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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콰이 강의 다리' 철원 승일교를 찾아서

林 山 2016. 5. 31. 11:59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花開山) 도피안사(到彼岸寺)를 돌아본 다음 한국판 '콰이 강의 다리'로 유명한 한탄강 승일교(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6호)를 찾았다. 승일교는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장흥리(長興里)와 갈말읍(葛末邑) 내대리(內垈里)를 잇는 다리로 지방도 제463호선 태봉로가 지나간다. 승일교는 현재 오래되고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차량들은 1999년 승일교 바로 옆에 세워진 한탄대교를 이용해야 한다.


승일교 


승일교와 한탄대교


승일교 아치형 교각


한탄강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자 철원군은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군정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실효적 지배를 받았다. 조선은 1948년 한탄교(漢灘橋)라는 이름으로 이 다리 공사를 시작했다.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 김명여가 러시아식 공법의 아치교로 설계한 이 다리는 동송읍쪽의 아치교각만 완성된 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김명여는 진남포제련소의 굴뚝도 설계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이 물러가고 철원이 한국의 실효적 지배하에 들어오자 1952년 미군 제79공병대와 한국군 제62공병대는 갈말읍쪽 교각과 상판을 완성해서 1958년 12월 3일 승일교라는 이름으로 개통했다. 기초와 동송읍쪽 교각은 조선, 갈말읍쪽 교각과 상판은 한국이 공사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총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의 남북합작 다리가 탄생한 셈이다. 이런 사연으로 승일교는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공은 조선에서 했지만 완공은 한국에서 했기 때문에 양쪽의 아치 모양이 약간 차이가 난다. 조선쪽에서 먼저 지은 다리는 둥글고, 한국쪽에서 지은 것은 둥근 네모 형태로 되어 있다. 


철원군 지역주민들은 김일성(金日成)이 시작해서 이승만(李承晩)이 끝냈다고 하여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한자씩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했다는 설, '김일성을 이기자'고 해서 승일교(勝日橋)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한국전쟁 중 중국인민해방군(중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간 제5연대장 박승일(朴昇日, 1920년 ~ ? ) 대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라고 명명했다는 설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1985년 세워진 승일교 입구의 기념비에도 '昇日橋'를 정설로 소개하고 있다. 이성가 제5군단장이 박승일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昇日橋'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박승일 연대장과 같은 시기에 중국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고근홍(高根弘)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의 근홍교(根弘橋)도 비슷한 사례다.


다리 이름을 두고 소송까지 갔던 일화도 있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이 다리를 이승만(李承晩)과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에서 유래한 '承日橋'가 맞는 명칭이라고 기술하자 1995년 박승일 대령의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이 책의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를 상대로 이 책에 대한 출판금지가처분신청을 했다. 창작과비평사는 '承日橋'라고 기술된 책 전량을 수거하고, '昇日橋'라 수정하여 재출판했다.     


아치형 다리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안은 채 고색이 창연했다. 주말을 맞아 사람들을 가득 태운 한탄강 래프팅 보트들이 연신 승일교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탄강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2016.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