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안성 칠현산 칠장사를 찾아서 2

林 山 2016. 7. 6. 17:45


칠장사 명부전


중정의 서편 원통전 바로 앞에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명부전은 자연석 외벌대 기단, 자연석 초석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측면 3칸 중 양쪽 두 칸은 협칸이다. 외벽에는 궁예, 혜소국사와 일곱 도적, 임꺽정을 그린 벽화가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궁예에 관한 벽화가 가장 많다. 궁예는 13살이 될 때까지 말타기. 활쏘기 등을 익히며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칠장사 경내 부도전은 궁예가 활쏘기를 연마했던 활터로 알려져 있다. 궁예는 칠장사 근처 죽주산성에 근거지를 마련했던 기훤(箕萱)에게 자신을 의탁했었다. 따라서 궁예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가 있어 보인다. 궁예는 27세가 되던 해 출가하여 영월의 세달사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궁예는 종간, 은부, 허월 등과 교유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궁예 궁습도

 

궁예 기마도


궁예 참선도


궁예 교유도


궁예 벽화의 내용은 용덕태자(龍德太子, 궁예)가 5살 때 활쏘기를 연마하는 것을 유모가 바라보는 장면, 궁예 기마도, 선종대사(善宗大師, 궁예) 참선도 등이다. 또, 궁예가 심복, 동자승과 함께 있는 장면을 그린 벽화도 있다. 


혜소국사 벽화는 일곱 명의 도적이 국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장면, 나한전 나옹송에 학이 날아드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물 때 절 주위에는 일곱 명의 도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도적 하나가 목이 말라 절의 샘으로 물을 마시러 갔다. 샘물을 뜨려고 바가지를 보니 순금이 아닌가! 흥분한 도적은 물을 얼른 떠 마시고는 누가 볼세라 바가지를 품 안에 슬쩍 집어 넣고 소굴로 돌아왔다. 나머지 도적들도 물을 마시러 갔다가 금바가지를 발견하고는 하나씩 옷 속에 감춘 채 소굴로 돌아왔다.


혜소국사와 7인의 도적도


나한전 나옹송도


그런데 먼저 물을 마신 도적이 소굴로 돌아와서 보니 몰래 가지고 온 금바가지가 이상하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다른 도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적들은 곧 혜소국사가 신통력을 부린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날부터 도적들은 혜소국사의 제도를 받고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라한과를 얻은 7인의 도적은 나한전에 봉안되었다. 칠현산, 칠장사의 유래가 된 이야기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혁명가 중 사람인 임꺽정 벽화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그렸다. 벽화에는 임꺽정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임꺽정이 큰 바위를 들어올려 힘자랑을 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임꺽정 기마도는 분전반에 의해 벽화의 1/4 정도가 가려져 있다. 


임꺽정 기마도


임꺽정 용력도


병해대사는 원래 가죽신을 만들던 갖바치였다. 조선시대 갖바치는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던 대표적인 천민계급이었다. 병해대사는 칠장사에 머물면서 안성 지역의 백성들에게 가죽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들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 나누면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안성의 백성들은 점차 병해대사를 생불로 여기고 그를 따르며 존경하게 되었다. 


병해대사를 정신적 지주로 삼은 임꺽정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칠장사를 드나들었다. 그때까지 말을 타본 적이 없던 임꺽정은 병해대사로부터 기마술도 배웠다. 병해대사가 85세로 입적하자 임꺽정은 그를 기리는 목불을 만들어 칠장사에 모셨다. 병해대사를 생불로 존경했던 안성의 백성들이 힘을 모아 목불을 조성했다는 설도 있다. 칠장사는 당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낡은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혁명의 불씨를 키워가던 그런 사찰이었다. 


홍명희의 소설에서는 안성 관아의 감옥에 갇힌 막봉이의 탈옥을 모의하던 중 병햬대사가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을 목불상으로 만들어 모시는 장면이 있다. 목불상 앞에서 임꺽정을 비롯한 일곱 명이 의형제를 결의하는 장면은 혜소국사와 일곱 명의 도적을 연상케 한다. 장길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청룡사 남사당 광대패 출신이었다. 일곱 도적도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미륵하생을 도모하던 혁명가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하면 당시 안성 지역은 조선왕조라는 낡은 질서를 타파하고 미륵하생으로 천지개벽을 꿈꾸던 혁명의 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는 홍명희의 장편 대하소설 '임꺽정(林巨正)'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하여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나도 가지고 있던 '임꺽정' 전권을 경찰에 압수당한 바 있다. 


명부전 정면 기둥에는 지장보살을 찬양하는 주련이 걸려 있다. 주련의 글귀는 지장경(地藏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지장대성님의 신통력은 위엄 있어라

恒河沙劫難說盡(항하사겁난설진) 항하사겁 동안 설해도 다하기 어려워

見聞瞻禮一念覺(견문첨예일념각) 견문 첨례 일념으로도 깨달음 얻으니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중생을 이롭게 하심이 헤아릴 수 없네

         

명부전 법당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명부전 시왕상


명부전 시왕상


명부전에는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 뒤에는 후불탱화로 지장시왕도가 걸려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모시므로 지장전,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이 바로 명부전이다. 


칠장사 명부전 지장보살좌상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앉아 있다. 얼굴은 통통한 편이고 상호는 원만하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겨 있다. 평형을 이룬 콧등과 유난히 크게 강조된 귀가 특이하다. 착의법과 옷주름은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거의 같다. 목걸이 장식과 갑대는 착용하지 않았고, 수인은 동시대의 지장보살상들과는 달리 손의 좌우가 반대로 된 하품중생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 좌우에는 젊은 비구의 모습으로 합장을 한 도명존자와 높은 관을 쓰고 손에는 홀을 든 무독귀왕 입상이 협시하여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지장삼존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 벽면을 따라 1 진광왕(秦廣王, 不動明王), 2 초강왕(初江王, 釋迦佛), 3 송제왕(宋帝王, 文殊菩薩), 4 오관왕(五官王, 普賢菩薩), 5 염마왕(閻魔王, 地藏菩薩), 6 변성왕(變成王, 彌勒菩薩), 7 태산왕(泰山王, 藥師如來), 8 평등왕(平等王, 觀世音菩薩), 9 도시왕(都市王, 大勢至菩薩), 10 전륜왕(轉輪王, 阿彌陀佛) 등 시왕과 판관, 기록과 문서를 맡는 녹사(錄事), 문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 등을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시왕은 왼쪽에 1, 3, 5, 7, 9 왕, 오른쪽에 2, 4, 6, 8, 10 왕 순으로 도열해 있다.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고, 판관과 녹사는 시왕 사이사이에 선 자세로 배치되어 있다. 


1 진광왕, 2 초강왕, 3 송제왕, 7 태산왕, 8 평등왕, 9 도시왕은 엄숙한 표정으로 공복 차림에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손에는 홀을 쥐고 있다. 4 오관왕의 머리에는 8괘를 그린 검은색 판을 올려 놓았다.  5 염마왕의 머리에 얹어 놓은 것은 금강경이다. 손에는 망자 생전의 선악행위가 적혀 있는 장부를 들고 있다. 6 변성왕은 오른손을 치켜들고 있다. 10 전륜왕은 반가부좌 자세로 투구를 쓴 장군의 모습이다. 


입상의 무독귀왕과 판관은 전반적으로 시왕상의 양식과 거의 같다. 사자상은 깃대를 들고 두 발을 벌린 자세로 당당하게 서 있다. 금강역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칼을 들어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표정이 매우 험상궂으면서도 해학적이다. 맞은편 금강역사는 불끈 쥔 주먹으로 내려치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마귀들이 금강역사를 만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것 같다. 


지장시왕도는 불교의 지옥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탱화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등 좌우협시, 시왕과 판관 등을 함께 도설한다. 지장시왕도는 지장신앙과 시왕신앙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시왕 중 7왕에게 7일 동안씩 차례로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업(罪業)의 경중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시기에 맞춰 행하는 천도의식이 49재(四十九齋)이다. 49재는 망자가 다음 생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종교의식이다49일이 지나면 망자는 백일, 1주년, 3주년 되는 시기에 나머지 3왕에게 심판을 받아 육도 가운데 한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 '시왕경'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선찰(禪刹)에서도 시왕을 모시는 경우가 있다. 시왕은 욕계(欲界)의 6천(六天)과 4선천(四禪天)의 왕들을 일컫기도 한다. 시왕도는 지옥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불화로, 상단에는 시왕이 좌우에 권속을 거느리고 탁자에 앉아 죄인을 심판하는 장면, 하단에는 형벌을 집행하는 옥졸들과 고통에 가득찬 죄인들을 도상화한다. 


명부전 영단(靈壇)에는 감로탱(甘露幀)을 걸기도 한다. 감로탱의 화면은 보통 삼단으로 구성된다. 하단의 중생들이 죽으면 그 영혼들이 중단의 의식을 통해서 상단의 불보살들에 의해 구원되어 극락왕생한다는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도설된다. 


지장보살상 연화대좌 하단의 묵서명과 시왕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하여 명부전 조각상들은 1706년(강희 45, 숙종 32)에 금문(金文), 청윤(淸允) 등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상의 복장에서는 1634년(인조 12)본과 1677년(숙종 3)본 등 두 권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1과 조선 후기의 의식집이 발견되었다.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불사에서 화주였던 사간(思侃)은 1726년(영조 2) 지금의 명부전을 건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체는 매우 생동감이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작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또 조성 연대와 조각승이 기록되어 있어 시대적 또는 유파적 특징과 변천을 살펴볼 수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칠장사 극락전


극락전 법당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좌상


꺽정불 하단의 '奉安 林巨正'이라고 쓴 삼베조각 


극락전 법당 불단에는 본존불인 목조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아미타불 대좌 아래 좌우에는 2구의 작은 불좌상이 있다. 아미타삼존상 뒤에는 6구의 지장보살 입상이 세워져 있다. 그 뒤에는 후불탱화로 지장시왕도가 걸려 있다. 


아미타불좌상이 바로 저 유명한 꺽정불이다. 병해대사가 입적하자 크게 슬퍼한 임꺽정은 스승이 생전에 봐 두었던 나무로 불상을 깎아 칠장사 극락전에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꺽정불 하단에는 '奉安 林巨正(봉안 임거정)'이라고 쓴 삼베 조각이 붙어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하는 전각이다. 하지만 혁명가 임꺽정은 아미타불이 아니라 미륵하생 용화세상을 꿈꾸며 미륵불을 깎은 것은 아닐까?  


안성시가 충북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칠장사 소장 목조문화재를 대상으로 방사선연대측정을 실시한 결과 꺽정불의 조성연대가 임꺽정이 활동했던 1540년과 비슷한 결과가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충북대 조사단은 꺽정불 밑부분의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이라는 결론을 내려 그동안 진위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던 꺽정불이 실제로 임꺽정이 봉안한 불상일 가능성이 한층 더 커졌다. 또, 소설 속의 임꺽정이 칠장사에서 활동했다는 구전의 신빙성도 더욱 높아졌다. 


아미타불은 2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아미타불의 인상이 결연해 보이는 것은 학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근본모순인 조선왕조를 뒤집어엎으려던 임꺽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게 박혀 있고, 정수리에는 봉긋한 육계(肉繫), 이마와 정수리 사이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中央繫柱)가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박혀 있고, 눈썹은 코에서부터 곡선을 이루면서 길게 이어진다. 일자 눈, 일자 입에서 굳은 의지가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정인의 하품중생인을 결하고 있고, 착의법은 명부전 지장보살과 대동소이하다.     


단층의 연화대좌 위에 안치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앞으로 약간 숙인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보발은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두 손으로는 연꽃을 받쳐들고 있다. 착의법은 아미타불과 거의 같다. 아미타불 대좌 앞 좌우에 안치된 작은 불상은 칠장사의 다른 불상들과는 상호가 좀 다르다. 양쪽 눈초리가 약간 외상방으로 치켜올라가 있고, 귀가 유난히 큰 것이 특이하다. 


아미타삼존상 뒤로 일렬로 늘어선 승려 모습의 지장보살입상들은 상호가 같은 듯 다른 듯 표정이 비슷하다. 세 지장은 석장을 짚고 있고, 한 지장은 염주를 들고 있으며, 한 지장은 합장 자세, 또 한 지장은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물결 모양을 이루면서 길게 내려와 있다.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을 함께 봉안한 것은 다소 특이한 불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은 정반대의 세계에 거하는 불보살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이 고해를 벗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거하는 부처라면,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들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지막 한 명까지 구원하려는 실천행의 보살이다.     


극락전 후불탱화로 지장시왕도를 봉안한 것도 특이하다. 극락전에 주불인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면 후불탱화도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화면 중앙의 삭발한 승려 모습의 지장보살은 결가부좌 자세로 화려한 법의를 걸치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가슴에는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고, 군의 상단에는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이고 왼손에는 석장,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다. 두광과 신광은 여러 가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하단에는 지장보살의 대좌 아래 좌우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고, 그 옆으로 각각 3구의 지장보살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녹색의 두광이 있다. 상단에는 명부시왕과 판관, 사천왕, 동자 등을 도상화하였다.     


칠장사 범종루


칠장사 범종루는 지은 지 얼마 안되는 듯 단청이 선명하다. 범종루는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범종루 기둥에는 종성게(鍾聲偈)를 써서 주련으로 걸어 놓았다. 


종성게는 범패(梵唄)의 한 곡명으로 절에서 새벽종을 치면서 외는 염불이다. 타종게(打鐘偈)라고도 한다. 종성게는 영혼을 천도하는 종교의식인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를 행할 때에도 부른다. 


사찰에서 아침에 예불을 올릴 때 노전승(爐殿僧)이 새벽 3시 목탁을 치며 경내를 돌면서 도량석을 하는 동안 대중들은 차수안행(叉手雁行)으로 법당으로 들어온다. 도량석이 끝나면 예불을 담당하는 노전승은 법당에 있는 작은 종을 치면서 종성게를 읊는다. 이를 종송(鐘誦)이라고 한다. 종을 치면서 게송을 왼다는 뜻으로 예불을 드리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도량석처럼 종송도 낮은 소리에서 시작해서 점차 높은 소리로 올라간다. 


願此鍾聲遍法界(원차종성편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서

 鐵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 깊고 어두운 지옥까지도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삼악도의 고통 떠나면 칼로 산을 부수나니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들 바르고 참된 깨달음 이루소서


종성게에 이어 화엄경에 귀의한다는 서원을 말한다. 다음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게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화엄경사구게(華嚴經四句偈)를 읊고,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왼다. 그 다음 종을 치면서 ‘극락세계십종장엄’과 ‘오종대은명심불망’ 등의 게송을 차례로 왼다.


종송이 끝날 때쯤 법당 밖에서는 범종루에 매달린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을 차례로 친다. 범종은 지옥계 중생, 법고는 지상계 중생, 목어는 수중계 중생, 운판은 천상계 중생의 해탈을 위해 치는 것이다. 범종은 아침 저녁 예불과 마지(摩旨)를 올릴 때 치는데, 아침에는 28회, 저녁에는 33회를 친다.

 

칠장사 제중루


칠장사 제중루는 대웅전 영역에서 조금 비켜서 앉아 있는 건물이다. 제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후면과 측면에는 통풍과 채광을 위해 여닫이문을 달았다. 제중루 편액 글씨는 칠장사 전 주지 도광의 작품이다. 제중루에서는 칠장사 주변 풍경과 칠장산의 산세를 바라볼 수 있다.  


칠장사 영각


이기홍 우바새 박옥산 우바이 영정


칠장사 샘터로 가는 길 초입에는 아주 작은 영각이 있다. 영각에는 이기홍(李基洪) 우바새(優婆塞)와 박옥산(朴玉山) 우바이(優婆夷)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두 사람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이기홍, 박옥산 부부는 칠장사에 토지 2만여 평과 쌀 60여 가마를 보시하였다고 한다


칠장사 경내 부도군


영각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끝에 칠장사 경내 부도군이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승탑의 부재들이 장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당호명이 없어 부도의 주인공은 확인 할 수 없다. 2층으로 된 옥개석과 긴 중대석이 특이하다. 


칠장사 샘터


칠장사 경내 부도전 바로 위에 혜소국사와 7인의 도적 전설이 서려 있는 샘터가 있다. 샘터에는 작은 문을 해 달았다. 샘에서는 지금도 석간수가 솟아나고 있다. 샘터에는 금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플라스틱 바가지만 놓여 있다.  


어사 박문수 합격다리


박문수 초상(출처 다음백과)


대웅전 구역에서 나한전 구역으로 올라가다 보면 어사 박문수(朴文秀) 합격다리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박문수 합격다리 바로 위에 나한전이 있다. 


박문수와 칠장사의 인연은 이렇다. 천안시 입장면 기로리(耆老里)에서 태어난 박문수는 과거시험 삼수생이었다. 32살의 늦깎이 고시준비생 박문수는 세 번째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찹쌀유과를 싸주면서 칠장사 나한전에 들러 나한에게 찹쌀유과를 올리고, 합격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리고 가라고 일렀다. 그의 고향에서 칠장사까지는 약 30km의 거리였다. 칠현산을 넘어 날이 저물어서야 칠장사에 도착한 박문수는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어머니가 당부한 대로 그는 나한전에 찹쌀유과를 올리고, 불공을 드린 뒤 잠을 청했다. 


칠장사 나한전


나한전 법당


나한전 나한상


나옹송


그날 밤 꿈에 나한이 나타나 과거시험의 시제 8구절 가운데 앞 7구절만 가르쳐 주면서 '마지막 한 구절은 그대가 알아서 써내라'고 하였다. 꿈에 나타난 나한은 혜소국사였다는 설도 있다. 이튿날 박문수는 나한이 가르쳐 준 시제를 잊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과거시험장에 도착하여 시제를 받아든 박문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젯밤 꿈에 나타난 나한이 알려준 시제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한이 알려준 7구절을 쓴 다음 나머지 한 구절도 막힘이 없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落照吐紅掛碍山(낙조토홍괘애산) 지는 해는 서산에 걸려 붉은 빛을 토하고

寒鵝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쓸쓸한 갈가마귀 흰구름 사이로 사라지네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尋寺歸僧杖不閑(심사귀승장불한) 절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바쁘도다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초원에는 소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望夫臺上妾低(망부대상첩저환) 댓돌 위 지아비 기다리는 아낙 목빠지겠네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시내 남쪽 숲길에는

短髮草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단발머리 초동이 풀피리 불며 돌아오더라

 

이것이 그 유명한 박문수의 몽중등과시(夢中 登科詩) '낙조(落照)’다. 박문수는 서정성이 뛰어난 7언율시 '낙조'로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했다. 


박문수 설화는 칠장사 나한의 신통력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설화가 사실이라면 박문수는 부정행위를 통해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한 것이 된다. 나한이 알려줬던 그 누가 알려줬던간에 말이다. 박문수 합격다리가 혹시나 학력엘리트주의나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나한전에 올린 박문수의 찹쌀유과는 오늘날 수험생들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을 선물하는 유래가 되었다. 요즘 나한전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불공을 올리는 사람들은 찹쌀유과 대신 초코파이나 과자, 사탕 등을 많이 올린다. 시대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나한전에는 혜소국사가 부처, 혜소국사가 제도한 7인의 현인은 나한으로 봉안되어 있다. 불상도 나한상도 매우 소박하고 친근해 보인다. 칠장사는 세계 불교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을 부처와 아라한으로 모신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나한전 뒤편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고려 말 왕사였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심었다는 나옹송(懶翁松)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나옹송은 수령이 620년이라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옹선사가 남긴 '청산혜(靑山兮)'는 내가 가장 애송하는 선시 가운데 하나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無愛以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칠장사 혜소국사비각


칠장사 혜소국사비각


혜소국사비 비신


혜소국사비 귀부


혜소국사비 이수


나한전 바로 앞에는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와 비각이 세워져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혜소국사의 속명은 이정현(李鼎賢)으로 972년(고려 광종 23)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에게 출가한 혜소국사는 칠장사 융철(融哲)을 은사로 모시고 불도에 정진하여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97년(고려 성종 15) 미륵사의 5교대선(五敎大選)에 뽑혔고, 999년(목종 2) 대사(大師)가 되었으며, 1012년(현종 3) 수좌(首座)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조정에서 주관하는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에 합격해서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야만 수좌에 오를 수 있었다. 수좌만이 승통(僧統)의 법계를 이을 수 있고, 국사(國師) 또는 왕사(王師)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1033년(덕종 2) 덕종은 혜소국사를 법천사(法泉寺)로 옮겨 주석케 하다가 다시 승통(僧統)으로 임명하여 현화사(玄化寺) 주지로 삼았다. 1045년(정종 11)에는 삼각산 사현사관을 개창했다. 산짐승이 많고, 산적들이 들끓던 삼각산에 사현사관을 지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내전에서 금고경(金鼔經)을 강했으며, 1048년(문종 2)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했다. 1049년(문종 3) 문종은 봉은사에 행차하여 혜소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고, 1054년(문종 8)에는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여 대부경 김양(金陽)과 승정 도원(道元)으로 하여금 칠장사까지 호위하도록 했다. 칠장사에 주석하던 혜소국사는 1054년(문종 8) 세수 83세로 입적했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혜소국사가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 문종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전중승(殿中丞) 민상제(閔賞濟)가 구양순체(歐陽洵體)로 썼다. 각자는 배가성(裵可成), 이맹(李孟) 등이 하였다. 비신의 전액 상단에는 '贈諡慧炤國師碑銘(증시혜소국사비명)'을 가로 2단으로 새긴 다음 경계선을 긋고 그 아래에 해서체(楷書體) 가는 글씨로 비문을 오목새김했다.   


혜소국사비는 현재 비신과 귀부, 이수가 해체된 채 비각 안에 각각 따로 놓여 있다. 비신의 석재는 흑대리이다. 높이는 3.15m, 폭은 1.42m이다.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조성한 것이다. 비신은 좌상부가 결실된 채 중단에서 부러져 쓰러져 있던 것을 1975년 비각 복원과 함께 보수하였다. 그밖에 심한 파손은 없고, 글자는 선명한 편이다. 비신의 양쪽 측면에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서로 엉켜있는 쌍룡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용은 비석을 수호하는 의미가 있다. 


귀부(龜趺)의 구갑(龜甲)은 방원형이다. 귀두(龜頭)는 용두(龍頭)라기보다 괴수(怪獸) 머리에 가까운 형상이다. 목은 짧고, 치켜든 머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벌린 입에는 이가 드러나 있다. 수염과 목지느러미도 새겨져 있는데, 특히 귀 뒤에는 지느러미가 크게 표현되어 있다. 등에는 이중 6각형의 귀갑문을 규칙적으로 표현하였고, 귀갑 주변에는 연주문을 돌렸다. 네 발은 모두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발가락은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귀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상면에는 연화문을 새겼지만 전면과 후면, 양 측면에는 문양이 없다. 


이수(螭首)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을 조각하였다. 환조(丸彫)에 가까울 정도로 깊게 조각해서 입체감이 살아 있다. 상면에는 따로 용 한 마리가 더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연화문이 조각된 원판형 석재가 올려져 있다. 원판형 석재는 원래 비석의 부재는 아닌 것 같다. 


혜소국사비가 두 동강이 난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칠장사에 왔는데,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화가 난 가토 기요마사가 칼을 빼 노승의 목을 내려치자 노승은 사라지고 자신의 팔만 저려 왔다. 나중에 비전(碑殿)에 가보니 혜소국사비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고 한다. 


칠장사 삼성각


삼성각 법당


삼성각 칠성단


삼성각 독성단


삼성각 산신단


칠장사 경내 북쪽 끝에 있는 삼성각은 단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지은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삼성각 법당 중앙에는 칠성단, 그 좌우로 독성단과 산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칠성단에는 치성광여래를 본존불로 그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앞에는 칠원성군입상이 세워져 있다. 치성광여래 뒤에는 후불탱화로 칠성탱화가 걸려 있다.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두 보살의 바깥 좌우에 보필성(補弼星)을 도설하였다. 하단에는 칠원성군, 중단에는 칠여래, 상단에는 삼태육성을 배치하였다.


독성탱화와 산신탱화의 배경은 모두 폭포수가 흐르는 심산유곡에 낙락장송이 있는 기압절벽이다. 독성은 승복 차림에 왼손에는 석장을 들고 있다. 독성의 오른쪽 앞에서는 동남이 차를 달이고 있고, 왼쪽의 동남 동녀는 선과를 들고 있다. 산신은 관복 차림으로 오른쪽 곁에는 호랑이가 있고, 왼쪽에는 선과를 든 동남과 석장을 든 동녀가 그려져 있다. 백발 수염의 신선은 바로 산중지왕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삼성각을 마지막으로 칠장사는 얼추 다 돌아본 것 같다. 다음 기회에는 칠장산, 칠현산에 올라 칠장사를 바라보리라. 나옹선사의 '청산혜'를 읊조리며 귀로에 오르다.        


2016.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