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觀音里)는 현세(現世) 복락(福樂)의 구세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정토를 상징하는 지명이다. 관음리에서 하늘 가는 길을 따라 백두대간(白頭大幹) 하늘재를 넘으면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彌勒里)이다. 미륵리는 미래세(未來世) 용화삼회(龍華三會)의 구세주 미륵불(彌勒佛)의 정토를 상징하는 지명이다. 관음리->하늘재->미륵리는 현세에서 미래세로 넘어가는 진행형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세 미륵불의 정토 미륵리는 서쪽의 마패봉(馬牌峰, 馬驛峰, 940m)에서 남서쪽의 부봉(釜峰, 935m)-남쪽의 탄항산(炭項山, 月項蔘峰, 856m)-남동쪽의 하늘재(525m)-동쪽의 포암산(布岩山, 962m)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장성처럼 둘러싸고 있다. 미륵리 북서쪽은 마패봉-지릅재(540m)-773m봉으로 이어지는 계명지맥(鷄鳴枝脈)과 773m봉-674m봉-연내골 들머리로 뻗어내린 능선, 북동쪽은 포암산에서 753m봉-만수골 들머리로 이어지는 능선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북쪽은 부봉에서 발원한 동달천(東達川)이 흐르는 송계계곡(松界溪谷)으로 이어진다. 미륵리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지라고 할 수 있다.
미륵대원지 전경
미륵대원지 전경
미륵리 오층석탑과 석등, 석조여래입상
험준한 백두대간 북쪽 기슭 해발 378m의 고지대 미륵리 안말에는 미륵하생과 용화삼회의 미륵정토(彌勒淨土)를 꿈꾸던 고려 전기의 대가람 미륵대원(彌勒大院)의 터가 있다. 이름하여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 사적 제317호)이다. 미륵대원지는 북향으로 조성된 석굴(石窟)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절터는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미륵리 대가람터는 바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미륵대원'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1의 신라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 항목에 '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계립령은 지금 미륵대원의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대원은 고려 말 충렬왕 대까지도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1977년과 1978년에는 청주대학교박물관, 1982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의 3차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3년금당개개와)’, '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명창3년대원사주지승원명)', ‘彌勒堂(미륵당)’, ‘彌勒堂草(미륵당초)’,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었다. '명창(明昌)'은 금(金)나라의 연호로 '명창 3년'은 서기 1192년(고려 명종 22)에 해당한다. 명문와를 통해서 고려 명종 22년에 미륵대원 금당(金堂)의 기와를 새로 이었고, 미륵대원지에 있던 절의 이름이 대원사였으며,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사찰임이 드러났다. 이후 기존의 ‘중원 미륵리사지’라는 명칭은 2011년 7월 28일 ‘충주 미륵대원지’로 변경되었다.
대원사를 미륵대원이라고 명명한 것은 절터 바로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륵리 원지(院址)에서는 마방 시설, 여행자 숙소 등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미륵대원은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사찰이자 지방행정과 교통에 중요한 기능을 했던 역원도 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90년 청주대학교박물관이 미륵리 안말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동서남북으로 회랑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대규모 절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절 안마당인 중정(中庭)에도 건물이 있었고, 건물지들의 기단 석렬 바깥쪽에 축대를 쌓았던 것도 확인되었다. 1991년의 발굴 조사에서는 남쪽 건물지의 기단 남면과 배수구, 석축 등이 새롭게 드러났다.
두 번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미륵대원지의 건물은 두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중수 때에 중간에 문지(門址)를 설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2중으로 겹쳐 복잡하지만 회랑처럼 동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북쪽 건물지 길이는 1차 건물이 31m, 2차 건물이 58m이다. 남쪽 건물지는 정면 13칸의 대형 건축물로서 기단 길이가 61.4m, 폭 7.4m이다. 동쪽 건물지는 측면의 기단과 초석 등이 유실되어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서쪽 건물지는 성벽형(城壁形) 석축으로 폭이 좁고 기단 윗면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건물지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남쪽 건물지에 있었다는 정면 13칸의 건축물은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웅전으로서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법당인 천안의 각원사(覺願寺)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륵대원지 석굴 전실(前室)의 목구조는 13세기에 소실되었다가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들어와 크게 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굴 전실 목구조는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서야 수리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은 1936년에 발생한 큰 수해를 입고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로 왕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예도 많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원(寺院)이 정치, 사회,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절터와 건물지의 규모로 볼 때 미륵대원지는 고려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미륵대원지는 계립령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늘재를 넘었다. 이때 누이 덕주공주(德主公主)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짓고 남향으로 마애불을 조성하자, 마의태자는 미륵리에 북향의 석굴을 짓고 석불을 세워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전설은 미륵대원이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음을 시사한다.
미륵대원지에는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6호),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95호), 삼층석탑(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석등(石燈,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사각석등(四角石燈,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 귀부(龜趺,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석조보살의좌상(石造菩薩倚坐像,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7호), 불두(佛頭, 충주시 향토유적 제9호), 연화문 당간지주(蓮花紋幢竿支柱), 불상대좌(佛像臺座)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다.
미륵대원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일 뿐만 아니라 석조와 목조를 결합한 복합양식의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륵리 석등과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대원지 남단 가장 높은 곳에는 면적 80.454㎡ 규모의 석굴 불전이 있다. 현재 석굴의 상부구조는 남아 있지 않고, 하부 석실만 남아 있다. 사각형의 주실(主室)은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웅장한 규모로 석조여래입상을 둘러싸고 있다. 석축 상부에는 목조가구로 결구한 천장이 있었으며, 전실(前室)은 목조로 된 반축조 석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실은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석실의 양쪽 옆면과 뒷면 중간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浮彫)하였다.
미륵대원지의 중심 영역에 자라잡은 석굴의 중앙 대좌에는 높이 10.6m의 거대한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이 북향하여 월악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불상은 모두 5매의 화감암을 다듬어 쌓아 올려 조성했다. 머리 위에는 얇은 돌 1매로 팔각형 갓을 깎아서 얹었다. 불상 앞에는 제단을 설치했다. 제단은 2매의 사각형 돌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2매의 석판을 올렸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부조되어 있다. 얼굴은 원만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았으며, 코뿌리에서 이어진 눈썹은 반달 모양이다. 코는 나지막하지만, 콧볼은 또렷하고 맵시가 있다. 입은 작고 도톰하게 표현하였다. 귀는 큼직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팔은 다소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펴서 오른쪽 가슴 위에 댔고, 상복부에 댄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약합을 든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조성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명과 사찰명이 모두 미륵이기 때문에 미륵불로 신앙된 것으로 보인다. 수인(手印)이나 지물(持物)로 명호를 확정하기 어려운 불상이다.
대의는 통견이며, 옷주름은 도식적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 부분에서 바깥쪽으로 약간씩 돌아가게 나타냈다. 불상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대의 밑으로 나온 맨발의 두 발도 빈약하다.
대좌는 크기가 작아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대좌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문양이 없어서 자연석처럼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이나 충주 용담사 석불입상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어 미륵리 석조여래입상과 좋은 비교가 된다.
얼굴에 비해 매우 긴 신체는 발끝까지 거의 같은 폭으로 내려와 돌장승처럼 보이며, 입체감도 부족하다. 특히 3단석이 2단석 위에 약간 어긋나게 놓여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느낌을 준다. 경직된 얼굴 표정, 장승처럼 표현된 불신 등은 고려 전기 석불입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그리고, 미륵대원지 석굴 불전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 목조 반축조 양식의 석굴사원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불상의 조성에는 나말려초 충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을 비롯한 충주유씨(忠州劉氏) 세력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지 석조보살의좌상
미륵대원지 석조보살의좌상
석굴의 동쪽 석축과 제단 사이에는 석조보살의좌상(石造菩薩倚坐像,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7호)이 놓여 있다. 판석의 한 면에 높이 95cm, 어깨폭 27cm 크기로 부조된 이 불상은 의자에 앉아 있어 의상(倚像) 또는 의좌상(倚坐像)이라고 불린다. 뒷면이 대충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은 고려 전기 석굴 조성 당시 석축 벽면에 결구되었던 부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네모진 탁자형 의자는 모서리마다 다리가 달려 있다.
불상은 하반신보다 상반신이 길고 크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쓴 것으로 보이지만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은 파악하기 어렵다. 귀는 커서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목에는 희미하지만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마모가 심하여 법의 형태나 옷주름은 알아볼 수 없다. 두 팔은 신체에 비해 길게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구부려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려 무엇을 쥐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은 펴서 배꼽 부위에 대고 엄지와 집게로는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하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렸고, 오른발을 꺾어서 왼쪽 종아리 뒤에 대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꺾은 것은 반가좌도 아니고 현실에서는 취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자세다.
석조보살의좌상은 석굴의 벽면석(壁面石)으로 활용된 부재가 아니라 석조여래입상의 협시보살로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손의 모양을 보면 마치 연꽃가지를 받쳐들고 있는 전형적인 보살상이다. 미륵불의 좌보처는 법화림보살(法花林菩薩), 우보처는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이다. 보살은 보통 연꽃을 들고 있는 손 모양을 하고 있고, 연꽃은 바깥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 불상이 미륵삼존불의 협시라면 좌보처 법화림보살일 것이고, 손 모양이 반대로 된 불상이 하나 더 있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다면 이 불상은 석조여래입상의 왼쪽으로 옮겨야 한다.
미륵대원지 석등
석조여래입상과 오층석탑을 잇는 미륵대원의 중심축 중간쯤에는 석등(石燈,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 세워져 있다. 간주석(竿柱石)과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이 팔각형으로 되어 있어 팔각석등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2.3m이다.
불교에서 석등은 부처의 진리와 자비의 빛을 비춰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석등은 사찰의 주불전이나 석탑의 정면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등의 양식으로 보아 석조여래입상, 오층석탑과 비슷한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기에 창건된 미륵대원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석조여래입상, 석등, 오층석탑을 건립할 정도로 사세(寺勢)가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크게 기단부(基壇部)와 화사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 지대석(址臺石)은 땅속에 묻혀 있어 사각형이라는 것 외에는 자세한 형태를 알 수 없다. 하대석(下臺石)은 복련(覆蓮)을 돋을새김하여 장식했다. 하대석 상면에는 팔각 굄대를 두고, 그 사이에 홈을 파서 팔각형의 간주석을 견고하게 끼워 넣었다. 간주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간주석 위에는 낮은 굄대를 놓고, 앙련(仰蓮)으로 장식한 상대석(上臺石)을 올렸다.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화문은 고려 전기의 양식이다. 화사석은 네 곳에 사각형 화창(火窓)을 마련하고, 화창이 없는 면은 너비를 좁게 하여 부등변팔각형을 이루고 있다. 화사석은 밑에서 1/3 지점이 파손되어 금이 가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落水面)은 경사가 완만하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낙수면이 만나는 마루 끝의 합각부(合閣部)를 살짝 치켜 올려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上輪部)는 팔각의 낮은 받침대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렸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등 양식을 계승하면서 장식이나 치석 수법 등 부분적으로 고려 전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석등은 고려 전기의 석등 중에서도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륵리 오층석탑
미륵리 오층석탑
미륵대원지 중심축의 끝에는 높이 6m의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이 세워져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塔身部)의 양식으로 볼 때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미륵대원이 크게 중창될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석탑은 신앙과 예배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석탑은 사찰의 금당 앞마당인 중정 한가운데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는 바로 미륵대원의 중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의 기단부는 단층 기단으로 하부가 땅속에 묻혀 있어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석탑이라면 대석(臺石)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석부(面石部)는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는 모각하지 않았다.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갑석의 낙수면을 옥개석처럼 경사지게 하고, 하부에 1단의 부연(副椽)을 표현한 것은 특이하다. 갑석의 너비는 면석에 비해 다소 좁고,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갑석 상부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굄을 각출(角出)하여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전체 5층이며, 탑신석 1층은 상당히 높은데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드는 심한 체감비례를 보인다. 2층 이상 탑신석의 체감률은 미세한 편이다. 1~5층 탑신석에는 우주를 좁게 모각했고, 탱주는 생략했다.
옥개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다. 1층 옥개석은 4매, 나머지는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석 정상면에는 낮은 굄을 모각하여 위층의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률을 보여준다. 낙수면은 좁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합각부의 반전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1층이 6단, 2층 이상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노반은 큼직하고 층급받침 같은 것이 모각되어 있어 마치 6층 옥개석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복발은 조각이 없는 반구형(半球形)이며, 찰주가 남아 있는 것은 그 예가 드물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가 간략화 경향을 보이고, 탑신석의 치석 수법도 투박한 편이다. 탑신석과 옥개석 층급받침 하단의 결구도 치밀하지 못하다. 또, 탑신석에 비해 옥개석의 너비가 비교적 좁고, 층급받침의 너비도 좁아서 석탑의 외관이 다소 둔중한 느낌을 준다.
미륵리 오층석탑은 비교적 대형 석탑이다. 갑석과 옥개석이 부분적으로 파손되기는 했지만 석탑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5단의 옥개석 층급받침, 직선형 추녀 등을 통해서 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석탑은 대형화, 고층화되고 치석의 소략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석탑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고려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평리 칠층석탑(塔坪里七層石塔, 중앙탑, 국보 제6호)과 더불어 충주 지역의 대표적인 석탑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에서 석등, 오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미륵대원지 중심축에서 동쪽으로 몇 미터 벗어난 지점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사각석등(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이 세워져 있다. 석등은 사찰의 중요 석조건축물 중 하나로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이나 석탑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 사각석등은 원래 오층석탑의 북쪽 정면에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 화사석, 옥개석 등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 지대석은 방형 판석을 놓았는데,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지대석 위에는 크고 투박한 복판 복련문을 새긴 하대석을 올렸다. 사각기둥형으로 다듬은 간주석은 하대석 상면의 사각형 홈에 끼워 고정시켰다. 간주석에는 연꽃봉오리형 안상(眼象)을 두고, 그 안에 좌우대칭의 화형(火形) 문양을 새겼다. 상대석은 하대석에 비해 비교적 정교한 복판 앙련문으로 장식했다. 앙련문은 각 면의 한가운데에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
화사석은 모서리마다 세운 원주형 기둥만으로 옥개석을 받치도록 한 다소 특이한 구조이다. 화사석 기둥 하나는 금이 가 있는 상태이다. 옥개석 가운데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합각부는 약간 돌출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사각형 받침대만 올려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사라지고 없다.
미륵리 사각석등의 간주석과 화사석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특이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개경 일대에 세워진 현화사(玄化寺), 개국사(開國寺) 등의 고려시대 석등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이다. 새로운 양식의 석등들은 미륵대원지나 충남 논산의 관촉사(灌燭寺) 등 대부분 고려 초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특정 사찰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미륵리 사각석등이나 관촉사 석등은 개경에서 시작된 새로운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미륵대원지 발굴 석재
사각석등 바로 북쪽 잔디밭에는 미륵대원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대석(臺石), 초석(礎石), 장대석(長臺石) 등이 나열되어 있다. 특히 초석은 초반(礎盤)과 부좌(副座), 운두(蕓頭), 주좌(柱座)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미륵대원지 발굴 석재를 나열해 놓은 잔디밭 바로 북쪽 아래에는 석조귀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가 우람한 자세로 앉아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본 귀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귀부이다. 실제로 이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귀부가 워낙 크고 무거워서 옮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래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쪼아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귀부는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인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신(碑身) 받침으로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능비(陵碑)나 탑비(塔碑)를 중심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오늘날에도 귀부는 석비를 조성할 때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고 있다.
미륵대원지 귀부는 지대석이 없이 그대로 땅 위에 올려져 있다. 귀두(龜頭)와 귀신(龜身)의 형태를 갖추고, 상부에는 비신을 고정하기 위한 홈이 마련되어 있지만 비신은 전하지 않는다. 귀두는 목을 앞쪽으로 내민 형상이다. 입과 코는 소략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눈은 분명하지 않다. 오른쪽 앞발은 돌출되게 조각했지만 왼쪽 앞발과 뒷발, 꼬리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귀갑은 경사지게만 치석하고, 귀갑문(龜甲紋)을 새기지 않아 투박한 인상을 준다. 귀갑 측면에는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귀갑대(龜甲帶)도 일부만 표현되어 있다. 귀갑의 왼쪽 앞등 경사면에는 등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가는 두 마리의 새끼 거북이가 표현되어 있어 이채롭다. 또 귀갑의 비신 고정 홈 전하방에는 받침 형태의 단이 새겨져 있다.
미륵대원지 귀부는 사각석등처럼 사찰의 중심축선을 동쪽으로 약간 벗어난 지점에 있다. 귀부의 전체적인 조각 기법은 어색하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초대형으로 조성된 이 귀부는 조각 기법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귀부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반적인 귀부의 형태와 다를 뿐만 아니라 치석 수법이 거칠고, 정 자국이 일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귀부를 조성하다가 중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용도로 조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형태를 볼 때 귀부로 치석되었음이 분명하다. 만약 미완성의 작품이라면 귀부의 치석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미륵리 연화문 당간지주
석조귀부 바로 북쪽 아래 미륵대원지 중심축선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난 곳에는 연화문 당간지주를 모아서 눕혀 놓았다. 당간지주는 표면이 잘 다듬어져 있으며, 바깥쪽 면의 연화문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하나는 위쪽 1/3 지점 연화문 우상방 부분을 비스듬하게 가르면서 두 동강이 나 있다.
사찰 입구에 당(幢)을 내거는 것은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불법(佛法)을 수호하여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또 사찰의 대외적인 위상을 드높이고, 종파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을 걸기 위해 세운 당간지주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초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대부분의 사찰에서 당간지주를 세워 사찰의 위상을 널리 드날리고자 하였다. 미륵리 연화문 당간지주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륵대원이 창건된 이후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의 중심축을 고려할 때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연화문이 있는 두 지주는 하단부가 절단되어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주부의 폭과 너비로 보아 원래는 매우 크고 높은 지주였을 것으로 보인다.
치석 기법은 다르지만 당간지주의 간대석(竿臺石)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또 하나 남아 있다. 하지만 미륵대원지에 2기의 당간지주가 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당간지주를 보수하거나 중건하는 과정에서 다른 용도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간대석으로 보강하여 끼웠을 가능성이 크다.
당간지주 간대석은 길고 큰 사각형의 석재를 대강 다듬어 상면 중앙에 이중의 원좌를 새기고, 그 한가운데에 당간을 세워 고정시킬 각변 16㎝, 깊이 7㎝의 사각형 구멍을 뚫었다. 간대석의 이런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尙州伏龍里幢竿支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나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당간지주, 서산 동문동 당간지주(瑞山東門洞幢竿支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에서도 확인된다.
지주의 바깥 모서리는 각지지 않게 깎았으며, 정상부는 내상방을 향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지주 정상부 곡선 부분에는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고, 세로띠 바로 아래에는 연화문을 돋을새김하여 장식하였다. 연화문은 6엽의 큼직한 선문대(線紋帶)를 돌리고, 연판은 둥글게 조각하였다. 연판 사이에는 간엽이 있고, 간엽의 끝부분은 살짝 들어 올리는 멋을 부렸다. 당간을 고정하는 간(杆)은 지주 안쪽 꼭대기에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고정하였다. 간공(杆孔)의 시공 여부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중 1주는 1976년 미륵리사지 정비 작업 당시 발견되었고, 다른 1주와 간대석은 충주 미륵대원지 1차 발굴 때에 발견되었다. 최근 지주 하단부로 보이는 석재도 발견되었다. 지주 하단부는 땅에 묻히는 부분이기에 거칠게 치석한다. 따라서 이 석재는 눕혀져 있는 당간지주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간지주들을 미륵대원지 입구에 눕혀 놓고 방치할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하여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륵리 연화문 당간지주는 비록 파손되기는 했지만 치석 수법이 정교하고, 연화문을 새긴 점이 특이하다. 당간지주에 연화문을 조각한 예는 통일신라시대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慶州普門洞蓮華文幢竿支柱, 보물 제910호)와 고려시대 고창 흥덕 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에서만 나타날 정도로 희귀한 작품이다. 연화문 당간지주는 경주에서 시작하여 지방으로 전파된 양식이다. 따라서 미륵대원지 연화문 당간지주는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 주변에 있었던 월광사(月光寺)나 덕주사(德周寺),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 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역할을 한 사찰이었음에도 아직까지 당간지주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이들 사찰들보다 미륵대원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미륵리 사지 바위
미륵대원지 중심축선을 사이에 두고 연화문 당간지주 맞은편에 사각기둥형으로 치석한 화강암 바위가 서 있다. 꼭대기 봉긋하게 솟은 부분 둘레에도 치석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석은 분명 아니다. 미륵대원지 문화해설사들도 모르는 이 바위는 왜 이 자리에 있으며,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곳이 사찰 중간에 설치했다던 문지는 아니었을까? 바위의 생김새를 바탕으로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도무지 모르겠다.
미륵리 온달장군 공깃돌 바위
미륵리 온달장군 공깃돌 바위
오층석탑 서쪽 개울 건너편 바위 위에는 고구려 장군 온달(溫達, ?~590)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바위가 있다. 온달장군이 지름 1m쯤 되는 이 큰 바위를 공깃돌 다루듯이 가지고 놀았다는 전설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온달은 비천한 평민 출신으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평강왕의 공주와 결혼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사람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연세대학교 지배선 교수는 온달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온달은 과연 미륵대원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온달전'을 보자.
'陽岡王(陽岡王 當作嬰陽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왕에게 '지금 신라가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군대를 주시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이 길을 떠날 때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마침내 떠나가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십시다.' 하니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하였다.'
미륵대원지와 관련된 지명은 '계립현', '죽령', '아단성' 등이다. 계립현은 지금의 하늘재이고, 죽령은 지금 이름 그대로다. 문제는 아단성이다. 제주대 장창은 교수는 '고구려 온달 장군이 출정했던 아단성(阿旦城)은 서울 아차산성(阿嵯山城)이 아니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온달이 출정한 아단성 위치를 놓고 논란이 많다'며. '고구려가 6세기 후반 온달을 앞세워 되찾으려던 지역이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고, 계립령과 단양 온달산성 주변에 온달 관련 설화와 전설이 아차산성보다 더 많은 점을 고려하면 아단성은 지금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게 옳다'고 말했다.
삼국시대 당시 계립령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라에 빼앗긴 실지 회복을 위해 온달 장군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미륵리까지 왔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곳에 진주한 온달 장군이 실제로 저 공깃돌 바위를 만졌을지도 모른다.
미륵리 원터
미륵리 원터
미륵대원지 입구 하늘재로 오르는 길 초입에는 고려 초기의 원터(院址)가 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이 지역 중심 사찰이었던 미륵리 미륵대원사 창건과 더불어 기호지방(畿湖地方)-충주-문경-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계립령에 원(院)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립령 너머 문경 관음리에 있는 절터도 미륵대원처럼 원의 역할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 결과 두 차례에 걸쳐 원의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의 형태는 回자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을 설치하고, 마방을 둘러싼 건물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 계립령로에 자리잡았던 이 원은 조선시대로 들어와 조령이 개통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갔다.
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공무 여행자들을 위해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국영 교통 숙식 시설, 즉 국립 여관이었다. 원은 대개 역(驛)의 중간 지점에 설치되기에 역원이라고도 한다. 객관(客館) 또는 객사(客舍)라고도 했던 관(館)은 군현의 읍치(邑治)에 있다는 점에서 원과 구별된다.
미륵리 계립령로 하늘재 들머리
미륵리 원터 바로 앞은 계립령로 하늘재 들머리이다.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곧 다시 만난다. 여기서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5km의 거리다. 특히 눈 오는 날 하늘길을 걷는 운치는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약 500m쯤 올라가면 대광사(大光寺)가 있다. 대광사는 한국불교 재단법인 선학원 충주시지부 소속 사찰이라고 한다.
미륵대원지 삼층석탑
미륵대원지 삼층석탑
미륵리 하늘재 들머리에서 대광사 방향으로 50m쯤 떨어진 언덕 위에는 미륵대원지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세워져 있다. 석탑의 높이는 3.3m이다.
주변 지형을 볼 때 석탑이 세워진 자리는 사찰 경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석탑은 허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사탑(裨補寺塔)의 기능을 겸하여 계립령로 하늘재를 넘나들던 여행자들의 무사안전을 불력(佛力)에 의지하고자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교통로 주요 지점에 세워진 것으로 볼 때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예배소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진 석탑은 고려 초기에 들어와 전국 각지에 많이 세워졌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의 여행자들은 이 석탑 앞에서 간단한 예배를 올리고 하늘재를 넘었을 것이다.
기단부는 상하 2층, 탑신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는 바닥에 넓게 깐 지대석 위에 하대저석을 놓고, 그 위에 굄대와 면석을 짜맞춰 하층기단을 올렸다. 하층기단 면석부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하대갑석은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상층기단은 4매로 구성되었으며, 면석부에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대갑석도 1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갑석의 하부에는 다소 높은 부연을 마련하였고, 낙수면은 아주 완만한 경사가 져 있다. 상대갑석 상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굄을 두었다. 상대갑석의 한쪽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탑신부는 옥개석이 넓고 탑신석이 작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느낌을 준다. 1층 탑신석은 2~3층에 비해 상당히 높으며,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상당히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옥개석 하부의 층급받침은 4단이고, 낙수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1층 옥개석 상면에는 1단의 탑신굄을 두었다. 2층 옥개석의 전각(轉角) 부분은 1층 옥개석에 비해 약간 날카롭다. 3층 옥개석과 노반의 상면 중앙에는 탱주공(撑柱孔)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과 복발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이 석탑은 하대갑석 상면의 면석굄, 상층기단의 우주와 탱주의 모각, 상대갑석의 부연과 상면의 탑신굄, 1층 탑신석과 2·3층 탑신석의 비례, 옥개석의 낮은 체감률과 층급받침 수가 같은 점, 낙수면의 현수곡선 등이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단부의 결구 수법이 간략하고, 기단 면석의 우주를 외곽의 결구 부재로 대체한 점, 탑신석의 간략한 우주 모각,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에서 4단으로 감소하는 등 전체적으로 간략화 또는 형식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은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 불두
미륵리 불두
미륵대원지 삼층석탑에서 하늘재 쪽으로 조금 떨어진 길가에는 미륵리 불두(佛頭, 충주시 향토유적 제9호)가 있다. 이 불두는 2000년 9월에 도난당했다가 3년만에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불두를 올려 놓은 불신과 지대석은 새로 조성한 것이다. 불두 옆에는 직육면체형으로 치석한 바위가 놓여 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불두를 올려 놓으려고 마련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두는 높이 138cm, 너비 118cm로 거대한 크기이다. 불두의 전체적인 모습은 사다리꼴 또는 역삼각형에 가깝고, 머리 윗부분은 칼로 자른 것처럼 편평하다. 머리 위에 보관을 올려 놓으려고 편평하게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얼굴은 코와 눈썹을 제외하고는 현대 조각 작품처럼 매우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불상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코와 입 사이에는 3줄의 주름선이 선명하다. 입은 작고 입술도 얇아서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불상을 조성하다가 중단한 미완성 불두로 보인다.
하늘길 용화정토 미륵대원지에서 미륵불을 생각하다. 기복신앙 대상으로서의 미륵신앙은 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혁명가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이야말로 미륵하생이었는지도 모른다. 5.18 광주민중항쟁도 용화정토를 건설하기 위해 미륵불들이 들고 일어난 것인지 모른다. 미륵불은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부처이다. 정의와 자비의 메시아가 곧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하늘에서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이 땅에 정의와 자비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 체 게바라가 바로 미륵불이요,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 전태일, 광주 시민군이 바로 미륵불이다.
2016.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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