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콰이 강의 다리' 승일교에 이어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원읍 산명리 395고지 일명 백마고지(白馬高地) 전적지를 찾았다. 어릴 때부터 말로만 들어왔던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적지를 이제서야 처음으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핏빛 선명한 동족상잔이 벌어졌던 비극의 현장이라서 그런지 마음은 줄곧 편치 않았다.
백마고지 전적지 광장의 백마상(출처 한국관광공사)
백마고지 전적지 입구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과 유엔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과 중국인민지원군(중국군) 양측은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철원은 2억 평(약 661㎢)에 달하는 철원평야와 병참선인 3번국도, 경원선 철로 등을 확보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철원 서북방 395고지 일명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일대에서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전술적 요지였다.
철원과 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에는 중국군 제38군 예하 제113, 114보병사단 6개 연대가 진출해 있었고, 예비부대로 제112보병사단 3개 연대가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세로 나왔다. 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중국군은 39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공격해 왔다. 395고지가 중국군에 넘어가면 철원 전지역이 점령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지대에 투입되어 395고지에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던 부대는 김종오(金鍾五)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이었다. 9사단은 미 제9군단 배속된 부대로 춘천과 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인민군) 전차부대를 물리쳤던 최정예부대였다. 국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병력 2만명에 경장비 제51연대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미군 제214자주포대대(일설에는 제49, 213 포병대대)와 제955중포대대,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미 제5공군도 전투에 참가했다.
1952년 9월 22일 중국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배치하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부대로 하여 제29, 30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철원평야 일대 주저항선의 취약지점 방어를 강화하였다.
10월 6일 저녁 장융후이(江擁輝) 대장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군의 6개 연대, 지원부대 등 총 4만 4,056명의 병력은 봉래호(蓬萊湖) 제방을 폭파하여 국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驛谷川)에 홍수를 일으킴과 동시에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김영선 소령이 지휘하는 제30보병연대 1대대는 395고지를 향해 맹렬하게 돌격해 온 중국군을 3차례나 격퇴시켰다. 이튿날 중국군은 2개 대대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1대대의 전초기지를 포위 공격한 결과 395고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주일 대령이 이끄는 제28보병연대는 2시간의 사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10월 8일 제38군 예비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개시한 중국군은 오전 8시 395고지를 재점령했다. 이에 최창용 중령이 지휘하는 제28보병연대 3대대는 즉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밤 11시경 395고지를 재탈환했다.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국군 제38군 제113, 114 보병사단의 피해도 컸지만, 국군 제28보병연대와 제30보병연대도 부대 재편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10월 9일 중국군이 제6차 공세를 개시하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소진되어 3시간만에 395고지와 우측 능선을 내주고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역습을 감행해서 395고지를 재탈환했다. 10월 10일 중국군 제38군이 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 오자 국군 9사단 장병들은 참호전과 백병전으로 맞섰다.
10월 10일 중국군은 3차례의 공방전 끝에 마침내 395고지를 재점령했다. 이튿날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는 김경진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의 지원을 받아 395고지를 재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김경진 소령은 박격포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 치열한 공방전은 4일 동안 계속되었다.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총력전을 펼쳐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중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395고지 북방 낙타능선상의 전초기지를 탈환함으로써 마침내 백마고지전투는 완전히 끝이 났다.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7번(일설에는 24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백마고지는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중국군의 공세로 시작된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만명(일설에는 1만4천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백마고지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으로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백마고지전투 결과 중국군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고, 국군 제9보병사단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국군은 5만 5,000발, 도합 27만 4,954발(일설에는 30만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은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국군을 폭격했다. 포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국군 제9사단은 치밀한 정보활동, 보병과 포병 간의 긴밀한 협동, 공군의 항공근접지원,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으로 백마고지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국군을 물리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常勝白馬)’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8월 백마부대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원래의 395고지는 철책선 안에 있어 출입할 수 없고, 대신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야트막한 고지에 백마고지전투 기념탑과 기념관, 전적비, 위령비 등을 조성했다. 해마다 10월 16일은 백마고지전투 전승(戰勝) 기념일로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2012년 11월 20일 국토해양부는 휴전 이후 단절됐던 경원선 신탄리에서 철원 간 5.6km 구간의 철도 복원사업을 마무리하여 백마고지역이 개통되었다.
백마고지 위령비
자작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오르면 맨 처음 백마고지 위령비를 만난다. 위령비 주위에는 3,,500여개의 운모석이 깔려 있다. 운모석의 숫자는 백마고지전투에서 확인된 전사자 504위, 전투 중 추가확인 전사자와 전투 후 부상 전사자 808위를 비롯한 3,500여명의 국군 희생자를 상징한다.
백마고지 전적지 기념관
기념관 서편 전시실
기념관 동편 전시실
백마고지 위령비 바로 뒤에는 그날의 전투를 낱낱이 전하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백마고지전투를 이끌었던 제9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사진, 백마고지전투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말해 주듯 녹슬고 부숴진 무기와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편 기념관에는 총열이 휘어버린 기관총이 전시되어 있다. 쇠는 웬만한 열로는 잘 휘지 않는 금속임에도 다급한 상황에서 쉴새없이 사격을 한 결과 총열이 녹아버린 것이다. 서편 기념관의 동판 전투상황도는 당시 백마고지전투에서 사용된 탄피를 모아서 주조했다고 한다.
백마고지전투 기념비(앞)
백마고지전투 기념비(뒤)
기념관 뒤로 정상에 오르면 22.5m의 백마고지전투 기념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손을 모아 기도하는 형상의 이 기념비는 홍익대학교 강건희 교수의 작품이다. 기념비 뒷면의 동판 부조물은 머리가 없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한다. 머리가 없는 영혼은 백마고지전투 희생자들 중에서도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한 전사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이렇게나마 기려야 하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다.
상승각
백마고지전투 기념비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6각 종각인 상승각(常勝閣)이 있다. 백마고지전투 후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항상 승리하는 백마부대'란 뜻이다. 이 종각의 이름도 '상승백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철원평야
백마고지와 오성산
백마고지와 오성산, 고암산
종각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한창 모내기철인 듯 논마다 써레질이 되어 있다.
철원평야 건너편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바로 저 유명한 백마고지전투가 벌어졌던 395고지이다. 백마고지 정상에는 두 곳의 국군 소초(GP, 小哨)가 세워져 있다. 백마고지 오른쪽 뒤로 보이는 산이 속칭 저격능선으로 유명한 오성산(1,062m)이다.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은 오성산을 국군 장교 군번줄 두 트럭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을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백마고지와 오성산 사이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산이 일명 김일성고지인 고암산(780m)이다. 사진에는 고암산이 아주 희미하게 나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성산과 고암산은 현재 조선의 영토이다.
오성산과 고암산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했다. 통일은 나중에 하더라도 남북한 주민들이라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백마고지 전적지를 떠나다.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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