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혁명가 임꺽정(林巨正)의 활동무대였던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변의 고석정에 이어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花開山) 도피안사(到彼岸寺)를 찾았다. 도피안사는 동송읍에서 구철원시가지로 들어가는 도중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도피안사 일주문
도피안사(到彼岸寺)란 속세의 강을 건너 이상세계에 이르는 절이란 뜻이다. 피안이란 깨달음을 얻어 번뇌를 여의고 도달한 해탈(解脫)의 세계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865년(경문왕 5)에 당대의 고승 도선(道詵)은 향도(香徒) 1천명과 함께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삼층석탑(보물 제223호)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을 봉안하였다. 당시에는 선불교가 유행하여 전국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개창되던 무렵이었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는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읍 율이리 소재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 찾았더니 도피안사로 날아와 앉았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전한다.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 이름을 도피안사로 지었다고 한다.
도선은 도피안사를 팔백 비보국찰(裨補國刹)의 하나로 삼고,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인 연화산의 연약한 산세를 보완하기 위해 석탑과 철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비보사찰은 부처의 가피로 나라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절이다.
비보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던 도피안사가 1898년(광무 2) 봄 큰 화재로 소실되자 영주산인(靈珠山人) 월운(月運)과 강대용(姜大容)이 재건하였고, 1914년 다시 개수하였다. 제국주의 일본이 물러간 뒤 도피안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치하에 들어갔다가 한국전쟁의 포화로 또 다시 폐허가 되었다.
1959년 도피안사는 15사단 장병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도피안사가 중건 될 때의 일화가 전해 온다. 어느 날 15사단장 이명재(李明載) 장군은 땅속에 묻힌 불상이 답답해 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이 장군은 전방 시찰을 나갔다가 목이 말라 물을 얻어 마시려고 근처의 한 민가에 들어갔다. 거기서 이 장군은 꿈에서 땅속에 묻힌 불상과 함께 보였던 안주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안주인의 안내를 받아 불에 타 사라진 도피안사터를 뒤져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했다. 15사단 장병들은 도피안사를 중건하고 철불을 봉안했다. 군에서 관리를 맡아오던 도피안사는 1985년에 대한불교 조계종에 인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극락보전(極樂寶殿), 삼성각(三聖閣), 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 범종루(梵鐘樓), 요사채인 무설전(無說殿)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도피안사 천왕문
사천왕상
사천왕상
도피안사 해탈문
도피안사는 연화산 남쪽 기슭에 남향으로 앉아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사천왕문이 나타난다. 사천왕문 처마에는 편액이 걸려 있지 않았다. 사천왕은 사찰을 외호하기에 사납고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천왕문 안마당의 연못에는 어리연이 자라고 있고, 연못 뒤에는 해탈문이 있다.
도피안사 전경
도피안사 삼층석탑
도피안사 삼층석탑(출처 문화재청)
범종루 옆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도피안사 중심법당인 대적광전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적광전 앞 중정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음에도 석탑의 상태는 상륜부(相輪部)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삼층석탑(보물 제223호)은 높이 4.1m로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석(塔身石,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올리고, 그 위에 상륜부를 얹은 일반적인 신라 석탑이다. 높직한 정사각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단면이 8각인 하층기단을 놓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갑석(甲石) 위 굄대에는 단조로운 16장의 복판연화(複瓣蓮華)를 조각해 별석을 놓았다. 그 위에 키 높은 8각 중대석(中臺石)을 올리고, 16장의 앙련(仰蓮)이 새겨진 8각 상대석(上臺石)을 얹은 다음 정사각형의 굄돌을 만들어 몸돌에 맞췄다.
불상의 대좌처럼 만든 8각의 이중기단 위에 불상을 안치하듯 탑신부(塔身部)를 올린 것은 매우 특이한 예로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대적광전의 철불과 함께 9세기경에 새롭게 일어난 이 지방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호족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매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의 높이가 비교적 높아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느낌을 준다. 몸돌에는 우주(隅柱)만 새겨져 있고, 탱주(撑柱)는 생략되어 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지만,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반전이 커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1층이 4단, 2층과 3층은 3단이다. 상륜부는 큼직한 노반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없다. 삼층석탑의 건립 연대는 철불의 조성연대와 비슷한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도피안사 대적광전
도피안사 대적광전 법당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후불탱화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
대적광전은 지은 지 아직 얼마 안되는 듯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식 건물인 대적광전 3층의 화려한 닫집 아래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나말려초에 크게 유행했던 철불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것은 그 예가 아주 드물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높이는 91㎝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갸름하고 단정한 얼굴에는 인자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 넘친다. 이마에는 백호가 박혀 있고,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감겨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평행의 옷주름이 넓게 파인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다소 형식적인 이러한 옷주름은 9세기 후반기의 불상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수인(手印)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지권인은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비로자나불만이 결하는 수인이다. 따라서 지권인을 결하는 불상은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권인의 수결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두 손을 모두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네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금강권(金剛拳)을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올린다.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을 서로 맞닿게 한다. 지권인의 오른손은 부처 또는 법계, 왼손은 중생을 뜻하며, 부처와 중생은 본래 같다는 의미가 있다. 나아가 불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 있으며, 또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도 있다.
대좌의 하대에는 복련(覆蓮)을 새기고, 그 위에 8각 중대를 올렸으며, 상대에는 앙련(仰蓮)을 새겼다. 이런 형태의 대좌는 나말여초에 가장 유행하였다. 대좌는 법당의 수미단 아래에 들어가 있어 밖에서 볼 때는 불신만 보인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 철불은 즉시 지하 벙커로 내려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뒷면 명문에는 '1,500명의 향도(香徒)가 결연(結緣)하여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이 지역에 철불을 조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호족 세력이 존재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도피안사 철불은 9세기에 대두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 지역 호족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명문에는 또 ‘咸通六年己酉正月(함통 6년 기유 정월)’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이 철불의 주조 연대가 신라 경문왕 5년(865)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도피안사 철불은 858년에 조성된 장흥 보림사 철불(국보 제117호)과 함께 9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불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좌상 뒤에는 비로자나불탱화가 후불탱화로 걸려 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녹색의 두광에 키 모양의 광배가 있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상단 좌우에는 녹색 두광의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배치되어 있다. 중단에서 외상향으로는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금강장보살, 제장애보살 등 8보살이 비로자자불을 외호하고 있다. 좌우단에는 사천왕, 2불과 8보살 사이에는 신중이 배치되어 있다.
대적광전 신중탱화
대적광전 동쪽 벽에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상단 중앙의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중심으로 왼쪽에 제석천(帝釋天), 오른쪽에 대범천(大梵天), 대예적금강신의 아래에 동진보살(童眞菩薩)을 도설(圖說)하였다. 주위에는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 등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신중탱화에 나오는 호법선신(護法善神)들 중에는 한민족 고유의 신들이 많다. 불교가 한민족신앙을 수용한 결과이다. 신중탱화에서 한민족 고유의 신들은 불법을 외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도피안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
대적광전 서쪽에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그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도피안사 아마티삼존불은 국내 최초로 오석으로 조성하여 2013년 8월 25일 점안식을 봉행했다. 아미타삼존불의 수인은 세 불상 모두 아미타정인의 하나인 중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중품중생인인 불교의 계율을 지키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극락보전 서쪽 공터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지장보살상을 조성하기 위해 불사를 벌인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직은 터만 마련되어 있을 뿐 불상은 미완성이었다.
도피안사 삼성각
극락보전 뒤로 잠깐 오르면 삼성각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각은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이다.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할 때 한민족 고유의 신앙을 수용하면서 생긴 신앙 형태이다.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성신은 각각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子孫萬德) 탐낭성군(貪狼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業障消除) 녹존성군(祿存星君),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등 맡은 바 그 역할이 있다. 요약하면 칠성신은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재물의 신이다.
독성을 환웅(桓雄)이나 단군(壇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독성이 단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의 토착 민족신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났다. 불교와 민족신앙의 결합으로 독특한 독성신앙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가 핍박받던 말법의 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법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나반존자는 불자들 사이에 매우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산신도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다. 도교(道敎) 또는 선교(仙敎)에서 유래한 산신은 무속(巫俗)의 대표적인 신이기도 하다.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악숭배신앙이 강했다. 백제의 산신신앙을 비롯해서 신라에는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악신(四岳神)과 산천신(山川神)을 매우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제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산중의 왕은 호랑이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의 신령이라 믿었다. 그래서 산신도에서 산신의 모습은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바로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처럼 이미 고대로부터 산신의 형상을 호상이나 신선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山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는 무속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다. 산에 묘지를 쓸 때 산신에게 고하는 예식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산악회나 등산동호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산신에게 안전한 산행을 비는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심마니들도 산에 들어가기 전에 대물 점지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 산신신앙은 이처럼 우리 민중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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