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세계로 가는 길 백두대간 하늘재(525m, 명승 제49호) 참 오랜만에 걸어 본다. 2001년도던가 내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하늘재를 넘었으니 실로 15년만에 다시 온 것 같다. 세월이 참 쏜살같다는 생각이 든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바라본 하늘재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서 바라본 하늘재
백두대간 탄항산(炭項山, 856m)과 포암산(布岩山, 962m) 사이에 있는 하늘재는 동쪽의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觀音里)와 서쪽의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彌勒里)를 이어주는 고개로 서쪽 동달천(東達川)과 동쪽 신북천(身北川) 지류의 분수령을 이룬다. 동달천은 송계계곡을 통해 남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고, 신북천은 낙동강으로 합류하여 남해로 흘러든다.
한편, 관음리->하늘재->미륵리는 방향성 진행형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음리가 현세(現世)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세계라면, 미륵리는 미래세(未來世) 미륵불(彌勒佛)의 정토를 상징한다. 따라서, 하늘재는 현세와 미래세의 경계인 셈이다. 현세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미래세인 미륵불의 정토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늘재라는 이름도 고개가 높아서가 아니라 현세와 미래세를 이어주는 고개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붙여진 것이 아닐까? 관음리 쪽 하늘길은 포장도로지만 미륵리 쪽 하늘길은 비포장 옛길 그대로인 것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신라 제8대 왕, 재위 154~184)이 즉위하니 ..... 3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다. ..... 양강왕(陽崗王, 고구려 제24대 양원왕, ?~559)이 즉위하자 온달(溫達)이 아뢰기를 .....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雞立峴), 죽령(竹嶺) 이서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계립령은 곧 하늘재를 말한다. 하늘재는 서기 156년 신라(新羅)의 아달라왕이 한강 유역까지 북진을 위해 개척한 고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죽령(竹嶺) 옛길 개척보다 2년 앞선 것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신라는 하늘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북방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했으며, 고구려와 백제는 하늘재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동남방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고구려 온달(?~590)과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은 신라에 빼앗긴 계립령을 수복하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다. 이처럼 하늘재는 삼국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였다.
하늘재는 문화와 문물이 오고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불교는 바로 하늘재를 통해서 신라로 전해졌다.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는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으며,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58) 때 하늘재를 넘어 신라의 서북지방이었던 일선군(지금의 선산)에 불교를 전파했다.
하늘재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울고 넘었던 고개로도 유명하다.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더 이상 대항할 수 없게 되자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왕건에게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냈다. 항복을 반대한 마의태자는 대성통곡하면서 하늘재를 넘어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으로 들어가 추운 겨울에도 베옷(麻衣)만을 입은 채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원나라 때의 한족 혁명군인 홍건군(紅巾軍)이 개경까지 쳐들어왔을 때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은 하늘재를 넘어서 안동으로 몽진했다고 전한다. 홍건군은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의 인적 물적 지원이 필요했던 홍건군은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원나라 군대에게 쫓긴 홍건군은 만주의 고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부흥운동을 전재하고자 했지만 고려인들은 이마저도 거부하고 귀국하기 시작했다. 이에 홍건군은 고려에 대한 보복과 대몽항쟁에 필요한 식량, 물자 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늘재는 오랜 세월 남쪽과 북쪽 물산이 오고가는 교역로이기도 했다. 남쪽 영남지방에서 생산된 물산과 경기, 충청 등 북쪽 기호지방에서 생산된 물산의 많은 교역이 하늘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계립령은 속칭 겨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사투리로 서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28리에 있고 신라 때의 옛길이다.'라고 하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조령 북쪽에 계립령(鷄立岺)이 표시되어 있다. 계립령은 지릅재의 한자표기이다. 지릅재를 지름재 또는 의역인 경티(經峙), 기름재 또는 의역인 유티(油峙)라고도 불렀다.
고구려에서는 하늘재를 계립현(鷄立峴) 또는 마목현(麻木峴), 신라에서는 계립령 또는 마골참(麻骨站), 마골점(麻骨岾)으로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하늘재 북쪽에 대원사가 창건되면서 대원령(大院嶺) 또는 대원현(大院峴),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고개 부근에 한훤령산성(寒暄嶺山城)이 있어 한훤령(寒暄嶺)이라고 부르다가 뒤에 한원령(限院嶺)으로 변했다. 이 한원령이 한월령→한월재→하늘재 전음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재는 또 소리가 변하여 하니재 또는 하닛재, 높은 고개라는 뜻에서 한치, 한자로 천치(天峙)라 부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늘재는 참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414년(조선 태종 4)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 영남대로 새재(鳥嶺, 草岾)가 개통되면서 하늘재의 이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새재를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같은 관방요새로 축조하였다. 새재가 국방의 요새가 되면서 인적 물적 교통량이 대폭 증가하자 인근의 하늘재 등 다른 통행로들은 대부분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하늘재 옛길은 인적이 드문 길이 되고 말았다.
하늘길
하늘재에서 미륵리로 내려가는 하늘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원시림이 우거져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교향곡 6번(Symphony No.6 in F major, K. 43)을 들으면서 걷는 하늘길이 너무 좋다.
교향곡 6번(Symphony No.6 in F major, K. 43)은 1767년 모차르트가 11살 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시작하여 모라비아 올로모우크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모라비아는 체코 동부 지역으로 모차르트 가족이 비엔나에 창궐한 천연두 전염병을 피해 떠나 있던 곳이다.
모차르트 교향곡 6번은 그가 작곡한 최초의 4악장 교향곡으로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안단테, 3악장 미뉴에트와 트리오, 4악장 알레그로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이 교향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최초의 F키 곡이기도 하다. 모차르트 교향곡 6번의 초연은 1767년 12월 30일 체코 남모라바 주의 주도인 브르노에서 이루어졌으며, 자필 악보는 폴란드 마우폴스키에 주의 주도인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연아송
하늘길에는 피겨 여왕 김연아를 닮았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를 보니 김연아가 피겨 스파이어럴 시퀀스 동작을 위해 한쪽 다리를 뒤로 곧게 뻗어올린 채 상체를 앞으로 내민 자세와 꼭 닮았다. 연아송 곁에는 '연아 닮은 소나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박윤규 시인이 쓴 '김연아 소나무'라는 시도 붙여 놓았다.
김연아 소나무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녀였나
참수리 날갯짓 우아하고 강력하게
그랜드슬램을 이룬 어느 날
월악산 하늘재에
숨겨둔 날개옷 찾아 입고
하늘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연기를 펼치다가
차마, 지상의 사랑 떨치지 못하여
절정의 동작 그대로
한 그루 소나무가 되었구나
오, 하늘도 시샘할
천상의 스파이어럴이여!
나는 김연아가 출전한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중계방송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봤다. 특히 김연아가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스파이어럴 시퀀스를 연기할 때의 모습은 환상적이면서도 감동 그 자체였다. 김연아가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대국에 태어났더라면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연리목-친구나무
연아송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하늘재연리목-친구나무가 있다. 두 그루의 다른 나무가 가까이 자라다가 서로 둥치가 붙어서 한 나무처럼 되었다. 그래서 연리지(連理枝)라고 하지 않고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한 것 같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마치 한 나무처럼 서로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연리지의 원조는 동진(東晉)의 간보(干寶)가 쓴 수신기(搜神記)에 등장하는 ‘상사수(相思樹)’이다. 수신기에 '宿昔之間, 便有大梓木, 生於二冢之端, 旬日而大盈抱, 屈体相就, 根交於下, 枝錯於上. 又有鴛鴦, 雌雄各一, 恒栖樹上, 晨夕不去, 交頸悲鳴, 音聲感人. 宋人哀之, 遂號其木曰相思樹.'이란 구절이 있다. 풀이하면 '그날 밤 두 그루의 개오동나무가 각각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 되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 몸체가 구부러져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며,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송(宋)나라 한빙(韓憑)의 부인 하씨(何氏)는 천하의 절세미인이었다. 송의 강왕(康王)은 하씨를 빼앗고, 이를 원망하는 한빙에게 변방에서 낮에는 도적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강왕의 형벌에 한빙은 자살로써 저항하였다. 하씨 역시 왕과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누대 아래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화가 난 강왕은 두 사람을 합장하지 않고, 무덤을 서로 바라보도록 만들게 했다. 그랬더니 수신기 내용처럼 각 무덤 가에 개오동나무가 자라더니 서로 붙어 상사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사수는 바로 연리지 또는 연리목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연리지를 ‘비익연리(比翼連理)’라고도 한다. 비익은 비익조(比翼鳥)를 말한다. 비익조는 날개가 한쪽 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를 합쳐야만 날 수 있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연리(連理)'란 말의 최초 출전은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의 '又木生連理, 遠近奇之, 多往觀焉'이다. 풀이하면 '그 후 채옹의 집 앞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랐는데, 점점 가지가 서로 붙어 하나가 되었다. 원근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하여 모두들 와서 구경했다.'는 뜻이다.
후한 사람 채옹은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누운 3년 동안 계절이 바뀌어도 옷 한번 벗지 않았고, 70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죽자 그는 집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모친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이처럼 연리지는 원래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지극한 효성의 상징이었던 연리지는 훗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남녀 간의 사랑 또는 지극한 부부애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 예를 당나라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장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한가 끝부분에 '연리지'라는 말이 나온다.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하게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그 말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일곱 달 일곱 날 화청궁의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인적없는 깊은 밤 남몰래 말씀하실 제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위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시옵고
在地願為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셨지요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장구한 하늘과 땅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絕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면면하여 끊어질 날 없으리라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장시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었다. 총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장한가의 앞 74구는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으로 양귀비가 죽자 밤낮 애끓는 마음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현종의 고독한 모습을 노래했다. 뒤 46구는 양귀비를 못 잊어하는 현종을 안타깝게 여긴 도사가 선계에서 양귀비를 만나 현종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세를 들은 내용이다. 장한가는 소설과 희곡으로도 나오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늘길
하늘말나리
까치수염
하늘길에서 필자
하늘길에는 하늘말나리꽃이 한창이다. 말나리처럼 잎이 돌려나면서 꽃이 하늘을 향해서 피어나기에 하늘말나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얀 까치수염꽃도 피어 있다. 이 꽃에 왜 까치수염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까치는 수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치가 날개를 접으면 몸통쪽으로 하얀 수염 같은 무늬가 생긴다. 까치수염꽃이 꼭 이 무늬를 닮긴 했다. 이 흰 무늬를 까치수염으로 착각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산길을 걷다가 들꽃 산꽃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현세 관세음보살의 거주처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어 하늘길을 따라 2.5km를 내려가면 미래세 미륵불의 정토 미륵리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에 이르게 된다.
미륵불이 하생한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빈부귀천의 차별이 사라진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아닐까? 미륵사상의 혁명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백년하청 미륵불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저마다 미륵불이 되어야 한다. 미륵사상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빈부귀천의 차별이 사라진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여 저마다 미륵불이 되자~!
2016.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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