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는 13정맥 중 하나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갈라져 말티재, 구치(九峙), 시루산, 구봉산(九峰山), 국사봉(國師峰), 선두산(先頭山), 선도산(先到山), 상봉재, 상당산성(上黨山城), 좌구산, 칠보산(七寶山), 보광산, 행태고개, 보현산, 소속리산, 마이산(馬耳山), 차현(車峴), 황색골산, 걸미고개를 지나 칠장산(七長山)에 이른다. 한남금북정맥은 칠장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한남금북정맥의 종점인 칠장산(492m)은 경기도 금광면과 죽산면, 삼죽면에 걸쳐 있으며, 바로 밑에는 칠현산(七賢山, 516.2m)이 있다. 옛날부터 칠장산과 칠현산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혼동하여 함께 칠현산으로 불렀다. 하지만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이 산 일대를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뒤 칠장사 뒤쪽의 산이라 하여 칠장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칠장산 동남쪽 산기슭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칠장사(七長寺)가 자리잡고 있다. 1773년(조선 영조 9)에 간행한 칠장사 사적비(事蹟碑)에는 고려시대 혜소국사(惠炤國師, 972~1054)가 중수한 기록은 보이지만 초창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헌 등을 통해 볼 때 칠장사는 이미 10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장사는 636년(신라 선덕여왕 5)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한다. 그 뒤 1014년(고려 현종 5)에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칠장사를 중창했다.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깨우쳐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혜소국사가 일곱 악인을 제도한 일을 기리기 위해 홍제관(弘濟館)를 세웠다.
칠장사는 1383년(고려 우왕 9)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있던 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1389년(공양왕 1)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506년(조선 중종 1)에 흥정대사(興淨大師)가 중건했다. 1623년(인종 1)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칠장사를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원찰(願刹)로 삼은 뒤부터 사세가 크게 중흥되었다.
칠장사 현존 당우로는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대웅전(大雄殿), 원통전(圓通殿),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극락전(極樂殿), 조사전(祖師殿), 응향각(凝香閣), 범종루(梵鐘樓), 영각(影閣), 제중루(濟衆樓), 삼성각(三聖閣), 혜소국사비각(慧炤國師碑閣) 등이 있다.
칠장사 경내에는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과 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오불회괘불탱(五佛會掛佛幀, 국보 제296호), 삼불회괘불탱(三佛會掛佛幀, 보물 제1256호),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奉業寺址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83호), 인목왕후어필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 보물 제1627호),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목조지장삼존상시왕상일괄(木造地藏三尊像十王像一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 죽림리삼층석탑(竹林里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범종(梵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철당간(鐵幢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등 문화재가 많다.
칠장사에 주석하던 혜소국사는 일곱 명의 악인 도적을 깨우쳐 아라한의 과를 얻게 했다고 한다. 칠현산, 칠장사의 유래가 된 설화다. 칠장사에는 신라 47대 헌안왕(48대 경문왕)의 서자인 궁예(弓裔)가 13세까지 활쏘기를 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있다. 칠장사에는 또 조선의 혁명가 임꺽정(林巨正)이 갖바치스님(병해대사)에게 바쳤다는 꺽정불 설화와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든 박문수(朴文秀)의 꿈에 나한이 나타나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 주어 장원급제를 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칠장사 부도군
칠현산과 제비월산 사이 계곡으로 들어가는 칠장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칠장사부도군(七長寺浮屠群, 안성시 향토유적 제29호)이 나타난다. 부도밭에는 14기의 석종형(石鍾型) 부도가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방형과 팔각, 또는 원형의 지대석 위에 종형 탑신을 올린 단순한 형태의 부도들이다. 부도마다 보주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처리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 별도의 대석을 올리고 문양을 새긴 부도도 있다. 1기를 제외한 탑신에는 당호가 새겨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칠장사부도군은 조선 후기~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 성행하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석종형 부도는 주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전시대에 걸쳐 조성된 부도 양식이다. 하지만 신라 하대와 고려 초기에도 석종형 부도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석종형 부도가 조성되기 시작한 연대는 신라 하대인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석종형 부도는 사각 또는 원형 기단의 사리공에 사리를 안치한 다음 석종형 탑신을 올리는 간단한 양식이다.
칠장사 철당간
칠장사 일주문 직전 왼쪽에는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이 우뚝 솟아 있다. 당간은 대개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불화를 그린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칠장사의 지세가 배(舟)의 형국과 같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돛대의 구실을 하도록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전한다.
칠장사 당간은 총 높이 11.5m, 당간의 높이 9.9m, 지름 40cm, 지주 높이 3m이다. 지대석은 없고 축대만 남아 있다. 당간은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원통형 철통이 30마디였다고 한다. 아랫부분은 좌우 두 개의 화강암 돌기둥이 당간을 지탱하고 있다. 바닥에는 네모난 구멍을 파서 당간을 꽂았다. 남북향으로 선 양쪽 돌기둥에는 조각이 없으며, 맨 윗면을 모나지 않게 처리하였다. 지주의 안쪽 상단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내고, 철띠를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당간은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고, 이음새 부분은 대나무마디처럼 형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철당간은 칠장사 철당간과 청주시 남문로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공주시 계룡면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만 남아 있으며, 나주시 성북동 동문 밖 석당간(보물 제505호)과 더불어 매우 희귀한 문화재이다. 갑사 철당간은 신라시대, 칠장사와 용두사지 철당간, 나주 석당간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칠장사 철당간은 조성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어 조성 연대를 추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조성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이후의 철당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장사 사적비
철당간 바로 옆에는 칠장사 사적비(안성시 향토유적 비 제24호)가 세워져 있다. 1671년(현종 12) 자연암반 위에 비공을 파고 세운 높이 2.2m, 가로 1.06m, 폭 27cm의 화감암 비신에는 '조선국죽산칠현산칠장사중수향화사적비명(朝鮮國竹山七賢山七長寺重修香火史蹟碑銘)'과 '대명숭정44년신해6월일립(大明崇禎四十四年辛亥六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비신 뒷면에는 시주, 화주자의 이름들이 음각되어 있다. 이수는 없고, 사적비 윗면은 둥글게 처리한 비갈(碑碣) 형태이다. 비문은 안명노(安命老)가 짓고, 글은 이석징(李碩徵)이 썼으며, 이구(李絿)가 전액(篆額)하였다
칠장사에는 문서로 전하는 사적기가 없다. 따라서 이 사적비는 칠장사 창건 연대와 중수 과정 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비문에는 1308년(충렬왕 34) 죽산 출신 혜소국사의 유덕을 기념하기 위해 칠장사를 창건했으며,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사천왕문, 명부전, 나한전 등 12동의 건물과 혜소국사비, 동종, 당간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벽응대사비
부도
부도
칠장산과 제비월산 사이에 자리잡은 산직마을에는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와 두 기의 종형 부도가 세워져 있다. 벽응대사비와 부도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이다. 풀숲이 우거져 있어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승탑 부재 2기가 더 있다는데 꽉 들어찬 풀숲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벽응대사(1576~1657)는 경기도 죽산 출신으로 성은 전주 이씨, 이름은 석숭(釋崇)이다. 13세에 운곡(雲谷)과 제월(霽月)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운수행각으로 전국을 떠돌다가 만년에 칠장사로 돌아와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그를 다비하여 얻은 흰 사리 두 과를 제자 인상(印相)고하 자덕(慈德) 등이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벽응대사비는 1660년(헌종 1) 비갈(碑碣)의 형태로 세워졌다. 방형 대좌 위에 높이 223.3cm, 너비 90.5cm, 두께 20.3cm의 비신을 세웠다. 비갈이라 머릿돌은 없고, 비석의 머리끝만 둥글렸다. 비석의 앞면 상단에는 세 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새겼다. 범자 바로 아래에는 두 줄의 횡선을 긋고, '碧應大師碑銘(벽응대사비명)'이라 전서체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朝鮮國竹山七長寺碧應大師碑銘 幷序
余嘗見傳燈錄 新羅比丘 多載 東國之出名僧 尙矣 有一沙門處興者 爲其師 請銘 按其跡 亦東國名僧也 師完山人 姓李氏 名釋崇 母白氏 萬曆丙子 十月 十八日 生于京畿之竹山郡 性根淸淨 不染塵土 十三出家 師事雲谷 霽月兩師 得其心印 又受諸經禪敎俱備 自是 遍遊名山棲息 則金剛 智異 九月 妙香 四山也 晩年 居竹山之七賢山 終焉實丁酉正月 二十一日也 年八十三 臘七十 涅槃 焚香說偈 闍維 瑞光漫山 祈祝凡十四日 得舍利二 其色白 弟子印相 慈德等 建浮圖于七賢山 安舍利 弟子克連 信粲 冲元 澤定 雙默 法澄等 又設影堂于浮圖之左云
銘曰
竹山之地 非師所出
竹山之山 非師所滅
適來適去 皆於是雲
立師浮圖 捨此奚適
後來沙門 護之無斁
庚子(1660) 五月 日 立
承政院 左承旨 鄭斗卿 撰
議政府 左叅贊 吳竣 書
郞善君 李俁 篆
조선국죽산칠장사벽응대사비명
내 일찌기 전등록을 보니 신라의 비구들이 많이 실려 있었다. 우리 동국이 이름난 승려들을 배출한 지는 오래되었다. 처흥(處興)이라는 사문이 그 스승을 위해 명문을 청해 왔다. 스승의 자취를 살펴보니 그 또한 동국의 이름난 승려였다. 스승은 완산 사람으로 성은 이씨, 이름은 석숭, 어머니의 성은 백씨였다. 그는 만력 병자년 10월 18일 경기도 죽산군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원래 깨끗하고 맑았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아 13세에 운곡과 제월에게 출가하여 그들의 심인을 얻었다. 또 여러 경전에서 선교를 겸수하여 양종을 모두 겸비하였다. 이때부터 지리산, 구월산, 묘향산 등 두루 이름난 산천을 유람하면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만년에 죽산의 칠현산에 기거하다가 정유년 정월 21일 임종하였으니 세수는 83이요, 승랍은 70이었다. 열반 후 향을 태우고, 게송을 낭송하며, 다비를 거행하는데, 상서로운 빛이 온 산에 가득하였다. 불공을 올린 지 14일만에 사리 2과를 얻었는데 하얀색이었다. 제자 인상(印相), 자덕(慈德) 등이 칠현산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제자 극련(克連), 신찬(信粲), 충원(冲元), 택정(澤定), 쌍묵(雙黙), 법징(法澄) 등이 또 부도의 왼편에 영당을 설치하였다.
다음과 같이 새겨 말한다.
죽산은 대사가 태어난 곳도 아니요
죽산은 대사가 입적한 곳도 아니라
우연히 왔다 가니 모두 뜬구름 같네.
부도를 여기 세워 두고 어찌 가리오
후대 사문들이 잘 지키기 바라노라
경자년 5월 일에 세움.
승정원 좌승지 정두경이 찬술하고,
의정부 좌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낭선군 이오가 전액을 쓰다.
비문은 1660년 5월 처흥(處興)이라는 제자의 요청으로 승정원 좌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글씨는 의정부 좌참찬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은 낭선군(郞善君) 이오(李俁)가 썼음을 알 수 있다. 전액을 쓴 낭선군은 선조의 손자이자 인흥군의 아들로 당대의 명필이었다.
비문을 보면 칠장사는 지금의 七長寺(칠장사)가 아니라 漆長寺(칠장사)로 표기되어 있다. 원래의 산명과 사명은 아미산(峨嵋山) 칠장사(漆長寺)였는데, 혜소국사가 7인의 도적을 교화하여 아라한으로 거듭나게 한 뒤부터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로 바뀐 것이다.
비석 주위에 세워진 2기의 부도에는 당호가 새겨져 있지 않아 어느 것이 벽응대사의 부도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부도와 비석을 같은 장소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벽응대사의 부도도 이 가운데 있다고 추정할 수는 있겠다.
벽응대사비에서 가까운 또 한 곳의 부도밭에도 9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이 중 5기의 탑신에는 당호가 새겨져 있어 주인공을 알 수 있지만, 4기의 주인공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서도 벽응대사의 부도는 확인할 수 없다. 이 부도밭에는 전체 높이 184.2cm, 비신 높이 173.2cm의 비갈이 하나 세워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벽응대사의 제자인 허월당(虛月堂) 인상이다. 인상의 부도도 확인할 수 없다.
칠현산 칠장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 문으로 경내와 경외의 경계 나아가 속계와 법계의 경계이다. 일주문 처마에는 '七賢山七長寺(칠현산칠장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편액 글씨는 칠장사 주지를 지낸 도광(道光)이 썼다. 서예와 달마도에 능했던 도광은 칠장사 곳곳에 그의 작품을 남겼다.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청룡사(靑龍寺) 산신각 편액도 그의 작품이다. 칠장사 일주문은 다시 세운 지 얼마 안 돼서 문화재적 가치는 적다. 불자들은 오로지 일심으로 부처에게 귀의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선다.
칠장사 전경
칠장사 천왕문
천왕문 동쪽의 북방다문천왕과 동방지국천왕
천왕문 서쪽의 남방증장천왕과 서방광목천왕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천왕문은 불국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배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의 동서남북방에서 권속들과 함께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고 한다.
칠장사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천왕문에는 나무로 뼈대를 하고 진흙으로 조성한 높이 3.42m의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이 좌우에 각 2구씩 안치되어 있다. 동시대의 사천왕상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며, 의좌상(椅座像)을 하고 있다.
사천왕상은 공통적으로 꽃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고,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비파를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오른손으로 용을 잡고,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는 여의주(如意珠)를 쥐고 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오른손으로 삼지창이 달린 당(幢)을 짚고 있고, 왼손을 허리에 대고 있다. 사천왕상들은 고통스럽게 바둥거리는 악귀들을 발로 밟아 짓누르고 있다.
장흥 보림사(寶林寺) 사천왕상이 세장하고 강직한 인상이라면 칠장사 사천왕상은 대체로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다. 눈썹과 수염은 곱슬이고, 길게 늘어진 귀에는 구슬 귀걸이를 달고 있다. 머리의 양옆으로는 보관 끈이 휘날리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갑옷 위에는 천의(天衣)를 걸쳤다. 길고 굴곡이 심하지 않은 허리는 김천 직지사(直指寺) 사천왕상, 보은 법주사(法住寺) 사천왕상과 그 양식이 유사하다.
칠장사 사천왕상은 화려한 관, 세밀한 무늬의 갑옷 등 조선시대 후기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칠장사 사천왕상의 제작 연대는 대체로 1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전반으로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이유는 또 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위된 인목대비는 죽은 부친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해 칠장사를 원찰로 삼아 여기서 불공을 드렸다. 인목대비는 당시 이곳에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책(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을 사경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은 바로 사천왕 신앙의 소의경전이다. 그러기에 칠장사 사천왕상은 인목대비의 발원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조선은 17세기 전반기 국가적인 차원에서 복구사업을 실시하였다. 17세기 전반기 대형소조상이 유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칠장사 사천왕상도 비교적 값싼 재료인 소조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칠장사 사천왕상은 험상궂고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친근한 조선 중기 사천왕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칠장사 사천왕상은 조선 중기 사천왕상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인목왕후어필칠언시
인목대비는 또 칠장사에 머물면서 족자에 친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를 남기기도 하였다. 인목대비는 칠언시를 '최승왕경'과 함께 김광명(金光明)에게 주었다고 한다. 세로 110cm, 가로 50cm의 종이에 4행으로 쓴 이 칠언시는 근대에 족자로 장황(裝潢)되었으며,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인목대비의 칠언절구에는 아비와 아들을 잃은 한이 짙게 드러나 있다. 칠언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老牛用力已多年(노우용력이다년) 늙은 소 힘 다 빠진 지 이미 여러 해이건만
領破皮穿只愛眠(영파피천지애면) 목 부러지고 가죽 헐어도 잠만 자면 좋겠다
犁耙已休春雨足(리파이휴춘우족) 쟁기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충분한데
主人何苦又加鞭(주인하고우가편)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질로 괴롭히는고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언시 하단에는 1966년에 서예가 배길기(裵吉基)가 쓴 발문(跋文)이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인목왕후가 대비(大妃) 때인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사(賜死)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원당으로 삼은 칠장사를 중건하면서 쓴 글이다.
인목대비의 글씨는 선조의 필체와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인목대비의 칠언시를 목판에 모각한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쌍구전금니본(雙鉤塡金泥本)이 전한다.
천왕문의 주련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3행과 4행이 바뀐 듯도 하지만 그대로 두어도 뜻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요!
四大天王威勢雄(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 위세는 크고 또 웅장하여라
護世巡遊處處通(호세순유처처통) 세상을 지키고 다니며 곳곳에 통하네
從善有情貽福蔭(종선유정이복음) 선행하는 중생에겐 복덕을 내려 주고
罰惡群品賜災隆(벌악군품사재륭) 악행하는 무리에겐 벌 주고 재앙 주네
대웅전 구역
죽림리 삼층석탑
죽림리 삼층석탑
대웅전 앞 중정(中庭) 한가운데에는 죽림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이 세워져 있다. 원래 죽산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 탑의 부재들을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서 수습하여 복원했는데, 2005년 11월 28일 목장주의 기증으로 다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3.63m, 지대석(址臺石)은 가로 1.71m, 세로 1.4m이다. 석재는 화강암이다. 지대석은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基壇)을 놓고, 그 위에 방형 탑신(塔身)을 쌓았다. 상대석(上臺石)의 앞뒤쪽에는 각각 하나의 판석을 덧대어 마감하고, 하나의 판석으로 된 상대갑석(上臺甲石) 위에는 둥글게 처리한 2단의 옥신괴임을 올렸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1~3층 옥신(屋身)의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隅柱)을 조각하였다. 1층 옥신 정면에는 둥근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를 새겨 감실(龕室)을 표현하였다. 2~3층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지붕주름(옥개받침,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방형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죽림리 삼층석탑은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의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경기도내에 존재하는 동시대에 조성된 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장사 대웅전
대웅전 앞 수련
대웅전 기둥
칠장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은 고색이 창연하다. 돌계단 아래 놓인 수반에 진분홍색 수련이 아름답게 피어났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의 원통전과 함께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 대웅전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1828년(순조 28)에 지금 이 자리로 옮겨다 세운 것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5단으로 가지런히 쌓은 양식으로 고려시대의 축조법을 따르고 있다. 제일 위와 아래 장대석의 사이에는 깊은 홈을 파서 단을 구획하였다.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의 좌우 귓돌은 위를 약간 둥글게 돌렸으며, 귓돌 측면에는 구름 모양을 돋을새김해 넣었다. 갑석은 댓돌 면보다 약간 튀어나오게 설치했다.
계단은 정면 중앙 한곳에만 설치했다. 8개의 계단 중 위 4단은 기단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것이고, 그 아래 4단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다. 난간을 보면 계단이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성된 것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주춧돌 중 정면의 네 기둥 주초와 우측면 두 번째 기둥 주초는 전체를 네모나게 다듬고, 윗면에 2단의 원형 기둥자리 홈을 팠다. 고맥이까지 뚜렷이 만들었다. 이런 주춧돌 형태는 라말려초에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이 주춧돌들은 칠장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자연석 덤벙주초는 건물을 옮겨 지을 때 새로 놓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정면에는 초석 위에 4개의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측면에는 굵기도 다르고 휜 나무를 간단하게 다듬은 뒤 기둥으로 사용했다. 원형을 그대로 살린 기둥에서 자연미와 연륜이 묻어난다. 어쩌면 기둥에 칠장사 승려들의 선풍(禪風)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 창호를 정면 3칸과 좌우 측면의 앞툇간, 그리고 후면 중앙간에 설치한 것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정면 처마의 공포(栱包)는 내외 삼출목이며, 각 기둥 사이에 2구의 공간포를 짰다. 공포의 외부 제공첨차(提栱檐遮) 끝의 연꽃 장식과 그 위의 봉두조각, 내부의 운궁형(雲宮形) 제공첨차 등은 조선 후기에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이는 1828년 이건할 당시 새로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뒤쪽의 공포는 그보다 더 늦은 양식인데, 이는 1857년(철종 8)의 중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를 올려 놓았다. 취두는 조선 말기 고종대의 사찰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1877년(고종 14)의 중건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웅전 돌계단 양쪽에는 석조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 열릴 때 대웅전 앞 당간에 내걸린 5불회괘불탕이나 3불회괘불탱은 엄숙하면서도 장엄했을 것이다.
5불회괘불탱(출처 문화재청)
괘불탱(掛佛幀)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법당 앞마당에 걸어놓는 대형 불화이다. 칠장사 오불회괘불탱(국보 제296호)은 길이 6.56m, 폭 4.04m의 대형 걸개그림이다.
전체 화면은 구름을 이용해서 상중하 3단으로 구분하였다. 상단에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좌상(釋迦牟尼佛坐像)과 보신불(報身佛)인 노사나불좌상(盧舍那佛坐像)이 협시하고 있는 삼신불(三身佛)을 도상화했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 왼손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의 수인을 취하고 있고, 그 주위를 10대제자(十大弟子)와 4구의 타방불(他方佛)이 에워싸고 있다.
중단에는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과 아미타불좌상(阿彌陀佛坐像)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을 배치하여 삼세불(三世佛)을 표현하였다. 삼세불은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이다. 약사불의 좌우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약사12신장(藥師十二神將)을 배치하였다. 아미타불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하고, 아미타 8대보살이 둘러싸고 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사이에 있는 보살입상은 미륵보살(彌勒菩薩)로 짐작된다. 이들을 사천왕과 여러 신장상들이 외호하고 있다.
하단 중앙에는 바다에 솟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도솔천궁(兜率天宮)을 묘사했다. 바다에는 용(龍)이 등장한다. 그 좌우로 바다 위에 솟은 기암괴석에 앉은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과 석장(錫杖)을 짚은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을 배치하였다. 관음보살의 좌측에는 쌍죽(雙竹), 우측에는 정병(淨甁)에 꽂힌 버들가지에 파랑새가 앉아 있다. 조그맣게 묘사된 선재동자(善財童子)는 관음보살을 우러러 법을 청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지옥의 판관, 선악동자(善惡童子) 등이 호위하고 있다.
최하단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왕비, 대신과 그 부인, 동자 등의 청문대중(聽聞大衆)이 도솔천궁에서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교화하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기를 염원하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 가운데 연꽃을 엎어 놓은 듯한 천개(天蓋) 주위로 아사세(阿寐世) 태자 및 위제희(韋提希) 왕비, 천중, 타방불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삼단 구성은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도상화한 것이다.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오불(五佛)을 강조해서 그린 이 괘불탱의 주조색은 녹색과 적색, 황색이다. 배경은 주로 녹색, 머리는 짙은 감색, 불신(佛身)은 금채(金彩)와 금니(金泥)를 대용한 황색, 옷은 주로 붉은색으로 처리하였다. 적색과 녹색에 의한 보색 처리는 잔상효과를 유발하여 장엄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광배의 연덩굴 문양은 매우 화려하다.
불상의 상투 모양 육계(肉髻), 팽창된 둥근 얼굴에 가늘게 뜬 눈과 작은 입, 안정감 있는 신체 등에서 16세기 불화의 영향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17세기 전반의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괘불탱은 1628년(인조 6)에 화승(畵僧) 법형(法浻)이 그렸다. 법형비구는 1627년 충청남도 무량사(無量寺) 미륵괘불탱(彌勒掛佛幀)에 수화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림에는 '용화회도(龍華會圖)'라고 표기되어 있다. ‘미래의 용화회에서 따라 기뻐하는 자들은 모두 성불할 것이다’라는 발원문은 법화경(法華經) 제16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에 나오는 구절이다.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은 16세기에 제작된 일본 십륜사(十輪寺) 오불회탱(五佛會幀)처럼 삼신불을 중심으로 하여 삼세불을 융합한 불화이다. 삼불 이상의 존상이 도상화된 괘불탱은 칠장사 오불회괘불탱(1628년)을 비롯해서 부석사(浮石寺) 괘불탱(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84년), 칠장사 삼불회괘불탱(1710년), 부석사 괘불탱(1745년) 등이 있다.
3불회괘불탱(출처 문화재청)
칠장사 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호)은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1710년(숙종 36) 승장(勝藏), 인혜(印惠), 경상(敬尙), 현책(玄冊), 영안(玲眼) 등이 세로 6.28m, 가로 4.54m의 삼베 바탕에 그린 채색화이다. 주조색은 적색과 녹색, 하늘색이고, 옷 문양에는 금니(金泥)가 사용되었다. 화기에 '대영산회괘불탱(大靈山會掛佛幀)'이란 명칭이 보인다.
화면은 상단과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보탑(寶塔)과 보수(寶樹) 좌우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 높이에 둔 노사나불과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불이 각각 4대보살을 거느리고 있다. 최상단은 보탑 위 반원형 광배 안의 9대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타방불, 팔부중(八部衆), 용왕과 용녀를 배치하여 천상세계를 묘사하였다.
하단에는 키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도상화하였다. 신광(身光)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신체에 비해 큰 얼굴에 눈은 치켜올라갔고, 눈썹은 처졌으며, 입은 작게 그려져 있어 다소 근엄한 표정이다. 석가모니불 주위에는 8대보살과 십대제자, 대범천(大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사천왕, 신중(神衆), 신장(神將) 등을 배치하였다. 꽃을 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보관에 화불이 있고 오른손에 연꽃, 왼손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 외에는 합장한 자세이다. 둥근 목깃의 복장을 한 대범천과 제석천은 천의(天衣)를 입은 다른 보살들과 구별된다.
청룡사 영산회괘불탱(출처 문화재청)
대좌 아래에는 사리불(舍利弗)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있다. 법을 청하는 사리불 묘사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靑龍寺)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57호)을 모방한 듯하다.
칠장사 삼불회괘불탱은 상단의 아미타불과 노사나불, 하단의 석가모니불을 통해서 삼신불과 삼세불 신앙을 표현한 불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괘불탱은 석가모니불이 그려진 하단만으로도 완전한 영산회상도가 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구성은 조선 전기에 나타나 조선 후기까지 유행한 양식이다.
대웅전 정면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 있다. 고봉화상(高峰和尙)의 '선요(禪要)'에 들어있는 유명한 선시다.
海底泥牛含月走(해저니우함월주) 바다 밑의 진흙소는 달을 머금고 달리고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바위 앞 돌호랑이는 새끼를 안고 잠드네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쇠뱀이 금강역사의 눈을 꿰뚫고 들어가니
崑崙騎象鷺鷥牽(곤륜기상노사견) 곤륜산 짊어진 코끼리를 백로가 끌고가네
선시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선승들은 깨달음의 순간을 선시로 남기기 때문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선시를 음미해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된다.
대웅전 목조석가모니삼존불
대웅전 목조석가모니삼존불좌상
건물 내부 뒷면 중앙의 기둥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치고, 그 앞에 불단을 설치한 다음 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을 봉안했다. 굵기가 가는 고주(高柱) 두 개를 삼존불 앞에 세워 닷집을 받치게 하였다. 천장은 빗반자와 우물천장으로 하고 불화, 연화문 등으로 채색하였다. 불단 위에는 지붕 모양의 천개(天蓋)를 매달아 중앙 부분을 장엄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불단 앞쪽 마루를 모두 예불 공간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15세기 이후 불전 건물에서 일반화되었다.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은 1685년(숙종 11)에 조각승(彫刻僧) 마일(摩日), 천기(天機), 법준(法俊), 신학(信學), 회신(懷信), 명옥(明玉), 인문(印文), 상현(尙玄) 등 8명이 제작한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여 그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높이 132㎝, 무릎폭 94㎝이고, 미륵보살은 높이 127㎝, 무릎폭 83㎝, 제화갈라보살은 높이 117㎝, 무릎폭 81㎝이다.
2007년 개금불사를 하던 중 좌협시보살상에서 '좌보처미륵보살(左補處彌勒菩薩).....'이라고 기록된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되면서 이 삼존불이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진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임이 밝혀졌다. 이런 형태의 삼존불은 응진전(應眞殿)과 나한전(羅漢殿) 등 불법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을 강조하는 당우에 주로 조성되지만, 조선 후기에는 여수 흥국사(興國寺) 대웅전이나 부산 범어사(梵魚寺) 대웅전 등 사찰의 주불전 삼존불로도 많이 조성되었다.
석가삼존불좌상은 접목조(接木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석가모니불의 머리는 뾰족한 나발이 촘촘히 박혀 있고, 육계(肉髻)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머리 꼭대기와 중앙에는 원형과 반원형의 계주(髻珠)가 뚜렷하다. 얼굴은 각이 져 방형에 가까우며, 살집이 통통한 편이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겨 있고, 코는 콧등이 편평한 삼각형이며, 입은 미소를 살짝 머금은 듯하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친 변형통견이다. 법의 끝단이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걸쳐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으로 넘어가고, 반대쪽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하반신으로 내려와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군의(裙衣) 끝단은 가슴 부위에서 수평으로 접어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왼쪽 무릎 위에 두었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서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좌우보처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은 본존처럼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는 구름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정수리에도 보계(寶髻)가 높이 솟아 있다. 보계에서 이어진 보발(寶髮)은 귀를 지나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두 보살이 연꽃을 들고 있는 손의 위치나 크기만 다를 뿐 상호나 착의(着衣) 방법 등 모든 면에서 거의 비슷한 것은 같은 조각승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칠장사 대웅전 석가삼존불좌상은 조각 기법이 정교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정확한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성발원문이 발견되면서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 연구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특히 마일은 이 불상을 통해 조각승임이 최초로 밝혀진 인물이다.
목조석가삼존불좌상 뒤에는 영산회상도(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39호)가 후불탱화로 걸려 있다.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설채법, 화면 구성, 필선 등을 통해 19세기 전반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의 계보를 밝힐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웅전 신중탱화
대웅전 서쪽 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다. 이 탱화는 상단의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 중하단의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천신(天神), 금강신장(金剛神將),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을 도상화하였다.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은 우리나라의 민족신들이 많다. 불교가 유입 정착되는 과정에서 민족신들을 호법선신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대웅전 지장탱화
대웅전 정면 미륵보살좌상 뒤 왼쪽 벽에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을 묘사한 지장탱화가 걸려 있다. 지장탱화는 보통 명부전에 봉안되는 불화이다.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거나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거나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칠장사 대웅전 지장탱화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이다.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 명부시왕(冥府十王), 판관(判官), 사자(使者), 졸사(卒使) 등을 도상화한 탱화이다. 지장보살은 삭발 머리에 반가부좌를 튼 자세로 왼손에는 보주(寶珠)를 들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검지와 중지를 엄지와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대좌 아래에는 좌우보처(左右補處)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도상화하였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다.
지장시왕도는 지장신앙에 시왕신앙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불화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육도 중생을 교화할 것을 서원한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명부시왕 또는 시왕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열 명의 왕을 말한다. 시왕이 명부 심판관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면서 독립된 신앙으로 명부전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도명존자는 환혼기(還魂記)라는 중국의 영험설화에서 유래했다. 중국 양주(壤州) 개원사(開元寺)의 승려였던 도명화상은 저승사자에 의해 지옥에 불려가서 지장보살을 친견한 뒤 이승으로 돌아와 자신이 목격한 저승세계를 세상에 알리고자 그림으로 그렸다. 도명존자는 그런 연유로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
무독귀왕은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준다고 하는 왕이다. 한 브라만(Brahman)의 딸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찾으러 저승에 갔을 때 무독귀왕이 안내하면서 여러 지옥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무독귀왕은 딸의 지극한 효심과 공덕으로 지옥에서 고통받던 어머니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딸은 미래겁이 다하도록 육도 중생을 구원하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환생하여 지장보살이 되었다. 무독귀왕은 브라만의 딸을 안내한 연유로 후에 지장보살의 협시가 된 것이다.
현존 대표적인 지장탱화에는 일본 닛코사(日光寺) 소장 지장시왕도, 독일 베를린동양미술관 소장 지장시왕도, 일본 세이카당(靜嘉堂) 소장 지장시왕도(이상 고려시대), 일본 고메이사(光明寺) 소장 지장탱화, 사이호사(西方寺) 소장 지장탱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지장탱화, 영천 은해사 운부암 지장탱화, 고성 옥천사(玉泉寺) 지장시왕도(이상 조선시대) 등이 있다.
대웅전 칠성탱화
동쪽 벽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가 걸려 있다. 칠성탱화는 민족신인 칠성신(七星神)을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수용하고 이를 도상화한 불화이다. 사찰에서는 칠성탱화를 칠성각(七星閣)이나 삼성각에 봉안한다.
불교에서는 칠성신을 호법선신의 하나로 보고 신중탱화에 배치하였다가 조선시대로 들어와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칠성신앙이 강화되면서 칠성신도 신중탱화에서 독립하여 별도의 칠성탱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칠성신앙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인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칠성신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칠성탱화에는 칠여래와 함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반드시 함께 도상화하게 되는 것이다.
칠장사 대웅전의 칠성탱화는 중앙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대좌 아래 좌우보처로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단 좌우에는 부처상의 칠여래, 하단 좌우에는 관모와 관복을 입은 칠원성군을 도상화하였다. 최상단에는 삼태(三台), 육성(六星) 등을 도설하였다.
사찰에 칠성탱화가 널리 봉안된 것은 칠성의 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의 역할이 약사여래와 같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치성광여래는 아이의 수명을 관장하고 재물과 재능을 준다고 하여 민간에서 많이 믿었다.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바라는 부인, 자식의 수명을 비는 불자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현존 칠성탱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일본 고베(神戶) 다몬사(多聞寺) 소장본과 일본인 개인 소장본(1569년 제작)을 들 수 있다. 국내에 있는 대표적인 칠성탱화로는 1749년(영조 25년)에 제작된 천은사(泉隱寺) 소장본과 1895년에 제작된 선암사(仙巖寺) 소장본이 있다.
칠장사 범종
칠장사 대웅전에는 높이 120㎝, 밑지름 75㎝인 범종(梵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이 나무틀에 걸려 있다. 용뉴(龍鈕)는 몸을 맞대고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두 마리의 용으로 만들었고, 천판(天板)은 낮고 둥근 편이다. 천판 아래에는 8개의 원형 범자문을 새겼다.
종체(鐘體) 중심에는 가로선을 양각하여 상하를 구분하였는데, 상단에는 각각 네 곳의 보살상과 연곽을 번갈아 배치하였다. 원형의 두광을 갖추고 보관을 쓴 보살상은 연화좌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다.
하단에는 범종 조성 연대와 장인들을 기록한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칠장사 범종은 1782년(정조 6)에 신안태, 이년성, 이영선, 이영준, 청봉 등이 주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한 범종 주조장들이다.
칠장사 범종은 형태와 문양 배치에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명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연대도 파악할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과 장원리석조보살좌상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
대웅전 동쪽 뜰에는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奉業寺址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83호)과 장원리석조보살좌상(長院里石造菩薩坐像)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은 원래 죽산면 죽산리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겨 온 것이다. 당대의 명찰인 봉업사지에는 불상대좌나 탑 등이 산재되어 있고, 금속 공예품들도 다량 출토되고 있어 고려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의 전체 높이는 198㎝, 불상 높이는 157㎝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살집이 통통해 보인다.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눈과 코, 입은 미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상호는 원만하다. 얼굴을 볼륨감 있게 표현하는 것은 인도 마투라(Mathura, 摩偸羅) 양식의 특징이다.
신체는 늘씬하면서도 우아하다. 법의는 얇은 통견의를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여러 겹이 원호(圓弧)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군의(裙衣)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룬다. 당당한 어깨, 가는 허리, 약간 나온 배, 법의를 통해 드러난 무릎과 두 다리 등 양감이 살아있고 세련된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붙였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이처럼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간다라(Andhra) 양식을 인도화한 굽타(Gupta) 양식의 특징이다. 가슴이 U자형으로 트인 것은 굽타 양식의 변형이다. 옷주름이 유려하게 양다리를 걸쳐 흘러 내리고 가슴의 옷깃이 반전하는 것은 우드야나(Udyāna, 優塡王像) 양식의 특징이다.
석불입상과 광배(光背)는 같은 돌로 조성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주위에는 화염무늬를 두르고 있다. 신광은 장대한 주형거신광배(舟形巨身光背)의 형태이다. 신광 안에는 바탕 무늬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두광 안에는 구름 위에서 여러 형태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세 화불을 단순하게 부조하였다. 두신광의 외연을 따라 좁은 공간에는 불꽃무늬를 도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석불입상은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石造四面佛像) 중 북면보살입상과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팽창된 얼굴, 양감이 살아있는 우아한 신체, 유려한 착의법 등은 8세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주형거신광배도 8세기의 경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석조아미타여래입상(石造阿彌陀如來立像)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석불입상은 8세기 신라 전성기의 양식에 고려시대의 특징이 가미되어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고려 초기 석불의 수작이며, 경기도 안성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장원리석조보살좌상
장원리보살좌상은 원래 봉업사지 남쪽 장원리 남산 기슭에 있었으나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죽산면사무소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겨온 것이다. 장원리에는 사운암이라는 사찰과 최소 3구 이상의 불상, 3기 이상의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장원리에 있던 석탑과 불상들은 현재 다 유출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장원리석조보살좌상은 복련(覆蓮)을 새긴 원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방형 기단(基壇)을 올렸다. 기단에는 연꽃봉오리 문양이 각면에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는 앙련(仰蓮)을 새긴 대좌(臺座)를 올리고, 그 위에 보살좌상을 안치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에는 화불(化佛)로 보이는 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추정된다. 눈, 코, 입은 마모가 심해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상호는 둥글고 원만한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옷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검지로 연꽃가지 끝을 잡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서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다.
칠장사 거북바위
석조여래입상 바로 옆에는 거북이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이름하여 거북바위다. 어떤 사람들은 이 거북바위가 칠장사 대웅전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물에 대한 해석은 각자 그릇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칠장사 원통전
대웅전 서쪽 바로 곁에는 원통전이 자리잡고 있다. 검은색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원통전 앞을 지키고 있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불전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원통전은 장대석으로 쌓은 두벌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면부 겹처마, 배면부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이다. 1725년(영조 1)에 완공되어 이듬해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지금의 원통전은 1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통전 창호는 정면에만 설치되어 있다. 창호 하단은 궁판, 중단은 격자살, 상단은 교살로 되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 가구 구조는 무고주(無高柱) 5량가(五樑架)이며, 공포는 정면에만 외일출목(外一出目) 이익공(二翼工) 양식으로 설치했다. 대들보(大樑)는 고주 없이 정면과 배면의 평주 사이를 가로질러 놓였으며, 그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宗樑, 마룻보)를 받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宗道里)를 받고 있다. 종보 상부면에는 우물반자, 처마도리와 중도리(中道里) 사이에는 빗반자를 설치해 천장을 가렸다. 처마끝은 와구토(瓦口土)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면에는 모로단청을 했으나 지금은 단청색이 많이 퇴락되어 있다.
원통전 정면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음미해 본다. 더없는 자비심으로 중생 제도에 여념이 없는 관세음보살을 예찬하는 칠언절구다.
寶陀山上琉璃界(보타산상유리계) 보타산 위 청정유리세계에 거하시며
正法明王觀世音(정법명왕관세음) 정법의 명왕이신 관세음보살이시여
影入三途利有情(영입삼도이유정) 삼도에 드사 중생들을 이롭게 하시고
形分六道曾無息(형분육도증무식) 육도에 모습을 나투사 쉼 없으시네
원통전 관음보살좌상
원통전 관음보살좌상
원통전 법당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합장한 보살입상이 협시하고 있다. 관음보살삼존상 뒤에는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상도가 걸려 있다.
2008년 4월 칠장사 원통전 관음보살삼존상을 조사하였는데, 복장물은 이미 모두 없어진 상태였고, 따로 제작하여 끼운 손목을 분리하던 중 그 안쪽에서 한지에 묵서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조성발원문에는 제작 연대와 조각승 등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발원문에 의하면 칠장사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18년 화주(化主) 윤영(允暎)과 처휘(處輝) 등이 발원하여 이듬해 칠장사에 봉안하기 위해 짐월법인(朕月法印)이 증명(證明)을 맡고, 일기(一機)와 선각(善覺), 선일(善一), 두영(斗英) 등이 제작하였다.
칠장사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1.2m의 중형 보살상이다. 높고 커다란 보관의 가운데 봉황을 중심으로 운문(雲文)과 화문(花文)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상체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불신(佛身)과 따로 제작된 양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정인 중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가모니불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래와 보살은 이런 수인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얼굴은 각이 지고 통통한 편이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겨 있고, 코는 오똑하고 날씬하다. 입은 미소를 머금은 듯 아닌 듯 꼭 다물고 있다. 보발은 귀 앞을 지나 어깨 위까지 흘러내렸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장식 목걸이가 있다. 법의는 편삼(扁衫) 위에 두터운 대의(大衣)를 걸친 통견이다. 대의 한 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있고, 왼쪽 어깨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은 길게 늘어져 있다. 군의(裙衣)에는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하반신의 대의처리는 결가부좌한 오른쪽 다리 위와 아래로 각각 한 자락씩 물결이 출렁이듯 흘러내렸다. 무릎 밑에는 갑대(甲帶)를 착용하였다. 갑대를 착용하는 것은 조각승 색난이 제작한 보살상에서는 아직 발견된 예가 없고, 1660년대 활동한 혜희가 제작한 충북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볼 수 있다.
일기는 색난(色難)과 1698년 전남 해남 성도암 목조보살좌상(제주 관음사 봉안)을 개금하고, 1699년 목조불상(개인 소장)에 이어 1701년에는 성도암 목조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제작하였다. 일기는 1703년 색난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칠존불상을 제작할 때 수화승으로 아미타불을 조성하였고, 1720년에는 수화승으로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을 개채하였다. 화엄사 각황전 불상을 제작할 때 능가산 사문으로 언급된 일기는 전북 부안의 능가산에 위치한 개암사나 내소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기가 대부분의 불상을 색난과 함께 제작한 사실을 고려하면 일기는 색난의 제자나 후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색난의 계보는 색난-충옥-일기-하천 등으로 이어진다.
원통전 현왕탱화
원통전에는 중단탱화(中壇幀畫)에 속하는 현왕탱화(現王幀畵)가 걸려 있다. 현왕탱화는 사람이 죽어서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명간교주(冥間敎主) 현왕여래(現王如來)를 중심으로 명계중(冥界衆)의 여러 존상을 도상화한 불화로 보통 약사전(藥師殿)의 현왕단(現王壇)에 봉안된다.
화면 중앙의 현왕여래는 살집이 있는 얼굴에 수염이 풍성하게 나 있다. 의복은 구름과 용 무늬를 넣은 화려한 붉은색 도포를 입고, 붉은색 바탕에 금빛 날개로 장식하고 경책(經冊)을 올려 놓은 관모를 쓰고 있다. 현왕여래 앞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다. 현왕여래의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부채인 듯도 하고 문서 같기도 하다.
현왕여래의 두광(頭光) 좌우에는 선악동자(善惡童子), 대좌 아래에는 책이나 문서를 들고 있는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判官), 녹사(錄事) 등을 도상화하였다. 이들 외에도 현왕여래의 권속에는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사천왕(四天王), 감재직부사자(監齋直符使子) 등이 있다. 대륜성왕은 망자의 일체 업을 펼쳐 보이고, 전륜성왕은 악을 위엄으로 굴복시키고, 참회를 마친 자는 다시 선계와 인연을 지어 준다.
현왕탱화의 본존은 보현왕여래(普現王如來)인데, 명호 가운데 ‘현(現)’자와 ‘왕(王)’자를 따서 현왕여래라고 한다. 현왕여래는 석가모니가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수기(授記)를 줄 때 '미래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는 보현왕여래로 십호를 구족할 것이며, 국토는 엄정하고 백복으로 장엄하며 보살이 가득하리라'는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豫修十王生七齋儀纂要)'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던 염라왕(閻羅王)은 104위 신중(神衆)의 하나인 장유음권위지옥주염마라왕(掌幽陰權爲地獄主閻滅王)으로 흡수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장유음권위지옥주염마라왕은 명부신앙(冥府信仰)과 결합되어 시왕(十王) 가운데 다섯 번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되었다. 현왕탱화는 바로 시왕도(十王圖) 가운데 다섯 번째 그림인 제5염라대왕도가 별도로 독립되어 성립된 불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왕은 사람이 죽은 후 7일부터 심판을 시작하는데, 현왕은 죽은 후 3일 만에 망자를 심판한다. 또, 현왕탱화가 현왕이 권속들에 둘러싸여 망자를 심판하는 광경을 도상화한 점에서는 시왕도와 유사하지만 시왕도에 등장하는 지옥 장면은 묘사되지 않는다.
현존 현왕탱화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864년(고종 1)에 제작된 양산 통도사(通度寺) 현왕탱화와 1884년(고종 21)에 제작된 전등사(傳燈寺) 현왕탱화, 연대 미상의 하동 쌍계사(雙磎寺) 현왕탱화 등이 있다.
원통전 신중탱화
원통전 신중탱화는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탱화이다. 상단에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신들, 하단에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금강신장을 도설하였다. 제석천은 불법과 불자들을 수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하는 하늘의 임금이다. 대범천은 호법신의 하나로 범왕(梵王), 범천(梵天)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33천(天) 중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다. 원래 힌두교의 신이었으나 불교가 출현하면서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항상 제석천과 짝을 이루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묘사된다. 금강신장도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원통전 빗반자 벽화
원통전 빗반자 벽화
원통전 불단의 오른쪽 빗반자에는 상하 2단, 좌우 4단으로 구획하여 검은색 바탕의 각 칸에 1점씩 모두 8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상단은 왼쪽부터 천녀봉과도(天女奉果圖), 천녀타주장고도(天女打奏杖鼓圖), 천녀타경도(天女打磬圖), 선인봉과도(仙人奉果圖), 하단은 천녀무용도(天女舞踊圖), 천동앙람도(天童革+央藍圖), 천녀봉주도(天女奉珠圖), ·천녀무용도(天女舞踊圖)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들 벽화에는 민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 다소 해학적이다.
천녀봉과도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천녀가 두 손으로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고, 천녀타주장고도는 장고를 치면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천녀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휘날리는 천의자락과 들어 올린 발에서 율동감이 느껴진다. 천녀타경도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작은 경(磬)을 치고 있는 천녀를 그렸다. 선인봉과도는 과일이 담긴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머리 위로 올린 채 걸어가고 있는 선인(仙人)의 그림인데, 쟁반에 과일과 함께 빨간 고추를 그려 넣은 점이 특이하다.
한삼자락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천녀를 표현한 천녀무용도는 같은 형식으로 두 점이 그려져 있다. 한 점은 다소 정적이고, 다른 한 점은 다소 동적이다. 천동앙람도는 뒤에서 누군가 불러서 뒤돌아보는 듯한 모습의 그림이다. 하얀 저고리에 주홍색 치마를 입은 천녀를 그린 천녀봉주도는 다른 천녀와는 달리 일반 여염집 아낙네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들은 그을음 등으로 인해 오염이 되어 있고, 채색의 박락과 탈락이 심한 편이다. 불단의 왼쪽 빗반자에도 같은 형식으로 8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으나 최근에 개채되어 원형을 잃어버렸다. 대들보에도 용 그림의 별지화(別枝畵, 별화)가 여러 점 있으나 색채의 박락과 탈락이 심하다.
원통전 앞 돌탑
원통전 앞에는 엉성한 돌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여기저기서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하나씩 모아 돌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부재는 어느 석탑의 옥개석을 가져다가 거꾸로 올려 놓았다. 보면 볼수록 정겨워 보이는 돌탑이다.
칠장사 조사전
원통전 바로 곁에는 조사전이 세워져 있다. 조사전은 조사(祖師)들을 존숭하기 위한 전각으로 조사들의 진영을 봉안한다. 칠장사 조사전은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혜소국사를 비롯해서 병해대사, 벽응대사 등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칠장사 종무소
칠장사 응향각
칠장사 요사채
칠장사 중정의 동쪽에는 종무소, 대웅전 맞은편 남쪽에는 응향각이 자리잡고 있다. 응향각은 최근 시민선방으로 개방하여 재가불자들이 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고 있다. 요사채에는 편액이 걸려 있지 않다. 응향각과 요사채에도 주련을 걸어 놓았다.
응향각 주련 가운데 서쪽의 4구절은 북송 제일의 시인이요, 당대의 선지식으로 알려진 소동파(蘇東坡)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어느 날 자신의 문장과 분별지(分別智)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참선수행에 들어간 동파는 노산 흥룡사의 고승 상총선사(常聰禪師)를 찾아가 법문을 청했다. 상총선사는 '그대는 왜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 하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들으려 하지 않는고?' 하고 반문했다. 동파는 '생각과 감정이 있는 유정물 뿐만 아니라 산이나 물, 바위, 나무 같은 무정물도 설법을 한다?'는 물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동파는 말을 타고 돌아오면서 의심삼매(疑心三昧)에 들었다. '어떻게 무정물이 진리를 설할 수 있는가? 또 나는 왜 그것을 듣지 못하는가?' 하고 생각면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순간 산골짜기에서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듣자마자 문득 크게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溪聲自是廣長舌(계성자시광장설) 시냇물 소리는 그대로 부처님 지혜의 말씀이요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산빛은 어찌 부처님의 청정한 몸이 아니겠는가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밤이 새도록 내린 비가 들려준 팔만사천 게송을
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 훗날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서 보여줄 수 있을까
2016.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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