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읍 산명리 백마고지 전적지를 돌아본 다음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분단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맨 처음 찾은 곳은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 세워진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문학비와 그의 흉상이다.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마을체험관(두루미평화관)
두루미평화관은 철원읍 대마리 농촌테마마을 두루미평화마을 입구에 있다. 두루미평화마을을 오대미마을이라고도 한. 2003년에 세워진 두루미평화관은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勞動黨舍)의 건물구조를 그대로 본떠서 지은 건물이다. 언뜻 보면 지상 3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2층 건물이다. 3층은 정면 벽체만 설치되어 있다.
두루미평화관은 사실 오대미마을의 마을회관이다. 평소에는 마을의 각종 행사와 회의를 여는 시설로 이용되며, 두루미평화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도 활용된다. 옥상에 올라가면 대마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도 보인다. 두루미평화마을에서는 오대쌀 생산 과정 체험과 겨울철 두루미를 비롯한 철새 탐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두루미평화관에 세워진 이태준문학비와 흉상
두루미평화관 앞 광장에는 철원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인 상허 이태준의 문학비와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철원군에서는 2004년 10월 상허의 문학비와 흉상을 세우고 해마다 이태준문학제를 열고 있다.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아버지 장기 이씨 창하(昌夏)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간 이태준은 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을 잃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이병기(李秉岐)는 이태준의 스승이었다. 1933년에는 이효석(李孝石),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함께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였다. 일본의 식민지시대 이태준은 일제에 부역하는 글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리얼리즘 문학을 통해서 저항했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으로 넘어갔다. 월북한 뒤에도 이태준은 김일성 우상화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유일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이 남긴 작품에는 '오몽녀(五夢女, 1925)', '아무일도 없소(1931)', '불우선생(不遇先生, 1932)', '꽃나무는 심어놓고(1933)', '달밤(1933), '손거부(1935)', '가마귀(1936)', '복덕방(福德房, 1937)', '패강냉(浿江冷, 1938)', '농군(農軍, 1939)', '밤길(1940)', '무연( 無緣, 1942)', '돌다리(1943)', '해방전후(解放前後, 1946)'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리얼리즘 계통의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긴 이태준은 '단편소설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편소설에는 '사상(思想)의 월야(月夜, 1946)'가 있다. 그외 수필집 '무서록(無序錄, 1944)',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 1946)'도 있다. '문장강화'는 당대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기념사업회(이사장 임종헌)는 항일민족봉기 97돌인 지난 3월 1일 제1회 이태준문학상에 김성동(金聖東) 작가를 선정해서 수상한 바 있다. 김성동 작가는 단편 ‘민들레꽃 반지’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민들레꽃 반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금기시되는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 남로당)과 전쟁 이야기를 다룬 단편소설이다. 소설에 구순의 어머니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은 김성동 작가 자신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이태준 생가터는 한국전쟁 당시 피아간의 맹렬한 포격전으로 쑥대밭이 되어 마을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이태준의 생가터에 기념이 될 만한 상징물을 세워 그를 기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
두루미평화관을 떠나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勞動黨舍, 한국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를 찾았다. 철원 노동당사는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조선의 실효적 지배를 받을 당시 조선노동당 철원군당의 당사였다. 1946년 조선노동당 철원군당은 노동당사를 러시아식 무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지었다.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고,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다. 검게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건물의 앞뒤 벽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아간의 격전으로 포탄과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나 있다.
2016년 5월 21일 오후 2시 노동당사 광장에서는 철원군(군수 이현종)이 주최하고, (사)한국예총 철원지회가 주관하는 '제1회 철원노동당사 평화동요제'가 열렸다. 앞으로 이런 행사가 많이 열려 남북 주민들 사이의 동질성이 많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동송읍 양지리 민통선 검문소
노동당사를 떠나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 금강산 전기철도교량으로 향했다. 도창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송읍 양지리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양지리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남쪽과 민통선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464번 지방도로(금강산로) 북쪽 사이에 있다. 민통선 북쪽에 있다 하여 양지리를 민북마을이라 부른다.
민통선 안 동송읍 양지리, 이길리나 갈말읍 정연리, 김화읍 도창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리 관할 사단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검문소에서는 행선지와 방문 목적을 밝힌 다음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출입 허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정부는 1954년 휴전선 일대의 군사 작전 및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민통선을 설정하고 민간인들을 소개시켰다. 1970년대 들어서 정부는 민통선 안에 주택을 짓고 주민들의 거주를 허용했다.
검문소를 통과하면 곳곳에 빨간색으로 '지뢰! Mine!'이라고 쓴 표지판이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마을 바로 옆 길가에도 지뢰 구역이 있다. 민가와 농지 외에는 거의 모두 지뢰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양지리는 철새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제2땅굴 집입로변에 있는 토교저수지는 1976년 완공되었다. 토교저수지에는 해마다 9월 초부터 쇠기러기를 시작으로 두루미, 재두루미 등이 겨울을 나기 위해 날아든다. 철새들은 드넓은 철원평야에서 먹이활동을 한 뒤 토교저수지로 날아와 쉰다.
양지리 마을 북쪽에는 1975년 발견된 제2땅굴과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 철원평화전망대 등이 있고, 서쪽에는 아이스크림고지로 유명한 삽슬봉이 있다. 삽슬봉은 한국전쟁 때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과 포격으로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고 해서 아이스크림고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들은 모두 한국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들이다.
금강선 끊어진 철길
금강선 끊어진 철길
양지리 검문소를 통과해서 동송읍 이길리, 갈말읍 정연리를 지나 한탄강(漢灘江)을 건너면 바로 김화읍 도창리 금강선(金綱山) 전기철도교량(등록문화재 제112호)이 나온다. 금강선(金綱線) '끊어진 철길'로 유명한 다리다. 여기서 90km만 더 가면 금강산에 닿는다.
금강선은 일본회사인 철춘철도주식회사에서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간을 개통했고, 1931년 7월 1일 내금강까지의 길이 116.6㎞를 완전 개통하였다. 경원선의 지선인 금강선은 철원과 김화, 북한강 상류에 위치한 금성, 창도를 지나 내금강에 이른다. 전기철도의 동력은 화천수력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했다. 조선총독부는 창도에서 나는 유화철을 흥남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금강선을 부설했다. 봄과 가을에는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경원선과 금강선은 일본 식민지시대에는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과 금강산 관광용으로 운행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선인민군의 군수물자 수송에 이용되었다.
경원선과 금강선은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운행이 중단됐다. 한탄강 끊어진 철길은 분단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강선 끊어진 철길 한탄강 하류
금강선 끊어진 철길 다리 위에서
금강선 끊어진 철길 다리 위에서
금강산 철길 한탄강 끊어진 다리 위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그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통일, 통일!' 쉽게 이야기하지만 통일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통일 이전에 남한과 북한 사이에 민간인 자유왕래라도 먼저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굳이 통일이 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북쪽 조선의 강원도 평강군에서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남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탄강은 김화, 철원, 포천을 거쳐 연천(漣川郡) 미산면(嵋山面)·전곡읍(全谷邑)의 경계에서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든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의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는 한탄강 유역에는 절벽과 협곡이 많이 있어 절경을 이룬다. 한탄강 지류에는 남대천(南大川)과 영평천(永平川), 차탄천(車灘川) 등이 있다.
한탄강의 본래 이름은 '한여울'이다. '한'은 '큰(漢, 韓, 大)'의 뜻이다. '한(漢)'은 '크다'와 함께 '은하수'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은하수(銀河水)와 은한(銀漢)은 같은 말인데, 은하를 강에 비유한 것이다. '한(漢)'은 또 중국의 '한수(漢水)'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하수처럼 크고 아름다운 여울'이란 뜻의 '한탄(漢灘)'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금강선 끊어진 철길 전선휴게소
전선휴게소 메기매운탕
금강선 끊어진 철길 바로 옆에 있는 전선휴게소에서 메기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전선휴게소는 철원의 숨겨진 맛집이라고들 하던데 막상 메기매운탕을 먹어보니 맛은 뭐 그저 그랬다. 다만 전선휴게소가 민통선 안에 있다 보니 메기매운탕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차림표도 메기매운탕 오직 하나뿐이어서 선택의 여지도 없다.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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