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철원 직탕폭포와 삼부연폭포를 찾아서

林 山 2016. 6. 3. 17:58

철원(鐵原)에서에서의 첫날 밤은 고석정국민관광단지에 있는 썬레저텔에서 묵었다. 객지에서는 아무래도 잠이 일찍 깨기 마련이다. 마침 안재성 작가도 잠이 일찍 깬 모양이었다. 안 작가와 함께 동송읍(東松邑) 장흥리(長興里) 한탄강(漢灘江) 직탕폭포(直湯瀑布)를 보러 가기로 했다. 철원팔경 중 하나인 직탕폭포는 고석정(孤石亭)에서 북서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직탕폭포


직탕폭포


직탕폭포


직탕폭포에서 필자


직탕폭포는 낙차가 3~5m로 그리 높은 폭포는 아니었지만, 너비 80m의 한탄강을 가로지른 암반 위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수는 장관이었다. 직탕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직탕폭포를 직탄폭포(直灘瀑布)라고도 한다. 직탕폭포는 동송읍과 갈말읍(葛末邑)의 경계를 관류하는 한탄강 중류에 있다. 한탄강 중류 유역은 추가령열곡(楸哥嶺裂谷)을 따라 분출한 용암에 의해 형성된 철원평강(철평)용암대지의 일부이다. 철평용암대지의 하방침식으로 생긴 하곡을 따라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흐른다. 


철평용암대지는 신생대 제4기에 평강 남서쪽 3km 지점의 오리산(454m)을 중심으로 구조선을 따라 열하분출(裂罅噴出, fissure eruption)한 용암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오리산에서 열하분출된 용암은 북쪽으로는 열곡에 의해 생긴 남대천을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강원도 고산군 북부 일대까지, 남쪽으로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까지 흘러내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철평용암대지는 침식작용에 의해 수직 하곡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한탄강 양안은 깊이 40m에 이르는 협곡도 있다. 현무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어진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벽은 한탄강계곡의 독특한 절경을 이룬다.


상천교 상류 한탄강


상천교 하류 한탄강


직탕폭포 바로 위에는 차량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상천교가 있다. 상천교 한가운데 서서 한탄강 양안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상천교는 지금 공사중이어서 차량 통행을 막고 있다.  


조선의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김화를 지나 이곳에 이르는 한탄강은 비교적 오염이 되지 않아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한탄강에 서식하는 어족에는 붕어, 피라미, 버들치, 쏘가리, 꺽지, 갈겨니, 참종개, 미꾸리, 새코미꾸리, 모래무지, 누치, 돌마자, 눈동자개, 퉁가리, 돌고기, 가는돌고기, 줄납자루, 큰납지리, 메기, 묵납자루, 돌상어, 쉬리, 얼룩동사리, 버들매치, 줄새우. 말조개, 펄조개 등이 있다. 


한탄강에는 외래어종인 블루길(Blue gill)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블루길은 배스처럼 천적이 별로 없어 하천생태계를 교란하는 종이지만 사실상 대책이 없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배스나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을 국내의 하천과 저수지에 함부로 방류한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태봉대교에서 바라본 한탄강 상류


태봉대교에서 바라본 한탄강 하류


직탕폭포에서 약 600m 하류에는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상사리(上絲里)를 연결하는 태봉대교(泰封大橋)가 있다. 태봉대교는 신라 말 궁예(弓裔)가 세운 나라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다리는 한탄강의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태봉대교 한가운데에는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다. 태봉대교는 또 승일교까지 보트를 타고 내려가는 한탄강 래프팅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와 접하고 있는 철원은 안보관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동송읍 장흥리 철의삼각전적관을 비롯해서 철원읍 산명리 백마고지(白馬高地) 전적지(戰跡地),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月井里驛)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勞動黨舍)동송읍 이길리 제2땅굴, 김화읍 도창리 금강선 끊어진 철길, 동송읍 중강리 철원평화전망대, 근동면 광삼리 승리전망대, 철원읍 홍원리 월정리전망대, 원남면 주파리 칠성전망대, 남북 합작으로 건설한 승일교(承日橋) 등은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들이다. 철원평화전망대, 승리전망대, 정리전망대, 칠성전망대에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다. 


철원에는 직탕폭포를 비롯해서 신라 진평왕이 노닐고 임꺽정이 은거했다는 고석정, 순담계곡(蓴潭溪谷)용봉산(龍峰山, 374m) 중턱의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 동송읍 상노리 금학산(金鶴山, 947.3m) 기슭의 담터계곡, 김시습(金時習)이 은거했다는 근남면 잠곡리 복계산(福桂山, 1,057.2m) 기슭의 매월대(梅月臺) 등 명승지가 많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삼층석탑으로 유명한 화개산(花開山) 도피안사(到彼岸寺), 선사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갈말읍 토성리 철원지석묘군(鐵原支石墓群)과 철원토성및석조물(鐵原土城─石造物) 등이 있다. 철원평야에 자리잡은 철원읍 대마리 두루미평화마을, 동송읍 양지리 토교저수지, 철원읍 내포리 샘통 등지는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와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등의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철원에는 철원팔경 또는 구철원팔경이 있다. 철원팔경은 용이 승천하며 생겼다는 삼부연폭포, 궁예가 피신한 명성산(鳴聲山, 923m), 임꺽정이 무예를 닦은 고석정, 746년(신라 경덕왕 5)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도피안사, 궁예가 궁전을 짓고 성을 쌓은 풍천원(楓川原)의 궁예도성, 김응하(金應河)가 수련했다는 칠만암(七萬岩), 신라 진덕여왕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원사(靈源寺)와 법화사(法華寺), 흥림사(興林寺), 도리사(忉利寺) 등 4대 사찰을 창건하고 1,602위의 불상을 봉안했던 보개산(寶蓋山, 877m), 마산치(馬山峙) 등이다. 마산치는 북한지역, 보개산은 포천시에 속하므로 이들 대신 순담계곡과 직탕폭포를 넣어 신철원팔경이라고 한다. 풍천원의 궁예도성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 칠만암은 동송읍 양지리 한탄강변에 있다.  


삼부연폭포


삼부연폭포


삼부연폭포는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용봉산 중턱에 있다낙차 20m의 3단폭포인 삼부연폭포는 철원8경의 하나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삼부연폭포의 절경에 매료되어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은거하기도 하였다. 삼연은 바로 삼부연을 상징하는 그의 별호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철원도호부 산천조에 '삼부연(三釜淵)은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여러 시내가 뒤섞여 모여 갈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거꾸로 걸리면서 문득 3층의 돌구덩이를 만들었다. 그 깊이는 알 수 없는데 모양은 세 개의 가마솥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 부른다. 곧 기우처(祈雨處)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폭포수가 높은 절벽에서 세 번 꺾여서 그 아래 세 군데의 가마솥처럼 생긴 소(沼)에 떨어진다고 하여 삼부연이란 이름이 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철원을 태봉(泰封)의 도읍으로 삼을 때, 여기서 도를 닦으면서 살던 네 마리의 이무기 중 세 마리가 용이 되어 바위를 뚫고 승천하면서 세 개의 소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상단 못을 노귀탕, 중단 못을 솥탕, 하단의 가장 큰 못을 가마탕이라고 부른다. 마을 이름도 이무기가 용으로 변했다는 뜻으로 용화동(龍簧)이라 불렸다고 한다. 


삼부연폭포는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천년 동안 물이 마른 적이 없어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오던 곳이다. 삼부연폭포 맞은편 길 위에는 부연사(釜淵寺)라는 절이 있고, 폭포 옆에는 오룡굴(五龍窟)이라는 터널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 3km 상류에는 명성산(鳴聲山, 923m)과 약사령(藥寺嶺, 545m), 각흘산(角屹山, 838m)으로 둘러싸인 용화저수지와 한국전쟁도 피해 갔다는 용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삼부연폭포는 당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일대기를 그린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이기도 하다. 이 폭포에서 비밀조직 귀문단의 비형랑과 길달의 혈투 장면을 찍었다. KBS 수목드라마 차태현 주연의 '전우치'도 여기서 몇몇 장면을 촬영했다.  


폭포 남쪽 산줄기는 억새로 유명한 명성산으로 이어진다. 명성산은 울음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망국의 한을 담아 목놓아 울었으며, 왕건에게 쫓겨 이곳까지 온 궁예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억새밭 가운데는 궁예가 마셨다는 궁예약수터가 있다. 


역사는 승리한 자가 쓰는 것이다. 역사가 기록된 것처럼 과연 궁예는 폭군, 망군이었을까? 만약 궁예가 왕건을 죽이고 고려를 건국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궁예처럼 폭군, 망군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금물이다. 역사는 같은 사료라도 해석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다. 역사는 해석이다! 


2016.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