이다. 치성에 누각이 있으면 포루라고 한다.
북치성과 남치성에서는 죽산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죽양대로와 서동대로(옛 삼남대로)는 물론 죽산면과 일죽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북쪽으로는 용인시 백암면 백봉리, 남쪽으로는 일죽면 죽림리 뒤편으로 망이산성이 있는 마이산까지도 조망된다. 죽산은 남북으로 서울, 수원, 용인 등 경기지방과 진천, 청주를 거쳐 호남지방을 연결하고, 동서로 평택, 안성 등 호서지방과 음성, 충주를 거쳐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요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죽산은 동서남북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것이다.
죽주산성 북문
죽주산성 북문
죽주산성 북쪽 성벽
940년(고려 태조 23) 고려는 개산군을 죽주(竹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使)를 두었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한 초기 정세가 불안정했던 시기에 죽주는 왕실과 수주(水州, 수원), 충주, 진천, 청주 등 주변 호족세력들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고려 광종(光宗)은 죽주산성과 망이산성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죽주에 부왕 태조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眞殿寺院)인 봉업사를 창건하면서 이 지역은 왕실 세력의 거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 죽주산성의 외성을 수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 때는 죽주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때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광주(廣州)에 예속시켰다가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
죽주산성은 제3차 려몽전쟁(第三次麗蒙戰爭) 당시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죽주전투(竹州戰鬪)로 유명하다. 1229년 몽골의 칭기즈 칸이 죽자 칸에 오른 오고타이는 요동방면의 동진국(東眞國)과 금(金)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231년 8월부터는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려몽전쟁(第一次麗蒙戰爭)이다.
살리타이(撤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은 함신진(咸新鎭, 의주)을 거쳐 철주(鐵州, 철산), 삭주(朔州)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구주(龜州, 구성)를 공격했다. 이에 정주(定州), 삭주, 위주(渭州, 위원), 태주(泰州, 태천) 등의 수령과 장수들은 군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구주성으로 들어와 농성하면서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
구주전투(龜州戰鬪)를 이끈 사람은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와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이었다. 송문주는 박서 장군의 부하 장수로 구주전투에 참가했다. 고려군은 수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이를 잘 막아냈다. 몽골군은 결국 구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남진할 수 밖에 없었다. 송문주는 구주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낭장(郎將)에 올랐다.
제3차 려몽전쟁(第三次麗蒙戰爭) 때 송문주는 중랑장(中郎將)으로 죽주방호별감에 임명되었다. 몽골군이 남하하자 송문주는 군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죽주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면서 방어태세를 갖췄다. 1236년(고종 23) 몽골군이 드디어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송문주는 구주전투의 경험으로 몽골군의 공격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성에 포루를 마련하여 몽골군의 포격에 대비하였으며, 몽골군이 기름을 퍼붓고 불을 지르면서 화공(火攻)으로 나오자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여 마침내 15일 동안 지속된 죽주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몽골군이 끝내 죽주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포위를 풀고 물러가자 백성들은 송문주를 귀신으로 여겼다고 한다. 죽주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로 송문주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올랐다.
1363년에는 홍건군(紅巾軍)이 고려에 침입했다. 공민왕은 홍건군을 피해 개경에서 죽주-충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진했다. 홍건군이 물러가자 공민왕은 안동에서 청주-죽주를 거쳐 환궁할 때 봉업사에 들러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
죽주산성 서문과 외성
성산 정상부와 죽주산성 서쪽 성벽
죽주산성에서 바라본 비봉산
죽주산성에서 바라본 죽산면 죽산리, 장원리 일대
죽주산성은 조선시대에도 보수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성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토기, 자기, 기와류 등이 출토되었다. 외성에서는 이들 유물이 뒤섞여 나오고 있다.
예로부터 죽산은 삼남요로보장지진(三南要路保障之鎭)이라고 하여 기호지방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죽산은 한양과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 '주(州)'가 붙은 고을로서 도호부 이하는 ‘산’ 또는 ‘천’을 붙이는 관례에 따라 죽산현(竹山縣)으로 바꾸고 현감을 두었다. 죽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이후 473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1434년(세종 16)에는 충청도에서 경기도 관할로 옮겼고, 1543년(중종 38)에는 군(郡)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584년(선조 17)에는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6년(선조 29)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는 죽산 지역에 분행(分行), 좌찬(佐贊) 등 2역(驛)과 태평원(太平院), 보현원(普賢院), 통리원(通利院), 장항원(獐項院), 이원(梨院) 등 5원(院)원이 있어 공무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분행역과 좌찬역은 삼남지방을 잇는 중요한 역이었으며, 분행역은 죽산에서 가장 큰 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북쪽에 천북대교(川北大橋), 동쪽에 동부호교(東部戶橋), 서쪽에 관음석교(觀音石橋) 등의 다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죽산 주변을 흐르는 청미천에 놓인 다리들이었을 것이다.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죽산은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큰 피해를 입었다. 죽주산성은 조일전쟁(朝日戰爭, 1592~1598) 때에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제1차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삼남대로는 왜군 제2군의 북상로였으며, 죽산은 한양과 부산을 잇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종제이자 맹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죽산을 지키기 위해 죽주산성에 4천5백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전라도 소모어사(召募御史) 변이중(邊以中)은 우거지계(牛車之計)를 세워 죽주산성의 왜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안성에서 죽산의 왜군과 대치하고 있던 조방장(助防將) 황진(黃進)이 죽주산성을 기습 공격해서 탈환했다. 죽주산성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용인과 이천으로의 북진을 포기한 채 음죽(陰竹, 장호원)을 거쳐 충주 조령을 넘어 경상도 상주까지 도주했다.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부총병(副總兵) 오유충(吳惟忠)이 죽산을 지나 충주까지 진격해서 왜군을 물리쳤다.
조일전쟁이 끝난 뒤 죽주산성 전투 승리의 공로로 인조는 여주에 있던 수어후영(守禦後營)을 죽산으로 옮겨 여주, 음죽(음성), 안성, 양성, 양지의 군병을 소속시켰다.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오유충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죽주산성 동문 아래 비석거리에 남아 있다.
1895년(고종 32)에 죽산은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이듬해 죽산군(竹山郡)이 되었다. 1914년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죽산군을 폐지하면서 원일면과 근삼면, 원삼면, 근일면은 용인군에 편입시켰고, 나머지 면은 대부분 안성군에 편입시켰다. 1927년부터 천안에서 안성을 거쳐 이천의 장호원에 이르는 안성선(安城線) 철도가 죽산의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했다. 이천과 안성 평야지대의 미곡을 수탈해 가던 안성선은 1944년 태평양 전쟁 군수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철로를 뜯어내면서 사라졌다. 1992년에는 이죽면이 지금의 죽산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죽산은 교통의 요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선조들의 혼이 담겨 있는 문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의 관방시설이었던 죽주산성과 망이산성을 비롯해서 고려 태조의 진전사원이었던 봉업사지, 칠장사, 일명 태평미륵불 매산리석불입상, 미륵당오층석탑, 봉업사지석불입상, 봉업사지오층석탑, 봉업사지당간지주, 죽산리석불입상과 삼층석탑, 죽산리삼층석탑, 두현리석조삼존불입상, 죽산향교 등 많은 문화재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문화 유적들을 통해서도 당시 죽산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죽주산성 서문은 특이하게도 본성과 외성 사이 경사가 가파른 곳에 세워져 있다. 서문을 저런 곳에 세운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외성은 성산에서 서쪽의 비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 축조되어 있다.
죽주산성 남쪽 성벽
죽주산성 남문
남문은 현재 보수 공사 중에 있다. 규모와 구조는 북문, 서문과 비슷하다. 북문과 서문, 남문에 문루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은 경계와 관측을 위해 초병이 상주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기에 문루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죽주산성 샘터
죽주산성에는 수량은 비록 많지 않지만 샘터가 있어 군사들이 입보농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물은 입보농성용 산성의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식수가 없으면 대규모 부대가 장기간 머물면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충의사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오랜 세월 죽산 방어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죽주산성에는 현재 동서남북 4대문지(四大門址)와 장대지(將臺址), 치성(雉城), 포루(砲樓), 각루(角樓), 샘터 등이 남아 있다. 죽주산성의 구조는 성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내성(內城, 270m)과 내성을 둘러싼 중성(中城, 1,690m), 서벽에 잇대어서 축조한 외성(外城, 1,500m) 등 3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3m 안팎이다. 중성은 정상부와 동쪽으로 단을 이루며 내려가는 대지, 그리고 그 사이에 형성된 계곡을 감싸고 있다.
문지는 중성에 3개소, 외성에 2개소가 있다. 남문은 중앙부가 완만한 경사의 능선임을 고려하여 서벽 가까이에 만들었고, 서문은 본성과 외성 사이에 설치하였다. 서벽 주변은 지세가 험하여 성문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방향이 꺾이는 곳에는 각루를 두었고, 군데군데 치성과 포루를 설치하였다.
성산 정상부에는 제3차 려몽전쟁 당시 죽주산성전투에서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충의사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송문주 장군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말부터 허물어진 죽주산성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충분한 조사나 복원 계획 없이 보수 작업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오히려 소중한 문화유산의 원형을 훼손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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