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미시령 옛길을 따라서

林 山 2016. 5. 23. 18:55

설악산 토왕골 토왕성폭포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미시령 옛길로 넘어가기로 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던 터였다. 

 

미시령 옛길에서 바라본 원암저수지와 델피노리조트, 일성설악온천리조트


미시령 옛길에서 바라본 화채능선


울산바위


미시령


성인대


수암


미시령 옛길을 오르다가 울산바위 바로 북쪽 정면에 전망이 매우 좋은 야트막한 봉우리가 하나 있다.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속초 상공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대청봉을 비롯해서 화채봉과 울산바위, 신선봉 산마루는 구름 속에 숨어 버렸다. 구름 사이로 미시령만 드러나 있었다.


백두대간 신선봉


백두대간 미시령


미시령 정상 표지석


미시파령 시비


폐쇄된 미시령휴게소


미시령계곡


미시령을 구불구불 올라서자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 보였다. 미시령 정상 표지석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용대리 미시령계곡의 산빛이 푸르고 푸르렀다. 미시령휴게소는 군데군데 유리창이 깨진 채 폐허가 되어 있었다. 


미시령 정상 표지석 뒤에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식(李植, 1584~1647)의 '미시파령(彌時坡嶺)' 시비가 세워져 있다.  


平生弧矢志(평생호시지) 평소에 호시의 뜻을 품고서

四方經險艱(사방경험간) 사방의 험준한 길 두루 밟고 다녔나니

南登鳥道棧(남등조도잔) 남쪽으론 조령(鳥嶺)의 잔도(棧道) 건넜고

北上磨天山(북상마천산) 북쪽으론 마천령(磨天嶺)을 넘어도 보았어라

不謂東峽路(불위동협로) 그런데 뜻밖에도 동쪽 산골 가는 길에

復有彌坡關(부유미파관) 또 다시 미시령(彌時嶺)이 버티고 서 있다니

一川百折渡(일천백절도) 돌고 돌아 일백 굽이 건너야 할 강물이요

一嶺千匝環(일령천잡환) 일천 겹 에워싸인 준령(峻嶺)이로세

側足滄波上(측족창파상) 한 발 삐끗하면 곧바로 푸른 바다

擧手靑雲間(거수청운간) 손을 들면 잡히나니 푸른 구름

始怪地何依(여괴지하의) 처음에는 디딜 땅도 없을 듯 겁나더니

更擬天可攀(갱의천가반) 하늘까지 오를 욕심 다시금 샘솟누나

方知濊國東(방지예국동) 이제야 알겠도다 예맥(濊貊) 나라 이 동쪽에

別是一區寰(별시일구환) 따로 별세계(別世界)가 감추어져 왔던 것을

將窮觀覽富(장궁관람부) 여기저기 좀 실컷 구경하려 하였는데

豈計腰脚頑(개계요각완) 말 안 듣는 허리 다리 이를 어쩌나

時時領奇絶(시시령기절) 때때로 접하는 기막힌 경치만으로도

且爾開塵顔 (차이개진안) 속세에 찌든 얼굴 펴기에 족하도다

五步一回顧(오보일회고) 다섯 걸음마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十步一停留(십보일정류) 열 발 걷고 나서 다시 멈춰 휴식하며

三朝上峻阪(삼조상준판) 삼일 동안 아침나절 험한 비탈 올라

三暮登上頭(삼모등상두) 사흘 저녁에 정상에 우뚝 섰어라

巨石傷我足(거석상아족) 거대한 바위에 발도 다치고

顚崖眩我眸(전애현아모) 깎아지른 낭떠러지 눈이 아찔했나니

大哉穹壤內(대재궁양내) 굉대(宏大)하도다 미시령이여

玆嶺誰與侔(자령수여모) 천지간에 그 무엇이 그대와 짝하리요

回車與叱馭(회거여질어) 수레를 돌렸거나 마부 꾸짖었거나

忠孝心所求(충효심소구) 모두가 충효심의 발로라 할 것인데

何意携老母(하의휴노모) 노모를 모신 이 길 무엇 때문에

乃反窮遐幽(내반궁하유) 깊은 골 뒤질 생각 거꾸로 한단 말가

餘生慕苟全(여생모구전) 남은 인생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絶跡甘遠投(절적감원투) 자취 끊고 먼 산골로 들어가도 좋으련만

臨風發長歎(임풍발장탄) 바람결에 날려 보내는 나의 장탄식(長歎息)

吾道知是不(오도지시부) 나의 이 길 과연 옳은 것인지


미시파령(彌時坡嶺)은 인제(麟蹄)와 속초(束草) 사이에 있는 고개로, 줄여서 미시령(彌時嶺)이라고 부른다. 호시(弧矢)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만들어 주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장차 세상에 웅비(雄飛)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回車與叱馭 忠孝心所求'는 한(漢) 나라 왕양(王陽)이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부임할 때 공래산(邛郲山)의 구절판(九折阪)을 넘으면서 산길이 너무 험한 것을 보고는 '어버이에게 받은 이 몸을 가지고 어찌 이 험로(險路)를 자주 왕래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얼마 뒤에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여 장안으로 수레를 돌렸으며, 뒤에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로 부임할 때에는 구절판에서 마부를 꾸짖으며 '말을 힘차게 몰아라. 왕양은 효자지만 왕존은 충신이다.'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이 시는 이식이 대사간 벼슬에 있을 때,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어 갈 때 쓴 것으로 보인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힌다. 


2015. 5. 15.